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에서 넘어옴)

1 개요

1866년 6월에서 7월, 7주간에 걸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및 군소 독일 국가들이 참전한 전쟁.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대독일주의이냐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이냐의 주도권 다툼의 마지막 과정으로 최종적인 독일 통일을 위한 한 과정이었다. 뒤에 보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연장선상에 있는 예방전쟁의 성격을 띤다.

2 역사적 배경

독일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주도권 경쟁은 멀리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북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성장과 17세기 30년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황제가 북독일내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이후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대왕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본격화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남계 단절로 일시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잃자 북독일에서 성장한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점유하며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를 완전히 축출했고, 7년전쟁에선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의 프란츠 1세가 1757년 제국의회에서 평화유지 의무를 저버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제국전쟁을 선포하나 결과는 또 다시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황제와 합스부르크가문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손상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빈 회의에서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나란히 영토확장을 하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견제에만 치중하고 독일권내 역외 영토[1]를 전부 포기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실리를 챙기면서 향후 프로이센의 독일내 지분만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령 또는 프랑스 위성국령인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방을 얻었는데 작센에서 얻은 영토와 합쳐 북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프랑스령과 인접한 영토는 경제력이 높은데다 산업혁명시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농업중심의 도나우강 연안 영토를 지닌 오스트리아보다 경제력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일 관세동맹을 주도하며 소독일주의에 기반한 독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 독일 내 주도권 갈등

1795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랑스와 바젤 조약으로 강화를 하며 프랑스는 일찍 대프랑스 적대를 해소한 대가로 당시 황제국 오스트리아를 무시하고 마인(Main)강[2] 이북의 우위권을 인정해주었는데 이후 1807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다시 1815년 다시 열강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이 마인강을 경계로 하여 오스트리아에게 복수 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3.1 독일 관세 동맹

경제적으로 독일 통일의 여건은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주장한 관세동맹에서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국가의 많은 수입이 관세에서 창출 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채택되기 어려웠지만 1818년 프로이센 영토내에서 시작하여 1828년 프로이센 영향권의 군소제후국들과 시험적으로 시행하여 호평을 얻고 1834년 본격적으로 프로이센 경제권 주도하에 관세동맹이 결성되는데 초기 부정적인 독일 영방 국가들도 나중에는 늦게 참여한걸 땅을 치고 가입하려고 줄을 선다. 반면 농업중심으로 산업력이 뒤떨어진 오스트리아는 관세 수입을 포기 하기 어려웠고 뒤늦게서야 오스트리아 주도의 관세 협약을 주창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할 물건도 팔어먹을 상품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프로이센 눈치를 보며 가입하지 않아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에 극히 부정적인 남독일 국가들 조차 정치적으론 프로이센과 대립하며 경제적으론 예속된 처지라 민심과 반대로 프로이센에 주도권에 순응하게 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장기적으로 프로이센의 주도권은 관세동맹으로 이뤄 졌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프로이센은 관세동맹의 효력으로 독일내 영방들을 배제 혹은 가입으로 구스르거나 협박하며 영향력을 끼쳤고 독일 연방 가입국인 네덜란드[3]와도 간접적으로 관세동맹이 체결되고 독일내 산업혁명시기 경제성장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3.2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

1848년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었는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국가적 정책과 별개로 시민사회 내부에서 독일 내 단일국가 형성에 있어서 대독일주의냐 소독일주의냐의 극심한 갈등이 터져나왔다.
앞서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 위주,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위주로 설명하였는데 이 안에서도 더 자세히 살펴 보자면

  • 대독일주의 중에서도
    •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토를 모두 포함하자는 대독일
    •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토 중 헝가리등을 제외하고 독일연방내 속하는 지역만 통합하자는 대독일
    • 독일 연방내 오스트리아와 독일어권내 체코, 이탈리아등을 제외하자는 대독일
  • 소독일 중에서도
    • 프로이센 위주로 북독일, 오스트리아는 남독일에 주도권을 가지는 절충적 소독일주의
    •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에 주도권을 인정하나 나머지 독일영방 국가의 주권과 자치를 인정하는 방안
    •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소독일. 단, 오스트리아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견 등등.

대략 이러한 여러의견들이 나왔으며 여기에 독일연방내 여러국가들의 국가원수를 세습제로 하느니 선출제로 하느니 과격좌파의 공화제 주장까지 터져서 토론과 합의로는 절대로 불가능할 갈등이 터져나왔다.

3.3 덴마크 위기

1849년 독일 혁명시기 덴마크에서 독일 연방 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두 공국[4]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연방에 속한 두 공국을 당시 까지의 동군연합 형태가 아닌 덴마크 왕국에 합병하려 했는데 당연히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선 민족감정이 폭발하면서 연방내 두 강대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게 군사적 대응을 촉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아직 혁명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자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또한번 폭발할것을 우려 내키지는 않지만 덴마크에 무력 대응을 시도하게 되는데 영국과 러시아에서 크게 반발하며 나섰다. 결국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중재를 받아 후퇴하는데 민족감정이 일어난 국면이라 외국군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저벼렸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게된다.

