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황후

1 당중종황후

韋皇后
660~710

1.1 개요

의덕태자(이중윤, 당중종의 차남), 당상제(이중무, 당중종의 4남이자 막내아들)[1], 장녕공주(당중종의 4녀), 영태공주(이선혜, 당중종의 7녀) 안락공주(이과아, 당중종의 8녀이자 막내딸)의 어머니다. 다만 폐위되어 폐후 내지 서인으로 불려서 시호가 없고 보통은 그냥 위황후로 불린다.

정치적 센스는 없으면서 시어머니의 흉내를 내어 황제가 되려 하다가 시망하고 인생퇴갤한 인물이다.

1.2 로또맞은 인생과 초고속 광탈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궁녀로 들어와 당시 영왕(英王)이었던 중종 이현의 총애를 받아 그의 후궁이 되었다. 당시 이현의 왕비인 조씨가 시어머니인 측천무후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혀 굶어죽자, 그 후임으로 영왕비가 되었다. 그 후로 680년에 남편이 황태자가 되자 황태자비, 그리고 683년 당고종이 죽고 중종이 황위에 오르자 황후가 된다. 그러나...

위씨는 중종에게 자신의 친정 가문을 좀 일으켜 세워 달라고 시덥잖은 검열삭제와 갖은 아양을 열심히 떨었다. 중종은 이에 위씨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참군(종8품)에서 예주자사(정4품)로 승진시켰으나, 계속된 위씨의 개수작으로 결국 시중(정2품)에 내정했다.

아무 공도 없이 단지 황후의 아버지란 이유로 초고속으로 재상에 앉히는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황제가 강행하자 다른 재상들과 대신들은 벌떼 같이 일어나 중종에게 따지지만 중종은 이러한 명언으로 재상들을 데꿀멍시켰다.
현대판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의 영부인이 실력검증이 안된 8급 공무원의 친척을 차관급이나 부총리로 승진해달라고 인사청탁을 하는 격이다.

 
"짐이 천하를 위현정에게 준다 하더라도 불가하다 할 건가? 시중이란 자리가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我就算把整個天下讓給韋玄貞,又有何不可?!難道就稀罕一個侍中的職位?!」

내버려뒀다면 당나라국가 막장 테크로 갈 기세였으나, 다행히도(?) 황태후로서 실권을 갖고 있던 측천무후가 이 정신 나간 며느리와 얼뜨기 아들의 미친 짓을 두고 보고 있지는 않았다.

무태후 마마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중종의 황관과 곤룡포, 신발, 옥새 등을 다 빼앗은 다음 여릉군왕으로 강등시키고 옥좌에서 끌어내렸으며 위황후 역시 여릉왕비로 내쳐 방주로 유배보냈다. 친정 일으켜 보겠다고 남편을 꼬드긴 결과는 결국 폐위였으니, 위씨 스스로 아무 생각 없이 바보짓을 하다가 자신과 지 남편의 신세를 망친 것이다. 우리 아들과 며느리가 정신이 나갔어요. 위씨는 그 검열삭제의 결과로 유배 가는 도중 안락공주를 낳았는데, 비단보자기가 없어서 낡은 천으로 아이를 감쌌다고 한다.

15년 동안의 방주 생활 동안 위씨는 남편을 세뇌시킨다. 언젠가 돌아가면 시어머니와 똑같이 천하를 호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 일화로는 어머니 측천무후의 위세에 눌리고 인생퇴갤했다 생각하는 중종이 자살을 시도하자 위씨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 벌써 죽어버리게, 이 루저야?"라고 하자 중종이 칼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이 덕분에 중종은 더욱 더 위씨를 사랑하게 되었고 크게 의지하면서 세뇌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종은 점점 멍청해지고 무능해졌고, 마누라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궁녀 때 궁중에서 시아버지를 철저히 주무르던 시어머니를 보며, 위황후는 고종과 다를 바 없던 중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측천무후는 690년 당나라를 없애버리고 나라를 세워 측천황제로 즉위했다.

한편 딸에게 이용당하다가 자신의 인생도 퇴갤된 위현정은 유배지에서 낙심하다가 죽었다. 이후 산적 두목이 위씨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위씨와 위씨의 어머니 최씨는 강력히 반대하였고, 두목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위씨의 오빠 4명을 밤중에 습격해서 암살해버렸다.

