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수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金若水
1890년 10월 21일 ~ 1964년 1월 10일

대한민국의 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본명은 김두전(金枓全)이다.

1890년 경상도 동래도호부(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한성부로 상경하여 휘문의숙, 경성공업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니혼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기장광복회 회장직을 맡았다. 1918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김원봉을 만나서 이름을 약수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서 사회주의 운동 및 항일운동을 하였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로부터 임전보국단 가입을 권고받았으나 거절했다가 수개월간 구금되었다.

8.15 광복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에 의해 건준이 좌경화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떠나 한국민주당 조직에 가담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의 정치 노선에 싫증을 느꼈다. 이에 1946년 10월 탈당하여 김규식 계열 노선을 따르고 좌우 합작 운동에 투신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샀다. 1949년 국회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고 국회부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항소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하였다. 1956년 반 김일성 운동을 하다 종파 사건 때 숙청되어 산골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