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자레 보르지아

Cesare Borgia[1] / Cèsar Borja[2]


탄생1475년 9월 21일
사망1507년 5월 11일


1 개요

르네상스이탈리아성직자, 정치가, 장군. 공식직함으로는 환속 전 팜플로나의 주교, 발렌시아대주교, 추기경. 환속 후 교황령군 총사령관이며 발랑스와 로마냐의 공작.

체자레 보르지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태어나 야심을 가지고 성직을 시작하여 불과 18세에 추기경이 된다. 1497년에는 교회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1498년 8월 역사상 스스로 추기경직에서 사임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그 후 아버지인 교황과 프랑스의 지원 아래 발렌티노로마냐의 공작, 안드리아와 베나프로의 군주, 디오이스의 백작, 피옴비노·카메리노·우르비노의 지배자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용병대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의 선종과 그의 라이벌이었던 율리오 2세의 즉위, 자신의 신병으로 급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 후 전쟁터에서 불과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마키아벨리의 역작 군주론의 모델로, 뛰어난 군사전략과 외교술 및 정치감각으로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로드리고 보르지아(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추기경이던 시절 낳은 사생아로, 어머니는 알렉산데르 6세의 내연녀 반노차 카타네이로 알려져 있으나 이설도 있다.[3] 성직자로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은 일단은 공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부자지간으로 등록되지 않았으나,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사실 당시 성직자결혼은 못해도 아이는 낳을 수 있었으며, 워낙 이런 풍조가 만연해서 신경쓰는 이도 적었다. 다만 성직자의 아이들은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만 인정되기 때문에 부친의 작위, 가문을 계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머니 쪽 가문이나 재산 등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탓인지, 육중한 돼지거구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재능있고 야심 넘치는 소년이었다.[4] 아버지인 로드리고에게는 대단히 아낌받으면서도 동생인 후안만큼 큰 주목과 신임을 받지 못했다. 이는 체자레의 무자비하면서도 냉철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로드리고의 입장에서 체자레보다는 아둔한 후안이 보다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성격 면에서는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처럼 사교적이지 않아 겉으로는 솔직해보여도 속으로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타입이었다. 이러한 성격들은 후일 그가 짧게나마 로마냐를 지배하게 되는 원동력이었다. 그외에도 열광적인 즐거움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 한동안 무기력과 침울함에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자존심이 강해 명예를 훼손당하면 깊이 분노해 반드시 복수하는 인물이었고, 이는 후일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의 집단 처형에서 표출되었다. 의심까지 많아 넓게는 가족, 좁게는 여동생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재능면에서는 동시대의 상층 계급 청년들이 으레 그러듯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문학자들의 저서들을 탐구하는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그에 더해 승마나 무기 다루는 법까지 배웠다. 체자레의 경우 장성한 후 맨손으로 편자를 구부릴 수 있다는 평판이 나돌 정도로 힘이 셌으며,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갔으며, 스페인의 친족들로부터 투우를 배웠고 이러한 교육은 그가 이른 나이에 성직에 있을 무렵에도 계속되었다.

1481년 6세로 추정되는 나이에 그의 아버지가 당시 교황을 설득해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체자레의 성직록을 허락하는 관명장을 발급해고 1482년에 아라곤의 페르디난드는 법적으로 사생아 출신에게 규정되어 있는 지위상의 불이익으로터 구제해, 그가 스페인에서 영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어 체자레에게 스페인의 교회들을 포기만 한다면 유리한 관직들을 모을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 그리고 3월에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교황청 고위 성직자가 되어 7월에 부친이 주교로 있던 발렌시아 교구 성당에서 성직록과 참사회원직을 수여받았고 아버지의 고향인 아티바에선 부주교였다.

그리고 1483년 4월에 알바르의 수도원장을 거쳐 이듬해 새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부친 로드리고가 주교로 있던 카르타헤나 교구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엔 마조르카 성당의 수급 성직자, 레리다 성당의 참사회원로 임명되었지만 체자레의 나이에서 알듯이 어떤 의무를 떠맡을 수 없었고 거의 대리인이 수행했으며, 모든 수입은 그의 양육비와 교육을 위해 부친에 의해 사용되었다.


