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Battle of Mohacs
헝가리어: Mohacsi csata
터키어: Mohaç Muharebesi
1526년 8월 29일, 오늘날 헝가리 남부의 모하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서 헝가리가 대패하여, 완전독립국이며 단일국가로서의 헝가리는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편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동유럽에서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1차 빈 포위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목차
1 배경
1.1 오스만 제국: 계속되는 상승세
1453년,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멸했다. 그리고 이후 1481년까지 이어지는 치세 동안 그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거의 매년 원정을 단행했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블라드 3세를 물리치고 왈라키아를 속국으로 삼는가 하면 스컨데르베우 사후 알바니아 반란군[1]도 격파하여 알바니아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삼았다. 비록 메메드의 생전에 로마 제국의 재건. 즉 로마 시(市) 정복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으로 본격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되었다.
1481년부터 1512년까지 이어지는 바예지드 2세의 치세 동안 대외 원정을 되도록 자제하면서[2]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한 오스만 제국은, 셀림 1세의 치세 동안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쪽에서부터의 위협을 한동안 종식시키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등을 추가로 제국의 영토에 합병하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맘루크 왕조가 보호하고 있던 칼리프로부터 칼리프의 직을 넘겨받아,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 이슬람 세계에서 명실공히 최고의 나라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520년에 제위에 오른 쉴레이만 1세에게는, 부황 셀림이 병사하는 바람에 못 다 이룬 목표를 완수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성 요한 기사단을 로도스에서부터 몰아내는 것과, 헝가리 원정이었다.
1.2 헝가리: 황금기... 그리고 망했어요
한편 오스만 제국이 이렇듯 상승세를 타고 있던 것과 같은 시기, 헝가리에서도 명군이 등장했다. 1458년부터 1490년까지 재위한 마티아슈 1세가 그로, 그는 헝가리의 왕통이 단절되자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던 야노슈 후냐디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왕관을 쓰게 된 인물이다[3]. 그는 나폴리왕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군주가 되었으며, '검은 군대(Black Army)[4]' 라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5]을 보강하는 등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헝가리 왕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한 가지 추진했는데,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마침내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군림하게 된 것.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그리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티아슈는 왕권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더니 전제군주가 되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저 왕이 언제 죽나' 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에 마티아슈가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자 한 명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마티아슈는 서자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귀족들은 그 말을 상큼하게 씹어무시해버렸고, 몇대 전 왕의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이웃나라 폴란드의 왕자인 브와디스와프를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6]. 하지만 귀족들이 울라슬로를 추대한 이유는 '현명하고 강인하니 우리 나라를 중흥시킬 것 같다' 라는 이유가 아니라, '띨띨하고 모자라니 예스맨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 라는 이유.동서고금 막론하고 99%의 나라는 이렇게 지배층의 탐욕때문에 멸망한다 실제로 울라슬로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왕이었는데,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위 계승권은 동생인 얀에게 가 있었다. 실제로도 그는 귀족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헝가리 왕령으로 되어 있던 토지들을 마구 나누어주는가 하면 귀족들이 무슨 내용을 담은 서류를 들고 오든 무조건 서명부터 해 주는 버릇이 있었고, 이로 인해 헝가리는 마티아슈 1세가 사망한 지 불과 몇년만에 전제군주국에서 귀족들의 사유지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마티아슈와 함께, 그가 이룩했던 문화적, 군사적 업적도 다 함께 관짝에 들어간 셈[7][8].
