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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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南京大學校
Nanjing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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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론 國立南京大學(국립남경대학)이라 하며 줄여서 난다(南大)라고 한다.[1] 일본에서 도쿄대학(東京大学)을 토다이(東大)로 줄여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홍콩[2]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칭화대학(淸華大學), 푸단대학(復旦大學), 상하이자오퉁대학, 런민대학(人民大學)과 더불어 중국 본토 최고의 대학이다.그러나 한국유학생 대기업 취업률은 북칭복인이 제일 높고 나머진 처참하다

1 역사

일반적으로 남경대학의 시작은 삼강사범학당(三江師范學堂)이 세워진 1902년을 시작으로 잡는다. 중국의 대학이 대체적으로 역사가 좀 복잡한 편이긴 하지만 남경대학은 그 중에서도 특히 복잡한 편이다. 1919년 5.4운동에 재학생들이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중국에서 첫 번째로 여학생을 받아들여 남녀평등화를 추구했다.

삼강사범학당은 1902년에 만들어졌고 1905년 양강사범학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1914년에는 남경고등사범학교로 고쳤고 1920년에는 국립동남대학으로 바뀌었다. 1927년 국민당정부가 세워지자 제4 중산대학이란 이름이 되었고 1928년에는 강소대학으로, 같은 해 다시 중앙대학(中央大學)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중화민국의 최고 학부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캠퍼스를 중화민국에 의해 충칭으로 임시로 옮겼고, 1945년에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중국이 다시 평화를 되찾으면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고 당시 단과대학은 다섯 개로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의대, 공대였다. 학생수는 2천명 규모였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남경을 접수하자 이름을 국립남경대학으로 바꾸었다. 1952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식의 대학개편이 단행되면서 금릉대학[3]과 합쳐지면서 현재의 남경대학이 되었다. 한편 중화민국의 중앙대학은 1962년 타오위안현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재대복교).

2 캠퍼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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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황

주로 이과 계열 위주로 발달했다. 특히 물리학과는 베이징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수준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자연계가 하도 탈탈 털려서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도층엔 남대 출신보단 푸단대학 출신이 더 많다. 현재 교직원 규모는 4,206명이며 학부생은 15,128명, 대학원 이상은 15,119명에 이른다. 중국의 수능인 가오카오(高考)는 거의 1천만명이 보는 시험인데 남대에 들어오는 사람은 1년에 5천명이 안 된다. 엄청난 엘리트들인 셈. 다만 중국의 경우 지역균형선발처럼 각 마다 남대에 입학할 인원이 쿼터가 있어 제한된다. 교환학생이나 유학생 규모는 약 2천명 수준이다.

4 동문

  • 여운형(독립운동가)
  • 궈진룽(현 베이징시 당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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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수진/직원

  • 장개석 - 1943~1944년에 교장(당시 국립중앙대학)을 겸직했다.
  1. 일부는 난다(南大)가 상하이대학의 약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난징대학의 약자가 맞다.
  2. 보통 아시아 대학 순위에서 1위는 홍콩대학홍콩과학기술대학,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난징대학, 도쿄대학, 싱가포르대학 등이 번갈아 한다.
  3. 금릉대학은 1888년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