2.2 중반기

2.2.1 1489년~1497년

1489년 교황령인 페루자에 있는 사피엔차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체류했고, 3년간 페루자와 피사의 대학들에서 공식 교육을 마무하기 위해서였다.[5] 1491년 15세 때 사제 서품을 받지 않는 가운데 팜플로나의 주교가 되었고,[6] 그리고 그해에 팜플로나 주교의 신분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피사로 가 그곳에서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차남이자 추기경이며 후일 레오 10세로 알려진 조반니 메디치와 알게 된다.[7]

그뒤 1492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고 그의 아버지가 교황에 선출되자 18세에 발렌시아의 추기경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했다. 성직자의 자식들은 사생아 취급을 받기에 보통 주교까지가 한계인데, 체자레처럼 교황의 사생아가 추기경까지 오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8]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이는 이는 비이탈리아인과 측근들로 추기경단을 꾸리려 했던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체자레보다는 여전히 후안을 더 총애했다. 본인이 소풍 갈 때 체자레를 빼놓고, 인질로 잡혀왔던 오스만 투르크 왕자 젬[9]과 대동했을 정도였다. 허나 체자레는 점차 아버지의 정치적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494년 샤를 8세이탈리아 침공 전 주요 지역을 정찰할 때 함께 동행했으며 부친의 협상에 은밀히 관여하였고, 스페인에 있던 형제 후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편지까지 보내는 등 가문의 일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 8세이탈리아를 침공, 로마로 향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12월 18일 피신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로마 근처에 도달했고, 로마 시민들 또한 알렉산데르 6세에게 프랑스 왕과 협상하지 않는다면 성문을 열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는 갑작스럽게 로마에 남아 샤를 8세와 협상을 했다.

샤를 8세가 산탄젤로 성과 젬 왕자를 넘기는 것과 체자레를 볼모로서 나폴리 원정으로 동행하는 무리한 조건을 걸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자레 부자는 지하통로로 통해 산타젤로 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으로 알렉산데르 6세샤를 8세의 무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1월 28일 체자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나폴리로 향했으나 1월 30일 벨레트리에서 말구종으로 변장한체 프랑스군 진영을 탈출해 로마로 스플레토에 있는 알렉산데르 6세에게로 돌아왔다.[10]

체자레의 탈출을 알게된 샤를 8세는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체자레를 내놓으라고 항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 점차 두 사람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샤를은 나폴리에 무혈입성하여 나폴리 왕을 자칭하긴 했지만, 알렉산데르 6세의 제안으로 교황령을 주측으로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최초의 신성 동맹[11]을 결성하는 한편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으로 피신한 전(前) 나폴리 왕이 스페인의 지원군과 함께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샤를은 급히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체자레가 이때 매독에 걸렸다는 주장이 있다.[12]

1497년 6월 14일 수요일 오후 체자레는 동생 후안과 사촌인 몬레알레의 추기경인 후안 보르지아와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만찬을 했다. 그 후 동생 후안은 귀가길에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되었다가 2일이 지나서야 하인과 함께 테베레 강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마침 수중에 있던 지갑의 돈도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체자레로 추정되고 있다. [13]


2.2.2 1497년 이후

이후 체자레는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하는 페데리코 4세[14]의 대관식을 집전하기 위해 나폴리로 갔으나 그 이면은 보르지아 가문의 이익을 더 얻기 위한 것이였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자레는 환속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 또한 아들의 세속영지와 아내감을 구할 겸 동맹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폴리 왕 페데리고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나폴리의 국왕이었던 페데리고는 왕가의 적녀와 교황의 사생아 간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겨 대신 가문의 서출 중 하나였던 알폰소에게 비셀리에 공작위를 주고 체자레의 동생이었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결혼하게 했고, 보르지아 가문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재혼 외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에 보르지아 가문은 나폴리와 그뒤에 있던 아라곤 왕가와 결별, 당시 스페인과 대립 중이던 프랑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샤를 8세이탈리아 원정이 실패된 이후 알렉산데르 6세는 후안 보르지아가 암살되기 3개월전 샤를 8세에게 우호사절을 보내 관계개선을 꾀했으나 샤를 8세가 4월 7일 앙부아즈 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샤를 8세의 사망은 알렉산데르 6세에게 호기로 작용했고, 조모의 집안인 비스콘티가와의 혈연을 내세워 밀라노 지역과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해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샤를 8세의 미망인과 재혼하려는 것을 요구하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와 교섭했으며, 루이 12세교황의 원하는 중요한 것을 약속했다.[15] 그리고 1498년 8월 17일 체자레는 추기경단에서 추기경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고, 곧 루이 12세의 특허장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프랑스 사절로 통해 발랑스 공작이 된다.[16]

