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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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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15 광복 후 1945년 9월 9일 결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이다.
풀네임인 한국민주당보다 약칭인 한민당으로 유명하다. 현재의 민주당계 정당이 이 정당의 후신이며[4], 의외로 보수정당인 새누리당도 그 뿌리가 닿아있다. 송진우(전남 담양), 김성수(전북 고창), 장덕수(황해도 재령), 조병옥(충남 천안), 윤보선(충남 아산), 장택상(경북 인동), 함상훈(황해도 송화), 유억겸(서울), 윤치영(서울) 등이 창당을 주도하였다. 어떻게 보면 현 한국 주요 정당의 모태가 된 정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당.[5]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고[6], 민주주의를 강하게 표방하였기에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자발적으로 사용했다.
집권여당인 자유당과 대립하는 우익정당으로서 지주층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며, 친일파 세력과의 연계성이 높아 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7] 독립운동가도 한민당에 드나들었지만, 미군정이 현상 유지 후 정부를 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친일파 처리 문제가 뒷전이 되고 권력 획득이 우선이 되어버린 탓이 컸다.
해방정국을 맞자 나중에는 숙명의 맞수가 되는 이승만 세력과 결합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다수 참여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에 대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친일 청산에 반대하였고, 나아가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는데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8]
게다가 이들은 전국 각지에 대농장을 거느린 인사들이 많아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기에 농지개혁을 비롯한 토지 개혁에도 비우호적이었다. 정부 수립 당시 초대 농림부 장관이던 조봉암이 토지개혁을 주도할때 가장 발끈하고 방해했던 세력이 한민당이었다. 나중에 제1공화국때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은 한민당 세력과 합작하고자 손 내밀었지만, 이들은 조봉암을 내팽겨쳤다. 2대 국회(5.30 총선거) 이후 대통령과 내각의 세력다툼 속에서 세력을 잃어가자 다수가 구 민주당, 소수는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현재 민주당 계열의 경우 그 뿌리가 한민당이라는 것이 진보 매체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비판받기도 한다. 현재의 새누리당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원죄로 꾸준히 까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 가령 프레시안의 경우 칼럼에서 민주당의 뿌리가 한민당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진보매체인 시사인에서도 민주당의 뿌리가 한민당이라고 했다.# 한겨레가 주최한 대담 칼럼에서는 한홍구 교수가 민주당이 한민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언급했음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박상천 전 의원의 논지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뿌리를 한민당으로 보는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라고 못박은 바 있다.# 이렇듯 진보 매체에서도 한민당을 민주당과 결부짓는 근본적인 원인은 민주당의 계보 중 최소한 60년대 말까지 한민당의 그것을 꾸준하게 계승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뿌리로서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노선에 있어서는 한국민주당의 출현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났고 그 사이에도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현재 민주당계의 성향은 태동 때처럼 확실한 강경 보수 노선은 결코 아니며, 중도/진보 개혁세력 정도로 이념적 좌표 분포가 다소 애매해지긴 했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세웠지만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군부계열을 숙청하면서 보수계 정당에서 친독재 성향이 상당히 타파된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후 다시 박근혜가 들어오면서 강해진게 함정이지만
또한 언급한 3당합당으로 인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인력과 조직이 현재의 새누리당과 이어져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새누리당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9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민당을 뿌리로 둔 계파는 민주당 구파, 비한민당 출신 계파는 민주당 신파로 분류하는데 1987년 통일민주당 분당 당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에 속했기 때문이다.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도 민주당 구파, 즉 한민당을 뿌리로 하는 세력이 3당합당으로 새누리당에 합류한 셈이다.
