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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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그럼 저 옆에 보이는건 한반도? 제주도가 없네
개미집

Trench Warfare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지상 전투 방식을 일컫는다. 참호전의 발단은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후퇴였다. 당시 파리를 50여km 남겨둘 만큼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였던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해서 조기에 영국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러시아와의 전면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이 전투의 패배로 계획이 틀어져 끝내 양면전쟁 상황에 빠졌다. 이에 독일군은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여기에 대응하여 연합군 역시 적의 진공을 저지하러 참호를 팠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2 기본적인 양상

2.1 방어선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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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육군의 참호선 건설 메뉴얼을 보고싶은 사람은 이곳을 참고 바람. #

공격군·방어군 모두 지그재그 모양의 최전선을 비롯한 다중의 참호 선을 파고 전면에는 대규모 철조망을, 참호에는 기관총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막는다. 지금은 기관총이 소대 혹은 분대 지원 화기지만, 이 무렵에는 대대 지원 화기였기 때문에 거의 몇 백 m마다 하나씩 정도만 놓여 있었다.

당시에 사용되던 기관총들은 거대한 수냉식 냉각방식 중기관총들이라 제2차 세계대전기의 M2 중기관총이나 M1919 정도는 우습게 볼 정도로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야전 운용 시에는 전세대의 기관총인 가드너나 노덴펠트처럼 전용 포가가 필요한,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포병대처럼 운용해야만 했다. 실제로 기관총 반은 포병용 조준기를 보급 받아서 마치 포병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광대한 참호 망을 전부 커버하기에는 설치비용과 효과가 상당히 미미했다.[1] 참호선 곳곳에 기관총호를 따로 만들게 된 것은 1915년을 전후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기관총호를 나눠 만들어갔다.

이 과정은 대규모 공격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호에 병력을 배치한 상태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한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참호가 거의 미로에 가깝게 바뀌게 되었다.

2.2 공격 전 대규모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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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이러한 적의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사전 포격을 실시한다. 이 때 방어 군은 모두 참호로 대피하여 큰 피해 없이 포격을 버텨낸다. 하지만 철조망 같은 급조된(?) 방어선은 모두 증발하므로 이론상으로는 보병들의 진격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게 된다. 즉, 몇 분간의 버틸 수가 없는 기관총 세례만 버티면 적군 참호에 돌입,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때에 따라서는 장애물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서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것. 당장 솜 전투 당시 제대로 포격이 되지 않은 일부 지역에서는 철조망 제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떤 곳은 하루 만에 보병중대 단위가 통째로 증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영국 육군은 한 지역에서 징집한 들을 한 중대에 배치하는 정책을 취했기에, 이런 중대단위 증발은 전후 지역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고 평가될 만큼의 포격이 수 일동안 이어졌는데 정작 철조망 하나 치우지 못 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영국 육군 포병대의 대부분이 유산탄(Shrapnel : 포탄 안에 쇠구슬이나 금속 조각을 가득 넣어서 파편 효과를 극대화한 포탄)을 사용했는데, 유산탄은 포탄의 파편으로 인마살상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개활지에서 밀집한 보병들에게는 효과적이었지만, 빈약한 폭발력으로 파편 따위는 튕겨내는 구조물에는 효과가 매우 미미했다. 참호나 철조망과 같은 구조물에 유효한 고폭탄은 극소수만이 사용되었다. 또한 나중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영국군의 포격은 상당히 부정확했으며 솜 일대의 토질은 습기가 많아 부드러웠고 영국군 포탄은 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불발탄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2]

