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金俊燁
( 1920년 8월 26일 ~ 2011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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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교육자.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일제시대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 유학 당시 징집되어 학도병으로 끌려갔으나, 만주에 배치된 후 친구인 장준하와 함께 탈출 수천리를 걸어서 충칭에 위치한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한다.[1]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특공부대의 일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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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의 모습. 가운데 안경쓴 이가 김준엽이다. 오른쪽은 장준하.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폄하하지만,[2] 일단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 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3]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가실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을만큼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한가지 말하자면, 장준하 선생이 동료와 함께 탈출한 쓰가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영을 하는데 성공한 병사가 있었으니 그 병사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 김준엽 선생이다.먼치킨

2.2 광복 이후

해방 후에는 중국 남경의 중앙대학에서 잠시 있다가,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고, 중문과와 노문과를 신설하면서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워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산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하신 분으로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 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4] 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처음으로 중어중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5] 당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공산권 연구기관이었다.

2.3 고려대 총장 재임시기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강제로 사임하게 된다. 총장이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CBS 기사 참조.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여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6]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 총장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 총장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이고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 총장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 총장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선 학생들이 잘리고 고려대에선 총장이 잘리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 총장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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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식에서 연설하는 김준엽 총장

이쯤 되면 그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에 3년씩이나 총장을 한 게 신기할 정도이다. [7]


고대생들의 졸업식에서의 총장사임 반대데모

2.4 고려대 총장 퇴임 이후

1987년 대한민국 헌법의 9차 개헌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그 이전까지는 3.1 운동이나 4.19 혁명 정도가 언급되었을 뿐 임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그제야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공인한 것이다.

학자로서의 자존심 또한 꿋꿋히 지킨 분으로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 간 2번의 총리직을 포함한 총 12번의 입각 제의를 거절했다. 폴리페서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참 드문 케이스이며 귀감이 될 만 하다. 그 거절 이유가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같은 사람도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총장 하다가 어떻게 총리가 되나."[8] 실로 대인배 of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노태우 정권의 총리직 제의에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젊은 층이 실망할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본인의 회고록인 <장정>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외에도 몇 가지 입각 거절 이유가 더 나와 있다.

참고로 노태우 당선 후 그와 2시간 동안 회동을 가진 적이 있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을 다룬 1/2권, 고려대 총장 시절을 다룬 3권, 이후를 다룬 4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자. 저자 스스로가 직접 겪은 경험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나 여러 자료들을 함께 수록했는데, 후배 사학도를 위해 연구와 교육용으로 쓰일 수 있도록 편집하셨다고 한다.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자신도 늙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2011년 6월 7일 별세하셨다. 그냥 링거 맞으러 병원 갔더니 1~2주의 최말기 시한부 폐암이었다고... 그의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것이 발목을 잡았다. 대전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그외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데도 고려대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치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9] '김준엽 前 총장과 이사회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며, 고인이 별세하기 약 반년 전, 2010년 11월에 김준엽 구순 기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봉정식이 있었을 때 고려대의 전현직 총장을 비롯, 사학과, 한국사학과 등의 각계 교수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김정배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이자 김준엽 선생의 사학과 제자이다.

2012년 6월 고려대에서는 김준엽 전 총장 사망 1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있기도 했다.

김준엽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참조.

여담으로 생전에 장준하 선생의 생에 관련으로 인터뷰를 많이 받았는데 가벼운 이야기로 "나도 중국 땅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내가 뭘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장준하만 물어보더라" 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준엽 선생의 행보를 보면 주목을 못 받을 이유가 없는 엄청난 독립운동가이면서 학자의 본연의 모습,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를 한 존경받을 인물이다.
  1.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2. 다만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독자적인 기반 없이 장개석중국 국민당 정부에 얹혀 살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애석한 사실이다.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화북으로 떠난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대)에 비하면 많이 아쉬운 점이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활동하던 조선의용대는 해방 이후 남북 모두에서 버려졌다.
  3. 1900년대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한민족이 중국과 만주지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국민당/공산당/일본군/군벌 등 여러 세력이 다투는 혼란 속에서 한민족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4. 92년 수교 이후 최초로 중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하였다.
  5. 우리나라 최초의 중어중문학과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1946)이다.
  6. 근데 생각해보면 그 여직원도 참 무지한 것이, 아니 49년부터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신 어른을, 서무과 전체가 못 알아 본 격이 아닌가? 신입 사원이었던 모양이지
  7. 한국 광복군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권위있는 학자가 명문대 총장을 맡고 있으니 독재정권도 어찌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은 마지막에 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는 명목으로 협박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
  8. 그렇다면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연대 김우식 총장 같은 사람은 대체 뭐가 되나... 연세대학교 총장 지못미... 고려대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거고 연세대 총장은 총리보다 낮은 거겠지 그럼 김상협 총장은? 김상협은 태평양전쟁 때 국방헌금까지 낸 김연수의 아들이잖냐
  9.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대는 사학자 한홍구의 외할아버지인 유진오 같은 친일인사들은 극잔한 장례를 치러주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