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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세 루이스 아라고네스 수아레스(José Luis Aragonés Suárez) |
생년월일 | 1938년 7월 28일 |
사망년월일 | 2014년 2월 1일 |
국적 | 스페인(Spain) |
출신지 | 마드리드(Madrid)- 오르탈레사(Hortaleza) |
포지션 | 미드필더, 포워드 |
신장 | 178cm |
소속 클럽 | 헤타페 CF(1957–1958) 레알 마드리드(1958–1960) 레크레아티보 우엘바(1958–1959) 임대 에르쿨레스 CF(1959–1960) 임대 우베다 CF(1960) 임대 플러스 울트라(1960) 임대 레알 오비에도(1960~1961) 레알 베티스(1961-196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64-1974) |
국가 대표 | 11경기 3골(스페인) |
지도자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74-1978/1978/1979-1980/1982~1986/1987/1991~1993/2001~2003) 레알 베티스(1981/1997~1998) FC 바르셀로나(1987~1988) RCD 에스파뇰(1990~1991) 세비야 FC(1993~1995) 발렌시아 CF(1995~1997) 레알 오비에도(1998~1999) RCD 마요르카(2000~2001/2003)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2004~2008) 페네르바흐체 SK(2008~2009)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대 감독 | |||||||||||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1973~1974)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74~1978) | → | 엑토르 누녜스 (1978) | |||||||
엑토르 누녜스 (1978)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78) | → | 수서 페렌츠 (1978~1979) | |||||||
수서 페렌츠 (1978~1979)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79~1980) | → | 헤수스 마르티네스 하요 (1980) | |||||||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 트라이드 (1981~1982)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82~1986) | → | 비센테 미에라 (1986) | |||||||
헤수스 마르티네스 하요 (1986~1987)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87) | → |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1987~1988) | |||||||
토미슬라브 이비치 (1990~1991)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91~1993) 이셀린 산토스 오베헤로 (감독대행) (1992) 호세 파스토리자 (감독대행) (1992~1993) | → | 라몬 에레디아 (1993) | |||||||
카를로스 가르시아 칸타레로 (2001)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2001~2003) | → | 그레고리오 만사노 (2003~2004) |
FC 바르셀로나 역대 감독 | |||||||||||
테리 베너블스 (1984~1987)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87~1988) | → | 요한 크루이프 (1988~1996) |
발렌시아 CF 역대 감독 | |||||||||||
카를루스 아르베르투 파헤이라 (1994~1995)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1995~1996) | → | 호르헤 발다노 (1996~1997)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이냐키 사에스 (2002~2004) | → | 루이스 아라고네스 (2004~2008) | → | 비센테 델 보스케 (2008~2016) |
1 소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전설
2000년대 스페인 황금 세대의 기반을 쌓은 명장
지역갈등으로 분열되었던 스페인 국대를 하나로 뭉친 지도자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레전드이자 스페인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명장이다. 그는 선수 시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서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에게 허구헌날 괄시받았던 팀을 강팀으로 이끌어냈다. 아라고네스는 감독 시절에도 AT 마드리드에서 가장 빛나는 경력을 쌓아 명실삼부한 AT마드리드의 레전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렇지만 그가 스페인 축구 역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 축구 대표팀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등의 각 지역 출신 선수들간의 지역 갈등을 바로잡지 못했을 것이고 2천년대 스페인 축구대표팀의 황금기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선수 관리 및 전술 운용 면에서 몇가지 비판을 받았고 티에리 앙리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축구 역사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선수 경력
2.1 헤타페 시절
아라고네스는 1957년 헤타페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헤타페 유스팀에서 한 시즌 동안 뛰었는데 워낙 화려한 개인기를 구사했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엘프'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소속팀에선 정규 시즌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1958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2 레알 마드리드 시절
레알 마드리드로 입단한 그는 경기에 나가기를 희망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레알에서도 단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아라고네스는 레알에서의 생활 내내 임대를 전전해야 했다. 에르쿨레스 CF에서는 24경기 17골을 넣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레알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레알 B팀인 카스티야로 또다시 보내버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라고네스는 1960년 레알 오비에도로 이적했다.
2.3 레알 오비에도 시절
아라고네스는 레알 오비에도에서 한 시즌을 뛰며 13경기 4골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오비에도 보드진은 그를 전력외로 구분하고 1961년 여름에 레알 베티스로 이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실패한 선수로 여겨졌다.
2.4 레알 베티스 시절
아라고네스가 본격적으로 포텐을 터트린 것은 바로 레알 베티스 시기였다. 그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3년간 86경기에 출장하여 33골을 기록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활약을 주목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64년 여름에 아라고네스를 영입했다.
2.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 AT 마드리드의 레전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아라고네스는 그곳에서 자파토네스(Zapatones : 큰 축구화)라는 별명을 얻었고 얼마 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란 명성을 얻게 된다. 아라고네스는 첫 시즌에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고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1965-66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69-70 시즌에 또다시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그는 1969-70 시즌에 스페인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피치치 상을 받았다.