1498년 10월 체자레는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그곳에 있는 나폴리 공주 카를로타와 접촉할 겸 새로운 동맹인 프랑스의 왕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자레는 마르세유를 거쳐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왕과 사냥터에서 만나 이후 한동안 프랑스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카를로타와는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유명해졌으며 1499년 5월 루이 12세의 주선으로 프랑스 왕족이자 나바라 왕 후안 3세의 여동생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게 되었다.[17] 그는 2개월 동안 아내 샤를로트와 함께 있다가 그해 7월 루이 12세이탈리아 원정에 200기의 기병을 거느린 채 참전해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1499년 10월 체자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밀라노로 입성했고, 로마로 돌아와 교황령군 총사령관이 된 체자레는 1499년부터 1502년에 걸쳐 로마냐와 우르비노 등 수많은 지방을 정복해 로마냐 공국을 세워 통치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정은 단번에 진행된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첫번째 정벌은 로마냐 지방으로 본래 교황령이었으나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지방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도시들이었으며, 그 도시들을 발판으로 이탈리아 전토의 통일하는 것이 알렉산데르와 체사레의 목표였다.[18][19]

그해 11월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독이 묻힌 편지를 보낸 포를리와 이몰라의 백작부인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보였다. 1500년 2월 체자레는 일부 군사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이었던 비셀리에 공작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또 다시 모든 의혹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해 8월에 그는 다시 군대를 몰고 내분중인 시에나를 점령했고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파문을 받은 리미니, 파엔차, 페사로를 쳤고, 수많은 용병부대 및 프랑스군으로 이루어진 12,000명을 이끌고 리미니로 진군, 리미니의 영주였던 판돌포 말라데스타는 체자레에게 항복한 후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리미니에서 도망쳐 체자레의 교황군은 리미니에 무혈입성했다. 그의 2번째 목표는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첫 남편이었던 조반니 스포르차가 있던 페사로였고, 조반니는 옛 처남이 기세등등하게 페사로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싸우지도 않고 페사로에서 도망쳐, 체자레는 또 다시 리미니처럼 무혈입성했다.

그해 11월 체자레와 그의 군대는 12세의 어린 영주인 아스토레 만프레디가 지배하는 파엔차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피엔차는 다른 두 도시와는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가 1501년 4월 영주인 아스토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로마로 보내졌다.[20]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큼 유능한 통치자로서 단기간에 로마냐 공국을 베네치아밀라노 등에 맞설 만큼 키워냈으며, 자신이 고용한 용병대장들이 자신의 세력을 경계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며 이들을 모아놓곤 세니갈리아에서 집단처형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면모를 과시했다[21].


2.3 말기

그러나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병사[22]하자 라이벌이던 율리오 2세와 비밀협약을 맺어 콘클라베에서 그를 지지했으나, 선출된 교황 율리오 2세는 간단히 손바닥을 뒤집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자신까지 중병[23]에 걸려[24]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다[25][26].

그는 곧 로마를 빠져나가 스페인령 나폴리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의 지령을 받은 나폴리 총독 곤살로 데 코르도바[27]에게 체포되어 1504년 스페인으로 이송, 수감되었으나 2년만에 탈옥해 아내의 나라인 나바라 왕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1507년 31살 나이에 나바라의 친스페인 세력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던 도중 전장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해 닥돌하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적병들에게 다굴을 맞아 최후를 맞았다.

그 뒤 적병들이 그의 번쩍이는 검은 갑옷과 고급 의상이 탐나 닥치는 대로 벗겨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알몸뚱이가 피를 흘린 채 누워 있었다고. 장례를 치른 뒤에도 수난은 끝나지 않아서, 처음에는 교회에 묻혔던 그 시신이 도로 파내져서 교회 계단 옆, 순례자들의 길 아래 파묻혀 깔리는 굴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후 500년이 된 2007년, 현지 주교가 교회 안으로 다시 이장하도록 허용했다.


