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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noke Colony
16세기에 영국이 개척하려 했던 식민지. 몇년 후에 우여곡절 끝에 보급이 왔을때 100명이 넘는 식민지인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크로아토안이라는 문구만 남겨져 있어 "잃어버린 식민지(The Lost Colony at Roanoke)"라고 불린다.
1 역사와 실종
월터 롤리 경은 1584년, 북미 동해안 연안으로 탐험대를 보냈는데 이때 발견된 섬이 로어노크 섬이었다. 롤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탐험과 식민지 개척을 허락받은 칙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로어노크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이후 1585년에 식민지 개척을 위한 함대가 로어노크로 파견되어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지만 영국과의 거리가 멀어서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고, 인근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들을 공격해서 초기 식민지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1587년, 존 화이트가 이끄는 120여 명의 남녀가 두번째로 로어노크에 도착해 식민지 개척을 시도했다. 화이트는 첫 번째 식민지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이 원주민들과의 적대적 관계라고 진단하고 그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여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여기서 화이트의 손녀이자 미 대륙에서 최초로 탄생한 식민지인 아기 버지니아 데어가 탄생했다.
당시 로어노크 식민지 |
화이트는 성과를 보고하고 보급물자를 얻어오기 위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화이트가 영국으로 건너간 건 1587년 말이었는데, 이 때 대서양을 건너는 건 위험했기에 선장이 돌아가기를 거부해서 구호 선단을 보낼 수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등장하면서 영국에서는 배란 배는 모두 징발해 버려서 대형 선박을 쓸 수도 없었다.
화이트는 가까스로 작은 배 2척을 구해 물자를 싣고 돌아가려 했으나, 배의 선장들이 과욕을 부려서 에스파냐 배를 나포해서 수익을 보충하려다가 오히려 잡히는 통에(....) 구호 물자도 빼앗겼고,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 영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이 계속되어 화이트는 3년간 영국에서 꼼짝없이 기다리다가 1590년이 돼서야 사략 함대를 통해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화이트가 로어노크에 돌아왔을 때는 나무기둥에 "크로아토안"이라고 적힌 문구만 남아있었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화이트는 떠나기 전에 혹시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면 눈에 잘 띄는 곳에 가는 곳을 기록해두라, 만약 강제로 떠나게 되었다면 몰타 십자가를 남겨라라고 지시를 내려두었는데, 몰타 십자가의 표식은 없었고 정착지에는 어떠한 전투나 충돌의 흔적도 없어서 화이트는 식민지인들이 크로아토안 섬 (현재의 해터라스 섬)으로 이주했다고 추측해 수색을 하려 했으나,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어서 함대에서 이를 거부했고 그 다음날에 섬을 떠났다.
2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렇게 사라져버린 식민지인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는 식민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했다가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전멸했다는 것이다.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이들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사라진 로어노크 섬의 식민지인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처의 파우하탄 족 족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어노크의 식민지인들이 파우하탄 동맹에 참여를 거부한 체서픽(Chesapeake) 족과 같이 살고 있어서 전부 없애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시체가 나오지도 않았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무릉도원
화이트가 떠날 때 배 몇 척을 남겨두고 갔기 때문에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에스파냐 인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가설도 있긴 하나 이는 말이 안 된다. 그 이유는 화이트가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와 식민지 인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발견하고서 10년이 지난 1600년까지 에스파냐에서는 실패한 영국 식민지를 계속 찾고 있었기 때문. 거기다가 로어노크 섬의 정착지 유적에는 전투나 충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융화이다. 실제로 화이트가 이끈 2번째 식민작업 때는 최초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주변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상반되는데, 화이트를 따라서 온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의 기록에 따르면 주변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평온하고 우호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다른 기록에서는 충돌이 잦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2000년도에 출간된 로어노크(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을 통해, 역사가 리 밀러(Lee Miller)는 로어노크의 식민지인들이 다른 부족에게 공격을 받은 초와노크(Chowanoke, 알곤킨 어를 사용한 부족으로 당시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서 가장 강한 부족. 전염병으로 인해 17세기에 전멸하고 지금은 혼혈만 남아있다)부족을 찾아가 의지했을거라고 추측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 주재 에스파냐 대사였던 페드로 데 수니가(Pedro de Zúñiga)는 1607년에 제임스타운 정착민인 프랜시스 넬슨이 그린 지도인 소위 수니가 지도(Zuniga Map)를 확보해서 펠리페 3세에게 이를 전달한 적이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roonock에서 온 옷을 입은 사람 4명이 Neuse 강의 이로쿼이족 마을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에 더하여 제임스타운의 서기였던 윌리엄 스트래치(William Strachey)도 주변의 원주민 부족 마을에 돌로 지은 2층 집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로어노크 정착민들에게 이를 배우지 않았나는 추측이 있다.
