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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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곤살레스 블랑코
(Raúl González Blanco)
생년월일1977년 6월 27일
국적스페인(Spain)
출생지마드리드(Madrid)
신체 조건180cm, 74kg
포지션스트라이커(Striker)
유소년 클럽산 크리스토발 데 로스 앙헬레스 (1987-199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0-1992)
레알 마드리드 CF (1992-1994)
소속 클럽레알 마드리드 CF C (1994)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 (1994)
레알 마드리드 CF (1994-2010)
FC 샬케 04 (2010~2012)
알 사드 SC (2012~2014)
뉴욕 코스모스 (2014~2015)
국가 대표102경기 44골[1]
2001 Ballond'or
수상
마이클 오언
2위
라울 곤살레스
3위
올리버 칸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
(1997~2003)
라울 곤살레스
(2003~2010)
이케르 카시야스
(2010~2015)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
(1989~2002)
라울 곤살레스
(2002~2006)
이케르 카시야스
(200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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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가 대신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흰 유니폼의 7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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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또 너냐?>[3]

1 개요

몸싸움이 두려웠다면, 그 후의 판단력도 없다.
"1억 유로? 그걸로 나의 마드리드를 살 수 없어!"

Ángel del Real Madrid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과도 같은 레전드 공격수

역대 레알 마드리드 선수 중 최고의 스페인 선수

샬케 04의 레전드

스페인의 축구 선수로, 일명 원조 반지의 제왕.[4] 레알 마드리드의 애칭이 블랑코스(Los Blancos, 영어로 하면 The Whites)인데, 이는 라울의 모계성씨 '블랑코'와 같기 때문에 마드리드와의 영원한 인연을 나타낸다고 한다. 흔히 스페인의 'Raul'이라 하면 그를 떠올리곤 한다. 지못미 알비올 19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했으며, 플레이 메이킹과 팀의 주 득점원을 동시에 수행하는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개념을 완성시키고 심지어 교과서라고까지 불린 3인 중 하나이다(나머지 2명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데니스 베르캄프).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면, 최고의 자국인 선수는 라울 곤살레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 스테파노 이후 거쳐간 수많은 스타들 중에서도 가장 큰 획을 그은, 가장 중요한 선수.

2 클럽 커리어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서포터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틀레티코의 유스 클럽에 입단했으나, 12세 때 아틀레티코가 재정 문제로 유스 클럽을 일시 해체하면서 다른 마드리드의 연고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게 된다. 아틀레티코는 아마 아직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듯 이 아틀레티코 유스의 붕괴는 레알 마드리드 창단 이래 가장 운이 좋았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아틀레티코와의 더비에서 데뷔 골을 넣어 아틀레티코를 두 번 죽였다

1994년 10월, 레알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클럽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인 17세 4개월이라는 어린 나이로 성인 팀 경기에 데뷔한다.[5] 데뷔 시즌인 1994/95 시즌에 9골을 기록하면서 스페인 축구의 미래로 각광받게 되었고[6] 카펠로, 하인케스 등 감독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처음엔 좌우 날개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했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 휘하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을 변경한다.

1998/99 시즌에 25골, 2000/01 시즌에 24골로 득점왕을 거머쥐고, 2000년과 2001년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7]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페르난도 이에로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1999/2000 시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거의 라울과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더해서 페르난도 레돈도 셋이서 만들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주전 선수들의 기량 및 조직력 저하로 인해 라 리가에서 홈에서도 5골을 먹고 패배하며 5위로 추락하던 시절이었고 전체적인 경기력이 부진하였고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도 뮌헨에게 2차례 패배해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였다. 그리고 8강에서 만난 맨유를 상대로 홈에서 비기면서 퍼거슨은 기자회견에서 레알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심리전을 구사하며 도발할 정도였다.

"더 이상 레알 마드리드는 두렵지 않다." - 퍼거슨

하지만 이후 라울은 퍼거슨의 발언을 들은 뒤 기자회견에 임하며 퍼거슨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다시는 그런 말 내뱉지 못하게 해주겠다."

