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역대 황제 | |||||
6대 고종 건륭제 훙리 | ← | 7대 인종 가경제 용얀 | → | 8대 선종 도광제 민닝 |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 ||||
45대 텡게린 테트게센 칸 | ← | 46대 샤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 → | 47대 터르 게렐트 칸 |
묘호 | 인종(仁宗) | |
시호 | 만주식 | 숭기연 황제 |
중국식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
한호[1] | 사이쿵가 펑션 한 (Saicungga Fengšen Han) | |
칸호[2] |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Sayishiyaltu Yirugertu Khaan) | |
휘 |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 용얀 (愛新覺羅 顒琰[3], 애신각라 옹염) |
연호 (청) | 만주어 | 사이쿵가 펑션 |
중국어 | 가경(嘉慶) | |
몽골어 | - | |
생몰기간 | 음력 |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 (61세) |
재위기간 | 음력 | 1796년 2월 10일 ~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
1 개요
1795년 선제인 건륭제의 퇴위로 즉위하여 1820년까지 약 25년간 청나라를 통치한 황제. 가정제랑 헷갈리지 말자
대단히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하는 군주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으며 신하들의 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다. 예컨대 당시 관료로 종사하던 홍량길이 가경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간언하자 우선 그를 내쫓은 후 다시 들여와 크게 중용하곤 하였다. 가경제는 인(仁)의 군주를 자처하였으며 이후 전개되는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 역시 최선을 다해 막으려 힘썼다. 다만 옹정제와 같은 무시무시한 워커홀릭도 아니었으며 건륭제와 같이 시대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노력은 중국 전지역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가경제의 전 시대인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도광 이후의 비중없는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라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하는 모습도 보이고...
2 재위 기간
건륭제 치세 후기부터 드리운 재정 파탄과 권신의 부정축재로 인한 부패와 관료사회의 타락이라는 재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좋은 예로 1799년 상황 건륭제가 사망하자 상황이 총애한 뉴호록 화신(鈕祜祿 和珅, 니오후루 허션)을 체포하여 자결하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당시 화신이 축재한 재산은 청나라의 20년치 세금과 맞먹었다고 한다. 건륭제 항목에서도 다루었지만 화신의 이러한 부정축재는 만주-몽골 귀족, 중앙과 지방 관료, 향신층의 축재와 사치를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 청나라의 멸망의 전주곡이 되었다. 그런데 가경제 본인은 그 몰수한 화신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4]에 넣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화신이 죽으니 가경이 배불리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화신 하나 잡았다고 달라진건 크게 없었다. 엄청난 부패는 당연히 농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강압적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관중에서는 백만이 넘는 농민들이 수탈을 피해 도망쳤다. 하북성(河北省)에서도 대량의 농민들이 고향을 이탈해 내몽골이나, 한족에게는 금지(禁地)였던 만주로 도망쳐 정착했다.
엄청난 세금에 들볶인 농민들은 마침내 농민 봉기로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1796년 폭발한 백련교(白蓮敎)의 난[5]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 1805년까지 약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농민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청 정부의 군사적 무능과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戰費)는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른바 '천리교(天理敎)'라는 이름을 걸고 다시 폭발했는데, 이 반란때 천리교도들은 고작 200여 명으로 자금성을 습격하는 흠좀무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미숙한 전략으로 청군이 그나마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6]
한편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의 치세에는 소수민족의 반란도 빈번하였다. 이미 1726~1729년, 1746~1749년, 1758~1759년, 1781~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사천(四川) 일대의 소수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1797년의 묘족 반란과 1833년의 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의 봉기가 터지기도 했다. 이것 또한 변경지대에서도 청나라의 통치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처럼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와 귀족층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가 죽은 후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 등으로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
3 각종 매체에서의 가경제
테메레르 시리즈에선 전 세계에 용이 존재하고 특히 중국이 용들의 지위가 가장 좋은 덕에 워낙 청이 킹왕짱한 동네가 되어 국가도 안정된 상태고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중. 테메레르가 윌리엄 로렌스를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바람에 로렌스를 형식상 양자로 입양했다. 등장은 2권 밖에 없지만 이후로도 편지로 연락하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력자 포지션.
요리왕 비룡 애니판의 황제가 가경제라는 말이 있으나, 연대로 따진다면 광서제가 맞다. 원작에선 서태후였다. 그런데 외모는 많이 닮았어
4 기타
가경제의 통치기(1795~1820)는 조선의 정조(正祖, 1776~1800), 순조(純祖, 1800~1834)의 재위기와 겹친다.
명나라 가정제와 헷갈리지 말자. 뭐 이쪽도 좀 안습이긴 하지만.
뱀발로 청의 모든 황제 중에서 가장 비중이 낮다. 강건성세로 대표되는 청 초기의 치세와 서세동점으로 대표되는 청 후기의 난세에 아주 절묘하게 끼어있다보니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농가경제, 서민가경제 등의 뜬금없는 결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안습.
그리고 희대의 매국노가 쓴 충격과 공포의 백서에 나오는 중국 황제가 바로 가경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