게다가 포격이 너무 강력해도 문제인데, 진격로 상에 기동에 장해가 되는 엄청난 숫자의 구덩이를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런 구덩이들은 폭도 넓고 깊이도 깊어서 재수 없으면 한 번 빠지면 탈출하기도 불가능하며, 피하려고 해도 멀리 우회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전의 포격으로 사방에 생긴 구덩이에 물까지 고이면 말 그대로 죽음의 함정이라 여러 명이 총상 등을 입고 빠져 그대로 익사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2.3 일제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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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포격이 끝나면 뒤이어 공격군에서 일제돌격을 감행한다. 보통 포격이 끝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포병과의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포격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격해서 아군 포탄에 팀킬을 당하거나, 너무 늦게 돌격해서 적이 기관총 사격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통에 적군 최전선 참호까지 가기도 전에 전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무선 기술이 존재는 했지만 성능이 개차반급이라 자주 활용되지 못했고, 유선반이 가설하는 유선망에 의존하거나 전서구를 이용한 전통적인 연락방식이 선호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양측의 포격이 격렬해지면 기껏 세운 유선망이 개판으로 바뀌어서 제대 간 연락을 못하는 상황이 정말 많았다. 유무선, 심지어 위성통신까지 발달한 현재에도 전령(연락병)은 연대, 대대 본부단위로 2-3명씩 할당되어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1차 대전시 독일 육군에서 받았던 보직도 전령이었다.

게다가 돌격하는 병력이 쓸 탄환이나 적 참호선 점령 시 확보를 위해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려면 기관총 사격을 뒤집어쓰면서 포격으로 엉망이 된 땅을 지나가야 한다. 이 경우 차량이나 수송부대를 쓰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돌격하는 병력 개개인이 무거운 짐을 나누어서 지급하는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돌격속도가 느려지므로 그야말로 기관총 입장에서는 사격 연습하기 딱 좋은 상태가 된다. 2차 대전 시기의 군장도 무거워 보이지만 1차 대전에는 프랑스 육군처럼 돌격시에 생필품까지 싸맨 완전군장을 맬 때가 있었다. 이는 점령한 참호 선을 바로 아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전초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참호전의 양상이 바뀌면서 완전군장을 매고 돌격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제돌격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산발적으로 돌격하면 적의 방어화력이 해당방면에 집중되면서 확실하게 돌격이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방어화력으로 일부 인원이 희생되더라도 나머지 병력이 적의 참호 선에 육박하도록 일제돌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4 방어사격 및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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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호로 대피했던 방어군은 포격이 멎으면 다시 복귀하여 돌격하는 적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준다. 이 때 방어의 성공을 가르는 기준은 포격시의 충격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서 중기관총을 참호 내부의 사격위치로 재빠르게 배치한 후에 사격을 실시하는지에 달렸다. 연합군에게는 아쉽게도 이것이 독일군들의 장기였다. 공격군의 정면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게 아닌 공격군의 측방[3]에 기관총을 설치했는데, 이것은 공격군이 넓은 전장 탓에 횡대로 돌격해 오거나 포격에도 남은 장애물에 걸려서 병목현상과 같은 양상을 띠면서 공격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기관총을 난사하면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진다. 까놓고 말해 난사하는 기관총에 죽는다는 말은 눈먼 총알에 죽는 셈인데, 때문에 기관총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번의 난사범위에 최대한 많은 표적을 밀집시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는 횡대로 들어오는 공격군의 측면에 대기하고 있으면 한 번에 많은 표적을 산탄범위에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참호전에서는 측방으로 노출된 경우에 방어 쪽 기관총의 공격 범위에 수십 명씩 중첩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절망적인 조준력을 감안하지 않고 마구 난사하여도 중대 하나를 증발시키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부대라면 우물쭈물하다가 참호에 적 보병이 난입하는 막장 상황을 맞이하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보통 방어전 중에 아군 참호 중 최전선에 위치한 1개 열 정도의 참호는 잠시 적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대개 참호 선은 기본적으로 3선 이상을 중첩해서 설치하며, 제2선 참호에 이미 예비 병력을 두며, 포병들도 적에게 넘어간 제1선 참호를 정확히 명중시키도록 훈련을 받고 참호가 공격받을 시 1선 아군 참호를 조준하고 대기한다.