사실 독일연방군의 전력은 덴마크군을 쳐바르기엔 충분한 전력이었고 실제로 그러했으나 영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로 알아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차 덴마크 위기는 1848년 혁명이 거의 진압되고 영국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현 상황 유지라는 조건하에 흐지부지 넘어간다.

1864년 덴마크 위기는 15년전 덴마크 왕실의 상속문제가 겹쳐 또 한번 퐈이어가 되는데 이번에는 영국과 러시아에선 별 관심이 없어지기도 했고 또 한번 민족감정이 들 끓어올라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독일 연방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합병하라며 국민적 감정이 일어났다. 사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덴마크 왕실의 상속문제따위는 전혀 알바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혁명분위기도 아니었고 외국에는 국민적 열망에 따라 어쩔수 없는데요 하면서 덴마크를 털기 시작하는데 오스트리아는 이번 계기로 독일연방 의장국으로 독일연방내 영향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고 프로이센은 자국의 영토와 가까운 북해 연안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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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에 있었던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덴마크에 압승을 거두고 두 공국을 획득했다. 이후 1865년 양국은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가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하기로 하는 가슈타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사람 욕심엔 끝이 없는 법. 양국은 나머지 1개 공국마저 차지하기 위해 첨예하게 갈등관계를 빚었고, 결국 유틀란드 반도 남단 지역의 소국에 대한 영유권때문에 유럽의 두 강대국이 전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는 희대의 낚시꾼이 각본을 썼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야기고 낚시일 뿐이었다. 후대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새 독일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다.

따라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서부터 이미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준비한 대규모 떡밥이라는 말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아직 논란이 많다. 가슈타인 조약의 핵심이자 보-오 양국 분쟁의 씨가 되었던 땅 나눠먹기 부분에 관해, 훗날 비스마르크 본인은 "그게 다 나의 계획대로였지 ㅋㅋ"라고 자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조약의 그런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제안한 것이어서, 전부 비스마르크의 계산대로였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어디까지 비스마르크의 계산이었고 어디까지가 우연하게 진행된 정치적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비스마르크의 발언이 실제로는 자신의 역할을 일부러 과대평가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로서는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걸림돌은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라는 강대국이 독일 연방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프로이센 주도하의 독일 통일을 막는 최후의 장벽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무력으로 허물기로 결심했고, 개전의 명분으로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영유권을 이용했던 것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독일 연방의회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연방 개편안을 제출했고, 이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가 결국 영유권 분쟁과 맞물려 1866년 6월 17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고 남독일 연방 국가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4 진행양상

먼저 선전포고했음에도 오스트리아는 고전해야 했다.[5]
선빵의 이점 따위는 없다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프로이센군은 철도[6]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전선으로 전개, 오스트리아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병력 동원에도 시간이 걸리고 철도 총연장길이도 형편없이 부족해 병력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셔틀이 수송을 못하고 있죠! 역러시 당하는 거죠! 느려서 거기에다 다민족 국가의 고질병인 내부민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쪽에서 느닷없이 이탈리아가 선전포고까지 해오면서 병력마저 분산되었다. 이탈리아의 선전포고는 사실 몇 달 전에 이미 비스마르크와 약속된 것으로,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맺고 대신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7]

개전 초기 작은 전투에서 연달아 패하고 국경에서 밀려난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과 연합하여 20만의 대군으로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레츠에서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7월 3일,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직접 지휘한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전사자가 2,000명도 채 안되는데 비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약 2만명에 달하는 전사 및 실종자에 비슷한 수의 포로까지 발생하며 결전에서 참패,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 전투는 전장식 소총을 이용한 오스트리아군과 후장식 소총으로[8] 장비를 교체한 프로이센군의 대결로 유명하다. 참고로 후장식이 전장식보다 더 좋은 점은 일단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장점은 뒤에서 장전하므로 누워서 장전 및 사격이 가능, 즉 엄폐하면서 사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전장식에 비해 무려 6배(!)나 빠른 연사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결국 보병간의 사격전에서는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9][10]

