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박경리(朴景利), 본명 박금이(朴今伊) |
출생 | 1926년 12월 2일 |
사망 | 2008년 5월 5일 |
첫 작품 | 계산 (1955) |
마지막 작품 | 나비야 청산가자 (2003)[1] |
제3회 현대문학상 수상 | ||||
김광식 (1957) | → | 박경리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1958) | → | 이범선 (1959) |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1926년 12월 2일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1955년 잡지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계산'이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사회와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성과 생명을 추구하는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9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해 1994년 완결하였다. 2008년 5월 5일 사망했다.
2 생애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을 졸업했다.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에 대한 분노는 그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넣었고, 그렇다 보니 이후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도 소심한 성격이었던 데다가 성적도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결혼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경리는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한 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식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경리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진주여고 선배였던 김동리의 부인네 집에 친구가 세들어 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말해버리면서 본의 아니게 박경리의 글이 김동리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 당시 박경리는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상(想)은 좋지만 아직 (완성은) 안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2] 당시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며 친구를 원망했다고.
하지만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계속 작품을 가져와보라고 말했고, 이후에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던 시기였는데,[3] 습작을 들고 문예살롱을 찾아오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경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고,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살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일어나고부터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안 하겠으니 자신이 제출한 원고를 모두 돌려달라고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김동리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문학' 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는다. 박경리가 제출했던 습작들 중 '불안지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원고를 김동리가 가지고 있다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수록된 '현대문학' 지를 우연히 자기 작품이 수록된 줄도 모르고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못 알아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추천을 두 번 받아야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첫 추천을 받고부터 비교적 늦은 편인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다시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박경리는 이후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밝히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불신시대'를 비롯한 단편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6,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장편소설을 많이 썼다. 박경리는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해왔던 당대의 한국 작가들과는 다르게 예외적으로 장편을 많이 쓴 작가로서, 그가 쓴 장편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20여 편에 이르고, 특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은 명작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표류도,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등을 썼는데, 나머지 장편소설들의 경우는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토지를 집필하던 중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딸이 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9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해 1994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써냈다. 사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집필에만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동학에서 광복까지의 사람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낸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2003년 토지에 이어지는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을, '표류도'로 내성문학상을, '시장과 전장'으로 한국여류문학상을, '토지' 제1부로 월탄문학상을, 인촌상을 수상했으며, 작고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하면서 토지 4,5부를 집필하고 탈고한 생가는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택지 개발로 1998년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원주캠퍼스 내의 청송관(인문예술대학 건물) 옆에는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청송관 내부에는 북카페 토지 라는 공간이 생겼다 북카페 안에는 박경리의 유품 일부도 전시되어있다.
사후인 2011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1회 수상자인 최인훈을 시작으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등이 수상했다.
3 주요 작품
박경리/작품 목록 항목 참조.
3.1 장편소설
3.2 단편소설
3.3 기타
- Q씨에게
- 원주통신
- 생명의 아픔
- 가설을 위한 망상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4 일화
박경리는 반일주의자였고 일본 문예지의 편집장과의 인터뷰 당시에는 자신을 반일작가라고 하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 일본 학생들이 방문했을 시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7]
일본의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높은 문화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문화는 인류의 공유물이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이 문화인가, 우리 본래의 인성과 생명을 바탕으로 한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기능적 통제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쾌락적 부패의 인자를 가득 실은 것에 문화라는 상표를 붙인 것, 과연 그것은 문화인가 하고 말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청계천 복원에 관해서 관계가 껄끄러웠다. 박경리는 본래 청계천 복원사업 계획에 찬성 의사를 표명했었는데 후에 청계천 복원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변경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찬성 의사를 취소하고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또한 박경리는 사위이자 시인인 김지하와 더불어 생명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그녀는 이것에 대하여 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언급하였다.
“자연의 파괴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파괴이며 자연의 황폐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황폐이며 자연의 해체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해체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종말은 우리 모든 생명체의 종말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신은 모두 자연의 것이며 자연의 육신과 영신 역시 우리의 것입니다."
김용옥과의 대화에서는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김용옥에게 "일본은 야만"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그녀의 소설 토지가 일본에서 반일문학으로 치부된다는' 답변으로 왜 자신이 반일인지 말하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자체로 비도덕적이고 반생명적이었어. 그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무엇보다 나는 일본 체제를 반대하지만 일본인을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한편, 그녀는 산문집 '생명의 아픔'에서 일본인에 대해 그 동안의 일본의 행적에 비하여 단순하고 소심하며 범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간에 일본과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평했다.[8]
굉장한 헤비스모커로 유명하다. 통영시 남망산에서 이루어졌던 문화 행사에서도 공적 시간 이외에는 담배를 손에서 놓질 않았다고.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에세이 속에서도 언급된다. 담배때문인지는 몰라도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 소설 기준. 전체 장르로 본다면 2008년 발표한 시 '까치설' 외 3편이 마지막 작품이 된다.
- ↑ 김동리는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 ↑ 실제로 박경리의 등단은 여성 작가로서는 1949년의 강신재 이후 근 7,8년 만이었다.
- ↑ 196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 196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 1963년 단편집으로 엮여 출간되었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시정소화>, <흑흑백백>, <회오의 바다>, <비는 내린다>, <안개 서린 얼굴>, <반딧불>, <사랑섬 할머니>, <설화>, <도표 없는 길>, <군식구>, <어느 정오의 결정>, <목련 밑>, <벽지>, <암흑시대> 등 초기 단편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 ↑ 박경리 수필집 '가설을 위한 망상' 출처
- ↑ 박경리 수필집 '생명의 아픔' 2. 생명의 문화/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