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협

Austro-Hungarian Compromise of 1867 (영어)
Ausgleich (독일어)
Kiegyezés (헝가리어)

1 개요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협상.이 협상의 결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사실상 독립해서 자치를 행사하게 되며,[1] 이중왕국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결과만 보고 이 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강제로 합병시킨줄 아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는데, 진실은 정 반대이다![2] 보통 독일어권에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k.u.k라는 약칭으로 부른다.[3] 동시기에 발생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인지도가 밀려서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는 등 이래저래 취급이 안습이다

2 역사

2.1 배경

16세기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된 독자적인 국가였다[4]. 하지만 헝가리는 1526년에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며 나라가 둘로 갈라져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 다른 하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두 나라는 헝가리의 영유권을 두고 수십년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와중에 오스만의 세력권 아래에 들었던 헝가리 중부와 동부 가운데 중부가 오스만의 직접 지배를 받는 지방행정구역이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이름이 바뀐 동헝가리의 공작 야노슈 지그몬드 자포야는 1570년에 헝가리 왕위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넘겼다. 이후 1683년부터 1699년까지 계속된 대(大)투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전체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5]. 이후 19세기가 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제국 재형성과 같은 역사적으로 큰 격변의 시기가 닥쳤지만 여전히 헝가리의 지위는 큰 변함이 없었다. 말하자면, 1867년의 대타협 이전에도 헝가리는 근대적 의미로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따위가 아니라, 엄연히 동군연합으로 합스부르크 군주를 헝가리 국왕으로 모실 뿐이지 헝가리 자체의 법률과 독립 된 귀족 의회 등을 모두 유지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은 새로 즉위 할 때 마다 신성 로마 황제로서 뿐만 아니라 헝가리 왕으로서의 즉위식 또한 따로 치러야 비로소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문제는 근대 이전에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중세의 정치적 봉건주의에 기반한 땜빵형 정부도 그럭저럭 먹혀 들어갔는데,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세계사를 뒤집은 폭풍이 중부 유럽에 다가 오면서 이러한 전통적 통치 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린 것이다.

2.2 탄생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는 모습의 목격과 프랑스 혁명이 남기고 간 씨앗이라고 할 만한 자유, 독립, 민족주의는 헝가리인들의 독립의지를 한껏 부풀게 만들었고 19세기 전반기 내내 헝가리인들은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시도한다. 번번이 진압돼서 문제였지. 특히나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봉기에 맞추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운동은 사실상 성공할 뻔 했으나....헝가리 독립이 성공할 경우 자국내의 소수민족들도 들고일어날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끝끝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헝가리의 독립운동에 크게 데인 오스트리아 당국은 가혹하게 헝가리를 탄압한다. 형식상으로는 헌법 등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를 아예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편입시켜버렸으며, 마치 일본의 1910년대 무단 통치처럼 헝가리 전역에 군사독재가 행해지면서 헝가리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독일어를 공용어로 선포하며 헝가리어를 탄압했다. 48년의 봉기에 자극 받은 빈의 합스부르크 중앙 정부가 지금까지 했던 것 처럼 동군연합에 기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러개 타이틀 중 동등한 하나의 국체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속국 처럼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강경책을 뒤엎은 것은 바로 7주 전쟁. 프로이센에게 참패하고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합스부르크는 제국을 전면 재편성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인들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한다.

2.3 채택

헝가리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 제안의 찬성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6]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페렌츠 데크는 이런 논란의 와중에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자치를 누리되, 외교 및 재정/군사 분야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공동으로 처리하자는 입장을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에는 오스트리아 지역이 더 산업화되고 부유했던지라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게 여전히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헝가리 영역에 거주하는 기타 슬라브 계열 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이렇게 양 민족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던지라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867년 5월 29일 독자적인 헝가리 의회가 황제에게 인준을 받고, 정식으로 헝가리 왕령 내의 입법, 사법권을 넘겨 받으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1867년의 대타협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합병도 아니고, 독립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 해 왔던 동군연합이라는 유럽의 정치적 봉건제의 유산을 근대적 방향으로 성문화 된 헌법적 원칙에 따라 재탄생 시킨 것에 가깝다.

3 이후

대타협의 결과로 헝가리의 주도 세력이었던 귀족층과 헝가리계 주민들은 실질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보다 큰 정치적 연합체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상당히 만족해 했으며, 이후 안정적인 번영의 길을 걷는 것 처럼 보였으나 이 뒤에는 헝가리인들 본인들도 간과한 큰 변수가 있었다. 이 시절 헝가리 왕국 자체가 오늘날의 헝가리가 아니라 다른 여러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의 영토까지 차지하며 이루어졌던만큼 헝가리 내부의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헝가리는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불만에 단호하게 강경책으로 대응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7]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질적인 외교권이 없었던 헝가리 왕국은 반 강제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따라 참전하게 되고 1918년 10월 31일 제국의 항복과 더불어 이 대타협도 무효화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헝가리 왕국도 산산이 조각났다.
  1. 외교, 재정, 군사권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주권국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헝가리 자체의 의회의 지도자가 헝가리를 다스리는 점에서 이미 뭐..
  2. 정확히는 말그대로 타협이지만.
  3. (오스트리아의)황제이자 (헝가리의)왕이라는 뜻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을 줄인 표현이다.
  4. 사실 이 문장은 어폐가 있는 게,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다만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의 권한이 약하고 제후의 힘이 강력했고, 16세기 중엽 당시 황제를 낸 합스부르크 황가는 본래 오스트리아 공작 가문이었다.
  5. 다만 주의할 것이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속한 한 지방으로 편입이 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황가의 영지에 헝가리가 추가된 것이다. 즉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별개의 영역으로, 둘 모두 똑같이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를 받는 영토가 된 것.
  6. 멀리 다른 나라를 볼 필요도 없이 조선에서 1920년대 자치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민족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다툼을 생각해보자.
  7.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 쪽은 은근히 자유주의적이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