한편, 17~18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눈 색깔이 회색인 원주민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조상이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1696년, 타르(Tar) 강에 정착한 프랑스 신교도들은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서 금발에 푸른 눈인 원주민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착지에서 가장 가까운 영국 식민지가 제임스타운이었는데, 투스카로라 족에게 공격을 받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잃어버린 식민지인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존 로슨(John Lawson)은 1709년에 캐롤라이나 주로 가는 새로운 항해(A New Voyage to Carolina)라는 책에서 해터라스 섬에 살던 크로아토안 인들이 로어노크 섬에서 살았었고, 백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상들은 '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눈 색깔이 회색인 사람들이 섞여있었으며 영어에 친숙하다는 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1880년대 후반에는 로베슨(Robeson) 카운티에 거주하는 투스카로라(Tuscarora, 이로쿼이 어를 쓰는 부족. 5대호 지역에 있다가 남부로 이주했는데 로어노크 섬에서도 거주했다) 족이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에는 폐어가 된 영어 단어와 굉장히 유사했고, 식민지인들의 성씨도 제법 많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되자 1885년 2월 10일에는 크로아토안 법안이 통과되어 이들을 크로아토안 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투스카로라 족은 백인들과 사이가 가까웠는데, 극심한 가뭄에다 영국의 지원도 끊겨서 빈궁하고 고달프게 살던 식민지인들에게 로어노크 섬을 떠나 본토로 이주하라고 설득했다고. 그래서 식민지인들이 새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 곳이 로베슨 카운티라는 것이다.
남북전쟁 때 남부군 장군이었던 새뮤얼 애시(Samuel A'Court Ashe)는 역사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로어노크 섬의 식민지인들이 버티(Bertie) 카운티의 초완(Chowan) 강 쪽으로 이주했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사라져버린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행보에 관한 추측 중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투스카오라 뿐만 아니라 럼비(Lumbee), 코리(Coree), 지금은 전멸한 사포니(Saponi) 족 등이 더 있어서 검증이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DNA 프로젝트.
거일스 밀턴은 "대추장 엘리자베스(Big cheif Elizabeth)"의 마지막 장에서 위의 두가지 가설을 결합한 견해를 내놓았다. 밀턴에 의하면 파우하탄 동맹에 참여를 거부해 몰살시킨 체서픽족 가운데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있었다는 파우하탄 족장의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인물은 파우하탄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제임스타운의 지휘관 존 스미스인데 익히 알려진대로 파우하탄 족장은 스미스를 처형하려 했고 이를 막은게 파우하탄 족장의 딸인 포카혼타스이다.
파우하탄 족장의 이야기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지만 생각해보면 처형할 생각이었던 스미스에게 굳이 있지도 않은 일을 이야기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스미스를 살려보내서 그 이야기를 전파해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밀턴에 의하면 파우하탄 족장은 스미스에게 체서픽족을 공격했을때 노획한 머스킷총과 청동제 박격포, 무기의 파편으로 보이는 쇳덩어리 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은 적어도 체서픽족에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있었거나 한때 머물렀거나 했을 개연성이 있다는것. 파우하탄 족장이 보여준 이 무기들은 십수년뒤에 파우하탄족과 제임스타운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제임스타운에 반환했다고 한다.