그리고 경기에 들어서 라울은 맨유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고 이후 그야말로 초인적인 활약을 이어갔고 결승에서 팀의 마지막 쐐기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빅 이어를 안긴다.오오 라울! 오오약속왕 라울

레알 마드리드 시절 라울은 팀이 필요로 하는 장소에서 뛰었고 스탯도 그와 연관성이 높다. 실제 라울이 2000/01 시즌 24골을 넣은 것은 피구마켈렐레를 영입한 갈락티코스 정책의 성공임과 동시에 모리엔테스의 부상으로 득점을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맞춰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위해 전방으로 올라온 구티의 지원이 있었음에 기인한다. 이렇게 많은 골들을 넣었지만, 그럼에도 다음 두 시즌 동안 마드리드의 탑 스코어러는 건재를 과시하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호나우두였고 라울은 이들을 보조하며 15골 전후로 득점했다.

그러나 이후의 시즌부터는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게 된다. 2003/04 시즌 잇따른 갈락티코스의 성공에 도취된 마드리드는 데이비드 베컴을 먹고 스티브 맥마나만마켈렐레, 콘세이상을 뱉으며 캄비아소마저도 가볍게 쓰는 선택을 한다. 공격수 위주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팀의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자[8] 라울은 아래로 내려가 미드필드에 가세하며 분전했지만 전 같은 경기력은 나오지 않았고 라울의 득점력마저 급감했다. 팀 성적도 명성에 비해 실속이 없어 이후 마드리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끝내 캄비아소까지 내치고[9] 마이클 오언을 데려온다거나 모나코발 부메랑을 맞고 모리엔테스를 다시 데려온다거나 카사노를 영입한다거나 혹은 우드게이트를 영입한다든가 같은 행위를 자행했다. 쉽게 말해 뻘짓의 연속.

라울은 이 와중에 열심히 경기장을 뛰어다녔지만 시즌이 끝난 후 결산 스탯은 하위권 팀의 그저 그런 공격수와 비슷하거나 떨어져, 여론의 화살에서 라울도 안전하지는 못해 부진이나 기량 하락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즉, 시궁창으로 향하는 팀에서 포지션을 상관하지 않고 그야말로 죽어라고 뛰어다녔으나 오히려 까인 케이스.

이렇게 리가에서 눈에 띄는 스탯상으로는 부진했지만...
최전방을 호나우두가 차지하거나 말거나 리가에서 호나우두가 골을 몰아치거나 말거나 챔피언스 리그는 여전히 라울의 독무대였고 호나우두는 강팀들의 수비에 막혀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10]

