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기. 러시아 제국처럼 국기와 어기가 같다.

1 개요

Habsburg Haus

라틴어 :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번역 :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1]

  • 신성로마제국 황제위, 독일 왕위, 로마 왕위(1273~1806)
  • 오스트리아 공위(1278~1453)
  • 포르투갈 왕위(1581~1640)
  • 스페인 왕위(1516~1700)
  • 트란실바니아 대공위(1690~1867)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위(1815~1866)
  • 일리리아 왕위(1816~1849)
  • 슈타이어마르크 공위(1278~1918)
  • 카린티아 공위(1335~1918)
  • 카르니올라 공위(1364~1918)
  • 크라인 공위(1364~1918)
  • 갈리시아와 로도메리아 왕위(1772~1918)
  • 달마티아 왕위(1815~1918)
  • 크로아티아 왕위(1526~1918)
  • 오스트리아 대공위(1453~1918)
  • 헝가리 왕위(1526~1918)
  • 오스트리아 황제위(1804~1918)


이 어마어마한 작위들을 보라!

현재까지도 존속중인 유럽 최고 네임드 가문. 특히 13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주로 중앙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으로 유명하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 크리 탓에 현재의 실권은 경쟁 가문이자 그렇게 깔보던 룩셈부르크의 부르봉 가문만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워낙 과거사가 눈부시기 때문에 여전히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가문이다.

2 역사

2.1 스위스 백작에서 제국의 주인으로

이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언저리에 웅거하며 지방 왕초 노릇을 하던 듣보잡 가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11세기 스위스 아르가우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아 백작 노릇을 하면서부터 차츰 유력 가문으로 부상한다.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이름이 좀 난 몇몇 유력 가문들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왕초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적절하게 찾아온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시대 덕분이었다. 왕계가 끊어진 제국의 왕좌를 얻고자 야심가들이 모여들었고, 이 때부터 선제후로 황제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제후들은 지나치게 강한 세력가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한미한 가문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 때 포착된 것이 바로 듣보잡 가문 합스부르크였다.

생각지도 않게 스위스 백작에서 독일 왕으로 승급(?)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는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았다. 이 때부터 합스부르크는 거점을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동했으며, 이 과정에서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의 신경이 흐려진 것을 틈타 4개 주를 중심으로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투쟁을 벌이며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는 결국 고향에서 쫓겨나 오스트리아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으나,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전쟁이 끝나고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터울이 진다는 정도.

2.2 권토중래

잠깐 제위를 차지했던 루돌프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앞마당 멀티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 그것을 잘 활용한 편에 속한다. 비록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가 암살당해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의 합스부르크는 더욱 탄탄한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14~15세기 사이에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하는 동안 합스부르크는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케른텐 주와 클라인 주가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떨어짐으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합스부르크는 더 이상 과거의 산골짜기 듣보잡이 아닌, 무시무시한 제후 세력으로 급성장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기저기에 씨를 뿌리던 143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겸 헝가리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가 모든 왕위를 계승하였다. 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여하튼 1438년 알브레히트 2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의 전성시대가 개막했다.

2.3 최전성기

합스부르크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던 보헤미아헝가리라는 두 강국의 왕관을 손에 넣어 가문의 영향력 하에 들이기 시작했고,[2] 보헤미아 왕의 황제 선출권을 손에 쥔 합스부르크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선출을 가장한 세습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 1개 가문이 유럽 중부의 패권을 획득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가장 경계한 것은 서쪽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였다. 15세기까지의 발루아 왕가는 합스부르크가 독일에서 제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동안 섬나라 영국과의 백년전쟁으로 신경을 돌릴 겨를이 없었고, 전쟁이 끝난 뒤엔 자기 제후들을 제압하고 특히 동북쪽 부르고뉴 공국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급급했다.

프랑스가 피를 토하는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손에 넣은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대공이었던 용담공 카를이 외동딸 마리를 남긴 채 로렌에서 전사하고, 대 끊긴 부르고뉴에 프랑스가 손을 뻗자 부친의 급사로 인해 여공작이 된 마리가 이에 대항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해버렸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특히 세금 뜯는 기계 플랑드르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하에 넣으면서 합스부르크와 발루아는 유럽의 패권을 양분하는 최대의 라이벌 가문이 된다.