1.3 재기, 막장, 그리고 간통

당시 당나라에서 이름만 바꿨을 뿐인 주나라는 성신황제(측천무후)가 다스리고 전 황제인 이단, 즉 예종이 황태자로 격하되어 있었으나 어머니인 황제가 워낙 경계하느라 동궁에 쳐박혀 있었다. 더군다나 황태자 자리를 놓고 벌인 조카 무승사와 무삼사 간의 다툼이 심화되자, 능력도 없이 권력만 추구하는 바보 둘의 싸움에 질린 황제는 여릉왕, 즉 중종 일가를 불러들이고 699년 그를 다시 태자에 삼고 예종 이단은 상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위씨의 로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씨는 시누이인 태평공주에게 유배를 풀어달라면서 편지와 패물 등을 보냈고, 태평공주는 당시 최고의 재상 적인걸과 합심하여 중종 가족을 유배에서 풀어달라 청하자 황제가 응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태자비에 다시 오른 위씨는 이제 다시는 폐위되지 않으리라 하며 정계 쪽의 실력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시어머니인 황제에겐 태자 좀 잘 봐달라며 립서비스까지 부탁한다. 이 때 자신의 딸들을 각기 무승사와 무삼사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냈다. 특히 여기서부터 무삼사랑 친해져서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705년 황제가 늙자 일부 구대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녀를 퇴위시켰다. 무후는 얼마 안 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주니 중종이 다시 복위하고, 얼마 안 가 무후는 사망했다. 다시 황후로 복귀한 위씨는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상태으며 이 상황에서 아주 제2의 측천무후가 되겠다며 수렴을 내리고 정사를 들었지만 여자가 싫어 중종을 앉힌 구대신들은 진저리를 쳤다. 대신들은 "여자가 한 번 나라 다스렸으면 되지, 그보다도 못한 여자가 다시 한 번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정변을 일으키나 무삼사의 도움으로 손쉽게 제압하고 대신들을 숙청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자신의 아버지 위현정을 상낙군왕에 추존하고 어머니 역시 상낙왕비에 추존하는 등 시어머니 측천무후가 하던 짓을 그대로 오마쥬하면서 한미한 자신의 친정을 명문가로 위장하여 있는대로 과시했다.

이제 대놓고 무삼사와 간통질을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는 위씨와 무삼사가 검열삭제 직전까지 갈 때 중종이 중궁전으로 온다고 하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바둑 두는 척하면서 몰래 손을 만지며 정분을 나눴다고 한다. 시대를 앞선 페티쉬

이와 더불어 정부 무삼사의 며느리가 된 딸 안락공주와 은밀히 도모하여 안락공주황태녀로 만들려고 하나, 중종의 엄청난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락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으며, 위씨 또한 능력 있는(?) 지 딸을 무시하고 남존여비 꼴통사상에 빠져 있다 하여 역시 남편을 증오하면서 오히려 무삼사랑 더 정분이 났다. 참고로 안락공주는 남편인 무삼사의 장남이 맘에 안 들자 그 남동생인 무삼사의 차남과도 간통질을 벌였다. 본격 형제덮밥이자 그 어미에 그 딸.

이후에 무삼사가 간통을 벌이는 것을 그리 좋지 않게 여겼던 황태자 이중준은 장군들과 짜고 무삼사를 처단한다. 하지만 위씨는 중종에게 태자가 함부로 국가의 재상(?)을 죽였으니 이 역시 죽여야 한다며 결국 태자 이중준도 죽여버렸다.

1.4 안습한 최후

그 후 종친들과 대신들의 요청으로 위씨의 정치간섭을 막은 중종이 위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 하지 않자, 위씨는 결국 지 딸 안락공주와 야합빅딜을 하여 자기는 황제, 딸은 황태녀가 되기로 하고 중종에게 독이 든 떡을 먹여 독살했다.[2] 그러나 독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후술하겠다.