결국 성적 부진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갈락티코스는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2005/06 시즌 루이스 피구와 솔라리와 사무엘을 내치고 토마스 그라베센을 영입했지만 실패, 2006/07 시즌에 이르러서야 마하마두 디아라와 페르난도 가고가 중원에 정착하고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호비뉴, 베컴, 뤼트 판 니스텔로이 등이 효과적으로 가동됨으로써 우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라울은 득점 면에서는 그 이전 시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경기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루드-라울이라는 꿈의 투 톱이 맨유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에서 결성되었고, 퍼거슨이 괜히 그 두 명을 투 톱으로 구성하고 싶어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루드와 라울 두 명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선수들답지 않게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그리고 2007/08 시즌 라울은 18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 리가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음은 물론 라 리가 MVP의 성격을 띠는 상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상의 초대 수상자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판 니스텔로이가 부상 때문에 출장 수가 적어지고 베컴, 판 니스텔로이라는 꿈의 콤비가 맨유를 떠나 마드리드에서 재회하자마자 헤어지게 된 덕택도 있지만, 이런 때는 언제나 써 먹을 수 있는 말이 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또한 뤼트 판 니스텔로이와의 호흡 역시 좋았다. 둘 다 서로의 장점을 잘 이해했고 잘 이용하는 멋진 축구였다. 서로 간의 차이점이 명확하지만, 축구 지능과 센스, 그리고 볼에 대한 집요함은 둘의 공통점이었다. 거기다 아무래도 공간 경합이나 몸싸움에서 별 도움을 안 주는 호나우두와는 정반대로 판 니스텔로이는 수비수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선수이기에 섀도우 스트라이커로서는 훨씬 더 도움이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이 다음 시즌도 18골을 넣으며 클래스를 증명하지만, 우승은 충격적인 경기력을 과시한 FC 바르셀로나 드림 팀 3기가 가져간다.[11] 이에 빡친 마드리드는 페레스 회장을 다시 선임하게 되고, 갈락티코스 2기가 시작된다. 기존의 공격수 라인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카카 등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을 첨가하였으나 최전방 공격진은 누가 라울의 파트너가 되느냐가 주 관심사였을 정도로 라울의 존재는 확고부동이었다. 그러나 2009/10 시즌 후반에 가며 이과인이 폭주를 시작하고, 벤제마의 희망 고문이 시작됨에 따라 서서히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2010/11 시즌을 앞두고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며 팀 내 노장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직 자신의 실력이 건재하다고 생각한 라울은 이적을 결심하고,[12] 샬케로 떠나며 마드리드에서의 커리어를 끝낸다.[13] 이렇게 2010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샬케 04로 적을 옮기면서 이젠 전성기도 다 지난 퇴물'이 되어버린 줄 알았으나...

샬케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초반 10경기 가량 라울은 침묵하며 '퇴물인가, 역시 원 클럽 맨이라 적응이 힘든가' 등 억측이 쏟아지는 와중에 훈텔라르가 골을 쏟아 내며 샬케를 지탱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골이 하나 둘 쏟아지더니 리가에서도 무서운 능력을 과시했다. 그 반대로 훈텔라르는 무서운 침묵을... 어쨌든 설마 하던 챔스도 조별 리그를 1위로 뚫어내고, 16강, 8강까지 뚫어서 4강까지 올라갔으며, 시즌의 대미는 포칼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9년 만의 우승이고 유로파 진출권도 따냈기에 샬케로서도 뜻깊지만, 생애 최초로 국내 컵 대회에서 우승 컵을 들어 올린 라울에게도 감격스러운 우승이었다.[14] 특히 헤더 한 방으로 바이에른을 침몰시킨 4강전 경기는 라울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면. 어느 웹툰에서는 라울을 두고 '이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골을 넣는 것 정도입니다선수 생명이 다 했어요'라고.

2011/12 시즌, 감독이 펠릭스 마가트에서 랄프 랑닉으로 바뀐 이후 전술적 변화에 따라 프리 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주전으로 소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겹쳐 말라가, 파리 생제르맹 등 신흥 돈 지랄 팀에서 비드가 쏟아졌으나 프로답게 계약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하여 잔류가 결정되었다. 멘탈 킹 오오...

2011/12 시즌 전반기, 공미로 포지션을 바꾼 라울은 팀의 중추로 활약하며 리가 17경기 10골을 꽂아 넣었다. 샬케 팬들은 '레알 마드리드? 그게 뭔가요? 라울은 우리 레전드!'라며 날뛰었다.
이에 샬케 구단에서는 라울과의 계약이 만료된 뒤 라울의 등번호 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2013/14 시즌부터는 막스 마이어가 이 7번은 이어받아 뛰고 있다. 단기 영구결번단기 영구? 말이야 방구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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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1/12 시즌 이후 라울은 샬케 04를 떠나서 K-리그 공공의 적 알 사드로 이적을 하게 된다. 하지만 1년 계약인데 알 사드가 리그 4위에 머무르면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해 한국 선수와 대결할 일은 없어졌다.