3 그 외 일화

아내와 결혼한 뒤 딱 일주일 동안만 만나고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체자레 평전]을 보면 실제로는 프랑스에서 3개월 간 아내와 함께 살았고, 이탈리아로 아내를 데려가려 했으나 프랑스 왕이 아내를 인질로 잡아두어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저때 임신한 건지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외에도 11명의 사생아가 있다고 한다. 이 중 제르니모라는 서출 자식은 부친인 체자레의 성격을 물려받았고, 아버지가 이탈리아에 축출된 후 고모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비호를 받았는데, 당시 그 와중에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페라라인 암살자들을 끝까지 추격해 처형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지아근친상간을 했다는 의혹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는데, 이는 율리오 2세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새로운 의혹[28]이 있으며[29], 남색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30]. 다만 체자레의 경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 대한 감정은 사실인 듯하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에 따르면, 체자레는 양어머니 혹은 친어머니인 반노차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설을 비슷하게 제기한 만화가 칸타렐라.

그런데 이 사람의 행적을 짚어가다 보면 모녀덮밥, 모자덮밥, 형제덮밥, 자매덮밥, 네토리[31], 심지어 부자덮밥까지… 다양한 덮밥을 즐겨 먹는 덮밥 마니아처럼 보이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물론 체자레의 행적을 다루는 역사의 사료대로 치정행각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밤새 토론만 했던 관계일 수도 있다.

한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군사고문으로 영입하여 신무기와 요새를 설계하게 했다[32].


4 평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에서 체자레를 유능하면서도 냉혹하고 추진력과 결단성을 갖춘 군주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의 실례로 체자레의 행동력과 결과를 예로 든 것일 뿐, 체자레가 마키아벨리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인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체자레를 진정한 군주의 모델로 제시한 건 당시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말뿐이었고 실제로 계획, 행동을 한 건 체자레 뿐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상으로는 로마인 이후 베네치아인, 로마인, 피사인이 아닌 최초로 이탈리아인이란 개념을 심어놓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카이사르와 함께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동인녀 의혹을 받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저서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읽어보면 된다. 체자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영국 역사가 새러 브래드퍼드가 쓴 체사레 평전인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를 사로잡은 군주론의 모델>을 추천한다.

사학계에서 나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순혈주의[33]에 대한 희생양이라는 측과 율리오 2세교황령 재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34]은 체사레가 초석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측도 존재하기 시작한다.

초인 덕후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주장한 초인을 정의한 언급에서 초인이란 도덕적인 성인군자가 아니라 체자레 보르지아 같은 사람이야말로 초인이란 말을 남겼다. 온갖 불미스러운 의혹과 아버지의 빽만 제외하면 단기간에 이탈리아의 실권자중 한 명이 된 것을 주목한 것 같다.


5 예수 초상화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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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냉혹한 학살자가 바로 현대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서양식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지배 시기에 대놓고 예술가들에게 예수의 초상화를 그의 얼굴을 본따 그리게 했다는 것으로, 이것은 프랑스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제기한 설인데 학술적으로는 그다지 신빙성 없는 떡밥으로 영문위키에서는 토론에서 지지측이 근거도 제대로 제기하지 못해서 본문에는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며, 애당초 예수의 그림은 화가마다 달리 그리는터라 누구를 딱 모델로 정한 표준영정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예수 표준영정 모델 음모론은 체자레뿐만이 아니라 알브레히트 뒤러등 예수와 닮은 것 같은 사람에게는 항상 달리는 떡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음모론이 한국 인터넷 일부에서 사실인냥 잘못 알려져 정설로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