이후엔 직접 황위에 오르려 하나 황제인 측천무후가 쿠데타로 물러난 선례도 있고 직접 황위에 오르기에는 시기상조란 판단도 있어서, 맘을 바꾸고 중종의 후궁 소생인 이중무를 꼭두각시로 황위에 앉히고 황태후 노릇을 하려 했지만 그것을 두고 볼 정적들이 아니었다. 이에 위황후는 정적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숙 당예종(당시엔 안국상황)과 시누이 태평공주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눈치챈 당예종의 아들 이융기(후의 당현종)는 역으로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 때 위씨를 치는 명분이 위씨가 선황을 시해하고 자신의 친족을 이용하여 금군을 장악하고 종친들을 몰아내 황위에 즉위하려 한다였다고.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전개된 까닭에 안락공주는 눈썹을 그리고 있다가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반란군인 줄도 모르고 눈썹 비뚤어진다고 군인들에게 호통을 치다가 목이 잘리는 끔살을 당했는데,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눈썹 똑바로 그린 얼굴로 갔다'고 표현했다. 모녀의 시체는 당연히 갈기갈기 찢기고(...) 황후공주 자리에서 모두 폐위당해 대역무도죄인, 패역서인이라 불리며 당나라 내내 조롱받았다. 또 상관완아, 장녕공주도 이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했다. 다만 상관완아는 쿠데타 세력의 궁궐 내 협력자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쿠데타측 군인이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죽여버려서 제일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다.

1.5 평가

위씨는 시어머니 측천무후에 비해서 전반적인 면에서 전혀 뛰어나거나 동등하지 않았다. 어느 설을 채택하든 결국 살해당한 역사의 패자라는 점에서 정국 장악력은 결코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센스나 처세술이 전혀 없는 등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데 비해서 욕망만 컸던 셈이다.

측천무후는 항목에 설명돼있듯이 악행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3] 훗날 손자 당현종이 이룩한 "개원의 치" 라는 당나라 전성기의 토대를 지었다고 평가받을 만큼 정치력 자체는 발군 중의 발군으로 인정받을 만큼 능력이 출중했으나 위황후는 정치적 감각도 전혀 드러난 바 없다. 무엇보다 남편도 살아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간통을 펴면서 정적들의 반격 명분을 자발적으로 갖다 바치고 있었다.

사실 측천무후는 수많은 남첩을 두었지만 그것은 남편 당고종의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고종 생전시에는 신하들에게 성격은 좀 강해도 현명하고 믿을 만한 황후마마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손수 당고종의 병수발을 행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부인이라는 것을 수없이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황제의 부인인 황후이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여주었다. 측천무후가 고종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때고 자신의 생각대로 정치를 행한 것은 황제 즉위 후에도 몇 년이 지난 뒤로 통치기간 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그 시기에 이르러서도 정부(情夫)가 대놓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4] 그런데 위황후는 측천무후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말기 시절에야 조심스럽게 행한 짓들을 황후 위치에 있을 때부터 대놓고 행하는 무뇌아스러움을 보여줬다.

중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독살이 아닌 중풍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독살설은 후에 위황후, 안락공주 등을 처단하고 즉위한 당현종이 이들을 매도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라는 것이다. 당시 위황후나 안락공주가 딱히 중종을 죽일 현실적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구당서나 신당서 모두 떡을 먹여 중종을 시해했다고만 적혀있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허파에 바람든 치맛바람 아줌마로 그려놓았다. 뭐 위의 행적을 보면 틀린 묘사는 아닐지도......

2 한무제의 황후

본명은 위자부로 명장 위청이 그의 동생이다. 훗날 무고지화에 연루되어 폐위당하고 목매어 자살크리.
  1. 당중종의 후궁 소생이라고 한다.
  2. 중종도 안습이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의 문정왕후인종과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중종의 독살은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고, 인종의 독살은 야사에 불과하다는 점.
  3. 그녀가 행했다는 다수의 악행이 사료간의 검증교차가 안된다.
  4. 수당가화에 실린 일화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정부로 총애를 믿고 왕족들 앞에서도 거만하게 굴던 설회의(薛懷義)가 하루는 조정의 남문으로 들어오다 복야(僕射, 재상)인 소량사(蘇良嗣)와 마주치고도 인사도 안 하고 지나치자, 빡친 소량사가 "너 뭐하는 놈이야?"하고는 설회의를 잡아다 따귀를 쳤다. 설회의는 측천무후에게 달려가 울고불고 다 일러바쳤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그러게 다른 신하들 눈에 안 띄게 북문으로 들어오라니까, 왜 신하들도 많이 오가는 남문으로 들어와서 안 맞아도 될 매를 버냐?" 하면서 소량사를 벌하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