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


1 개요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은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이 있는 장소로, 1970년에 이 자리를 사적 제245호로 지정하였다.

2 역사

2.1 유래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2대 왕 남해 차차웅 3년에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고, 이후에 이 자리에 신궁을 세우는데 이 때부터 수백년이 지난 통일신라대까지도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발굴 조사 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1]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또한 담장이 전각과 화강암을 둘렀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 m 짜리 돌덩이가 나정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2.2 발굴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겼다. 하여 법률에 따라 조사단을 꾸리고 경주 박씨 문중에 이를 알려 개토제를 지낸 뒤 형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보니, 조사단조차 미처 예상치 못한 팔각형 건물터를 발견하였다.[2]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던 것이다. 출토된 기와를 통해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 8각형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시대 건축물 가운데 고구려[3]형식으로만 알려졌지만, 신라에서도 8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대로 이 건물은 4각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단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역시 품질로 미루어보면 고급건물이었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절충설에 힘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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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나정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던, 네모난 중앙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터가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 하지만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새로 발견된 우물 터는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보아 실제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우물은 의도적으로 매립된 흔적이 보인다.이 우물 자리를 중심으로 이 팔각형 신궁 건물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원형의 배수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어떠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아들인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 세워졌다던 박혁거세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나정이라고 불린 화강암으로 덮힌 곳이 실제로는 우물이 아닌 이유는 알 수 없다.

즉, 원래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을 메우고 우물 자리를 중심으로 원형의 시설을 세웠다. 그런데 후대에(문무왕 즈음으로 추정) 원형 시설을 부수고 원래 원형 시설 자리를 전부 포함할 만큼 큰 8각형 건물을 지었는데, 우물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중앙 기둥을 세웠다. 나중에 이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중앙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나정이라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간 신뢰성이 낮다고 여겨지던 삼국시대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성 역시 높아진 측면이 있다.[4]
  1. 원래 이 유허비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을 일제시대에 같은 내용으로 비석을 복제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원래 서 있던 비석은 땅 속에 묻혀 있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발견하였다.
  2. 물론 앞서 말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나을`이 나정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있었다. 다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발굴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3. 정릉사, 청암리 사지 참고
  4.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라의 경우 지증왕 즉위(500년) 이전 기록들은 과연 정확한 것인지 부정되는 편이었는데,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외국 당대 기록과 안 맞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초기 기록이 거의 완전히 못 믿을 것으로 간주됐고, 현대에는 절충안이 대세인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는지는 학파마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