혹자는 예수의 그림이 '체자레의 초상화와 닮았음이 일목요연하다'라고 표현하며 외모의 유사점만 보고 마치 사실인냥 단정짓기도 하지만 실은 오똑한 코와 푸른 눈은 전형적인 서구 백인의 미남상이며 자신의 민족적 외형을 종교적 성인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불교초기 미술에서 인도남성으로 표현되던 부처상이 동아시아에 유입된 이후 전형적인 동양인 얼굴로 바뀌게 된 것과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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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흔히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이 르네상스가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성 다미아노 십자가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외형이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성 다미아노 십자가에 그려진 이 성화는 12세기 시리아 수도자가 그린 비잔틴 양식의 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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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챠코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12세기 러시아의 이콘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외형적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체자레가 예수 외형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를 고려하더라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냥 이탈리아인 미남의 모습으로 그린 것 뿐이다. 또한 이전 항목의 체자레 모델설에서는 '중세때도 머리 긴 예수 그림이 있었지만, 현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고 되어있으나 이 역시 근거가 미약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예수는 표준그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흔한 이미지라고 해봤자 '곱슬거리는 긴 머리를 가졌으며 수염이 있는 현자 스타일의 젊은 남성' 정도가 전부이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예수를 그려보라고 해도 대부분 '장발, 곱슬, 수염, 현자 스타일'의 예수를 그리려고 하지, '특정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예수'를 그리려 하지는 않는다. 과연 위의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를 '현대의 예수'와 동떨어진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예수의 그림과 닮은 얼굴을 가진건 위에 언급한 또다른 음모론 대상인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이 체자레 뿐만이 아닌데 유독 체자레 초상화만 보고 '그래 이거야!'라고 성급한 판단을 일으키는 어리석음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양한 원인이 있을수 있음에도 무조건 프리메이슨으로 몰고가는 것과 같은 여타 다른 음모론들과 일맥상통하는 특성을 보인다.


6 대중문화 속의 체자레

어쩐지 만화계, 특히 순정만화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자주 각색되는 실존인물로 유명하다. 사이토 치호의 화관의 마돈나, 소료 후유미의 체사레 ~파괴의 창조자~, 히구리 유우의 칸타렐라, 토가와 미토모의 순백의 피오렌티나[35] 등등에서 출연한 바 있다.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한 김강원의 만화 '바람의 마드리갈'에서도 한 줄 언급된다.[36] 국내 로맨스 소설 중 '이태리 연가'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해서 여주인공과 연애를 펼친다. 참고로 이 소설은 한국의 평범한 여대생이탈리아 배낭여행을 떠나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고 당시 체자레 보르지아의 사촌 여동생의 몸에 빙의되는 내용이다. 이고깽??? 이건 뭐 용랑전 로맨스 버전도 아니고…

여담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에드몽 당테스가 얻게 되는 막대한 재산도 간접적으론 보르지아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보르지아에게 숙청당한 추기경이 재산을 뺏기지 않으려고 무인도에 몰래 감췄는데 가문이 멸문당해 잊혀져 버린 것이기 때문. 그리고 재산의 정체와 위치를 기록한 문서가 한 성경책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 성경책은 가문의 남겨진 후손들이 물려받았고, 마지막 후손이 사망한 뒤 당시 그 후손의 비서였던 파리아 신부가 이 성경책을 상속받은 것이다.


6.1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에서

흑태자 사후 구 게이시르 제국령을 관리하는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에 이 인물을 대입시켰다. 구 제국령을 종교국가화하며 독재 정치를 펼쳤으며, 제피르 팰컨시라노 번스타인의 활약으로 차차 밀려 종국에는 파괴신으로 각성하나 결국 라시드 팬드래건의 지원을 받은 제피르 팰컨에 의해 죽는다.[37] 서풍의 광시곡 자체가 시오노 나나미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에서 모티브를 받은 게임이니만큼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자세한 부분은 체사레 보르자 참조.


6.2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

항목 참고.


6.3 영상화

2005년 스페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 국내에선 보르히아로 통용. 상당히 선정적이고 보르지아의 막장 스멜이 강조된 영화.


