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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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어 독음으로는 린쩌쉬. 린저씨가 아니다!

林則徐/임칙서(1785-1850)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아편을 팔고 영국인들을 부추겨서 아편을 사서 피우게 한다면, 여왕님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리라 믿습니다.

-임칙서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1 개요 및 생애

청나라 최고의 명신중 하나

1785년 푸젠 성 후관현에서 태어났다. '칙서(則徐)'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복건순무로서 시찰 중이던 서사증이 폭우를 피해서 임칙서의 집에 피난을 하던 중이어서 서사증(徐)을 본받으라(則)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도전했다가 실패해 시골에서 학도를 가르치는 교사 노릇(서당 훈장)을 하고 있었다. 임칙서는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 전념해, 마침내 1811년 과거에 합격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 임칙서는 한림학사로서 수많은 행정자료들을 연구하고 청나라의 각종 문제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찾는데 분주했다. 이런 임칙서에게 지방 행정관 자리는 자신이 연구한 대안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청나라농촌이 붕괴되어 가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는데, 임칙서는 농촌의 복구에 힘쓰는 한편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징치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포청천에 빗대어져 "임청천" 소리까지 들었다니 그야말로 청백리 오브 더 청백리.

또한 임칙서는 이미 만연하고 있던 아편의 폐해를 깨닫고 자신의 관내에서 아편을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형이 아편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끝에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요절한 것 때문에, 아편에 대해서는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국 과거제의 학위에서 최고학위인 진사 다음의 학위인 거인을 젊은 시기에 취득하고 있어서 집안의 기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욱 아편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아편을 막기 어려우니 현실적으로 아편을 국산화하면서 가격을 올리고 점진적으로 근절하자는 주장과[1], 강력한 단속으로 아편을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도광제는 임칙서의 아편 근절 노력을 보고받고 아편 근절 쪽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다.

2 흠차대신 취임 및 활동

1839년,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아편 수출입을 금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임칙서는 광둥 성에 도착하기 전부터 공문을 보내 아편상인 60명을 체포하고 영국 상인들에게 "일정 시간을 줄 테니까, 그때까지 알아서 자수해서 아편을 다 내놓으라. 만약 안 내놓고 뻐팅기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때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가 뇌물을 받기 위해 쇼하는 거라고 저마다 생각했고, 실제로 아편 판매를 위해 뇌물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너무 잘못 생각했다. 임칙서는 어지간한 청나라의 관리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결국 실컷 욕만 먹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기 무섭게 영국 상인들은 아편 1천 상자를 내놓았지만, 이미 영국인들이 숨긴 아편이 2만 상자가 넘는다는 걸 간파한 임칙서는 숨겨둔 것들을 내놓으라고 했다. 영국인들이 이걸 거부하자 그 거리를 몽땅 포위해 물자 이동을 단속했고, 결국 더러운 돈을 벌려다가 일하는 사람들이 죄다 나가는 바람에 굶어죽을 뻔한 상인들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아편을 모조리 몰수해 그걸 그대로 폐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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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을 폐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임칙서

보통 임칙서가 아편을 '소각했다'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불태우지 않았다. 임칙서가 사전에 소량으로 실험한 결과, 불태우니 원래 양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아편이 불타지 않고 녹아서 회수가 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아편을 완전히 못쓰게 하려고 이것저것 섞어보니 석회와 소금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해변에 임시 연못을 만들고 거기에 바닷물을 끌어들인 뒤에 잘게 자른 아편 덩어리와 석회를 같이 넣어 휘저어 녹이고는, 마지막에 바다 쪽의 수문을 열어 이 혼합물들을 바다로 흘려보냈다. 물고기:기모찌이이~ 이 작업을 하는 데는 무려 20일이 걸렸다.[2] 이를 동양의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분노한 영국 상인들은 영국 정부에 하소연하였고[3] 이것이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다.

3 아편전쟁 이후

결국 전쟁이 터졌으나 임칙서는 의외로 잘 방어해 냈다. 일찌감치 서구의 대포상선를 사들이고 초보적인 증기선, 자주포까지 준비하고 민병대까지 준비한 것.[4] 그래서 임칙서는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광저우 상륙을 저지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함대를 북상시켜 청나라 수군의 주력인 정크선들을 쓸어버렸다.

청 수군이 연전연패하고 영국군이 제2의 수도이자 남방의 중심지인 난징 인근까지 상륙하자, 당황한 청 조정은 영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임칙서를 흠차대신에서 해임해 버렸다. 그리고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으로 홍콩은 영국령이 되었고, 1997년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흠차대신에서 해임된 임칙서는 신장(위구르)으로 좌천되었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고 신장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농지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간파하고 "영국은 경제 이득만 원하기에 문제가 아니지만 영토를 탐내는 러시아가 문제다. 나는 늙었지만 너희들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5] 이런 임칙서의 주장은 좌종당 등에게 영향을 끼쳐 소위 색방파를 만드는데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런 색방파는 해군을 강화하려는 이홍장을 견제하여 결국 청일전쟁 패배의 단초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1849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했으며 이듬해 1850년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그를 다시 흠차대신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임지로 가던 중 병사했다.

4 평가

부정부패로 물들어 멸망 크리를 타고 있던 청나라에 나타난 구세주같은 존재였지만, 능력에 비해 임칙서가 활약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는 게 문제. 청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인재이지만 서방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만약 청나라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면 청의 생명이 조금이나마 더 연장되었을 지도 모른다.

대단히 청렴결백한 인물로,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었어도 원망하지 않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5 기타

뜬금없이 김동인[6] 「아편전쟁」이라는 이름의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임칙서가 사실상 주인공급으로 묘사된다. 소설 전문 정작 아편전쟁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온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상당히 뭣한 게, '서구의 동양 침략의 시발점이었던 홍콩이 황군(일본군)에게 함락된 기념'으로 썼기 때문. 대동아 공영권 합리화를 위한 문학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그럭저럭 읽을 만하지만, 아편을 '태웠다'는 오류가 보이며 김동인 특유의 영웅 논리가 강하다.
  1. 이러한 주장을 이금론이라고 하는데, 흔히 이금론을 '아편 무역의 합법화'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금론 역시 아편 무역 자체는 반대하는 입장으로, 그들의 궁극적 목적도 아편의 말살이었다.
  2.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 열이 발생하는 이 과정에서 연기가 난다. 이걸 태우는 걸로 착각한 듯.
  3. 이게 정말 적반하장인 게, 임칙서는 아편 1상자에 차 5근의 비율로 보상을 했다. 마약사범에게 이렇게 후대하다니아편과 차의 시세에 따라선 영국 상인이 손해보았을 수도 있지만, 요즘으로 치자면 마약상들한테 돈주고 마약을 사들여 폐기했으니 엄청 후한 건 맞다.
  4. 이때 그가 쓴 "사주지"는 그의 동지인 위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원판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이나 일본도 이 책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5. 실제로 러시아는 청나라의 영토이었던 위구르몽골, 탄누투바의 독립을 적극 후원해 집어삼키려 했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대한 영토 야욕을 연해주, 신강 일부 지역, 탄누투바를 합병하면서(단 탄누투바를 합병한 건 소련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를 보여주었고 심지어 내몽골과 청나라의 성지인 만주까지 합병해 청나라를 만리장성 이남으로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이는 러일전쟁의 패배로 좌절되었다.
  6. 「배따라기」, 『운현궁의 봄』 등을 쓴 그 친일파 김동인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