이와는 반대로 공격군은 엄청난 손해를 입으면서 간신히 참호 하나를 점령했지만 후속해서 들어오는 증원 병력이나 보급이 모자라고, 자기가 점령한 참호의 특징도 잘 모른다. 따라서 대형 해프닝만 없다면 일반적으로 방어 군이 다시 반격해서 참호를 탈환해 버린다.

이러다보니 적군 참호를 향해 땅굴을 파거나[4] 돌격용 참호로 길도 뚫었다. 끝내 최전방은 적아군 할 것 없이 참호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참호 안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적군 진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심해 프랑스군이다. 근데 웬 물통을 들고 오지? 사실 참호족을 발병시키려고 보낸 첩자라 카더라

2.5 도돌이표

이렇게 되면 공격군은 다시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모으고, 그 동안 방어군은 다시 참호선을 재정비하면서 1번으로 되돌아간다.

간혹 공격이 성공하거나 방어에 실패해서 전선이 몇 km 이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반격이 들어가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원상복구 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참상

문제는 이러한 4단계의 무한반복을 4년간 지속했다는 것(!!). 그야말로 무의미한 돌격과 살육의 반복이었고, 제1차 솜므 전투 당시 영국 육군은 공세 개시 딱 하루만에 6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는 엄청난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망 19,240, 중상 35,493, 포로 및 실종자까지 합치면 총 57,470명. 참고로 독일 육군 사상자는 겨우 8,000명, 모 독일 육군 연대는 아군 280/ 영국군 5,121이라는 기록적인 교환 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과 함께 시체를 파먹어 고양이만하게 살찐 들이 돌아다니고, 엄청난 숫자의 벼룩이 득실거리며, 만 오면 참호에 이 가득 차 장병들은 걸레처럼 젖기 일쑤에 심지어 참호 속에서 익사하거나 참호가 무너져 매몰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거기에 겪는 무시무시한 추위와 더위, 온갖 질병이 만연해 참호전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상황이 너무 처참한 나머지 각국은 전선의 장병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참호전의 지옥 같은 상황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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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가 온 뒤 참호에 고이는데, 물론 이 물이 그냥 빠질 리가 없기 때문에, 며칠 동안 발을 담그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냥 물에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겠지만 참호 안에 고이는 물이 깨끗할 리가 없기에,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증상으로 고생해야만 했다. 이러한 증세는 유리한 위치에서 후퇴를 멈출 수 있었을 것인 독일군 쪽이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나았으나, 대신 이쪽은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으며 군사들의 참호-후방 교체 주기도 연합군보다 길어서 별 나을 게 없었다. 더구나 솜므 지역에 엄청난 비가 내릴 때는, 고지대도 진창으로 변하게 되고 물이 잘 빠지는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끝내 사이좋게 시궁창.

물에 의한 피해는 영국군이 가장 심했는데, 그 이유는 벨기에에서 국토 전역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전선의 모든 운하와 둑을 폭파하거나 밀어젖힌 결과 독일군의 진격이 늦어지면서 벨기에 영토의 한 귀퉁이를 보전한 대신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연합군(대부분 벨기에군&영국군)이 매년 홍수로 고생해야했기 때문이다. 영화 60고지 전투를 보면 뽀송뽀송한 독일 육군의 참호에 비해 완전 물바다가 된 영국 육군 참호를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영국의 근현대 역사상 영국인들에게 가장 쓰라린 기억을 남긴 곳이 바로 이 지역의 이프르, 그리고 솜므이다. 영국군은 전쟁 초기에 이프르 전역만 맡다가 이후 병력을 늘려 전선의 1/3이나 맡을 정도로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 지역은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인 파스샹달 전투가 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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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영의 참호건 진흙 밭이 되면 상당히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저기에 생긴 포탄구덩이에 물이 고이면 깊이도 알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나름 참호 안에서 움직이기 편하게 한다고 나무판자들을 깔았는데 잘못 밟으면 놀이터 시소처럼 위로 날아올라 얼굴이나 몸을 후려치는 일이 많았으며[5], 물구덩이 위의 판자가 부서져서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대량의 배설물 때문에 더욱 안습인 상황이 벌어졌는데, 사방에 물이 고여 진탕이라 똥오줌이 참호 안까지 넘쳐 흘러와 범벅인 참호에서 먹고 자며 싸워야 했다.

