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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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1]

한국 광고계와 음향계의 전설

1 개요

본명은 김평호. 연극계에서 일하면서 왜소한 체격[2]으로 얻었던 별명 '벌레'를 이름처럼 삼았다가 어감 때문에 '벌래'로 바꿨다고 한다.

1941년 현 하남시 인근에서 태어나서 9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6.25 전쟁이 터지고 1.4 후퇴 당시 보국대 운송대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도 사고로 척추를 다쳤다. 돈을 밝히던 새어머니에게 학대당하다가 서울로 몰래 상경해[3] 체신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명동 국립극장에서 스태프로 활동했다.[4]

이후 오지명, 최불암 등이 창단한 동인극단에서 활동하다 극단 '행동무대'를 창단하고 체신부에서 전신기사 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아방송 개국 초대 멤버로 취직해서 음향효과를 전담하게 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운드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이때 만난 김종삼[5]과 함께 사실적인 일차원의 소리를 넘어 상징적인 이차원적 소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동아일보 계열의 광고회사 '만보사'와 만보사 소속 윤석태 감독과 수많은 광고를 만들어 대히트를 했다. 하지만 1975년 동아일보 언론자유 투쟁 사태로 인해 방송국이 거의 개점폐업 상태에 이르르자 방송국을 나오고[6] 퇴직금으로 음향 스튜디오 38오디오[7]를 차리고 로보트 태권 V의 음향을 담당해서 히트를 했다.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올림픽, 1993 대전 엑스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및 여러 대통령 취임식 등 굵직한 행사에서 음향을 담당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소리의 달인'과 같은 칭호들도 얻게 된다.


2007년에는 자서전'제목을 못 정한 책'을 발간했다. 컨셉이 아니라 정말로 제목을 못 정해서(...)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이름을 지어주세요'라고 공모전을 연 끝에 '불광불급'이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여러가지 일들과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8]

현재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있다.

2 일화

  • 동아방송 음향 스태프로 일하던 시절에는 녹음실에 무지향성 마이크 하나밖에 없어서 라디오 드라마 방송 때는 배우들 바로 옆에서 효과음을 넣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라디오 드라마 삼국지를 녹음하면서 식칼로 칼싸움 효과음을 내던 중, 식칼에서 날이 빠져서 한 배우의 목덜미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박혀버렸다. 이 사고를 계기로 녹음실에는 효과음 콘솔이 따로 만들어졌다. 참고로 식칼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그 배우는 바로 이순재.
  • 금성사에서 처음 나온 리모컨 기능이 있는 TV 광고를 만들면서 '첨단 기술'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리모컨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컨셉을 제안하고 성냥을 켤 때 나는 소리를 이용해 효과음을 만들었다. 이 광고는 엄청난 히트를 쳐서 TV를 구입한 사람들이 '왜 리모컨에서 파란 광선이 안나오냐' 같은 항의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고.
  • 종근당 광고에 등장하는 소리도 바로 김벌래의 작품이다.[9] 하지만 처음 광고 시청회를 가질 때 종근당 회장이 부친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종(弔鐘) 소리 같다'면서 퇴짜를 놓았다. 그러나 한 달 후 다시 시청회를 가질 때는 '종소리가 평화스럽다'면서 호평을 받았는데, 사실 두 종 소리는 길이만 다르게 한 똑같은 종소리였다.
  • 로보트 태권 V의 음향을 맡을 때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스튜디오에 영사기와 동기화된 멀티트랙 녹음기가 없어서 영화를 10개의 16mm 롤로 나눠서 싱글트랙 녹음기로 태권 V 효과음, 적군 효과음, 성우들의 대사, 사운드트랙을 따로따로 작업하고 믹싱해야 했다. 결국 마지막 롤을 작업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는데, 병원에 입원해서도 음향 삽입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마지막 부분의 극장용 프린트가 시사회날까지 나오지 못하자, 음향 작업에 썼던 흑백 롤을 갖다가 틀고 영화가 끝날때까지 주제가만 무한반복으로 틀어주는 사태가 발생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좋아했다고.

