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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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야
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소가야고령가야

1 개요

伴跛國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 있었던 가야 국가 중 하나. 흔히 대가야로 알려져 있으며[1], 가야 후기의 가야 일대 정세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속에 562년 멸망했고, <지리지>에 의하면 520년간 존속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2 성립기와 중심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나오는 변진반로국이 기원이 되어 금관국광개토대왕에게 치명상을 당한 즈음부터 성장하기 시작해 주변을 흡수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구야국의 유민들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묘제나 토기 양식은 금관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어 어디까지나 원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반로국이라는 국명 또한 400년 이후 가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지산동 고분군 발굴 당시 이시기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래 중심지는 낙동강가에 가까운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와 반운리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로 천도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학설.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초교 운동장 구석에는 대가야의 왕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정이 남아 있으며, 1977년 발굴 결과 우물 밑바닥에서 대가야 양식의 목긴 항아리와 적갈색 안질토기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 남쪽으로 500여미터 떨어진 고령 향교 옆에는 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왕궁 터라고 추측된다. 1910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이곳 일대를 조사하여 기와 조각을 발굴 했고, 2000년 경북대 박물관이 축대근처를 발굴한 결과 부뚜막 2기와 대형 건물터, 그리고 500년 전후시기의 시발, 그릇받침, 접시 뚜껑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여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한편 이 시기쯤인 일본서기상 262년(이갑자를 인하하면 382년, 삼갑자를 인하하면 442년) 사지비궤신라미인계에 넘어가 가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왕실이 백제로 도망치고 목라근자가 가라를 복권시켜 준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서기에서 '가라'는 반파국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사건을 반파국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금관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교차 검증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 적당히 걸러 듣자.

3 전성기와 쇠퇴, 멸망

백제는 물론 신라, 금관국보다 늦은 시기에 성장을 시작했으나, 빠른 속도로 대가야 특유의 문화를 성립시키고, 주변 지역에 대가야 양식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신라보다 지방 장악력이 더 강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서남쪽 방향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찌되었건 반파국은 점차 위세가 커져 백제가 장수왕에게 털리자 왕 하지(荷知)가 479년 유송(劉宋)에 직접 조공을 시도했다. 일회성 이벤트이긴 했지만... 양직공도에서 다른 가야 국가들이 백제에 딸려서 조공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독보적인 것이다(다만 6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압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왜국이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책봉받은 데서도 자극을 받은 듯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212년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가야' 기록이 481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반파국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결과물로 풀이된다.

경남 합천군 저포리 고분군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에서 하부(下部)란 글자가 발견되었고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긴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는 것은 반파국은 왕을 대왕이라 불렀으며 대가야 내부의 통치를 위한 위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허나 경기 지방을 잃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전라도 경영을 시작한 백제에 의해 소백산맥 서안 일대를 다시 빼앗기고 성장세가 둔화되고 만다. 가까운 합천은 반파국이 제대로 종속시킨 것으로 보이나 남강 유역권은 산청 아래로는 끝끝내 확장하지 못했다. 안라국(아라가야)가 함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자국(소가야) 지역은 고성 일대에서 여전히 큰 세력 없는 분산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가야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반파국 자체의 한계 때문이거나 주변국인 백제나 신라의 간섭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후 관산성 전투에 휘말려 대패하고, 많은 병사들을 상실해 버린 이후 진흥왕의 명령에 의해 이사부와 사다함에게 멸망하고 만다.

이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하던 가야 7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좀 다른 의미로 절절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 물론 그 사료의 사실성은 의심받아야 마땅하나, 백제와 왜가 반파국을 비롯한 가야 국가들을 지키기 위해 무진장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4 문화 및 기타 사항

흠좀무한 규모의 순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삶과 죽음의 세계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係世思想)이 가야인들의 생각이었기에 현대 인의 기준으로 보았을때 문제가 되보이지만 그때당시엔 자진 순장등의 문화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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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모주

흔히 알려진 김수로왕이 주인공이 되는 '가야의 시조신화'는 구야국 중심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반파국이 중심이 되는 시조 설화가 존재한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 이비가지(夷毗訶之)와 감응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맏아들은 뇌질주일이고 둘째 아들은 뇌질청예라 하였다. 뇌질주일은 대가야국을 건설하여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뇌질청예는 김해에서 가락국을 건국하여 수로왕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이진아시 항목 참조.

이 두가지 신화를 해석하자면 반파국과 구야국은 일단 형제국 의식은 있었는데, 반파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고 구야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다… 정도.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면 반파국에서 힘의 변화에 따라 신화를 뒤집어버린 것일 가능성도 크다.

앞서 언급한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왕궁 터 추정 지역에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쓴 '임나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에는 '임나', '남차량'등의 글자는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이곳으로 옮겨 오기전 임나일본부설로 이용할 것을 우려한 사람들이 고의로 지웠다고 한다.

5 반파국 연표

연도기록출처
42년대가야 시조 이진아시(뇌질주일)왕이 즉위해 대가야를 건국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522년 3월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에서 이찬비조부의 딸[2]을 보냄. 그들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탄생하였다.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551년 3월신라 진흥왕이 낭성에 행차했을때 국원에 있던 대가야 출신 악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삼국사기
552년 3월신라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등 세명에게 우륵으로 부터 음악을 배우도록 지시삼국사기
554년가야, 백제와 함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하다 실패삼국사기
562년가야가 신라에 반하다가 신라장군 이사부가 거느린 군의 공격으로 멸망. 그곳에 대가야군이 설치삼국사기

반파국 관련된 기록은 이게 다다...

6 관련 항목

  1. 대가야는 고령군의 정체성이자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자원이라, 과거 고령읍을 2015년 대가야읍으로 바꿨을 정도이다. 고령군 군청 소재지.
  2. 또는 이찬 비지배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