게다가 브와디스와프는 51세의 늦은 나이에야 아들인 로요슈를 낳았고, 1516년에 왕위를 이었을 때 로요슈 2세의 나이는 열 한 살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헝가리를 다시 일으켜세우기는 무리였고, 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의 양자가 되는가 하면 그의 손녀와 결혼하고 누나인 안나를 막시밀리안의 손자인 페르디난트와 결혼시키는 등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로요슈가 '만일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 꺼' 라고 약속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
2 베오그라드 공방전
오스만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고 1년 뒤인 1521년, 황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신하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국왕 로요슈는 이교도가 쳐들어오면 당연히 신성로마제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사절들의 목을 돌려보냈고, 로요슈의 '답장' 에 격분한 쉴레이만은 당장 군대를 일으켜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쉴레이만이 직접 이끄는 원정의 첫 번째 목표가 된 베오그라드는, 1456년에 메메드 2세가 친히 공격했다가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던 중요한 요새였다. 하지만 1456년과 1521년 당시의 헝가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고, 베오그라드로 군대를 보내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실제로 군사를 보낸 귀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9].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군도 오지 않아서, 베오그라드를 지키는 수비군은 꼴랑 7백 명(...)에 불과. 이러니 오스만 제국이 베오그라드와 그 주변에 위치한 작은 요새들을 모조리 정복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싱거운 싸움이라고는 해도, 베오그라드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우선 수십년 동안 대(對) 오스만 전진기지로서 버텨온 요새가 너무나도 싱겁게 함락되었고, 헝가리 남부의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린 오스만 제국은 언제라도 헝가리의 수도 부다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 게다가 유럽 군주들의 입장에서, 헝가리 다음엔 자신들의 차례가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10]
3 모하치 전투
3.1 전투 직전의 상황
1525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1]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파비아에서 완패하고 국왕마저도 생포된 것. 그리고 설사 패배해도 왕이 포로로 잡히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 궁정은 멘붕했고, 자리를 비운 국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모후를 중심으로 대책이 수립된다. 이교도고 뭐고 가릴 계제가 아니니, 당장 강력한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한 것. 그리고 1525년 12월에 프랑스의 사절을 접견한 쉴레이만은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526년 2월에 카를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왕을 당장 석방하고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가겠노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광대한 대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황제 카를은 쉴레이만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고[12], 카를의 답장을 받아든 쉴레이만은 다시 한번 친히 군사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무렵에도, 헝가리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1523년에 컬로처라는 도시의 대주교이자 용맹한 군인으로서도 유명했던 팔 토모리라는 인물에게 헝가리 남부의 방어를 명령한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지만, 그마저도 충분한 군자금을 준 것이 아니라 '일단 파견해놓고 보자' 라는 식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대주교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방어 전체를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1526년 4월에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그가 지휘한 군대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0만은 되었으리라는 것이 오늘날의 추정.
이교도가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헝가리의 귀족들은 7월 2일까지 군사를 이끌고 집결지로 모이라는 왕명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국왕 로요슈 자신도 출전 채비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집결지에 모인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로요슈는 부랴부랴 국왕이 친히 모범을 보인다며 먼저 집결지로 향했고, 그제서야 헝가리군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어렵사리 헝가리군을 긁어모은 21세의 로요슈는, 경험이 적은 자신을 대신하여 사실상 군대를 지휘하게 된 팔 토모리와 죄르지 자포야, 야노슈 자포야 형제 등 지휘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귀족인 야노슈 자포야가 이끄는 8천에서 만 3천 가량의 군사는 트란실바니아를 지키고,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정확히는 동군연합) 크로아티아를 수비하기 위해 다시 5천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로요슈 자신은 팔 토모리와 죄르지 자포야를 부관으로 삼고, 2만 5천에서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군사를 나눈 것이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발칸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부다로 바로 쳐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 게다가 오스만 제국군의 위치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는 이미 트란실바니아나 크로아티아로 파견한 군사를 불러들이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로요슈는 결국 2만 5천에서 3만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최소 10만의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3.2 헝가리의 삽질전략
로요슈 2세와 팔 토모리, 죄르지 자포야가 선택한 전략은, 오늘날 헝가리 남부에 위치한 모하치 주변의 평원에서 이교도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었다. 즉 군데군데 늪지대가 펼쳐져 있고 한편에 도나우 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탁 트인 평원에서 전통적으로 헝가리의 자랑인 기병대를 앞세워 적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헝가리의 두 번째 실수였다. 셀림 1세 시대에 오스만 제국이 사파비 제국이나 맘루크 왕조와 맞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사파비나 맘루크는 기병을 앞세웠던 반면 오스만은 총과 대포를 앞세웠기 때문. 즉 모하치 전투는, 사파비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 맘루크 왕조와의 미르지 다비크 전투의 재방송이 될 운명이었다[13].