그런데 사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가 이길 뻔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베네데크 장군은 전략적 능력은 떨어져도 전술적 능력은 훌륭했고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지역에 우주방어선을 치고 기다렸다. 그리고 전투 초반 프로이센군이 여기에 닥돌했고 초반에 엄청 고전했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담배 야사[11]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이기거나, 프로이센이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역 방어 임무를 맡은 오스트리아의 귀족출신 지휘관 두 명이 전공도 못세우고 기다리기 짜증난다고 돌격해버렸다! 바로 이 방어선이 뚫려버린 결과로 패배한 것이다. 참고로 소총의 경우 프로이센이 확실히 우월했지만 포병에서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 뒤떨어졌고 이것도 초반 고전의 원인이 됐다. 따라서 종합하자면 이 전투에 한해서는 프로이센군이 우월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군이 삽질해서 스스로 자폭한 것이 패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선 나름대로 선전하며 방어전을 수행했고, 특히 리사 해전에선 양적 열세인 해군력으로 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다. 하지만 '역시 이탈리아군은 어쩔수 없다' 라고 치부하기도 곤란한게,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를 이룬지 10년도 안된 신생국이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내륙강국이라곤 하지만 수백년 동안 해군력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고 따라서 그 질이 상당했다. 그 우세를 잘 이용해서 충각 돌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주적인 프로이센군이 파죽지세로 체코를 석권할 기세를 보이자 7월 26일, 황급히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7주만의 일이었다.

5 결과

  • 독일 연방 해체 북독일 연방 승인

오스트리아가 의장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며 30여개 독일계 국가들의 연맹으로 결성된 독일 연방은 해체하고,전쟁중 프로이센이 점령한 영토는 병합하고, 북독일의 모든 제후국들을 강제로 가입 회원으로 북독일 연방을 승인 받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전쟁배상금 4천만탈러 부과받는다.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해체

이탈리아는 전쟁에선 이겼지만 전투에선 쳐발렸기 때문에 발언권이 매우 적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은 이미 1861년에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은 획득했고, 애초에 전쟁 발발시 오스트리아에서 중립을 대가로 베네치아 지역 할양을 제시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새로 얻은건 없다. 오히려 오스트리아에서 북이탈리아 지역 4각요새(만토바,페스키라 델가르다,베로나,레냐고) 는 너희들에게 공짜로 못 주니 돈 주고 사든지 알아서 해라...고 해서 이탈리아는 매우 난처한 처지였다. 결국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령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부채를 상당부분 인수하는 조건으로 요새와 영토를 인수했고 영토도 오스트리아는 전투에서 이긴 자존심상 프랑스를 거쳐 국민투표를 한 후 이탈리아에 귀속되는 절차를 거쳤다.. 안습

  • 남독일 연방 결성 가능

프로이센이 신속하게 승리하자 프랑스에서 매우 당황하여 개입한 끝에 양보받은 사항이 프로이센의 작센 왕국 합병 저지였으며 또한 남독일 4개국의 연방 결성을 제시했는데 남독일의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뷔르템베르크는 프로이센도 짜증나게 싫지만, 남독일연방이 결성되면 바이에른이 왕초노릇 할 것도 고까웠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의 구상과 달리 이 제안을 거부했다.

쾨니히그라츠(사도바) 전투로 결정적인 승리는 얻었지만 프로이센군은 여기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모라비아 니콜스부르크에서 회담을 진행중이었는데 회담과 별도로 점령전으로 나섰다. 북독일 거의 전역을 석권하고 바덴과 뷔르템부르크, 바이에른 영토 깊숙히 진군했고, 오스트리아 전선에선 보헤미아를 석권하고 빈 60킬로 근방의 브라티슬라바까지 진격했다.

프로이센 군부는 영토할양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고, 빈에 입성하는것은 단순 영토할양의 대가르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을 일소하여 재기불능으로 만들려는 욕심도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어차피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축출한 마당에 프로이센의 영토적 이익은 독일 연방 제후국에게 영토적 할양을 더 부과하는것이 옳고 빈 근처에서 멈추면 고마워 할것(?)이다라며 말렸다.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여야 된다고... 주장했으나[12] 왕세자 프리드리히 3세 또한 비스마르크 편을 들자 뜻을 꺾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었다.

사실 쾨니히그라츠 전투 이후 니콜스부르크에서 평화회담으로 전쟁 종료전 조건은 이미 거의 확정이 되었지만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국내 여론은 똘똘 뭉쳐 비스마르크를 멍청하다고 비난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늘상 하던데로 이런 반발들은 국왕의 강력한 신임덕에 무시했고, 현실정치를 들어서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우호적인 동맹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더 큰 강적을 격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때는 이번에 못 턴 수도를 털 수 있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보불전쟁의 승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치룬 첫 본격 전쟁이었고 이 전쟁의 경험을 철저히 연구했다. 포병 부족으로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것, 실제 철도 운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등을 연구해 프로이센군의 전투력을 더 강력하게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육군이라는 강적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 프랑스군도 이 전쟁을 보고 더 좋은 소총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신무기 도입 외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13]