2014년 레알 마드리드가 라울의 복귀를 추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거기에 코칭 스태프가 아닌 스포팅 디렉터나 구단 스태프 자리를 약속한다고. 라울 측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2014년 10월 20일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다. ESPN은 "라울과 뉴욕 코스모스가 입단에 합의했다. 연봉을 비롯해 정확한 계약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년 계약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또한 "내년에 창설되는 유스 아카데미로 지도한다"고 덧붙였다.

2015시즌 NASL 봄 시즌에 9경기 출전 4득점으로 6월 13일 뉴욕 코스모스를 NASL 봄 시즌 무패 우승(5승 5무)으로 이끌었다. 6월 17일에는 FA컵에 해당하는 US OPEN CUP 32강전에 출전, 뉴욕 시티를 상대로 승부차기 승을 하는데 일조 했다. 가을 시즌에도 19경기에 출전하며 팀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는 오타와 퓨리를 상대로 3:2승리를 거두며 미국에서도 리그 우승을 차지 했다.

11월 15일 오타와 퓨리와의 경기를 끝으로 동료 마르코스 세나와 함께 은퇴했다.

3 국가 대표 커리어

그러나 국대에서의 라울은 까임과 조롱의 대상이다. 102경기를 뛰며 44골을 넣었으며 라울의 골 기록은 다비드 비야가 갱신하기 이전까지 스페인 국대 최다 골 기록이었고 2002년 이에로의 은퇴 이후 대표 팀 주장도 도맡았다. 하지만 팀 커리어가 이 당시 스페인이 강팀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해도 나쁜 편이었다. 예선에선 골을 몰아쳤으나 본선에선 부진에 시달리기도 하고[15]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그가 국대에서 빠진 다음 스페인은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달성하고 있으니... 다만 그가 지나치게 옛 스페인의 나쁜 점들을 혼자 뒤집어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명거리가 있다.

라울이 대표 팀에 더 이상 차출되지 못한 것은 라울의 폼이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1차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라울이 부진했던 시기는 03-04 시즌 후반기부터 05-06 시즌 정도까지였다. 하지만 이 시기 라울은 대표 팀에 꼬박꼬박 차출되었고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유로 2004에서는 모리엔테스와 멋진 골 장면을 만들어낸 것을 제외하고는 무기력했고 2006 월드컵에서는 주전도 아니었다. 그리고 라울이 클럽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유로 2008 시기에는 당시 대표팀과의 전술적인 문제, 팀내 구설수 등의 문제로 출전하지 못했다.

여기서 라울이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라서 레알까인 아라고네스의 중용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당시 스페인 대표팀의 경기를 꾸준히 봤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수준의 극히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는 실제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주장으로 단순한 소설에 불과하다. 아라고네스는 부임 초기인 2004년부터 라울을 꾸준히 출장시켰으며, 심지어 초기에는 그를 중심으로 팀의 전술을 짰으나 그가 부진하자 라울을 살리기 위해서 그를 중심으로 대표팀의 전술을 여러차례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대표팀에서 그의 이름값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기에 2006 월드컵에서 중용받지 못했고, 여기에 2006 월드컵 이후 아라고네스의 전술적인 변화, 대표팀에서의 부진, 그리고 팀내 불화 등의 문제로 대표팀에서 배제당한 것이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를 싫어해서 아라고네스가 카시야스와 라모스를 혹사시켰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다. 일단 당시 스페인 대표팀에서 대체불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라모스를 중용한 것을 마치 그를 혹사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명백히 악의적인 왜곡에 불과하며, 만약 정말로 아라고네스가 단순히 레알을 싫어해서 선수를 쓰지 않는 수준의 인물이었다면 카시야스가 아니라 그의 부임 당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던 레이나나 발데스를 쓰려고 했을 것인데, 아라고네스 시절 레이나는 만년 백업에 불과했고 발데스는 대표팀에서 아예 데뷔전조차 갖지 못했다. 아라고네스 체제에서 카시야스와 라모스는 핵심 중의 핵심 선수들이었던 데다가 아라고네스는 다른 선수로 이들을 대체하려는 시도조차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이들을 신임했다. 게다가 라울을 쓰지 않은 것을 비판하면서 또 반대로 카시야스와 라모스를 중용한 것을 혹사라고 비난하는 것은 순전히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전부 라울을 신격화하고 그가 대표팀에서 일으켰던 문제를 덮어버리기 위해 아라고네스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려는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델 보스케 스페인 국가 대표 팀 감독도 라울의 복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라울 본인도 '팀이 원한다면 돌아갈 것'이라며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담으로 해축 좀 봤다는 사람들 말로는,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의 라울이 출전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 한다.[16][17] 모리엔테스 막는 것도 버거운데 영혼인 라울까지 나왔으면 0:3으로 끝났을 것이다. 실제 라울은 2002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4경기 3골). 대외적인 공신도가 높은 키커 평점[18]을 첨부하자면, 이전의 98 프랑스 월드컵[19], 유로 2000[20]에서 팀내 중하위권 평점을 기록했던 라울은 우리와 8강에서 맞붙기 전까지 4경기 평균 평점 1.5점[21][22]이었다. 물론 경기 수가 적었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클럽에서의 폼에 비해 국대에서의 모습이 아쉬웠던 라울이 자국 언론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도 다 근거가 있었던 것.