밀턴에 의하면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은 두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주했을것으로 추정한다. 한 그룹은 12명에서 15명 정도의 소수의 인원으로 나무에 새겨진대로 크로아토안 섬으로 이동했을것이라고 본다. 소수의 인원을 크로아토안 섬으로 보낸 이유는 크로아토안 섬의 지리적 이점때문이었다는것. 크로아토안 섬의 동쪽 해안은 탁트인 공간이라 섬쪽에서도 바다를 전망하기 좋았고 바다쪽에서도 섬에서 피워올리는 연기등을 관찰하기 용이했다는 것이다. 밀턴은 이 소수의 인원들은 크로아토안섬에서 존 화이트의 구호함대를 기다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서픽 베이로 이동해 체서픽족과 같이 살았던것으로 추정했다. 본래 1587년에 존 화이트가 이끄는 식민지인들은 로어노크 섬이 아니라 체서픽 베이로 가려고 했지만 함대내의 갈등때문에 어쩔수 없이 로어노크 섬에 내렸다고 한다. 체서픽 베이에는 존 화이트와 토마스 해리엇이 환대를 받은 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우호적인 부족을 기대하고 그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것. 체서픽족들도 갈등중인 파우하탄 동맹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우수한 무기를 가진 영국인들을 환영했고 한동안 이곳에서 같이 동거했다가 파우하탄 동맹의 한 부족의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이 몰살당했지 않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밀턴에 의하면 전부가 몰살당한것은 아니고 일부는 살아남아서 파우하탄족보다 덜 호전적인 부족들로 도망쳤지 않았나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존 스미스도 몇몇 원주민 부족에 소수의 영국인들이 살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들을 만나보려고 영국인들이 살아있다는 부족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존 화이트가 크로아토안섬을 수색하기만 했어도 그곳에 있던 영국인들을 만나볼수 있었고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행방도 알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임스타운에서는 살아남은 영국인들을 찾아나서지 않았을까. 밀턴에 의하면 존 스미스는 파우하탄 동맹에 의해서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사실을 숨겼고 제임스 1세에게만 비밀리에 보고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제임스 1세는 파우하탄 족장에게 대관식을 치뤄주고 영국의 신하로 인정했는데 만약 파우하탄 족장이 영국인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제임스 1세는 물론이고 식민지 개척도 큰 타격을 입을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의 이야기를 접했고 존 스미스는 이들을 찾아나서기도 했으나 현지 원주민들이 안내를 거부하고 또한 영국인들을 데리고 있는 원주민 추장들이 제임스타운측과의 접촉을 거부해 실제로 살아있는 영국인들을 만날수는 없었다는것이다. 아마 존 스미스가 제임스타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파우하탄족과의 협상을 통해서 살아남은 영국인들을 데려올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스미스가 부상으로 제임스타운을 떠나게 된 뒤에 후임 총독들은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수색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결국 이들의 행방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는것.
3 학술적 조사
1998년,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로어노크 섬에 대한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을 개시했다. 발굴 결과 의미있는 성과가 나타났는데 특히 16세기 영국에서 쓰이던 인장반지가 발굴되었다.
또한 기상학자들이 16세기 후반의 로어노크 섬 일대의 기후를 조사해본 결과 1587년에서 1589년 사이에 로어노크 섬 인근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연대는 화이트가 영국에 있다가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온 시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런 결과로 미루어보면 극심한 가뭄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이주라는 결단을 내렸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고 볼 수 있다.
- 참고: #
4 매체의 등장
- 미드 슈퍼내추럴에선 악마의 소행으로 생긴 바이러스로 나온다. 시즌 5에 나오는 2014년 루트에서는 이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퍼져 인간들이 거의 멸종한 상태. 시즌 7에서 기근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려고 하나 윈체스터 형제에 의해 실패한다.
- 미드 헤이븐에서는 이곳에 다른차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 TRPG 월드 오브 다크니스 세계관의 시스템 중 하나인 워울프 디 아포칼립스에서는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갈 초월적인 악의 존재, 웜의 세 화신 중 하나인 이터-오브-소울즈의 현현을 막기 위해 로어노크 식민지 외곽에서 크로아탄이란 이름의 부족이 부족원 전체를 제물로 한 희생 의식을 통해 이터-오브-소울즈를 막았다는 설정이 있다.
- 그 유명한 교양만화인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언급된다. 허나... 그저 '모두 사라졌더래'라고 모호하게 언급하고, 그림상에 식민지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을 그려놓음으로써 마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두 굶거나 병들어 죽은 것처럼 묘사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