더러운 물이 넘실거리는 곳인지라 참호족으로 고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더러운 흙탕물과 철조망 등으로 파상풍도 심했다. 지저분한 장병들이 집단으로 모여있으니 는 물론 , 벼룩 등 사람을 물어뜯는 각종 해충들까지 참호에 들끓어 장병들을 극심하게 괴롭혔다. 갈리폴리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직을 사퇴한 뒤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소집되어 대대장으로 복무한 윈스턴 처칠의 수기를 보면, 해충에 견디다 못해 큰 통을 구해다 놓고, 자신과 장병들이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철모만 쓰고 들어가 자주 목욕해서 부대에서 이와 벼룩을 격감시켰다는 내용까지 나온다. 목욕하러 불을 때면 연기와 김이 펄펄 올라왔을 텐데 적진의 포병들에게서 어떻게 관측을 피했는지 자세한 내용이 없어 신빙성이 좀 의심을 받고는 있지만(...) 물론 참호전서 목욕이라는 사치(?)를 즐길 수 있던 부대들은 극소수였는지라 대부분의 장병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비단 처칠 중령의 부대 뿐 아니라, 일단 참호에서도 혹은 참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떻게든 장병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시켜보려는 노력을 전반적으로 하긴 했다. 물론 관료적인 방법으로 강요하는 통에 병사들이 오히려 고생하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각국 수뇌부도 아주 손을 놓은 것은 아닌지라 물이 고인 참호에 고무장화와 우의, 보온용 의류 등을 지급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고무장화는 하루도 못 되어 사방의 날카로운 파편과 못 등에 구멍 나 물이 들어오고, 우의나 트렌치 코트같은 보온용 의류는 울 등의 두터운 실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것들이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 10kg 단위로 무게로 불어나 장병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더구나 연기나 불꽃을 피우면 금방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적 포병에게 목숨을 헌납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서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축축한 참호 안에서 불을 피워 발을 말리거나 차디찬 통조림 등의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도 없었다. 덤으로 참호 전후방에 당연히 포탄이 날아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 정시에 따뜻한 음식을 보급하러 오다 포탄에 맞아 추진 인원들이 사망하거나 도망가는 일도 자주 벌어져, 딱딱하고 맛없는 밀가루 조각 등의 비상식량으로 며칠에서 몇 주일 동안을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 장병들이 가장 원하던 품목 중 하나가 연기 없이 장시간 태울 수 있는 고체 알코올로, 그건 적 포병에게서 안전하고 체온이 떨어지는 야간에도 유용한지라 가족들에게 부탁하거나 급여를 모아 공동구매하는 등으로 많이 조달했다.

게다가, 참호에 있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포탄과 탄환 때문에 정신붕괴를 일으키는 장병들도 꽤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탄환충격(쉘 쇼크, Shell Shock), 정식명칭 CSR(Combat Stress Reaction. PTSD와는 다르다)로, 정신적인 충격보다는 포격에 의한 뇌의 물리적 이상이라는 게 당시 의료계의 정설이었다.