앙리, 베르캄프 투 톱이나 알레제게 투 톱만큼이나[23] 유명한 라울, 모리엔테스영혼의 투 톱은 스페인 국대 올드 팬들이라면 종종 회자하곤 하는 그리운 콤비이다. 머리, 무릎, 허벅지, 가슴 등 그 어느 신체 부위로도 골을 다 넣어봤다고 할 정도로 타고난 타겟 맨인 모리엔테스에게 수비수가 붙으면, 라울이 이리저리 상대 진영을 휘젓고 다니는 플레이가 매우 유명했다.

4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

Míster Champions(미스터 챔피언스). 챔피언스 리그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라울을 빼고 챔스를 논할 수 없다. 데뷔 이래 매년 챔스에 개근하며 쌓은 내공이 어언 142경기. 역대 최다 출장이었으나 라이언 긱스, 사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마드리드의 또 다른 전설 이케르 카시야스가 라울의 기록을 깼다. 현재 카시야스가 최다 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156경기 출전인데 아직 FC 포르투 에서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뛸 수 있어 아직 카시야스의 기록은 현재진행형.

챔피언스 리그 골 부문은 또 어떤가. 56골을 기록한 뤼트 판 니스텔로이는 물론, 레알 마드리드의 스타 공격수들이 수십 년 동안 넘지 못했던 선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마저도 훌쩍 넘어선 71골을 기록했다. 이는 2014년 말엽까지 '단독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를 잇는 레알 마드리드의 7번 호날두와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가 나란히 기록을 넘어섰지만.

또한 챔스와 유로파를 합산해 계산한 '유럽 대항전 최다 골' 랭킹에서도 라울이 77골로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후에 14-15시즌 호날두가 78골로 기록을 갱신하였고, 메시와 함께 2위가 되었다.

현재는 메시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있다.

5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일명 El ángel del Madrid(마드리드의 천사).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인해 유독 이적생들이 많았던 레알 마드리드에서 진짜 전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16년간 뛰며 총 741경기에 출장했고, 323골을 넣었다. 이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넘어선 당시 레알 마드리드 최고 득점 기록이자 최다 출장 기록이다.