위의 프레시안 기사에서도 한국민주당이 민주당의 뿌리임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연장까지는 아니라 밝혔고,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 '한국 근현대사 산책' 등의 저서를 통해 민주당계 계열 정당들의 이념적 특징은 뭐라 특정짓기가 애매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한홍구, 고종석[9], 손호철 같은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진보계열 인사들은 현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도 여전히 보수주의 성향이라 여기고 있으며, 대조적으로 고원, 김호기 교수 등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지금의 민주당이 한민당의 그것에서 정도만 완화된 보수주의 성향이라고 해야 할련지, 아니면 리버럴리즘~중도 우파로 규정해야 할련지는 사람마다 이견이 분분하며 당내 계파가 워낙 다양하니만큼 여러 노선들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한국민주당은 남북 분단 문제, 친일 처리 문제에서 상당한 과오를 싸질렀기 때문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해방 이후 정국이 워낙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돌아갔기에 단순화된 설명은 무리이지만[10]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측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2 역사
2.1 창당과 세력 구축
1945년 8월 말,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알려진지 얼마 안되어 전라도 지역 지주 계층[11] 및 사회 경제 분야의 명망가가 중심이 된 우익진영 인사들이 모여서 창당을 준비하는 총회를 열었고 9월 16일에 창당대회를 열었다[12]. 이어 한민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덕수가 발기문 및 성명서를 기초 작성했는데, 주 내용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 인민 공화국을 대차게 까는 글이다. #
한민당은 미군정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결탁하면서 군정 내 요직(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11명 가운데 9명이 한민당이다. 1명은 여운형, 1명은 조만식.)을 차지하였으며, 미군정에게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이 친일파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대표적인 반일인사 세력인 여운형과 안재홍을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친일파라고 주장하였다참조#[13].
실제로 이 때문에 민중으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약했다. 한국민주당은 지주,친일 자본가들[14]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당연 곱게 볼수가 없는 일.
1945년 9월에 창당된 한민당 창당 발기인 명단을 보면 김성수, 장덕수, 함상훈, 유억겸, 김동원, 유진오, 윤치영, 송진우 등이 참여했다. 당의 중심 인물은 대부분이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나마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자도 1910년, 1920년대에 집중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각종 친일 협력한 반민족행위자들이었다. 때문에 당시 한민당은 대중뿐 아닌 미군정조차도 '친일파 정당'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다만 한민당에는 친일경력이 없고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인물들이 일부 있었다(대표적으로 김약수, 원세훈, 김병로 등). 그런데, 이들은 토지개혁 관련해서 한민당의 소극적 태도에 크게 실망감을 느끼고 반발해 1946년 10월 무렵에 탈당하고, 대부분이 김규식계열에 합류에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대표적으로 송남헌 경우 처음 한민당에 있다가 한민당에 혐오감을 크게 느껴 김규식인사로 갈아탄다. 그리고 이후 김규식의 비서로 쭉 수행해왔다.)
1945년 9월 6일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의 협성실업학교에서 한민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7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0 ~ 3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반면, 같은 날에 건준에서도 종로구 계동정의 경기여고 강당(당시 건준의 본부)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무려 1000명이 모였다.) 300명이나 1000명이나 도찐개찐같아 보여도 당시 참여 숫자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참여 숫자는 곧 자신들의 세력을 의미했다. 그만큼 건준의 인기가 대중들로부터 굉장히 높았고, 한민당의 지지는 거의 없었다.
9월 21일에는 중앙부서를 확정해 총무제를 실시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라북도의 백관수, 경상북도의 서상일, 경기도의 김도연, 경상남도의 허정, 충청남도의 조병옥, 황해도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봉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 원칙이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정식정부로 봉대하고 기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를 배격한다는 것이었다[15]. 따라서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 지지도가 비교적 낮았고, 엄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이 존재함에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겨[16] 추대를 받아들이고 한민당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한민당 세력은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2.2 신탁통치 문제와 한민당의 성장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이 때 동아일보는 신탁통치안을 제기한 것이 소련이라 보도(실제로는 미국이 제의)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트렸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그 해에 다시 타국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이 결의안은 민중의 반발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이에 대해 한민당 수석 총무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신중파 송진우는 오보를 시인하고 경교장에서 반탁을 주장하던 김구에 대해 극렬한 반탁운동이 미군정에 의한 권력 이양으로 곧바로 이어질 공산이 거의 없으므로 반탁운동 방법 측면에서 신중히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날 새벽에 원서동 저택에서 암살당했다[17]. 신중론을 취하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민당 내 신중론자들은 한독당 김구와 찬반탁 문제를 두고 모종의 갈등을 겪었다.
신탁통치안의 발표에 국내 정치 세력은 우파 중심의 반탁론, 중도 중심의 신중론, 좌파 중심의 찬탁론으로 나뉘었으며, 위에 썼듯이 절대 지지를 받는 것은 반탁론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파는 크게 성장하였고, 한민당 또한 세력을 확대하였다.