1973년, 아라고네스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다시 한 번 이루었고 1973-74 시즌에 3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는 유로피언 컵에서 대활약하여 팀을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결승전 상대는 독일의 명문구단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이 경기에서, 아라고네스는 연장전에 골을 넣어 팀의 1:0 리드를 이끌었다. 그러나 경기가 다 끝날 무렵이던 119분, 뮌헨은 경기를 뒤집어 버렸고 결국 뮌헨이 아틀레티코를 제치고 유로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 유로피언컵 결승전이 끝난 뒤, 아라고네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265경기 123골을 기록했고 아틀레티코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기록되었다.
2.6 국가대표 경력
아라고네스는 1965년 5월 8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는 1968년 10월 17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데뷔 골을 넣어 팀의 3:1 승리를 견인했다. 그는 11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넣었다.
3 감독 경력
3.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기
아라고네스는 은퇴하자마자 아틀레티코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74년 인터컨티넨탈 컵을 우승했고 1976-77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코파 델 레이에서도 1976년에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6년 동안 아틀레티코를 이끌며 팀을 안정적으로 이끌다가 1981년에 베티스로 자리를 옮겼다.
3.2 레알 베티스 시절
그는 1981년 베티스로 옮긴 후 한동안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곳에서 얼마 있지 않았고 1982년에 다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이럴 거면 베티스는 왜 간 겁니까?
3.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기
잠시 베티스에 있다가 도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온 아라고네스는 1984-85 시즌에 코파 델레이와 라 리가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가 이끄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유러피언 위너스 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소련의 디나모 키예프에게 3대 0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1987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3.4 바르셀로나 시절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즌 동안 감독 생활을 했고 코파 델레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는1988년에 사임하고 2년 간 쉬다가 1990년에 에스파뇰로 이적했다. 딸랑 코파 델 레이 하나 우승하고 바로 떠날 거면 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나간 거지?
3.5 에스파뇰 시절
아라고네스는 에스파뇰에서 한 시즌 동안 감독 생활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1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오퍼를 받은 그는 곧바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냥 거기서 쭉 있으세요.
3.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3기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온 후 평범한 중위권 팀에 머물고 있던 팀을 빠른 시일 내에 강팀으로 육성시켰고 1992년에 국왕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1993년에 또다시 팀을 떠나 세비야 감독으로 부임했다.
3.7 방랑기(...)
세비야로 떠난 아라고네스는 그곳에서 2시즌 동안 활동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 그는 발렌시아, 레알 베티스, 레알 오비에도, 그리고 마요르카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2001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충격의 2부 리그 강등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라고네스는 분기탱천하여(...) 곧바로 아틀레티코 감독으로 부임했다.
3.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4기
사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강등을 당할 수가 없는 팀으로 여겨졌다. 강등당한 시즌인 1999-00 시즌 당시 멤버 수준은 이름값만 따지면 강등이 아니라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라이커 하셀바잉크, 스페인 대표팀의 키코, 바라하, 발레론, 그리고 카프데빌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솔라리, 파라과이 대표팀 주전 수비수 아얄라와 가마라 콤비가 있었고 감독은 명장으로 이름났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였다.
그런 팀이 왜 강등당했냐하면..... 당시 구단주 헤수스 힐이 구단 경영을 엉망진창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탈세로 징역을 산 적이 있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고 투자를 지나치게 방만하게 하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자 선수단의 주급을 일방적으로 체납하는 짓거리를 했다. 졸지에 돈을 받지 못하게 된 선수들은 당연히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모두가 이 막장팀을 떠나고 싶어했다. 결국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의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2000-01 시즌에 승격에 도전했지만 4위에 그치며 실패하고 만다.
이런 팀의 꼴을 보다못한 아라고네스는 곧바로 아틀레티코에 복귀한 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선수단을 다잡고 2001-02 시즌에 세군다 우승을 차지하며 라 리가 승격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2002-03 시즌에 팀을 라 리가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한 후 2003년에 팀을 떠났다. 미션 완료!