라 리가에선 총 550경기 228골을 넣어서 통산 5위의 득점을 기록했다. 이는 디 스테파노의 227골을 근소하게 앞선 기록이며 통산 1위인 메시의 기록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기록이지만, 기록을 경신하고자 했으면 충분히 했을 만하기에 아쉬운 기록이다. 그 놈의 갈락티코스 정책만 아니었어도 옛날옛적에 기록하고도 남았다

특징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천부적인 득점 감각과, 동료들을 지능적으로 활용하는 스트라이커이며, 묵묵히 팀을 이끄는 주장이었다.
2. 비교적 평범한 스피드와 개인기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히 다 해먹는다 축구 지능과 골 감각이 눈에 띄게 뛰어나다. 특히 쥐도 새도 모르게 수비 라인을 파고드는 솜씨가 일품이고 번뜩 나타나 사냥개처럼 골키퍼나 수비수를 물고 늘어지는 플레이에도 능하다.
3. 다양한 슛 기술(특히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로빙 슛이 일품), 박스 지역에서의 감각적인 위치 선정, 공이 어떤 방향에서 와도 정확한 피니시를 할수있는 천부적인 공격수.
4. 수비 면에서의 높은 공헌도, 팀을 위한 헌신적인 움직임. 루니가 좀 더 부드럽고 감각적으로 플레이한다면 라울과 비슷하게 될 확률이 높다.[24]
5. 무엇보다도 강인한 멘탈, 프로 정신, 소리 없이 팀을 이끄는 리더십.
6. 5번 항목을 바탕으로 바로 이 순간 팀에 필요하다 싶은 순간에 팀에 필요한 플레이를 해 주는 뛰어난 정신력과 감각.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3번 출장해 2골을 넣고 3번 우승한 사나이다.

마드리드에서 라울이 남기고 간 업적들은 실로 잊을 수 없는 것들이며, 팬들도 그를 '라울리토'라고 부르며 그 오랜 공헌을 기리고 있다(Raulito, Raul을 스페인식 애칭으로 부르는 표현). 갈락티코스니, 갈락티코스 2기니 하기 전에는 라울 마드리드가 맞았다.

오랜 기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이었고, 스페인 대표팀의 상징이었던 만큼 구설도 조금 있다. 예를 들자면 스페인 대표 팀에서 지역 감정의 중심축이었고, 클럽에서도 클럽 분위기를 자신이 주도했다는 점. 니콜라 아넬카, 시시뉴, 마이클 오언 등이 라울을 디스한 대표적인 선수들.

좋은 일화도 있다. 2007/08 시즌의 우승을 이미 확정지은 레알 마드리드는 레반테와의 리가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 무렵 레반테 선수들은 임금 체불로 인해 파업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경기는 무사히 치뤄졌는데, 라울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라 리가의 많은 유명 선수들에게 연락해 레반테 선수들을 위한 자선 경기 약속을 잡고 이를 레반테의 선수들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경기는 모두에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라울은 한 부심에게 다가가 그 부심과 포옹을 했다. 그 부심은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부심에서 은퇴하는 심판이었고, 부심은 라울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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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라울에 대한 말말말

"라울이 있기에 레알 마드리드는 승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라울은 마치 골을 넣으려고 태어난 선수 같아요. 득점할 수 있는 자리에는 항상 그가 있었습니다." - 티에리 앙리
"내 생애 라울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에서 뛴 것은 특권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 라사나 디아라
"라울의 DNA는 오직 승리를 향한 열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 - 페르난도 레돈도
"라울은 내가 생각하는 스페인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 파비오 카펠로
"라울은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 지네딘 지단
"물론 예전같진 않아요. 하지만 들이마드리드죠."- 레알 마드리드의 팬
"에이. 라울과 구티가 없는 마드리드요?상상할 수 없어요!" -레알 마드리드의 팬

7 기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골수 라울 빠돌이로 유명하다. 라울이 마드리드에서 한창 뛰어다닐 때도, 마드리드에서 샬케로 이적할 때도, 또 샬케 데뷔 시즌을 막 마쳤을 때에도 계속해서 어떻게든 모셔 오려고 바득바득 노린 걸 보면...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raul-lynnk_01.jpg 반지의 제왕 인증 샷
  • 2001/2002 시즌 라 리가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 팀의 1-0 신승을 결정짓는 결승골을 넣었는데, 이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 리가 통산 4500호 골이었다.
  • 2016년 10월 9일에는 스페인의 축구전문 통계업체 'CIHEFE' 가 최고점인 528점을 부여하여 프리메라리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8 기록