위의 정신붕괴 문제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당시 심리학자들을 보는 시각은 거의 점술사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리학이란 학문 자체가 그 당시에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을 위시한 당시의 심리학자들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분석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래도 장병들의 불만이 증폭되는 1916년 이후에는 많은 처우 개선이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던 연합군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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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저격수, 영화 60고지 전투중에서)

포탄이 날아오지 않는 소강상태일 때도 저격수 때문에 어떤 진영이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미는 행위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언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은 저격수를 양성해서 교착상태인 참호전에 투입하여 적 참호를 노리게 했다. 그 결과 치열한 신경전을 매일 벌이는 사이 하루에 수십 명 단위로 몰래 저격을 당해 죽어나가는 처절한 사태도 벌어졌다. 1, 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와 각종 사례, 정보

그러나 이런 상황을 겪어본 상관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통신수단의 발달로 고위 지휘관들은 최소 몇km 떨어진 곳에 둔, 포격에도 안전한 벙커를 마련한 다음, 거기서 지도나 보며 작전을 지시했고, 참호전의 특성상 전선이 대규모로 급격하게 변하지 않아서 지휘관들이 굳이 안전한 벙커와 편리한 숙소를 버리고 최전선으로 갈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6][7] 게다가, 관료제의 폐해로 전방의 장교들은 쓸데없는 서류 업무에 쉴 시간조차 빼앗겨 부대 지휘와 전투력 유지에 쏟을 시간이 줄어들곤 했다. 당장 포격의 시작으로 부하 장병들이 포탄에 날아가는 와중에도 "귀 연대에 며칠 전 보급한 딸기 통조림의 수량을 실셈해서 보고하라.", "장성기를 휘날리는 차량이 지나가면 차 안에 아무도 없어도 무조건 경례할 것을 전파하라."처럼 쓸모없는 서류들의 지시 이행 독촉을 예사로 받았다.

게다가 전쟁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아무리 병력을 잃어도 증원 군이 무한정 오다 보니 각 군은 참호돌파의 방법으로 압도적인 화력, 즉 머릿수로 밀어붙이기만 되풀이했다. 이런 지옥도는 쇼미더머니를 치는 미군과 영국과 프랑스의 전차 개발, 그리고 독일의 국력이 완전히 연소할 때까지 이어졌다.

덧붙여 그런 참혹한 상황을 잇는 사이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각국의 본토에서 '참호 연습장'이라는 명칭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둔 참호를 각종 군용장비와 함께 민간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참호 연습장이란 대체로 일반 공원에 있었는데, 시민이나 심지어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소풍을 즐겼다. 카페, 레스토랑, 전쟁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까지 두었다. 이런 것에 낚여서 진짜 참호전을 겪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그렇게 죽어간 가족이 어떤 환경이었는지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부모들도 엄청나게 많았다.[8]