2011년에 미드 더 보르지아 1시즌이 나왔고, 2시즌이 제작중이다. 여기서는 의외로 또 훈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겠다'라는 신조로 가족과 아버지의 적들과 싸우는 전사의 입장. 자세한 것은 더 보르지아 항목에 설명되어져 있다.
  1. Cesare는 카이사르이탈리아식 발음이다. 본인도 생전에 자기 이름의 원래 주인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며, 'Aut Caesar, Aut Nihil(황제이거나, 무(無)이거나)' 라는 표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2. 스페인어카탈루냐어 이름. 보르자 가문은 스페인에서 성직을 지냈고, 체사레 보르자 본인도 스페인에서 성직을 맡았기 때문에 그를 "스페인계 이탈리아인"으로 소개한다.
  3. 체자레는 차남인데, 형인 페드로 루이스와 어머니가 다르다. 페드로 루이스는 전장에서의 공적과 부친의 후광으로 20대에 간디아 공작에 서임되는 것과 함께 아라곤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요절했다. 원래대로라면 페드로 루이스의 작위와 약혼녀는 차남인 체자레에게 넘어가야 했겠지만, 당시 체자레는 이미 성직자가 되었기 때문에 3남인 후안에게 넘어갔다.
  4. 다만 체사레 생전의 초상화들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위의 초상화 또한 둑스 발렌티누스라고 세겨져 있기에 체사레의 초상화로 보고 있는 것이 대세다.
  5. 이때 페루자는 약 2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싼 부유한 농촌지역(Contado)로 이루어진 교황령의 중요한 도시였지만, 실세는 교황이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지방 귀족인 발리오니 가문에게 있었다. 아비뇽 유수 이래로 교황의 지배를 받던 로마냐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형식상으로만 교황의 지배를 인정하고 실질적으로는 모조리 떨어져나갔기 때문으로, 훗날 체사레 보르자는 이 도시들을 형식 지배에서 실질 지배로 바꾸고 자신의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6. 이때 팜플로나 주민 전원이 분개해 봉기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임명 이유를 순진하게 "그의 공적, 미덕, 신조"라고 발표했고 체자레 또한 대리인을 보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결국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개입해 유야무야된다.
  7. 둘은 같은 동갑이긴 했지만 조반니의 서기였던 세르 스테파노의 기록을 보면,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사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도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8. 물론 사생아 출신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긴 한데, 이쪽은 태어나자마자 큰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위에서 거론되었던 레오 10세의 사촌 동생인 클레멘스 7세. 아버지는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큰아버지가 그 유명한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로렌초),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 파치 가의 음모로 동생이 죽고 난 뒤 동생의 애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메디치 가문의 적자로 받아들였던 것. 다른 설도 있는데, 당시 교회법에서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두 커플이 서로 배우자가 되겠다고 맹세만 하면 그 자식은 적자로 인정을 받았는데, 클레멘스 7세의 양친은 그것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로렌초가 그 조카를 받아들인 건 생모가 죽은 뒤였다. 하지만 체자레의 경우 확실한 사생아였기 때문에 내연녀였던 반노차와 그의 남편이었던 도메니코 다 리그나노의 아들로 해야 했고 후일 공식석상에서 조카로 기록된다.
  9. 사정이 조금 복잡한데,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황태자들끼리 하나뿐인 옥좌를 두고 내전을 벌이는 것이 관습이자 법이었다. 이에 젬도 부황인 메메드 2세가 죽자 형인 바예지드와 내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패배하여 성 요한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로도스 섬으로 망명. 이를 전해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기사단 측에 '얘를 개종시켜서, 이교도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총사령관으로 삼아야겠음' 이라고 통보하여 신병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젬은 기독교로 개종할 뜻이 없었고, 황제가 된 바예지드도 '우리 나라로 돌아오면 골치 아프니, 그냥 계속 붙들고만 있으시오' 하고는 그 대가로 금과 성유물을 보냈다.
  10. 체자레의 탈출 계획은 그가 프랑스군을 따라 로마를 떠나기전에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잠시 로마에 들려 사람들로 하여금 주둔하고 있던 스위스 용병들을 습격하게 만들었는데 어머니였던 반노차의 집이 이들에게 약탈당했기에 보복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1. 교황령이 주창하긴 했지만, 주도권은 많은 병사를 제공한 베네치아에 있었다. 따라서, 이 동맹을 '베네치아동맹' 이라고도 한다.
  12. 추기경직을 버리고 나폴리를 다녀올 때 몬토바 후작부인의 밀정이었던 도나토 데프레티의 보고에서, 그가 당시 프랑스 질병으로 불렸던 매독에 걸렸다고 보고했다.
