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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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1대 소지 마립간 김비치22대 지증왕 김지대로23대 법흥왕 김원종
시호지증왕(智證王)
김(金)
지대로(智大路) / 지도로(智度路) / 지철로(智哲老)
생몰년도음력437년 ~ 514년 7월 (78세)
재위년도음력500년 ~ 514년 7월 (14년)

1 개요

신라의 제22대 임금. 무려 64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망한 나이가 78세...오래도 살았다... 이름인 지철로(智哲老)에서 한자 鐵의 원음은 /tiet/에 가까워 "톗"에 가까운 발음이었으므로 지대로(智大路)와 그다지 차이가 없다. ..한편으로 같은 의미의 사투리로 '지절로'라는 발음이 있다. 김지절로...

소지 마립간의 6촌 형제. 내물 마립간의 증손으로 눌지 마립간의 동생인 갈문왕 복호(고구려로 끌려간 그 복호)의 손자이자 갈문왕 습보의 아들이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법흥왕소지 마립간의 사위임을 감안하면 아들 덕에 왕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오히려 업적 중 상당수도 법흥왕이 미리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업적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마립간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다. 울진 봉평비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이 등장하는데, 이는 법흥왕으로 비정된다. 매금은 마립간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지배자의 호칭이므로 이 때까지는 마립간과 왕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王) 칭호를 사용한 신라 최초의 군주이며, 시호를 한국사 최초로 받기도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노동력 확보를 위한 순장 폐지(502), 시장 감독기구인 동시전 설치, (를 농사에 이용하는)우경법 실시(502)[1], 신라 국호와 왕호 사용(503)[2], 지방조직인 군현제 정비(505),[3] 이사부에게 명해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한 것도 지증왕 재위 시기다(512). 신라라는 국호 변경 전에는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으로 불렸다. 영일 냉수리비에는 신라의 옛 명칭인 '사로'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증왕이 지도로 갈문왕(이란 칭호에 주목, 후술)이라고 되어 있다. 새로이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 羅者綱四方之義)."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마립간 대신 왕의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잘 보면 지증왕 이후로 왕의 이름이 중국식 시호로 확정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4], 미실[5],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증왕 대에서 우경법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업그레이드되었으며 공공행정 찍었고 신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지증왕 대에 삼한 땅에 알음알음 내려오던 인신공양순장을 전면 금지함으로서[6] 삼한 세계 전체에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인명 존중 사상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과 동일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인명 존중은 본격적인 삼국 간 회전력 싸움이 슬슬 시작되던 시기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순장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활용하고 동시에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자랑하지만 금석문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도 여전히 신라 왕실은 한 부의 지배자 정도로 머물러 있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해당 업적들 상당수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법흥왕이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법흥왕은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업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린다.

3 신체적 특징

지대로
사실 이런 내용보다는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더 유명하다. 삼국사기에선 지증왕에 대해 '체격이 장대하고 담력이 월등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략)...그의 음경의 길이는 무려 1자 5치였는데,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지증왕은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자기의 음경을 능히 감당할 만한 처녀를 수소문하였다. 어느 날 지증왕이 보낸 한 사자가 모량부에 도착해 동로수(冬老樹)아래에 쉬고 있는데, 큰 2마리가 북 만한 누런 똥[7]을 양쪽에서 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쾌재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가 그 커다란 똥덩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 숲속에 숨어서 눈 똥입니다."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 근데 똥 크기랑 무슨 상관이지 이거 말하는 거지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처녀를 보니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사자는 급히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왕비로 삼았다.