4 변명

다만 이러한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던 까닭은 각국 육군 수뇌부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위력을 떨쳤던 폭격기도, 중전차도, 지진폭탄도, 대전차 로켓도, 현대의 벙커버스터도 없었다. 즉 땅을 파서 만든 참호를 뚫을 수단은 보병들이 닥치고 돌격하든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병 수준에 비하면 형편없는 포병, 그리고 해안에서나 가능한 해군 함정의 포격[9] 밖에 없었다. 보병의 화력이라도 좋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단발식으로 쏘는 볼트액션식 소총을 쓰고,[10] 그나마 기관총이 소대별로 보급된 정도였다. 폭탄도 아닌 총기류였기에 참호에 틀어박혀버리면 '제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점령'을 할 수 없는 사태가 속출했다. 심지어 참호전의 해결사인 박격포의 경우에는 전쟁 중반에 등장한 스톡스 박격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구형 봄바드는 물론 심지어 투석기와 유사한 투탄기까지 사용하는 안습한 현장이 계속되었다. (투탄기는 정숙성 때문에 이후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이론상으로는 포병의 철저한 포격과 그에 보조를 맞춘 보병의 진격을 통해 참호를 돌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곳의 적을 포격해야 하는 포병이 정확하게 목표를 타격하기란 불가능했으며, 목표 좌표를 확보한다고 해도 적의 대응 사격이나 누전, 쥐에 의한 피해, 기타 사고 등으로 인해 전선의 보병과 후방의 포병들은 유기적으로 통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보조가 안 맞아서 일어난 일이 위에 말한 사태이다. 단순히 나폴레옹 시절의 전술을 그대로 적용시킨 것만은 아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진짜로 75밀리 구경의 포도 매우 희귀한 판이고 더 큰 포는 정말로 전쟁 중반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데다 후반에서야 참호를 갈아엎어버릴 화력의 중포와 숫자가 생겼다. 그리고 더 전으로 가면 보병과 포병의 이론상의 완벽한 유기적인 협동은 2차 세계대전이 되어서야 나왔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선 통신이였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유일한 장거리 송신수단은 유선통신장비뿐이었고 유선을 안 쓰는 것은 깃발신호였다. 이러니 참호에 적을 몰아내고 나서 점령해도 증원이나 포격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좀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나온 때는 1차 세계대전 후반이었다. 연합군이 기존의 적 참호에 골고루 포탄을 뿌리는 방식 대신 모든 중포와 포를 총동원해서 한 지역에다 빽빽하게 퍼부어버리는 전술로 바꿨는데, 이러면 철조망이든 참호든 거기를 지키는 보병과 함께 아예 흙에 파묻어버리고 덤으로 유선송신도 망가지기 때문에 효율적인 방어가 아예 불가능해진다. 이 전술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연합군은 독일의 철통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천천히 독일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해 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참호속의 병사들의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참호전은 병사들의 생존률을 엄청나게 올려준 전술이였다. 당장 참호에 의존하지 않고 엘랑 비탈에 미쳐서 공격의지가 참호의 방어력을 뚫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초기 프랑스군은 140만 전사자 중 60만명을 전쟁 첫해인 1914년 그것도 5달만에 날려먹었다. 덕분에 실제 사상자 비율도 상당히 떨어졌는데, 사상자 수가 많았던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인 사상자는 산업화로 대규모병력을 투입이 가능해져서 발생한 것이지. 비율로 따지면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남북전쟁 시기보다도 상당히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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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전투 사상율의 변화 - 출처: 무기체계와 전쟁.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국 수뇌부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대응을 했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당장 프랑스군의 공세숭배(Culte de l'offensive) 사상만 살펴봐도 엄청난 막장인데, 공격제일주의의 창시자 그랑메종 육군 대령은 이런 사상을 극대화시켜 교본에도 "전통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육군은 공세 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같은 구절을 넣고야 말았다. 묘하게 자신은 듣보잡인데 스승 페르디낭 포슈 장군만 온갖 욕을 먹는다. 엘랑 비탈 사상으로 잘못 알려진 공격제일주의 교리는 전초 프랑스 육군의 극심한 인명피해의 주범으로 평가받는다. 포슈 장규의 군사이론마저 '이길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돌진하면 이길 수 있다'라는, 맨 땅에 헤딩하는 수준의 발상이라고 오해해서 문제인데, 원문은 '전의야 말로 승리의 첫 번째 조건이다(The will to conquer is the first condition of victory)'로 뉘앙스가 매우 다르다. 포슈 장군은 두 피크의 영향으로 화력, 보급, 전술, 전략 외에 전쟁의 인적요소를 강조했는데 그걸 근성이론으로 왜곡하다니. 정신승리 항목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니 참고. 일본군이 공격제일주의를 수입해서 반자이 돌격을 만든 것은 꽤 유명한 사례다. 영국 육군 또한 포병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부정확하고 포탄은 품질이 낮았으며 지휘부에서는 피해상황조차 제대로 모르는 등, 전장에서 다소 혼란이 있을 만함을 고려해도 도저히 옹호하치 못할 행태를 보였다. 이런 극심한 병력 소모로 인해 연합군 및 동맹국, 특히 영국과 독일은 여단~사단 규모로 해군 병력을 차출해 참호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진창에서 구르기 싫어서 병사가 아닌 수병을 택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는 젊은 청년층을 너무 많이 잃어서 뒷날 일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 엄청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어전 일변으로 나서게 된다. 분명 전투의 전사자 비율 자체는 줄었지만, 과거의 상비군은 민간인과 완전히 다르게 운영했던 반면, 1차 대전부터는 전쟁의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투입 병력 자체의 규모가 비교하지 못할 만큼 늘었고 노동 인구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10]

5 피와 진흙의 요람

참호전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교착상태였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양 진영은 계속해서 전술과 병기를 개발했고... 결국, 피의 요람은 수많은 살인병기들을 탄생시켰다.