8.1 대회 실적

  • FC 샬케 04(2010/11~2011/12)
  • 뉴욕 코스모스(2015~)
    • NASL 사커 볼[25](1) : 2015
    • NASL 우즈남 컵[26] (1) : 2015
    • NASL 스프링 시즌(1): 2015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 1996 UEFA U-21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8.2 개인 수상

  • 최우수 신인 선수(라 리가): 1995
  • 최우수 스페인 선수: 1997, 1999, 2000, 2001, 2002
  • 프리메라리가 득점 왕: 1998-99, 2000-01
  • 코파 델 레이 득점 왕 : 2001-02, 2003-04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 왕: 1999-00, 2000-01
  • UEFA 올해의 공격수: 1999-00, 2000-01, 2001-02
  • UEFA 챔피언스 리그 최우수 공격수: 2000-01, 2002-03
  • 인터컨티넨탈 컵 맨 오브 더 매치: 1998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2000 팀 오브 더 토너먼트: 2000
  • IFFHS 세계 득점 왕: 1999
  • FIFA 100: 2004
  • 독일 골 오브 더 이어: 2011, 2013
  • 카타르 리그 페어 플레이 상: 2013
  • NASL 이달의 선수 : 2015년 5월

8.2.1 득점 기록

시즌클럽소속 리그리그FA컵유럽 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4/95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2892100
1995/96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40192186
1996/97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422151--
1997/98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51011122
1998/99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7252083
1999/00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417401510
2000/01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62400127
2001/02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51466126
2002/03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11620129
2003/04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5117692
2004/05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2910104
2005/06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2650062
2006/07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571075
2007/08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7181085
2008/09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7181373
2009/10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052072
2010/11FC 샬케 04독일 분데스리가341341125
2011/12FC 샬케 04독일 분데스리가321532114
2012/13알 사드카타르 스타즈 리그22912300
2013/14알 사드카타르 스타즈 리그1725250
2015뉴욕 코스모스북미 축구 리그[27]28820--
  1.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득점 역대 2위
  2. 이 번호는 라울이 떠난 이후 호날두가 물려받았다. 호날두마저도 레알 이적 첫해엔 9번을 달았다
  3. 레알 마드리드는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시벨레스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뒤 주장이 여신상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제목은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너무 자주 해서 매번 라울과 키스를 해야 하는 시벨레스의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
  4. 현지에선 'El señor de los anillos'라고 불린다. 'anillos'가 스페인어로 반지를 뜻하고, 'señor'는 영어의 'Mr.'와 같은 뜻.
  5. 이때는 1998 월드컵 득점왕 다보르 슈케르와 유고의 거성 프레드락 미야토비치가 결성한 투 톱에 밀려 섀도우 스트라이커 정도의 포지션으로 출전했다.
  6. 나이는 어리지만 30대 선수처럼 노련하게 경기를 뛰며 더욱 돋보였다. 흔히 말하는 이제 '축구가 보이는' 선수처럼 동료를 활용하며 슛과 패스할 시기를 잘 구분했다.
  7. 특히 2000/01 시즌엔 라 리가 득점왕과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동시에 거머쥐고 본인의 커리어 하이 스탯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 가장 유력한 발롱 도르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마이클 오언이 상을 가져가 논란이 되었다. 당시 마드리드는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 적은 점수 차도 아니었던지라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불가사의한 결과였다는 의견이 많다.