2.1 펩시 효과음 공모전 당선

김벌래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바로 펩시콜라 광고에 나오는 효과음을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 동아방송에서 일하던 김벌래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펩시가 제품을 상징하는 소리를 찾고 있다"는 제보를 듣고 윤석태 감독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펩시만의 차별점이 잘 떠오르지 않자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갔는데, 그 자리에서 웨이터의 맥주병 따기 쇼를 보고 영감을 얻어서 그 웨이터를 데리고 녹음실로 달려가서 맥주 두 박스를 다 따면서 소리를 녹음했다.

하지만 막상 결과물을 들어보니 병뚜껑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상쾌한 이미지에는 맞지 않았고,[11] 결국 다른 아이디어를 찾던 중 풍선을 터뜨리는 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펩시라는 브랜드명처럼 '두 음절'의 효과음을 내기로 결심하고 수십번 씩 풍선을 터뜨리고 녹음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얇은 재질 때문에 경쾌하고 박력있는 소리가 나오지 않자 고심 끝에 떠올린 것이 바로 콘돔. 콘돔 여러개를 겹쳐서 부풀린 후 터뜨린 소리를 '펩'으로, 콘돔에서 바람을 빼는 소리를 '시'로 삼아서 시행착오 끝에[12] '펩시' 효과음을 완성해서 일본의 펩시 지사로 보냈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미국의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과 만나게 되고 본인의 효과음이 채택된 사실을 알게 된다.[13] 미팅을 마치고 돈봉투를 열어봤는데, 안에 금액란에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수표[14]가 들어있는 걸 보고는 "이런 쳐 죽일 놈들을 봤나, 금액을 빼먹다니"라면서 화를 냈다가 백지수표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야 까무라치게 놀랐다고. 결국 지인인 이어령과의 논의 끝에 985,000원이라는[15] 생각보다 소박한 금액을 적었다.
이후 이어령은 '만약 김벌래가 백지수표를 받은 뒤에 실종된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라는 희곡을 썼고, 이는 나중에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여담으로 넷상에서 이와 관련된 루머도 있는데 '펩시'라는 이름과 펩시의 로고까지[16] 그가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아마 위의 일화에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1. 단 2008년 이후부터 업데이트가 안되어있다.
  2.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 키 158cm에 몸무게 48kg. 군대에 2번이나 지원했으나 신검에서 떨어졌다. 스티브 로저스?
  3. 연극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선생님과 상담을 받고서 서울에 있는 국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공무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4. 이때 만난 김상열, 유경환, 이영식과 함께 '젊은 스태프 4인방'을 이루어 이후 줄곧 활동해왔다.
  5. "묵화"로 유명한 바로 그 시인. 당시 동아방송에서 음악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다.
  6. 그리고 5년 뒤 언론통폐합 조치로 동아방송은 사라진다.
  7. 밴 헤일런의 '5150 스튜디오'에서 영감을 받아 어떤 숫자를 붙일지 고민하다가 38 광땡(...)에서 영감을 얻어서 '버러지같은 작품도 광땡같은 작품으로 만들어준다'는 의도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8. 이 항목의 거의 모든 내용도 다 이 책에서 나왔다.
  9. 광고에 나오는 종은 서양식 종이지만 소리는 동양의 범종 소리다. 영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소리가 좋으면 거부반응이 없다는 것의 대표적 사례.
  10. 음향 작업 참고용으로 썼기 때문에 작업용 롤에는 아무런 사운드트랙이 없었다.
  11. 그리고 이 병 따는 소리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방송국에서 쓰이고 있다.
  12. 이게 다 오픈릴 테이프를 직접 가위로 잘라서 이어 붙인 결과다. 1960년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13. 그대로 쓴 것은 아니고 특수 효과용 신디사이저를 활용해서 후작업을 거친 뒤 사용되었다. 김벌래 본인도 이걸 듣고서는 원래 소리는 여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을 정도.
  14. 최초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원음은 김벌래가 만들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재창작 한 것은 펩시 측이기 때문에 정확한 금액을 따지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15. 당시 본인의 월급이 4만 원, 60평짜리 주택 한채가 100만 원이었다. 그러니까 2년치 연봉이면 최고급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16. 펩시의 로고와 태극기의 태극모양과 유사한 점에서 착안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