과거 영국과 100년 넘게 동군연합을 이루었다가 얼마 전부터 영국과 별도의 국왕을 두게 된 하노버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다가 망했다.[14][15] 그 외에도 헤센-카셀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나사우, 프랑크푸르트를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시키는데 성공했다. 단, 작센은 프랑스의 견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식으로 만족해야했다.
  1. 라인강변 합스부르크 가문 월경지 영토들로 13세기 스위스에 집착한 이유도 오스트리아와 경제력이 높은 라인강변 영토들을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본토와 너무 멀기 때문에 심심하면 루이 14세에 털렸고 요제프 2세 때부터 라인강변 영토는 포기하고 본토와 가까운곳에서 확장에 치중한다.
  2. 라인강의 지류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인강과 합류한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한반도 대운하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은 물론 유럽내 양대 하천인 라인강과 도나우(다뉴브)강을 연결하는 라인-마인-도나우(RMD) 운하가 개통되어 있기도 하고 현재도 남북 독일의 지리적 경계점
  3. 룩셈부르크 뿐만 아니라 현 마스트리히트 지방인 림부르크도 포함되었다.
  4. 홀슈타인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
  5.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크게 3가지 면에서 유리했었다.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를 타고 북쪽으로 살짝막 움직였어도 바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 닿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남독일 주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기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들의 위치선정까지 사실상 완벽했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두 동강 나있는 영토(사이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다른 주들이 껴 있음)가 있을 뿐더러 주변국들을 전쟁에서 발을 못들이게 하는데도 상당히 많은 노고를 겪었다.후에 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이점들을 가진 오스트리아는 끝없이 고통 받는오랜시간 동안 고전하고 비참히 패배한다.
  6.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의 전쟁 전의 신속한 판단들 덕분에 철도 5개를 완공시켜 엄청난 통신과 수송 효율성을 보여준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쟁도중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사용 할 수 있었던 철도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7.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를 자기 편으로 섭외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를 전쟁에 발을 못 들이게끔 얘기를 끝내놓았었다. 당시 폴란드(1차 대전 전까지 러시아, 오스트리아(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후에 독일 제국)이 나눠서 통치함)에서 활발해지는 독립 활동 문제로(바르샤바에서 유난히 심했음) 골머리를 썩고 있던 러시아에게 '프로이센이 도움을 줄 터이니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랑 전쟁을 하면 그냥 아무편도 들어주지 말아라'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크림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뒷통수를 맞은 러시아는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다. 프랑스도 강한 독일을 원하지 않는 이웃 중 하나였는데 나폴레옹 3세는 라인강 동부의 영토를 프랑스가 합병하는 걸 프로이센이 묵인한다는 조건 하에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동의하였다. 어차피 5년 뒤에 다 뺏기는데 뭘...
  8. 프로이센군이 이용한 드라이제 니들건이 대표적이다.
  9. 하나 덧붙이자면 조준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장식 소총은 발포 후 장전 문제로 조준점을 다시 세팅해야 하나 총을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던 후장식 소총은 비교적 오래 조준점이 유지가 되었다.
  10.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아주 압도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전장식 제식소총은 프로이센군에 비해 후진적이었던 기술이었지만, 아직 원시적 형태에 불과했던 니들건보다는 유효 사정거리가 길었고, 덕분에 프로이센군이 접근하기 전에 포화를 퍼부어 초반에는 선전할 수 있었다.
  11. 전투가 한창 질행될 당시 몰트케의 지휘부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가 방문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에게 담배갑을 건네며 한 대 피울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이 담배갑에는 썩어서 맛이 간 담배와 정상적인 담배가 있었다. 몰트케는 이 중 정상인 담배를 골라서 피우며 상황을 설명하였고,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이 전투는 이겼으니 돌아가시죠"라고 말했다. 격렬한 전투로 아군이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인 몰트케가 맛난 담배를 골라서 피울 정도로 침착하게 지휘하고 있으니 승산이 크다고 비스마르크가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12. 1814년 나폴레옹 전쟁시 추억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평생 공유했다고한다... 보불전쟁시에도 이러한 승전퍼레이드 요구를 요구했고 비스마르크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관철시켰다.
  13. 샤스포에서 많이 해결되긴 하지만 당시의 후장식 소총은 아직 문제가 많은 물건이었고,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의 승리 원인은 무기보다는 그 체계에서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구시대적 전략체계로 대응하다 패배한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14. 옆나라 작센은 그래도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왕가가 사라지고 멸망하는 건 피했지만 하노버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완전히 합병당했다. 안습... 그 결과 왕족들은 오스트리아나 친척 동네인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15. 이때 하노버의 왕실 금고는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북독일 연방이 고스란히 챙겼고 그 돈은 보불전쟁바이에른같은 남부 국가를 구워삼는데 쓰이는 등, 잘 쓰고 다녔다. 또 이 돈으로 지은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