  13. 단 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수사가 중단된 것과 당시로서는 형제간 살해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 후안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알렉산데르가 '범인이 누군지 알겠다' 라고 중얼거렸다는 소문 등을 근거로 한 추측일 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체사레의 정적이자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체사레를 범인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체사레는 한참 뒤에나 용의자 명단에 올랐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절반은 믿고 절반은 불신하는 추세.
  14.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 나폴리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므로, 삼촌인 페데리코가 뒤를 이었다.
  15. 전문은 대략 이렇게 된다. 첫째, 체자레에게 프랑스의 영토인 발랑스와 두아즈를 수여해 발랑스 공작위를 수여하는 동시에 금화 2만 프랑을 지급, / 둘째, 체자레를 창기병 100기의 지휘관으로 임명, 이탈리아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운용한 것과 비용은 프랑스 국왕이 부담하며, 왕의 선택에 따라 2,300기를 증원하는 것과 최대 2천 기 규모로 확대할 수 있다. / 셋째, 체자레는 국왕으로부터 매년 금화 2만 프랑의 개인 보조금을 받음, / 넷째, 밀라노를 정복할 시 체자레에게 아스티를 봉토로 수여, / 다섯째, 체자레에게 성 미카엘 기사단 훈위를 수여함. 이 정도면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었다.
  16. 역대 추기경 가운데, 스스로 사임한 것은 체사레가 처음이었다. 덧붙여 이 때를 계기로 체자레는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발렌티노라고 불리게 되는데, 바로 발랑스 공작과 그가 대주교로 있었던 발렌시아가 이탈리아어의 표현으로 발렌티노로 불려졌기 때문이었다.
  17. 이 때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에게 자기 신혼 첫날밤을 상세히 기록한 편지를 보냈다.
  18. 이전 항목에서는 스페인 출신인 보르자 가문의 이탈리아화를 위해 이탈리아를 통일한다고 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 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 등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땅따먹기를 벌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에 알렉산데르는 이탈리아 통일이야말로 땅따먹기를 조속히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것. 다만 여기에서 대단한 것은,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속국가의 이탈리아 통일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교황령은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권력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종교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겠다는 것인데, 교황령 천년 역사상 이러한 생각을 한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유일하다.
  19. 훗날 율리오 2세가,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 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일이 있다. 즉 알렉산데르와 정 반대로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망했어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방해가 되는 국가를 차례로 약화시켰지만,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20. 이후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다음해인 1502년 1월 산타젤로 성에서 암살되었고 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체자레로 추정되고 있다.
  21. 다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세니갈리아에서의 숙청을 훌륭한 계획이었다고 평가했으며, 의사이자 성직자, 역사가이자 전기작가였던 파올로 조비오(Paolo Giovio)도 '멋진 속임수' 라고 긍정적으로 기술했다.
  22. 당시 사람들은 독살로 믿었으나 사실은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3. 말라리아에 걸린 것으로 추정된 아버지처럼 그 역시 말라리아라고 한다.
  24.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던 날, 공작(체사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떠어떠한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부터 생각해 두었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놓았지만, 다만 아버지가 죽을 때 자신 역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25. 보르자 가문에 충성하는 스페인계 추기경들의 표를 몰빵해줄 테니 교회군 총사령관과 로마냐 공작이라는 작위를 유지해달라는 협약을 맺었지만 배신당한 것으로, 체사레를 새로 나라를 세운 자가 본받기에 더없이 좋은 예라고 극찬했던 마키아벨리는 다만 한 가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교황을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만 현대의 역사가 사라 브래드퍼드는, 협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율리오 2세의 즉위는 막을 수 없었으며 체사레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협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6. 즉위하자마자, 율리오 2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보르자가 살았던 방에서는 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성한 교회를 전례가 없을 정도로 훼손했으며,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교황직을 찬탈했다. 나는 보르자라는 이름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는 그 누구든 파문에 처할 것이다. 그 이름과 기억은 반드시 잊혀져야 하며, 그에 대한 모든 문서와 기념비는 지워져야 한다. 보르자를 그린 모든 그림은 검게 덧칠되어야 한다. 보르자 가문이 묻힌 모든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들을 그들의 조국.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체사레는 그저 안습