먼저 기존에 정찰 임무를 맡던 기병이 참호로 인해 그 능력을 상실하자 대신 기구, 그리고 신기술인 항공기를 활용하여 정찰하기 시작했다. 후장식 강선포의 발달로 사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늘어난 포병은 이제 육안 관측이 아닌 이들이 정찰을 통해 찍어준 좌표에 맞추어 보이지도 않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포병은 사전 포격에 그치지 않고 전쟁 후반기에는 보병의 진격 속도에 정확히 맞춰 이동 화망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전술의 발전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항공 전력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처음에는 정찰로 좌표를 찍어주는 것이 목표였던 육군 항공대는 서로를 견제하려는 공중전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전술 폭격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가 된다. 바로 공군이 탄생한 것.

포병을 활용한 참호 외부의 지원이 아닌, 참호 그 자체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시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연합군은 적 참호 지하까지 여러 개의 갱도를 파서 대량의 폭약을 매설하여 폭파시켜 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훈련시킨 후 공병 부대로 참전시켰는데 그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공병대가 참여한 60고지 전투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 전장이었던 곳에는 아직도 폭파되지 않은 거대 지뢰 2개소나 남아 있어서, 1950년대에 그 하나가 낙뢰로 폭발한 적도 있다. 덕분에 참호와 그 파괴 공작을 위한 이런 대공사를 거치면서 공병은 전에 없이 큰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독일군은 참호 안의 병력 그 자체를 무력화하기 위해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했으며, 기관총 진지를 공략하도록 부대 단위를 소규모로 줄여 수류탄과 경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돌격대를 창설했다. 반면 연합군의 경우 기관총에 방호력을 갖추며 더 확실한 지원 화력과 함께 보병을 전진시키기 위해 Mk 시리즈 등의 전차를 발명하여 투입했다.

이 모든 난장판이 끝난 뒤, 1918년의 각국 군대는 이미 1914년 처음 전쟁을 시작했던 그 군대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보병과 기갑, 항공, 포병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적의 전선을 돌파하고 목표를 타격하는 현대전의 기본적인 양상이 바로 참호전이라는 강철과 진흙, 피로 도배된 요람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얻은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죽일 방법을 배운 것이다.

끔직한 참호전 속에서 교훈을 얻은 인류는 공군, 전차, 공병과 전술적 타격이란 개념을 만들고, 2차대전에서는 아예 최소한의 피해로 분쟁을 종결시키고자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단 한 기만으로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핵무기의 탄생이 오히려 전쟁을 방지하는 강력한 억지력으로 자리 잡아 2차대전 이후 강대국과 강대국간의 전면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억지력이 작용하는 사이, 각 국은 세계화로 한데 묶여 이젠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손실이 몇 배는 더 많은 세상이 도래해버렸다.[11]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보면 그 지옥같은 참호전과 지리멸렬한 싸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리며 얻은 경험을 통해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의 성과를 얻어 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덕문에 우리는 2차대전 이후로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 수 있게 되었다.

6 왜 서부전선에서만 생겨났나?

동부전선과 발칸, 중동에서는 참호전이란 상황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비해 지형이 험해 전선이 엄청나게 길고, 보급도 서부전선에 비해 형편없었다. 원래 전쟁은 보급이 핵심이지만 참호전은 다른 전투양상보다 보급이 더 중요했다. 1차대전은 2차대전처럼 도시가 전장이 되는 일은 적었지만 도시의 삶이 급격하게 피혜해진 것에 참호전이 한 몫을 했다. 참호전 상태에서 사망자도 많지만 소모되는 생필품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전쟁이 몇년씩 장기화되었다. 결국 도시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장기화되었고 민간인 삶의 질이 낮아지게 되었다. 하물며 동구권 국가들은 서유럽국가에 비해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고 러시아는 민심이 최악이었다.