이 두 가문의 배틀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부르고뉴 여공작 마리의 남편)가 즉위하면서부터다.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녀 안느와의 정략 결혼을 추진해 다시 발루아 가문에게 엿을 먹일 시도를 하는 등[3]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

영민한 그는 전통적인 결혼 동맹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알토란 영지를 다스리는 유력 가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특히 부르고뉴의 마리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인 필립을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결혼시키고, 딸인 마가레테는 왕세자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했는데, 장미전쟁에서 요크파가 승리한 이후 반 프랑스 정책을 펼쳐오던 영국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프랑스가 전 유럽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꼴이었다.

당시(15세기 후반) 발루아 왕가의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핏줄을 통해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나폴리 왕국을 침공했는데, 이미 전 유럽에서 고립되어 돈 빌릴 곳조차도 없어서 군자금 융통도 못하는 상황이라 포르노보 전투에서 교황, 베네치아, 스위스, 밀라노, 만토바,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의해 복날 개패듯 다굴을 쳐맞고 처참한 꼴로 이탈리아에서 쫓겨나갔다.[4] 불행 중 다행히 훗날 기사왕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1세가 이제 막 합스부르크의 제동에서 벗어나 기를 좀 펴보려던 스위스군을 격파하면서 이탈리아 패권을 다시 탈환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나…….

발루아의 굴욕과 합스부르크의 발흥은 이조차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덕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릴 자격을 갖고 있었고, 그 자신도 대단히 영민한 군주였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는 최전성기를 맞는다.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스페인은 막 통일을 이루고 무서운 속도로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며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초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는 유럽 최강을 다투는 강대국을 둘씩이나 접수한 격이 되었다. 당시 제후들은 선출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나치게 강대해진 합스부르크의 일가 세습을 저지하려 들었고 아들 없이 죽은 프랑스 국왕 오를레앙 공 루이 12세의 뒤를 이은 프랑수아 1세도 여기에 뛰어들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나 이 카를 5세는 갓 스무살도 안 된 상태에서 적절한 로비와 인맥과 실질적인 '힘'을 통해 제후들의 인기를 끌어모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어중간한 입장인 제후들의 경우 막강한 자금력을 갖춘 푸거 가문을 비롯한 선대부터의 제휴 세력들을 동원해 구워삶는가 하면, 그럼에도 발루아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해 제압했다. 결국 발루아 가문은 제위 경쟁에서 패배했고 이 즈음부터 프랑스는 본격적인 콩라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게다가 양국이 결정적으로 맞붙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 앞에 포로로 무릎꿇고 아들들을 포로로 넘겨주며 프랑스 역사에 치욕을 안겨준다. 프랑스가 그토록 합스부르크에 이를 갈았던 것이 괜한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다.

이 카를 5세 치하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랑스와 맞붙어 이탈리아를 완전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고, 오스트리아-스페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는 30년 전쟁으로 화려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5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러우하게 된다. 영국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종교개혁오스만 제국이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방을 산산조각내며 분열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술레이만 1세 치하의 투르크 제국이 헝가리를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 내전과 1529년의 1차 빈 포위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카를 5세는 겨우 제국을 지켜내어 후계로 넘겨주는 데 성공한다. 다만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 영방 체제를 지속하게 되었다.

2.4 분열과 위축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가 광대한 영지 중 오스트리아 대공위+중부유럽 영토의 작위를 포함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나머지 전부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나누어 양위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할 체제가 성립한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는 1700년까지 유지되었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1780년까지 지속되었다. 플랑드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으나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카를 5세의 후계 세대인 16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는 합스부르크가 최전성기를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로 향하는 시기임과 동시에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사이 과거의 경쟁자였던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내전인 위그노 전쟁을 거쳐 사라지고, 대신 제 2 왕족 가문인 부르봉 가문[5]위그노들을 이끌고 프랑스의 왕위를 접수했다. 여전히 종교가 갈려있던 동쪽 독일과 달리, 위그노의 우두머리로서 활약한 부르봉 가문의 앙리 4세는 파리 점령을 앞두고 돌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국가 통합을 이뤘고, 그 아들 루이 13세는 위그노들의 뒷통수를 후려갈기며 프랑스에서 이들을 무참하게 짓밟아 모든 문젯거리를 해결하였다. 부르봉 프랑스는 과거 발루아 프랑스가 그러했듯이 합스부르크와 대치 국면에 들어갔고, 양 가문의 대립은 독일 인구 1/3를 집어삼킨 30년전쟁을 통해 정점을 찍는다.