그리고 저 해당 전투들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참패한 이스마일 1세나 맘루크 왕조의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가 화약 무기도 있지만 본인들의 주특기라는 스텦의 경기병 전술에서도 오스만 제국은 자신들의 뿌리도 아나톨리아의 기마 유목민이었고, 스웜 전술을 비롯한 스텦 유목제국의 전술과 노하우들 또한 어디 갔다 버린 것도 아니었다. 15세기 중후반 이후의 오스만 군대는 오히려 저런 유목 제국 특유의 스웜 전술에 지정학적으로 한곳에 정착하여 고정적인, 그것도 풍부한 세수가 있어야만 양성 가능한 화약 무기로 대표 되는 예니체리라는 첨단 상비군 까지 있었던 기존의 유목제국의 강점에 플러스 알파가 있었기에 라이벌들을 압도적으로 꺾고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헝가리군에게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헝가리군은 일찌감치 모하치 평원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반면, 오스만 제국군은 한여름인 7, 8월에 먼 거리를 행군하느라 지쳐 있었던 것. 하지만 헝가리는 이러한 유리함조차도 스스로 저버리고 마는데,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한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스만 제국군이 진형을 갖춘 채 늪지대를 행군하는 것을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3.3 전개
게임 미디블 2 토탈 워를 통해 모하치 전투를 재현해 낸 다큐멘터리.
중세 헝가리 왕국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1526년 8월 29일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중앙에 보병과 50여 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좌익과 우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국왕 로요슈 2세는 중앙의 지휘를 맡고, 우익은 팔 토모리가 지휘했다. 한편 모하치로 진군해가는 오스만 제국군은 전군을 선두부대와 후위부대의 둘로 나누어, 앞쪽에는 아자브[14]와 아큰즈[15] 등 비정규군을. 후방에는 시파히와 예니체리 등 정규군을 배치했다(이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진형이다).
전투는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이 먼저 모하치 전장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본 헝가리군은 곧바로 대포를 발사했고, 팔 토모리가 이끄는 우익 기병대가 곧바로 오스만 제국군에게로 돌격. 포탄에 얻어맞은데다 사람과 말 모두 갑옷으로 휘감은 기병들이 돌격해오자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뒤이어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이 투입되면서 비정규군도 전열을 정비하고 싸움에 임했지만, 헝가리의 우익 기병대는 오스만 제국군 진영 깊숙이까지 돌격하여 황제 쉴레이만의 흉갑에 화살 하나가 날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1526년의 모하치에서 헝가리가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 기병대인 시파히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는 이점을 살려 헝가리군을 양옆에서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고, 제국의 자랑인 예니체리와 대포는 곧바로 헝가리의 기병들에게 총알과 포탄을 퍼부었다. 결국 헝가리군 우익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지휘관인 팔 토모리는 병사들에게 퇴각하지 말라고 독려하던 도중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헝가리군 우익을 제압한 오스만 제국군은, 뒤이어 남은 헝가리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포탄과 총알이 비오듯 하는 상황에서도 적을 향해 돌격했던 헝가리군 좌익의 기병대가 먼저 제물로 바쳐졌고, 국왕 로요슈가 직접 이끄는 병사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로요슈도 황혼 무렵에 말을 돌려 달아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도중 강가에서 낙마. 갑옷의 무게로 인해 익사하고 말았다. 향년 21세, 10년의 치세였다.
4 결과
모하치 전투에서, 2만 5천에서 3만여 명의 헝가리군 가운데 3분의 2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군은 천 5백여 명의 사상자만을 내며 압승. 하지만 쉴레이만은 여세를 몰아 헝가리의 수도 부다로 진격하는 대신 며칠 동안 모하치에 야영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제아무리 헝가리의 왕도 죽었다지만 고조부인 무라드 2세 시대부터 수십년 동안 오스만에 저항했던 강국 헝가리가 이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16]. 사실 바르나 십자군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만 14세기 후반 쯤 들어가면 동로마 제국의 망조 자체가 너무 뚜렷하게 보이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계 짜잘한 공국들은 애초에 체급 자체가 오스만 제국과 비교가 안되었길레 기본적으로 동남부 유럽의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의 주축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면 육상에서 탱킹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발칸 반도의 정교회와 카톨릭계 기독교 연합군이었다. 슐레이만 입장에서 헝가리 정복과 복속은 이런 차원에서 큰 장애물 경기 하나 끝낸 셈이니 '이게 생시인가'하는 생각이 들법도 했다. 결국 얼마 뒤 부다에 입성한 쉴레이만은 수비군은커녕 주민들도 진작에 피신하고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뭔가 찜찜했던지 부다를 제국의 영토에 합병하기는커녕 그대로 철군하는 것을 선택했다.
21세의 나이로 요절한 탓에, 로요슈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이 결과 로요슈의 누나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17]는 로요슈가 생전에 했던 약속에 따라 헝가리의 왕위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헝가리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헝가리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인망을 얻고 있었고 모하치 전투 당시에는 트란실바니아를 수비하고 있었던 야노슈 자포야를 야노슈 1세로 옹립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가 야노슈의 즉위를 납득할 리 없었고, 그는 군대를 보내 헝가리를 접수했다. 하지만 야노슈는 오스만 제국에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는 것을 도와준다면 신하가 되겠노라고 제안했고, 헝가리를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완충국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쉴레이만은 그를 받아들였다. 이 결과 그는 1529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해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냈고, 이는 1차 빈 포위로 이어진다.
