기생반숙녜

1 개요

紀生磐宿禰きのおいわのすくね

키노오이와노스쿠네(きのおいわのすくね). ~숙녜(宿禰)는 고대 가야-왜의 인명뒤에 붙었던 칭호이다. 따라서 기생반숙녜의 이름은 기생반 또는 기생일 것이다. 그래서 칠지도의 기생성음과 엮기도 한다. 역사학자 김현구는 기생반숙녜=목군유비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기생반숙녜는 5세기 일본의 인물이다. 사실 정확한 국적사료부족으로 알 수 없다. 왜인이 임나-가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호응을 얻었다는것 자체가[1] 왜와 임나-가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경계인이거나 임나-가야인이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위만과 비슷한 케이스일수도? 사실 그시대에 국적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지만...

2 기록

이 해[2] 기례반숙례(紀生磐宿禰)가 임라(任那)를 점거하고 고려(高麗)와 교통(손을 잡고)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三韓)의 왕노릇하려고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이라고 칭하였다. 임라(任那)의 좌노(左魯)·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百濟)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이고【이림(爾林)은 고려(高麗)의 땅이다】[3], 대산성(帶山城)[4]이 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영군(領軍)[5] 고이해(古爾解)· 내두(內頭)[6] 막고해(莫古解)[7]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기례반숙례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담력(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임라(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이 좌노·나기타갑배 등 300여 인을 죽였다.

ㅡ 《일본서기》 권 15

3 설명

일본의 23대 천왕인 켄조(顯宗) 덴노 3년인 487년에 벌어진 반란의 주동자. 위에서 언급한 현종천황에서 현종은 켄조(顯宗)의 한국어 표기다.

이시기는 가야연맹의 금관국이 힘을 잃고 반파국과 안파국이 가야연맹의 수장으로 떠오르는 시기였다. 가야연맹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자 이틈을 틈타 한탕 하고 싶어하는 기생반숙녜가 군사를 모아 고구려와 손을 잡고 세력을 키운후 자기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거다.

백제가 개입한 것으로보아 가야연맹 자체에서 저지하지 못할 만큼 군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고구려와 손을 잡고 개입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구려의 지원을 등에 입었기 때문에 가야가 감당하기 힘들엇을듯 하다. 이에 가야연맹에 세력확대를 노리던 백제가 개입해 해결한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왜인 혹은 가야인이 고구려와 손을 잡고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백제에게 토벌당한 사건.(...) 흔한 반란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당대 한반도와 일본의 쟁쟁한 세력들이 모두 엮인 사건이였다.

일당백이라는 묘사나 300여명이 죽은점을 볼때 어떤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1. 이걸 왜가 임나를 지배했다는 임나 일본부설의 증거로 엮으려는 일본 학자들의 시도도 있었지만(대표적인 게 스에마쓰 야스카즈) 기생반숙녜가 스스로 삼한의 왕이 되겠다고 신성(神聖)이라고 자칭한 것부터가 야마토의 지배를 부정하겠다는 것인데 야마토에서 임나를 통치하려고 보냈다는 사람이 야마토를 부정하는 짓을 할 리가 없는지라...
  2. 현종 원년
  3. 학계에서는 이림의 위치를 천안시김제군으로 추정한다.
  4. 삼국사기에서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을 대산현(帶山縣)으로 기록해놓았기에 학계에서는 태인면이 아닐까 추정중.
  5. 백제의 중앙군으로 추정
  6. 내두좌평. 고이왕때 설치한 재정담당 관직.
  7. 여담으로 근초고왕 24년(369년)에 고국원왕이 침공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해 막아낸 장수와 이름이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