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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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신라 건국초대 혁거세거서간 박혁거세2대 남해 차차웅 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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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역사문화 공원내에 있는 박혁거세 상
시호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박(朴) / 밝
혁거세(赫居世) / 아누리, 아뉘
생몰년도음력기원전 69년(?) ~ 기원후 4년 3월 (73세)
재위기간음력기원전 57년 4월 15일[1] ~ 기원후 4년 3월(61년)

1 개요

신라의 시조

칭호는 거서간 혹은 거세간(또는 거슬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기타 재외동포 모든 박씨의 시조.

현재 전하는 박혁거세란 이름은 朴赫巨世란 한자표기를 음만 따다 읽은 것이나, 신라시대 한자독법은 지금의 일본어 같이 음독훈독을 섞어 썼고(향가 같은 걸 생각해보면 된다) 赫(밝을 혁)과 世(누리 세)는 각각 뜻으로 읽기 때문에 원래 발음은 밝아누리나 밝아뉘등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명으로 불구내弗矩內라고 한다" 라고 되어 있다. 현대 한국어로 하면 '밝은 이' 정도 되겠다. 이설로는 世의 뜻을 해로 보아 원 발음을 밝은해, 밝붉은해로 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삼국유사와 일치한다.

2 탄생설화 및 사망

박(식물) 모양의 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을 박씨로 정한 것도 그 이유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한개 있어 깨뜨려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쓰인 위의 설화에 의하면 성씨의 박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법흥왕 때의 당대 기록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는 성씨가 등장하지 않기에 혁거세가 당시에 박이라는 성씨를 가지지 않았고 후손들이 소급해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계에서 제대로 연구되어 있진 않다, 참고로만 알아두자.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경주의 나정은 이후 신라왕실의 성지가 되었고 신궁 등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다른 기록으로 선도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선도성모 문서 참조.

기원전 57년, 경주 일대 6촌 촌장들의 추대로 13세에 왕위에 즉위, 계룡에게서 태어났다는 알영부인과 결혼하였으며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한다. 1년 전 기원후 3년에는 경주에 두 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죽을 때도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巳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토막난데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위의 설화를 유추하여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자세한 것은 남해 차차웅 항목 참고.

박혁거세와 얽힌 전설로 금척 이야기가 있다.

한편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박혁거세의 농경신화를 뜻한다고 한다. 건국의 신화적 인물은 승천하거나 신으로 모셔지는 것이 보통인데 뱀이 이를 막고 시체가 다섯조각이 나서 땅에 묻힌다. 신화적으로 시체가 묻히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조각내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뱀은 신화적으로 남근을 상징해 다산, 생산등을 상징한다. 게다가 시체가 다섯 토막인 것은 어머니가 얻은 오곡과 연관된다. 즉 죽은 뒤에는 농경신으로 모셔졌지만 차마 건국신화에 곡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3 치세

박혁거세 시대의 사로국(신라)은 한반도에서는 꽤 살 만한 동네였던 모양으로, 당시 한반도 남서부를 지배하던 마한이나, 북쪽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낙랑 등이 쉽게 손대지 못했고, 바다 건너(중국, 일본())에서는 이민을 온 사람도 많았다.[2] 일본에서 왔다는 대표적인 사람이 호공. 한편 알영부인계룡에게서 태어났다든가, 농잠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알영부인은 외부 선진문명을 이식한 이주민 세력일 가능성도 크다.

즉위 8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온다. 이후 초기 왕 답게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폈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한다. 그런데 이 당시 '전국'이라도 해도 작아서 신라 영토는 경주 지역 정도였다. 한국 고대사에는 우산처럼 4-5세기까지도 일개 도시가 國을 칭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즉위 19년에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는데, 백제온조왕마한을 흡수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믿기 힘들다. 당장 변한은 가야로 변화하는데,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것은 수백년이나 뒤인 6세기다. 대체로 삼한이 이런저런 소국들을 정리하고 완전히 백제신라고구려 삼국으로 대체된 것은 좀 더 뒤의 일로 추정되므로 이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세력이 강한 왕이 패의 칭호를 얻은 것과 유사한 관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변한은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거의 다 걸쳐져 있다. 이런 큰 덩어리가 조그만 도시국가에 스스로 항복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설령 항복을 했다면 그 자리에 멀쩡히 가야가 들어선것 자체가 이상해진다.

