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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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2월 21일 ~ 1995년 6월 17일

1 개요

한국의 소설가·시인.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1]

1913년에 경북 경주에서 출생. 본명은 김시종. 순수문학을 주로 하였고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대표작으로는《화랑의 후예》,《무녀도》,《역마》,《황토기》,《등신불》 등이 있다.

결혼을 세 번 하였는데 첫째 부인은 김월계 (김동리보다 6살 연하, 1940년 결혼, 1966년 이혼 성립.), 둘째 부인은 소설가대인배 손소희 (4살 연하, 1948년 재혼, 1987년 사망), 셋째 부인은 소설가 서영은 (30살 연하(...), 1987년 재혼)[2]

자식으로는 법조인 김평우씨 (김월계씨 소생, 둘째 아들)와 기업가 김기홍씨 (손소희씨 소생, 다섯째 아들)가 있다.

황순원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의 거장이다.그리고 오늘도 학생들은 이 두 사람의 그림자 안에서 고군분투중 취미는 골동품 수집, 꽤나 고상한 취향이셨던 듯.

2 생애

1913년 경북 경주 성건리에서 아버지 김임수(壬守)와 어머니 허임순(許任順)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김시종이다. 이 이름과 동리라는 이름은 큰형인 김범부 씨가 지어주었다. 이 분이 뭐하는 분인지 궁금하면 여기를 볼 것. 괴물 형 아래 괴물 동생이 태어난 셈이다. 뭐야 이 집안. 도올 김용옥 집안 같잖아. 마치-_-;;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동리가 형인 김범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며[3] 이 형에 대한 내용은 <화랑의 후예>에도 나온다. 화랑의 후예에 나오는 황진사를 소개해줬다는 숙부의 모델이 바로 김범부씨라는 것이 중론.[4]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등단하였다. 이듬해 <조선 중앙 일보>신춘 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며 소설가로서도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 부락'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41년 절필하기까지 21편의 글을 쓰고 세대논쟁[5]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길어지면서 일제의 압력이 피부로 느껴질 때가 되자 절필한다. 그리고 절필한 뒤로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사천의 양곡배급소에서 일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임화등이 ‘조선문학건설본부’ 등을 조직하고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하자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참가하게 된다. 여기에 별도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기도 하며 좌익계열과는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당대 관심은 조선문학동맹 쪽에 더 가고 있었다. 한때 미군정에서 여론조사를 했을 때 남한의 70%가 사회주의계 정파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6] 이는 지식인도 마찬가지라...코, ?!

해방공간에서 김동리는 대부분 우익의 민족문학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갔다고 보면 되지만 사실 극단적인 우익에 가담한 문학가들도 있었고 문학가를 가장해서 좌익공격에 앞장선분들도 있었던터라 김동리의 행보를 우파로 간주하기는 조금 애매한 입장, 오히려 어용 우파 문단쪽에서는 그가 순수문학에만 경도한다고 배척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소설집《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들을 출간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도하게 되자 과거 토속성과 외래문화의 대립에 따른 인간성을 그리던 작품에서 어느정도 이동하여 인간과 이념의 갈등을 주로하는 작품을 썼다. 이시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이 있다.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문협(文協)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95년 사망하면서 첫번째 부인 김월계씨와 합장되었다.[7]

쓰러지면서 후처 관련 재산분쟁으로 나름 여성지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2.1 문학적 성향

그는 그의 작품을 3개의 성향으로 나누어서 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한민족의 삶과 정서를 다룬 《역마》,《무녀도》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을 다룬 리얼리즘 성향의 작품으로써 대표작은 《까치소리》,《혈거부족》,《광풍 속 에서》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예술'에 관련 된 것으로 그는 이를 장편으로 시도 했으나, 문학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3 기타

서라벌예대 시절 좌익의 혈육이라는 따가운 시선 아래 여러가지로 압박을 받고 있던 이문구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경찰에서 나와 이문구를 조사하려고 하면 "내 제자보고 왜 그래?"라고 실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문구의 문재를 알아보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으니 여러모로 이문구에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이문구 자신도 일가가 참혹하게 살해된걸 알았기에 김동리 선생에게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했다[8]스승님의 실드. 이문구는 이러한 스승님의 영향으로 일평생 보수와 진보 문인들을 상호 연결해주며 사상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와 교분을 다졌다.

서라벌예대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모두 등단했다는 것은 전설로 통한다. 그리고 그 제자 중 한 사람이 박경리 선생이다. 스승이고 제자고 간에 하나같이 먼치킨들. 또한 직계 제자는 아니지만, 가정 주부로 지내던 강신재(젊은 느티나무의 작가)를 추천해서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했다.

남민전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문인 모임에서 김남주 시인에 대해 '김남주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므로 절대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문인들의 공개 비판을 받았으며,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던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벌이는 등 큰 파문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결국 문창과 교수들이 제출한 해촉 의견서가 받아들여져 1988년 9월 명예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조금 빠지면 동리목월 문학관이 있다. 한 번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주당으로 특히나 유명했다.

4 대표작

  1. 사실은 서울 경신고등보통학교 4년 재학중 중퇴하였다. 그 이유는 돈이 없어서. 하지만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고 하여 그의 작품들이 평가절하되어야 한다면 난 그런 대학 반댈세(...) 오히려 평가절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도 학력 따지는 더러운 세상(...)
  2. 하지만 그 전부터 좋은 말로 해서연애관계였다. 24살의 서영은씨와의 연애관계에 대해 손소희씨가 여러모로 뒷수습해주고 묵인해주지 않았다면... 게다가 87년 사망하면서 서영은씨에게 "선생님을 부탁한다"라고 말하면서 뒤를 맡겨버린다.
  3. 심지어 첫부인인 김월계씨의 경우 ‘걷는 모습이 얌전하다’는 말로 허락을 하자 당장 결혼했을 정도. 학교를 미션스쿨에서 다녔음에도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상이 전통적인 사상들이라거나 유교나 불교에 해당하는 것이 많은 것도 이 형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둘째 형은 경주에서 건어물 상을 하고 있었다고.
  4. 나이 차이가 열 여섯은 더 나니 숙부 같았을 수도 있겠다.
  5. 유진오가 <문장>지에 <순수에의 지향>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자 김동리가 <순수이의>로 반박하고 김환태가 <순수시비>로 김동리에 찬동하자 벌어진 논쟁이었다. 순수문학논쟁이라 불리기도 하나 이 논쟁 자체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문학관의 차이에서 온 논쟁이었으므로 세대논쟁이라 칭한다. 즉 표면적으로는 세대론, 내면적으로는 순수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 이후 일제의 폭압 등 외부적 요소에 의해 시들해졌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새로이 논쟁에 불이 붙는다.
  6.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공산당의 신탁통치찬성이후 뒤집힌다.
  7. 그런데 김동리는 손소희씨 옆에 묻히기를 바랐다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이면(...)
  8. 이문구의 형은 서북청년단에게 가마니로 싸져서 바다에 수장되었다. 분지 논쟁때 작가들이 서로간에 쉴드친것을 보고 자신이 살려면 문단에 들어가야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