30년 전쟁과 2차 빈 포위가 있었던 17세기의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최전성기의 16세기와는 대조적인 위축 국면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세기 말에 들면 스페인계 합스부르크가 카를로스 2세의 35년 통치를 끝으로 대가 끊기면서 영지가 유럽 내륙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합스부르크가 중흥하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2.5 중흥기

합스부르크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2차 빈 포위를 극복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합스부르크는 러시아폴란드를 우군으로 끌어들인 후 곧장 동쪽 국경에 대해 수세에서 공세 국면으로 전환했고, 동헝가리를 탈환한 것에 이어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1701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도 뛰어들어 숙적 프랑스를 꺾었다.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의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과거 스페인 령이었던 밀라노나폴리 등의 북이탈리아와 스페인령 플랑드르(벨기에)를 성공적으로 빼돌렸다. 반면 이후 경쟁자인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든다.

이렇게 경쟁자들을 물리친 후 중흥을 맞기는 했지만 오래잖아 제위가 단절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18세기 합스부르크의 중흥을 연 카를 6세가 적장자를 남기지 못한 채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문을 이어받았기 때문인데, 신성 로마 제국은 여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위는 남편 프란츠 1세의 로트링겐 가문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사실상 합스부르크에 묻어가는 형식이었는지라 이후의 왕조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해지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예들이 새로운 왕조의 주인이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로 세력을 뻗고 북쪽 폴란드를 분할해 접수하였으나, 반면에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과 독일 내 패권 경쟁인 7년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명암이 뚜렷하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일대 위기에 직면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시집보낸 부르봉 왕조가 뒤집히고 프랑스에 혁명 정부가 들어서버린 것이다. 이후 프랑스의 패권을 휘어잡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이탈리아마저 뺏겨버린 합스부르크는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고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시망, 오스트리아 전쟁-특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고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와해당하고 만다. 불과 10여년 사이에 상전벽해가 이뤄진 것이다.

이어지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까지 깨지고 굴욕을 맛보던 시기, 나폴레옹이 극적으로 러시아 원정을 거쳐 몰락하면서 상황은 또 반전된다.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는 잃었던 영토 상당량을 수복하고 부활하여 유럽 왕정의 주도권을 쥔다. 유럽을 뒤흔든 민족주의의 세례 속에서도 합스부르크는 건재하게 버티며 오스트리아를 놓지 않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와 함께 헝가리와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새로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한다.

2.6 제위 상실

이후 19세기 후반의 과정은 한마디로 부침의 연속.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깨지고 동유럽 속령의 반발에 직면하면서도 꿋꿋이 제위를 유지했으나 끝끝내 터져버린 제1차 세계대전은 결국 크리티컬 타격이 되고 말았다.

1918년 오스트리아 제위에서 물러난 카를 1세를 끝으로 합스부르크의 영화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일세를 풍미한 이름 높은 가문으로 대접받으며, 근대 유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하는 산 증인이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90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등의 작위를 가지고 있다.

3 특기할 사항

3.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경우 다른 왕조들과 같이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수십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출현했으며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자식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6]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혼인 전략은 모토만 봐도 알 수 있다. "행복한 합스부르크여, 그대는 결혼하라!"가 바로 그 모토인데 정말 이 모토대로 그들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이런 혼인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게 오히려 근친상간으로 인한 왕실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가 됐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콩가루 관계가 계속 잇다르면서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가중되었으며 유전적 결함의 중첩으로 인한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태어났다.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마르가리타 테레사 스페인 공주[7]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하면 할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주걱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주걱턱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상간이 반복되면서 후손들은 더욱 심한 주걱턱과 유전병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2세까지 가면 근친혼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 수 있을 정도.

한편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시작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근친혼이 스페인보다는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8] 이러한 일이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9]

3.2 근황

상술했다시피 프랑스의 발루아/부르봉 가문과는 몇 세기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지하고 있는 왕위가 없는 데에 비해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가지고 있다. 정작 텃밭인 프랑스[10]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철저하게 축출당했기에 20세기까지 제위를 유지한 합스부르크보다 사정이 딱히 낫다고 보긴 힘들지만 말이다.