3.9 스페인 축구 대표팀 시절 : 스페인 황금세대의 기반을 쌓다
이후 마요르카로 돌아갔지만 2003-04 시즌에서 11위에 그친 책임을 지고 2003년 10월에 사퇴한 아라고네스는 한동안 야인 생활을 보내다가 2004년 6월 1일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유로 2004 본선 8강진출을 실패한 충격으로 국가 대표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먼저 대표팀에서 부진하고 있는 미첼 살가도와 라울 곤살레스를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아라고네스가 극도로 레알 마드리드를 미워해서 라울을 배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울 곤살레스 항목 참조.)그의 지도 하에, 스페인은 2006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승승장구했다. 스페인은 2006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3경기 모두 승리를 거두고 16강에서 프랑스와 맞붙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프랭크 리베리, 페트릭 비에이라, 그리고 지네딘 지단의 연속 골로 3:1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유로 2008 지역 에선에 참가하여 승승장구했고 본선에서도 기세를 이어가 마침내 결승전에서 독일을 1:0으로 격파하고 1964년 이후 44년만의 유로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는 사임을 선언헀고 델 보스케가 그의 뒤를 이어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는 동안, 그는 스페인 축구 선수들을 한 팀으로 뭉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가 부임하기 전만 해도, 스페인 선수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눠서 서로 간의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하나로 뭉치지 못한 스페인은 국제 대회에서 부진했고 국민들은 국가대표팀에게 환멸마저 느꼈다. 아라고네스는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고 카탈루냐, 카스티야, 바스크 등 여러 지역 출신 선수들이 "우리는 스페인을 대표한 선수들이다."라는 의식을 갖고 한 팀으로 뭉쳐서 뛰게 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스페인은 2천년대 후반 황금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일부 축구팬들은 아라고네스가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고의로 레알 출신 선수들을 홀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명실삼부한 레알의 주장 카시야스를 중용한 걸 보면 꼭 그렇게 해석할 근거는 부족하다.
이시기 그의 최대 오점은 티에리 앙리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다. 2004년 스페인 감독으로 부임할 무렵, 아라고네스는 대표팀 훈련 도중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에게 그의 팀 동료인 티에리 앙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그 검둥이 자식보다 낫다고 말해라. 말 돌리지 말고 그에게 말해. 너는 너 스스로를 믿어야 해. 너는 그 검둥이 자식보다 나은 놈이야.
이 사건은 곧바로 영국 언론에 전해졌고 아라고네스에 대한 영국 언론의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가 감독직을 그만두거나 중대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일었다. UEFA는 이 사안에 대해 조사한 후 10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벌금을 아라고네스에게 부과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더한 징계를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UEFA는 국제대회에서 스페인 서포터즈들이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징계가 차후에 내려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고네스는 자신이 인종차별자가 아니라고 밝혔고 자신은 흑인 친구가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브라질 출신의 흑인 미드필더 마르코스 센나 또한 "그는 자신을 좋아했고 자신을 브라질리언이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해줬다"며 그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옹호했다.
2004년 11월 18일 영국과의 친선 경기가 있은 후, 애쉴리 콜은 아라고네스를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페인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야유는 티에리 앙리(아스날)에 대한 그의 인종 차별적인 발언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아라고네스는 18일 있었던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스페인은 반드시 그를 해고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스페인 관중들은 18일 애슐리 콜, 숀 라이트 필립스(맨체스터 시티) 등 잉글랜드의 흑인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마다 원숭이 소리를 내는 등 조직적인 인종차별 행위로 물의를 빚었다. 또한 에쉴리 콜은 “사이드라인 아웃된 공을 가지러 스페인 벤치 쪽으로 향했을 뿐인데 아무 이유 없이 아라고네스가 나를 밀치길래 나도 홧김에 그를 밀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증오가 가득했으며 마치 악마 같은 표정이었다”고 치를 떨었다.
이후 한동안 스페인과 영국 간의 감정이 악화되어 외교 문제까지 이어지자, UEFA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앙리와 아라고네스 양자에게 화해를 권고했다. 영국 흑인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앙리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사태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후에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는 아라고네스를 내내 따라다녔다.
3.10 페네르바흐체 시절
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후, 그는 2008년 6월 말에 페네르바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4위에 그쳤고 2009년 6월 2일에 시즌이 끝나자마자 경질되었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30여 년의 감독 생활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4 죽음
은퇴 후 말년을 조용히 보내던 아라고네스는 백혈병에 걸려 병원에 장기 투숙했다가 2014년 2월 1일 오전 6시 15분에 사망했다. 스페인 왕립 축구 협회는 "슬픔과 충격에 잠겼다"며 고인의 공헌으로 스페인 축구가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며 그의 넋을 기렸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인 디에고 시메오네 또한 "나는 그의 가족들에게 매우 강력한 메세지를 보내고 싶다. 아틀레티코의 모든 이들은 클럽과 스페인 축구의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을 잃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장례식은 2월 2일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이 장례식엔 카를로스 푸욜, 세스크 파브레가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그리고 사비 등 스페인 선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이 끝난 뒤 화장되었다. 2014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단은 아라고네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의 셔츠를 착용했다.
5 수상
5.1 선수 시절
라리가 우승 : 1965–66, 1969–70, 1972–73
코파 델 레이 우승 : 1964–65, 1971–72
모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에 수상했다.
5.2 감독 시절
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라리가 우승 : 1976–77
코파 데 레이 우승 : 1975–76, 1984–85, 1991–92
수페르코파 에스파냐 우승 : 1985
세군다 디비전 우승 : 2001–02
인터네셔널 컵 우승 : 1974
2. 바르셀로나 시절
코파 델 레이 : 1987–88
3.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UEFA 유로 대회 우승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