5 기타
오늘날 모하치는, 헝가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하나로 남아 있다. 모하치 전투를 모티브로 하는 민담도 여럿 전해지고 있고, 전투 450주년인 1976년에 헝가리 정부는 모하치 전장에 국립 추모공원을 세우기도 했다. 또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몹시 힘들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에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 라 한다고.
1683년부터 169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폴란드 등등등(...)이 벌인 대(大)투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도 모하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687년에 벌어진 이 전투는 1526년의 전투와 구분하기 위해 '2차 모하치 전투' 라 부르는데, 150년 전과는 달리 오스만이 대패. 이로써 헝가리는 몽땅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모하치에서 승리하여 헝가리를 지배하게 되었다가, 모하치에서 패하여 헝가리를 잃은 셈.- ↑ 물론 알바니아 입장에서는 저항군.
- ↑ 아예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메메드의 치세와 비교하면 횟수 자체가 적었고, 그나마도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의 비정규군인 아큰즈만을 동원한 전쟁이 많았다. 바예지드 치세 3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베네치아와의 전쟁(1499~1503)과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1485~1491)이 전부.
- ↑ 이는 헝가리 역사상, 이전의 왕들과 전혀 혈연관계가 없으면서도 즉위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 ↑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몽땅 중기병이었다.
- ↑ 오늘날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에 속했으며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였다.
- ↑ 브와디스와프라는 폴란드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울라슬로.
- ↑ 왕실의 재정이 부족해지다 보니 그러잖아도 막대한 용병료를 잡아먹던 검은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 부대는 마티아슈가 죽은 지 4년만인 1494년에 헝가리 귀족들의 손에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이권경쟁에 돌입한 귀족들 가운데 마티아슈가 심혈을 기울여 보강해놓았던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계속 유지, 보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게 짓밟히면서 마티아슈가 이룩했던 문화적 업적도 무너져내리고 만다.
- ↑ 1520년을 기준으로, 헝가리 왕실은 문서상 국가 1년 수입의 3분의 1에 불과한 왕실 유지비도 충분히 마련할 수 없어 이곳저곳에 자금을 융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1520년이라는 해는, 쉴레이만 대제가 황위에 오른 해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망했어요 - ↑ 이는 왕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데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
- ↑ 오스트리아에 한정해서라면, 이는 1529년의 1차 빈 포위로 현실이 된다.
- ↑ 1519년부터 1556년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1516년부터 1556년까지 스페인 왕으로 재위하여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한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
- ↑ 여담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는 한달 전인 1월에 프랑스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난 상태였다.
- ↑ 설령 헝가리가 이러한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으로 미숙했다는 점을 변호해주기는 어렵다. 1493년에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진 크르바바 평원 전투도, 찰디란이나 미르지 다비크, 그리고 이번의 모하치와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
- ↑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인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무슬림이라면 누구든’ 으로 대상이 확대된 지원병으로 급료를 받았으며, 언제든 계약을 해제하고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구른 모습을 보면 심지어 저 '무슬림'이라는 기본 자격도 안 지켜진 체 단순히 오스만 제국 편에서 싸우는게 더 이득이라 판단한 현지 기독교 피지배민들도 많았다
- ↑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병대로, 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대이다보니 예니체리나 시파히와는 대조적으로 봉급을 받지 않아 이웃나라의 마을이나 방어가 취약한 도시를 공격한 뒤 약탈한 전리품을 봉급이다 생각하고 나누어가져야 했는데, 그 이웃나라가 항의해 와도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미처 몰랐네? 미안.' 으로 일관하기 일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잘 나가던 시기. 즉 아큰즈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의 오스만 제국에게 '이웃나라' 는 '잠정적인 정복 대상' 에 불과했으며 아큰즈들의 약탈로 평상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은 물론이요 어디의 방어가 취약한지도 알 수 있었다.
- ↑ 사실 모하치 전투는 헝가리로서는 국가의 운명을 건 대전이었지만, 오스만의 입장에서는 적의 기병들이 단체로 반자이 어택을 시전한 싸움이었을 뿐이다. 헝가리의 함정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
- ↑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