201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관련의 뉴스가 나왔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현직 통치자 가족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최후의 황태자)의 조카 울리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2011년 7월 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자신을 '공화국의 시민'으로 부르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당주는 오토 대공과 레기나 폰 작센마이닝겐의 아들 카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며, 프란체스카 폰 티센보르네미서[11]의 사이에서 총 1남 2녀(총 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인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현재 사실상 말장난이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제1계승자이다.

3.3 기타

만화 봉신연의극중극인 '국립 앙뉘 학원'의 주인공도 뜬금없지만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미드 30 ROCK에도 한 에피소드에 이 가문의 후손이 등장한다. 잭 도너기의 소개로 리즈 레몬과 제나 마로니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이라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된장녀 기질이 있는 제나 마로니는 동화속 왕자님을 상상하며 그를 유혹하여 팔자를 고칠 생각이 부풀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휠체어에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몸 여기저기 성한데가 없고 정신지체까지 있는 심각한 수준의 장애인이었다(합스부르크가의 유전병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제나 마로니는 공작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공작은 사망해버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공작이 사망하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제나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중세를 다룬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당연히 등장하는데, 1066년 시나리오를 열어보면 알프스 아래 작은 영토 하나만 점유하고 있는 애처로운 합스부르크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회사의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도 등장하며,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중기 시나리오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도 있다. 하지만 99%의 유저는 초반부 시나리오를 선택하며, 오스트리아는 강국이긴 하지만 매우매우매우 복잡한 외교능력을 필요로 하기에, 초보자에게는 어렵다.

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로트링겐 공작가일 시절의 조상에 동로마 제국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있어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핏줄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이어지고 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 테오도로 팔레올로고(1291~1338, 그리스식으로는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가 몬페라토 여후작이었던 어머니 이레네의 이탈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후손이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에 시집을 갔고, 곤차가의 후손이 로트링겐 공작가문에 시집을 가서 이어진 후손인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함으로서 비록 직계는 아니긴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에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1. 표어는 아니고 유명 시구다.
  2.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관을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은 100년 후 카를 5세의 치세부터이다.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와 헝가리 또한 귀족들이 왕을 선출했기 때문에 헝가리가 일단 멸망한 후에야 그 정통성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3. 이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영국, 스페인 등까지도 안느와의 정략 결혼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안느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느와 강제로 결혼하였다.
  4. 사실 포르노보 전투는 프랑스군 1만 2천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동맹군 2만 명을 개발살낸 승리였다. 왜냐하면 맨처음부터 프랑스로의 철수가 목적이여서 협상으로 해결하려했는데, 동맹군이 거부하며 길을 막고 보내주지 않자 샤를 8세랑 프랑스군이 죽기살기로 싸워 동맹군을 쳐발라 격퇴시켰다. 동맹군 입장에서 보면 주목적인 프랑스군을 저지하는 것을 달성하지 못했고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5. 앙리 4세의 아버지인 부르봉 공작 앙투안이 나바르 여왕 잔느와 결혼함으로써 나바르 왕위를 얻었다. 당시 나바르는 스페인에게 영토 태반을 뺏기고 아주 조그만 영토만 보존하고 있었다.
  6. 아이러니하게도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산 선대 국왕들과는 다르게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
  7. 스페인 왕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엄마는 아빠의 조카(!)뻘 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 공주. 하지만 그녀 역시 사촌(고모가 페르디난트 3세에게 시집갔다.) 겸 육촌(아버지 펠리페 4세와 레오폴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고종사촌)이자 외삼촌뻘인 레오폴트 1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자신의 외가(!))에게 시집갔고 불과 22세의 나이에 출산도중 요절했으며 그녀의 자식들은 대부분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는다.
  8. 여전히 근친혼이 성행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독일 땅에 워낙 나라가 많은 탓에 결혼 후보들의 출신이 상대적으로 다양해 근친혼의 폐해가 심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경우는 결혼 상대가 대부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9. 하지만 루이16세의 왕비가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앙투아네트 조차 턱이 주걱턱이였다고 하니 근친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10. 카페 왕조의 방계로 시작되었고, 16세기에 나바르 여왕 잔느와의 결혼으로 나바르 왕위를 획득했다.
  11. 남작가문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빼박 귀천상혼이었겠지만 오토 대공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