한독당의 김구는 임정 법통성을 관철시키기위해 한민당과 협력했으나, 김구는 반탁을 고수하면서 미소공위 불참을 주장했고, 한민당은 "참여하되,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소공위 참여문제를 놓고 한민당과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였다.
1946년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하자 한민당은 이를 지지하였으며, 이를 즈음하여 김구와 돌아서게 되었다. 단정 수립 비난 성명이 잇따르자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대응하였다. 한편 미군정이 안재홍이나 김규식같은 같은 중도파를 중요 자리에 임명하려하자 한민당은 안재홍을 겨냥해 “1개월이 넘지 않는 동안 이 자를 쫓아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이들 한민당은 안재홍을 '친일파'라느니 공산주의자라느니 말도 안되는 억지논리로 마구 공격하였고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삐라를 뿌리게 했으며, 민정장관에 임명된 안재홍이 내린 인사발령 지시까지 거부하였다.
1947년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을때 처음에는 순조로웠다.[18] 그러나, 정당 단체 수 문제와 또다시 신탁/반탁 문제로 제2차 미소공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양측 입장만 확인한채 완전 결렬. 미소공위 좌초된 이후에는 이미 좌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힘을 잃어 있었고, 중도파 또한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상태가 돼버린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한국 정부 수립에 대해 이미 안이 확연히 달라져 단정 지지파에게 더욱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민당 총수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김구는 미군정에 의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의심되어 검찰에 소환되었고 한민당은 이를 비난하였다. 이후 김구는 한민당, 미군과 완전히 결별하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중도적 선택에 김구의 한독당 세력은 오히려 우익측 지지세력을 잃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떨어져 나간 우익들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흡수하였다.
2.3 대한민국 정부 수립
5. 10 총선거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위원회가 55석을 차지하고, 한민당 세력은 29석을 차지하였다. 여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우파 세력들을 흡수하여 나름 여당과 같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에 반민특위가 발대하였으나 우익 주도파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친일파 청산을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 좌초되었다. 조봉암이 주도한 토지 개혁안 또한 한민당의 반대 속에 힘겹게 통과되었다.[19]
2.3.1 김성수의 좌절감
이승만과 한민당은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협력하는 공생관계로 출발하였다. 이 밀월관계는 제헌의회에서부터 틀어지게 된다.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은 기존의 내각책임제 대신에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요구[20]했고, 한민당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내용 수정이 원체 졸속이었던 탓[21]에 정부조직법 상으로는 여전히 실권이 국무총리에게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에 김성수 총리, 그리고 내각의 절반(6인) 이상은 한민당계안을 내걸어 이승만과 합의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자 그런거 없다는 듯 바지사장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격분한 한민당[22]이 이윤영 안을 부결시키자, 이번에는 이범석을 지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범석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주면 한민당에게 내각에 6석 이상을 내주겠다고 딜을 걸었고, 더 이상 총리 지명을 질질 끌기도 뭣했던 한민당은 이 제안에 응한다. 하지만 이범석 총리 지명이 통과되기가 무섭게, 이승만은 이범석의 요청도 씹고 한민당계를 한 명만 내각에 임명해 버렸다[23]. 야 신난다! 거기다가 이승만은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지주층을 한방에 박살낼 결전병기를 꺼내게 되니 그것이 바로…!
2대 국회에서 우익측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승만은 대통령 권한 강화를 시도하였고, 한민당은 이에 맞서 의원 내각제안을 제시하였다. 이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자유당을 결성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민당과 연을 사실상 끊었고, 이에 한민당은 조병옥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3 평가
후에 반이승만을 내걸고 이승만을 견제하는 제1야당의 주요 세력으로서 한국 야당 계보의 제일 첫머리에 위치하고, 군사정권과 경쟁하는 세력으로 이어졌으며, 내부적인 정책에서 '비교적' 온건보수의 성향을 보였으나, 기본적으로 반공적이고 대부분 부르주아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체제보전과 반공을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진 뒤 일시적으로 집권여당이 되었을 때 이들의 후신인 민주당이 민중의 요구만큼 개혁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에 매우 적대적이어서 국제정세라거나 시류를 고려해야할 대북 정책에서 오로지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물론 당시 북한 정권은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면서 일당독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일제말 부일협력이라거나 미군정에 붙어 좌파를 탄압, 단독정부 수립 지지등 보였던 과거 행보는 곱게 봐줄 수 없기 때문에 진보정당과 민족주의 좌파 사관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공화당의 흠집내기를 감안하더라도, 해방정국을 겪어본 이들에 따르면 한민당 세력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 그 자체라는 반응이 한결같다. 실제로, 해방정국 당시 신문사를 비롯해서 시사만화 등 보면 한민당은 주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었고.