ㅈㅈ
지증왕의 크고 아름다운음경 1자 5치를 현대 수치로 계산해보면 과거 1자인 18cm라고 잡아도 27cm는 족히 되는 게 흠좀무. 이 길이로 따져도 길이가 9와 1/2인치(24.13cm)인 어느 미국인 게이보다 더 크다 뒤에 나오는 처녀의 키를 생각하면 아마도 한 자 23cm를 적용해야 할 텐데 이러면 34.5cm(;;;). 물론 상징적인 설화니까 너무 따지지 말자.(거시기 얘기를 꺼내는 게 좀 거시기해서 그런지, 어느 어린이 역사 만화에서는 덩치가 너무 커서 장가를 못갔다고 변형하기도 했다.).[8]

처녀의 키 7자 5치 역시 어마어마하다. 30cm라고 볼 경우 약 225cm. 현대에도 거인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이런 키는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1자를 18cm로 볼 경우 135cm. 이 경우는 아무리 과거라도 도저히 크다 볼 수는 없다. 23cm를 적용하면 172.5cm로 그럭저럭 사람이 가능한 키니까 이 기준이 맞을 듯.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도 여자의 키로는 꽤 큰 키이니 지증왕 시대에는... 역시 이 큰 덩치도 농업 생산력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잠깐 근데 우리는 64세와 처녀의 키잡에 더 주목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보면 법흥왕은 이전에 낳은 어머니가 따로 있고 사별한 건 아닌지

이는 아마 실제로 대물이었다기보단(물론 당초에 덩치가 크면 아마 그것도 비례할 가능성이 높지만) 지증왕의 실제 외형을 기반으로 하되, 왕의 거대함위대함을 신격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해서 퍼뜨린 전설이라고 생각된다.

4 기타

1989년에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2009년 5월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지증왕 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링크 삼국사기 등 사서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시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됐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 지증마립간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순장을 금지하다
三年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농사를 권장하고 소를 부려서 논밭을 갈다
四年冬十月 나라 이름과 왕의 칭호를 정하다
五年夏四月 상복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다
五年秋九月 인부를 징발하여 12성을 쌓다
六年春二月 나라 안의 주·군·현을 정하다
六年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다
六年冬十一月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하다
七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다
十年春一月 서울에 동시를 설치하다
六年春三月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의 피해를 없애다
六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죽다
十一年冬十月 천둥이 치다
十三年夏六月 우산국을 정벌하다
十五年春一月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七月 6부와 지방 사람들을 옮기다
十五年 왕이 죽다

기록 자체는 소략한 편에 속하지만, 매우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

무엇보다도 우산국 정벌기사는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지증왕부터 삼국사기 4권이 시작된다.
  1. 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 우경법 실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6c가 될때까지 신라 사람들이 농사짓는데에 소를 활용하지 못했었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 따라서 우경법이 시작됐다고 보기 보다는 우경법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를 시작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2. 한화 정책의 일환. 이전에는 신라 국호의 한자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던 상태로, 삼국지사로국(斯盧國), 포항 냉수리 신라비사라(斯羅) 등 여러가지 표기가 혼용됐다.
  3. 통일 전 신라의 수도, 지방행정조직은 6부5군 이었는데, 지증왕때 최초로 실직주 군주(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로 이사부를 파견했다. 이때 이후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한 것.
  4. 프랑스가 아니다! 자세한 정보 추가 바람
  5. 참고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고 선덕여왕(드라마)으로 유명해진 미실과는 한자가 다르다. 화랑세기 미실은 美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지명 미실은 彌實. 단 이 시절 신라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쓰는 한자가 고정돼있지 않고 음이 같으면 막 섞어쓰기도 하는데,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약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신라인스러운 이름을 만들기 위해 이런 데서 참고해 따 온 이름일 수도 있다.
  6.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후 천 년 가까이 지난 명나라 때까지도 순장을 했다. 선례를 남기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 다만 중국의 순장은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폐지되어 병기나 토우 등을 대신 묻었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유입에 따라 일시적으로 다시 실행되기도 했고, 명나라의 경우는 전대 원나라가 몽골의 풍습에 따라 순장을 했었기 대문에 그 유습이 내려왔던 것이다. 고대부터 일관적으로 수천 년 동안 순장이 시행됐던 것은 아니다.
  7. 농업 생산력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해석 있음
  8. 물론 삼국사기에 덩치가 크다고 했었고 거시기가 크다는건 덩치가 크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변형은 아니고 좀 과장이나 순화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