  27. 그 유명한 테르시오를 창안해내고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박살낸 굉장히 유명한 명장이다. 전부터 체사레와 친하게 지냈기에 체사레는 그를 믿고 있었던 모양. 그러나 이미 코르도바는 그를 체포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28. 보르지아 가문 몰락 후 바티칸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 관해 갑자기 소문이 빠르게 번졌던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9. 즉위하자마자 위의 각주에 달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데에서 알 수 있지만,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 가문을 증오하다 못해 혐오한 율리오 2세는 알렉산데르 6세를 가까이에서 섬긴 시종들을 체포해 고문, 그의 기독교 수장으로서의 잘못(성직매매나 족벌주의 등)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린 자백을 받아냈으며 알렉산데르 6세가 한 적도 없는 암살이나 독살그리고 삥뜯기에 대한 자백마저 받아냈다.
  30. 시대상을 생각했을 때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다.
  31. 베네치아 공화국 고관에게 시집가는 아가씨를 신행길에 납치 강간하고 자기 첩으로 삼았다. 해당 여성은 체자레가 율리오 2세에게 체포될때까지 체자레에게 붙잡혀있다가 체자레 몰락 후에 원래 시집가기로 되어있던 남편에게 반환되어 결혼했다고.
  32. 후원자 없이 실업자 신세였던 다빈치가 제 발로 찾아와 '당신을 위해 제 재능을 바치고 싶습니다.' 했던 것. 비범한 인물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보는 것인지 체사레는 머지않아 다빈치를 '나의 아르키메데스' 라고 높이 평가했고, 자신의 영토 내에 지어지고 있거나 지어질 예정인 건축물을 감독하려는 목적이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다녀도 된다는 허가증을 써주기까지 했다.
  33. 현재나 다른 나라 출신 교황이 나오는 거지, 당시만 해도 교황이탈리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교황은 로마 총대주교니까. 베네딕토 16세까지 265명인 교황 가운데 로마 출신만 해도 108명이고, 이탈리아 출신만 해도 81명으로 70%를 넘는다. 가톨릭 역사, 특히 교황의 권한이 강해진 중세 이후 역사에서는 비이탈리아계 교황은 아비뇽 유수기(프랑스 출신 7명, 대립교황 제외)를 제외하고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회가 통합되자 알렉산데르 6세(스페인, 1492~1503) 이후 20세기까지 비이탈리아교황네덜란드 출신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단 1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1년을 재임했다. 이런 관행을 깨고 정말 파천황적으로 등극한 게 1978년 즉위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다. 비이탈리아인으로는 500년, 동유럽 출신 교황으로 따지면 달마티아(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의 카이오 교황(283~296), 요한 4세(640~642)을 제외하곤 최초.
  34.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줄타기 외교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교황령 자체의 군사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기에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스페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은 스페인의 남부 이탈리아 영유를 인정하는 병크까지 저질렀고,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꿈은 완전히 붕괴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위대한 업적' 은 커녕 '업적' 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며, 율리우스 2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상의 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가 워낙에 악명높은 탓이다.
  35. 순백의 피오렌티나에선 루크레치아 보르지아가 남주인공인 알폰소가 오빠와 닮았다고 언급했을 뿐 직접 등장하진 않았다. 시대적으로 그로부터 몇 년 후 사망했기 때문. 근데 알폰소의 친부인 호화왕 로렌초 메디치는 당시 못생긴 남자의 대명사격이었는데 미남인 제 오빠와 닮았다니,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심미안이 특이했는지도
  36. 체자레 보르지아가 본편에 등장하는 건 아니고, 배경만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이고 주인공이 남장여자인 체자레인데, 자기 이름을 밝히자 어떤 사람이 혹시 체자레 보르지아 아니냐고 묻자 아주 정색하며 "아뇨, 피렌체 사람이오."라고 답한다. 참고로 로마냐 전역을 정복한 체사레가 다음 목표로 노렸던 곳이 피렌체였고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라는 놈이 언제쯤 쳐들어올 것인가를 사전에 탐지할 목적으로 체사레와 붙어지냈던(?) 것이기에, 충분히 정색할 만 하다.
  37. 트루 엔딩에서의 전개이다. 배드 엔딩에서는 시라노 번스타인이 직접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