한민당에 가까운 인물을 굳이 찾자면 민주당 구파 인사로 스스로가 송진우-김성수 직계라고 주장하는 호남 지지기반의 정치인 이철승[24] 등. 민주화 이후의 유력 정치인과 관련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국회의원 데뷔를 자유당에서 했지만 하지만 사사오입 개헌 병크 직후 탈당하고 민주당으로 갔다는 점에서 한민당과 연결점을 두기도 한다.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는 한민당과 민국당에서 이어지는 장면의 민주당 신파 직계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기와 때에 따라 한민당에 속했던 것을 사안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피력하며 애매한 입장을 취했던 바 있었다.
이승만 세력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그랬기에 일당 독재를 견제했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한민당은 정책 면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도 돋보이지 않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이런 전력을 의식해서인지 현 민주당은 한국민주당 거론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현 민주통합당의 구성원들중의 다수가 90년대 이후 정계 입문한 사람이 다수고, 현 시점에서 민주통합당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인사들 상당수가 8~90년대 이후 입당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민주당계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현 민주통합당을 사이비라고 비난했던 구 민주계(동교동계) 일부는 새로 평화민주당과 정통민주당을 창당했다가 처참하게 박살났고 그중 김대중 전 대통령 아래 있었던 한광옥, 김경재는 새누리당에 가담, 다만 민주당의 정신적 구심점인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한국민주당부터 시작해 꾸준히 그 후신 정당을 따라 이어지는 정치 역정을 밟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자칫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역풍이 돌아갈 수 있어서인지 정의당이나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계열 정당들처럼 한민당을 대놓고 비판하거나 한민당과 선을 긋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참고로 한민당을 대변한 대표적인 신문이 동아일보였다. 이유는 동아일보의 창업주부터가...
4 관련 항목
- ↑ 1945년에 창당된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
- ↑ 1945년에 창당된 민족진영의 보수정당
- ↑ 1945년에 창당된 보수정당, 1935년 창당된 한국국민당 그리고 1980년에 민주공화당의 잔여세력을 모아 만든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과는 다름
- ↑ 다만 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의 역사를 1955년 창당한 민주당부터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한민당을 흑역사 취급하는 모양새.(...) 여기서 볼 수 있다. 비판받는 이유는 후술내용 참조.
- ↑ 다만 이건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 크고, 사실상 영향력이 큰 직접적 전신은 보수계 정당이나 민주계 정당이나 모두 90년대 창당한 정당들에서 찾는다.
- ↑ 물론 친미라는 점을 빼고는 자신들 개개인 집단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활동했다.
- ↑ 위의 창당 주도 인물들 가운데, 김성수, 장덕수, 유억겸, 윤치영은 본래 독립운동 세력이다가 친일파로 변절하였으며, 함상훈 또한 조선일보의 주필로 친일 논설을 발표한 바 있다. 다만 당시 한민당과 자유당 등 국내 정치 세력을 끌어들인 집단은 독립운동가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섞여 있는 구성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 ↑ 일례로 1949년 6.6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사퇴한 이후 한민당 인물인 변호사 이인이 특위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인은 이승만의 측근이었고, 애시당초부터 친일파 청산에 강력히 반대했던 인물로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자마자 반민특위를 축소시키고, 체포된 친일파들을 죄다 '증거불충분 무죄'처리로 노덕술이나 이종형, 박흥식 등등 악질 친일인사들을 '무죄'로 석방시킴으로써 훗날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는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 ↑ 그는 민주당이 진보주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진보 정당들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민주당계 계열 정당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해답이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종석은 중도보수우파 자유주의자다...