즉위 21년에 금성(경주시)에 도성을 지었으며 즉위 30년엔 낙랑이 쳐들어왔지만 성 밖에 쌓여있는 노적가리를 보고 이 곳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의가 있는 나라다.라는 평을 내리고 스스로 물러갔다(!) 믿기 힘든 기록이다. 남의 나라 수도까지 쳐들어가서 노적가리 쌓인 거 보고 돌아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로 보이지만 일단 당시 신라는 매우 조그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축성이 되어 있는 상태이며, 낙랑은 원정군이고,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 왔는데 성이 버티고 있다. 이걸 설사 쳐서 떨어트린다한들 정치가 어지럽다면 모를까 통치가 잘 되고 있고 민심을 얻고 있다면 당시 낙랑의 국력으로 경주를 함락시켜도 영토로서 유지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성을 떨어트려서 약탈을 해도 지역사회의 민심이나 공성전의 시간과 수고와 물자도 생각해야 하고.... 뭣보다 공성에 실패했다면 떨어진 사기와 축소된 세력과 쌓인 피로도를 안고 다시 백두대간을 넘고 넘으면서 퇴각하는 건 꽤 두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왜인들도 변경에 쳐들어왔다가 박혁거세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 버렸다(...)

즉위 38년에 마한왕과 신라 호공의 말다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러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마한: 신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은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게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인가?

호공 : 우리나라는 두 성인(박혁거세, 알영부인)이 나라를 세운 후, 인재가 넘치고 천시가 고르며, 창고가 가득 찼고, 백성이 어지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들까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신하를 보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협박하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에 마한왕이 참하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은 살아서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새로이 부상함과 더불어 삼한의 왕초노릇을 하던 마한도 더이상 신라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호공은 본래 일본인으로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그렇게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으로 보아 호공은 술꾼이었고, 술꾼답게 호기는 있었지만 지혜는 없었는지 나중에 석탈해에게 집을 빼앗긴다[3]

4 그 외

초기의 신라 땅은 기록상 자연재해가 꽤나 많은 편인데, 이 시기에는 기록상 자연재해도 딱히 없다. 바로 다음 대인 남해 차차웅 때만 해도 자연재해 기록이 제법 많다. 사로국이 위치한 경주평야 자체가 영남지방에서 독보적으로 넓은 평야지대로, 지금도 경상남북도 전체 생산량의 7%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주변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기준으로 경주 근처에서 경주보다 더 농사지을 평야가 넓고 비옥한 김해시, 강서구(부산), 울산광역시 등은 고대에는 대부분이 바다였다.

한편 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은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신라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인 박특이 개국공신이었다면 박특은 기원전 57년 이전에 최소 10대 초반에서 20대가 된다는 얘기가 된다. 박혁거세 역시 기원전 69년생이 아니라 신라 건국 당시 30,40대의 나이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알영부인은 기원전 53년생으로 그의 생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알영도 나이를 속였거나

한가지 가능성은 기원전 57년이나 그 전해에 남해 차차웅 박유와 청평군 박특 형제가 태어났다는 추론을 해볼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박혁거세는 개국공신들을 책봉할때 자신의 어린 두 아들 역시 덤으로 개국공신에 책봉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아마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심지어 인정 때문에 마한(현 충청도 - 전라도 일대)왕이 죽었음에도[4] 병합하지 않고 조문을 보냈고, 그 이후 쇠퇴해진 마한은 온조가 병합했다는 구절도 있다. 바로 그런 먼치킨적인 면모 때문에 오히려 이런 기록들이 대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자녀로는 장남 남해 차차웅, 개국공신으로 청평군에 추증된 박특(朴忒), 왕자 박민(朴忞) 등 3남과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처로 하가한 공주 박씨, 신라 시조묘의 제사를 총괄한 신라의 첫 여성 제사장인 대신녀 아로공주 등 2녀가 존재한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1.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가 기록상 건국연도는 가장 빠르고, 즉위한 57년은 갑자년이라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 백제 보다 빠른 갑자년으로 조작했다는 설이 제기된다. 다만 고조선 멸망 이후 유민들을 받아들였기에 빨리 건국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존재하며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박씨 집단이 이런 외래 이주 집단이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구려는 부여에서 분리독립 했기 때문에 부여의 건국연도를 추정하면 신라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2. 삼국사기의 연도를 일단 믿는다면 박혁거세 동시대의 중국은 전한 말기로 슬슬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었으니 객관적으로도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
  3. 그래도 이후 호공과 협력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4. 이전에 자기가 보낸 사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