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1 개요

중세와 근대 시기 이탈리아의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

'이탈리아 전쟁' 이라고 하지만, 두 번의 전쟁 모두 이탈리아인이 주역은커녕 피해자였다는 게 안습.

2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발생한 전쟁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이 벌인 전쟁.[1] 1494년에서 1559년까지 여덟 차례.[2]에 걸쳐 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벌인 전쟁으로, 이 밖에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도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프랑스의 샤를 8세나폴리의 왕위를 요구하며 이탈리아에 원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 때 프랑스는 대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전술로 이탈리아 각국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나폴리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스페인 연합왕국의 구성국이 된 아라곤은 1280년부터 시칠리아를 지배해 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를 점령해서 아들 페르난도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알폰소 5세에게서 따로 아라곤을 물려받은 동생 페르난도 2세는 형의 자손들을 나폴리에서 몰아낸 프랑스를 경계해서 개입했고, 이전 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도 개입함으로써 도합 여덟 차례 전쟁과 강화가 되풀이되었다.

여덟 차례의 전쟁을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1차 전쟁(1494~1495):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시작되었고 샤를은 나폴리 점령에 성공했으나, 베네치아, 교황령 등이 중심이 되어 체결한 베네치아동맹과 스페인 세력이 개입. 급히 프랑스로 퇴각해야 했다.
  • 2차 전쟁(1499~1504): 샤를 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수도로 한 밀라노공국을 정복, 이어서 나폴리왕국도 점령하여 샤를 8세의 숙원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프랑스 세력의 확장을 경계한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지원군으로 참전하겠다고 요청하는데, 이는 일단 나폴리왕국을 멸한 뒤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 나폴리를 독점하려던 계획이었던 것. 결국 스페인은 유명한 테르시오 진형을 창안한 명장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활약으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영유했던 나폴리왕국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며, 이후 나폴리왕국령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끝나는 1714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 3차 전쟁(1508~1516): 교황령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치세의 목표로 내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쟁.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율리우스는 먼저 프랑스와 손잡고 베네치아를 격파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간다고 생각. 다시 스페인을 끌어들여 프랑스를 몰아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페인이 프랑스 대신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 이에 율리우스는 신성로마제국을 끌어들여 스페인을 견제하려 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태자와 스페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희대의 엄친아 카를 5세의 등장[3]으로 인해 율리우스의 꿈은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잉글랜드는 이 전쟁에 처음으로 참가. 이후 간간이 프랑스의 적국으로서 참전하는데, 이는 백년전쟁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바랐던 왕 헨리 8세의 야심 때문.
  • 4차 전쟁(1521~1526):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 된 카를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20여년간에 걸친 노력의 시작. 하지만 이 전쟁에서 프랑수아는 카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는 커녕 3차 전쟁 후반부에 획득한 밀라노를 잃었으며,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개발살. 자기 자신도 포로로 잡혀 이듬해에야 겨우 풀려난다.
  • 5차 전쟁(1526~1530):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뒤 복수를 갈망하게 된 프랑수아 1세와 카를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교황 클레멘스 7세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코냑 동맹 대 카를의 싸움. 하지만 코냑 동맹은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것이었기에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 이 전쟁 중에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연합군이 로마를 초토화시켜 로마르네상스를 한칼에 해치워버렸다(...).
  • 6차 전쟁(1536~1538): 5차 전쟁의 결과 카를의 신하로서 밀라노공국의 공작으로 즉위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된 전쟁. 프란체스코 사망 이후 프랑스 왕 프랑수아는 자기 자신을 공작으로 내세운 반면 카를은 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는 펠리페를 공작으로 임명. 이에 화가 난 프랑수아가 선전포고했다. 이 전쟁 중에 프랑수아는 오스만 제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는데, 이는 이후 이탈리아 전쟁 내내 프랑스의 기본 방침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한편 이 전쟁은 교황 파울루스 3세가 중재하여 성립된 니스 조약으로 그 끝을 맺는데,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파울루스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 서로 전쟁과 강화를 되풀이하는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보다도, 니스에 도착한 프랑수아와 카를이 서로와 대면하기를 원치 않았고. 이에 서로 다른 방에 앉고 파울루스가 왔다갔다하며 서로의 말을 전달했기 때문교황을 시계추로 삼아버리는 프랑스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위엄.
  • 7차 전쟁(1542~1546):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사이의 영토분쟁 결과 벌어진 전쟁. 앞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은 모두 프랑스에게 불리한 쪽으로 끝이 났는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가 조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 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인 카를 5세가 서로와 겨룬 마지막 전쟁이 되는데, 전쟁 종결 1년 뒤인 1547년에 프랑수아가 사망하기 때문. 한편 이 해에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도 세상을 떠난다.
  • 8차 전쟁(1551~1559):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 앙리 2세가,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한 전쟁. 앙리 2세의 정책은 프랑수아 1세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닌데, 따라서 '카를의 세력을 꺾어누르려던 아버지의 유지를 본받겠음!' 하는 식으로 벌인 전쟁이다. 비록 1556년에 카를 5세가 퇴위하며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주고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을 주어[4] 카를의 제국이 둘로 쪼개지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이번에도 이기지 못했고사실 여덟 번의 전쟁 가운데 프랑스가 웃으며 끝낸 전쟁은 3차 전쟁 한번뿐이다, 1559년의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스페인과 강화를 체결. 스페인이 이탈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직접, 간접 지배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한편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거점인 칼레가 프랑스에게 함락된 것도 이 전쟁에서였는데, 펠리페 2세의 아내가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였고. 따라서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동맹으로서 참전했었기 때문.