- ↑ 미군정 및 소련 군정 자체에 대한 논쟁, 좌우 대립, 남북 분단, 6.25 전쟁 등 이 시기 한국사는 정말 큼직큼직한 사건들로, 그것도 수많은 세력들이 개입하면서 복잡하게 돌아간다. 한민당이 큰 영향을 줬다고는 해도, '다 한민당 탓!'이라고 하는 것 또한 한국 현대사를 너무 단순화시켜 보고 큰 오류를 부를 수 있다.
- ↑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도 지역은 농업이 기반이었기 때문에 지주나 부호세력들 영향이 굉장히 컸다. 이때문에 전라도 지역은 친일파 지주들이 많았다. 김성수의 경성방직주식회사 또한 호남 지주의 자본에서 출발한 것. 단 김성수가 사업을 한창 시작하던 시점에는 친일과 거리가 멀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 ↑ 사실, 건준에 대항하기 위해 한민당 발기 이전 '국민창당준비위원회'(약칭 '국준')을 발족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지기반이 너무 약했다.(...)
- ↑ 그러나, 여운형은 분명한 반일인사였고, 일제말에 건국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는등 오히려 일제말에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행보를 보였다. 안재홍도 역시 철저한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절대 변절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고...오히려 한민당 세력들 인사들 대부분이 친일 시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오히려 '기회주의'집단이다. 이들은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 대중적으로 상당히 인기가 많았던 여운형과 안재홍등 건준위 세력을 '골수 친일파이며 좌빨!'이라는 굴레를 씌워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민당과 친일파의 논조를 그대로 지니는 친일파 후예들은 우기고 있으니... - ↑ 일제강점기에 전라도지역에는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지주세력들이 많았다. 반면, 경상도지역은 공산주의 성향이 매우 짙었던 곳.
- ↑ 중경 임시정부 지지를 보였던 또다른 인물은 안재홍이 있었다. 그러나 안재홍은 한민당이 주창하는 '임정봉대'와는 격이 상당히 다르다. 일단 안재홍은 건준 부위원장까지 했던 사람이다. 안재홍은 건준과 임정이 협력할 수 있는 관계로 보았고, 임정을 뼈대로 과도정부를 세우더라도 중경의 임정 그대로는 안 될 것이니, 그를 보완하는 역할을 건준이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임정 지지를 선언했다. 즉, 안재홍은 임정과 국내의 건준위하고 동급의 선상을 놓고 임정 지지를 주장한것이다. 반면, 한민당은 임정을 명분삼아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 ↑ 이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고수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당시 임시정부 외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위치를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동등히 할 것 혹은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통일적인 새 단체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으나 1920년대 국민 대표 회의에 제대로 데인 바 있는 김구는 이를 거절해왔다.
- ↑ 정황이 정황이니만큼 우파, 그 중에서도 김구에 의한 암살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 ↑ 제2차 미소공위 재개 당시, 우익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고, '시국대책협의회'(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하게 된다.
- ↑ 사실 이건 좀 지저분한 뒷이야기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농지개혁법 참조.
- ↑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안 되면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땡깡까지 부려댔다. 친일파 지주정당 이미지를 벗으려고 이승만을 모셔온 한민당으로선 미치고 팔딱 뛸 노릇.
- ↑ 사실상 개헌이나 다름없는 내용을 꼴랑 10분만에 끝냈다.
- ↑ 이윤영은 월남자라 정치기반이 정말 전무했고, 그 때문에 제헌의회 총선거 당시에도 남의 지역구를 빌려 당선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지역구의 원래 주인은 바로 김성수. 한민당이 길길히 날뛸만도 했다.
- ↑ 엄밀히 말하자면 세 명이지만, 둘은 사실상 이승만의 개인 지명에 가깝기 때문에 한민당계는 한 명만 들어갔다.
- ↑ 이철승은 연고지가 전라북도로 같았던 김성수의 제자였고, 해방정국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비롯해 적극적으로 나서며 소위 '정치깡패' 활동을 나서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당 신파 계열 정치인으로 쭉 활동하다 1988년 정계은퇴했다. 여담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극우세력인 국민행동본부 애국기동단이 모태를 삼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이철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