  8. 마켈렐레의 이탈은 한 가지 원인이었지 치명타는 아니었다. 치명타는 스쿼드 축소. 베스트 11 + 후보 선수 2~3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스 수준의 선수들이었다.
  9. 캄비아소는 나가서 인테르에서 성공한거지 레알마드리드에서는 대성할 자질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10. 호나우두의 챔스 기록은 42경기 16골로 그 명성이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비해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갈락티코스 초창기 시절에는 챔스에서 나쁜 모습을 보였다고 하긴 어렵지만 빡빡한 경기에선 그저 그랬고 팀 밸런스가 붕괴한 이후에는 미드필드에 별 가세 없이 최종 라인에서 골을 따 내는 역할인데도 정말 성적이 나빴다.
  11. 07-08 시즌 좋은 활약을 보였던 호비뉴의 이탈, 그리고 시즌 초반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던 루드, M 디아라, 루벤 데 라 레드의 시즌 아웃이 결정타였다.
  12. 무리뉴는 라울이 팀에 남기를 바랐지만 라울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찾아 떠난 것.
  13.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라울과 구티는 자신의 의지로 팀을 떠난 것이다. 물론 두 선수가 고향과도 같은 팀에서 은퇴하지 못한 것은 선수 개인에게나 팬들에게나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팀의 미래와 자신들의 출전 시간을 위해 좋게 헤어진 것은 분명하다.페르난도 이에로페르난도 레돈도 같은 병크를 반성한 듯 특히 라울의 경우 알 사드와의 친선 경기 개최를 통해, 클럽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14.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단 한 번도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라울이 이적한 직후 레알은 귀신 같이 코파 우승
  15. 유로 2000 8강 프랑스와 2:1 상황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이 되는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16. 이 당시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는데, 사실 경기를 못 뛸 정도로 심각한 정도의 부상은 아니였고, 8강 이후의 경기들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안 뛴 것. 여담으로 16강 전에서 한국이 이탈리아와 맞설 때도 알레산드로 네스타파비오 칸나바로 등이 나오지 못했다는 점도 생각해본다면 한국은 여러모로 운이 좋기도 했다. 주전이고 나발이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연속으로 만난게 운이 좋음? 물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톱 수준의 팀들은 주전과 비주전의 차이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으니 이 당시 한국 팀의 선전을 저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17. 월드컵이든 챔스든 유로든, 큰 대회에서 약체로 평가받는 팀을 만난 강팀의 감독들이 다음 스테이지 대비 차원에서 주력 선수들을 쉬게 하는 경우는 꽤 잦다. 당시 이탈리아전을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이탈리아전에서 한국은 이탈리아의 강한 압박과 통곡의 벽에 막혀 내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스페인 대표팀 입장에서 한국의 선전을 저평가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컨디션이 완벽하지 못한 에이스까지 풀파워로 출전시킬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마음놓고 있다가 일격을 당하는 경우도 많으니 결과론적으로는 감독의 실책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18. 1에서 6 사이로 0.5 단위로 점수를 주며, 낮을수록 활약을 좋게 평가한 것.
  19. 조별예선 탈락
  20. 8강 토너먼트에서 대회 챔피언 프랑스에 패배
  21. 조별예선 슬로베니아전 1.5점, 파라과이전 1.5점, 남아공전 1점, 16강 아일랜드전 2점.
  22. 경기 수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대회 MVP의 평점은 2점대 초중반에서 잡힌다.
  23. 앙리, 트레제게 투 톱이 이론상으론 정말 짱짱일 것 같은 조합이지만 생각보단 별로였단 평이 많다. 또 프랑스 국대는 주로 원 톱 전술을 썼기에 투 톱으로 나오기보단 앙리 주전, 트레제게 서브인 경우가 많았다.
  24. 루니가 라울보다 피지컬이 더 좋고 리그도 EPL이라, 그렇게 플레이하면 더 좋긴 한데 루니의 피지컬이 건재한 동안에는 그럴 일이 없어 보인다. 갑자기 그쪽으로 발전할 원인도 없고 주위에 본뜰 만한 선수도 없다.
  25. NASL 포스트 시즌
  26. NASL 봄 시즌, 가을 시즌 최종 합계 성적
  27.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부 리그로 2부 리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