한편 이탈리아 전쟁으로 유럽의 군대 편제는 크게 달라지게 되었는데, 먼저 여러 종류의 병종을 한 부대에 편제하는. 이른바 '제병연합' 전략이 본격적으로 틀이 잡히게 되었다. 백년전쟁 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기병만 우루루 몰려가거나 거의 대부분 궁병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편제하거나 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런 현상이 거의 사라지게 된 것.

또한 총이라는 무기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5], 샤를 8세가 이탈리아에 포병대를 이끌고 가 굉장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던 것을 계기로 대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축성술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무조건 높게만 쌓아올리면 OK였던 경향 대신 낮지만 튼튼하게 쌓아올리는 경향이 생겨난 것.

3 나폴레옹과 신성로마제국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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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중 리볼리 전투를 다룬 삽화

나폴레옹 전쟁
이탈리아 전쟁이집트 원정

1796년부터 1797년에 걸쳐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프랑스오스트리아의 전쟁.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수 있다.

툴롱 공략의 승리로 사단장으로 승진한 나폴레옹은 1794년에는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대 사령관으로 승진해있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로선 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려는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었다.

결국 툴롱 공략에서 명성을 날린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원정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게 하였다.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병력은 4만명 정도였지만, 나폴레옹이 이끌고 갈 원정군은 보급이 무척이나 빈약해서 사기가 많이 꺾인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 나서기 앞서서 "정부는 제군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군들을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데리고 간다. 제군들은 거기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하여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렸다고 한다.

이 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서 북이탈리아로 쳐들어 갔다는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건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때고 이때는 해안가로 돌아서 산맥을 피했다. 이때 영국함대가 나폴레옹을 덮쳤다면 역사는 다른길로 걸어갔을 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원정대는 북이탈리아를 침공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고 1796년 5월, 밀라노를 점령했다. 또한 그 때까지 최전선에서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군을 단 한달만에 항복시켜버리고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 최대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 당시 전투 중 전투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은 떨어졌지만 이후 나폴레옹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가 있는데 바로 아르콜 다리 전투이다. 아르콜(Arcole)이란 지역을 통과하던 도중 2000여 명의 오스트리아군 병력이 지키는 다리를 통과해야 했고, 프랑스군은 다리를 쉽게 돌파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 때 나폴레옹이 삼색기를 들고 최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해 다리를 돌파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추가한 영웅담으로 실제로는 강둑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의 총격으로 죽을 뻔 했다. 부상투혼을 발휘한 장 란이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구원해냈다. 이후 3일 동안 돌파 시도와 후퇴를 반복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겁을 먹고 후퇴해서 전투가 종료된 것.

오스트리아는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나폴레옹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치뤘지만(카스틸리오네 전투, 알 코레 전투, 리보리 전투) 결국 1797년 2월에는 만토바가 함락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4월 18일 레오벤에서 정전을 제의하여 레오벤 강화가 체결되었고 1797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와 남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를 차지했으며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와 같은 공화제를 도입한 치살피나 공화국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포기하는 대신 베네치아를 획득했다. 또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비밀조약으로 프랑스는 라인강 서안을 영토로 삼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 또한 이 전쟁의 승리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1.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 이 주된 레퍼토리이지만, 그렇게만 정의할 수는 없다. 여덟 차례 벌어진 전쟁마다 참전국이 모두 제각각이었고, 그 가운데 단골이 프랑스와 스페인이었지만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교황령, 베네치아 등등이 뒤따르기 때문.
  2. 다만, 전쟁의 양상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스페인 대 발루아 왕가의 프랑스가 되는 1521년부터 1559년까지의 다섯 차례의 전쟁을 '합스부르크-발루아 전쟁' 이라 부르기도 한다
  3. 1516년에 스페인 왕으로 즉위,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즉, 당시의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전혀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4. 여기에 베네룩스 등의 저지대 국가 지방, 아메리카의 식민지가 추가된다. 본래 카를은 펠리페에게 신성로마제국까지 몰빵해주고 싶었지만, 펠리페 자신이 스페인인이라는 귀속감이 강했던데다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제후들이 펠리페보다 황제 대리인으로 신성로마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한 페르디난트를 지지. 결국 카를은 페르디난트의 직위에서 '대리인' 이라는 부분을 떼어내야만 했다.
  5.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총에 맞아 전사한 최초의 지휘관으로 알려진 인물은, 2차 전쟁 당시 전사한 프랑스의 지휘관 느무르 공작 루이 다르마냐크(Louis d'Armagnac, Duke of Nemour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