보통 1차대전 동부 전선은 화력덕후 러시아의 엄청난 수의 야포가 떠오를 수 있는데, 이건 재정이 나빠져 기관총같은 신문물을 들여올 수 없어 낡은 무기를 다 동원한 것 뿐이다. 동부전선에선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 모두에게 충분한 기관총이 사용된 것도 아니라 기관총 유효 사거리 이내에서 교착상태에 빠지는일도 적었다. 그렇다고 소화기만 쓰이는 보병전투가 일어난 건 아니다. 동부전선엔 훨씬 더 많은 야포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래서 설령 참호로 된 전선이 형성되더라도 중간지대가 너무 넓어서, 그 안에 사는 민간인들이 평상시의 생활을 유지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덕택에 동부전선 등에서는 전차 등장 이전부터 장갑차가 전차 노릇을 하며 활약했고, 전통적인 기병도 현역으로 대량 활용되었다. 기관총과 참호, 전차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기병이 계속 존속했던 것은 이런 비 서부전선에서의 경험 탓도 있다. 결국 참호전이 없었다고 해서 동부전선이 좋은 건 아니었다. 서부전선 병사는 시체와 진흙 사이에서 몸을 굽혀 참담한 식사를 해야 했다면 동부전선 병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해 배를 굶주려야 했다.

7 기타

참호전의 생생한 묘사를 알고 싶다면 에리히 M.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자. 그 외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 최근 영화로는 프랑스영화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cailles, A Very Long Engagement)'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워호스(War Horse)'가 참호전의 완벽한 재현을 보여준다.



폴 그로스 감독의 2008년작 영화 '파스샹달(Passchendaele)'의 참호전 장면. 주인공들은 영연방 소속 캐나다군들이다, 영국군들도 많이 섞여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는 병기도 전술도 달랐지만 '참호전'은 고대에도 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참호전은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쓴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회전에서 참호에 병사를 대기시킨 뒤 미트리다테스 군을 맞아 싸워 격퇴하였고, 두 번째 회전에선 참호를 판 뒤 미트리다테스 군을 그 쪽으로 몰아붙여 승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조조도 참호를 이용하는 전투방식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완성 전투에서 장수와 싸운 뒤 패주하는 과정에서 추격해온 유표, 장수 연합군을 맞아 참호를 팠다. 그 뒤 병사를 그 밑에 대기시켜 연합군이 다가오자 그 참호에서 병사를 내보내는 기습작전으로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슬람을 세운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쳐들어온 메카의 원정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펼친 끝에 이겼다는 기록도 있다.

미니어처 게임 워머신의 국가 시그나에서는 참호전 당시의 병사의 모습을 딴 참호병이라는 병과가 있다.



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라고 한다.

여담으로, 독일군은 참호를 만들 때 모서리를 무조건 90도로 각을 맞춰 팔 것이 교범이었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지나다니며 모서리가 닳는 것도 철저하게 다시 각맞출 것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이랬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박격포 등이 참호에 떨어졌을 시 모서리가 90도인 참호라면 인명손실이 줄어들어서였다. 당시에는 그런 사실은 독일군만 알고 영국군도 "야 독일 애들 참호 각 맞춰서 파네, 힘들겠다."로 대충 넘어갔는데... Mythbusters[몇 화인지 추가 바람.]에서 실험하니 정말 폭발 충격파가 모서리에 부딪혀 사라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역시 독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일

8 근 미래에 벌어질 가능성

고착상태를 타개할 방법이 너무나도 많다.[12]
현대전에서는 1차 대전 이래 참호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각종 화기 및 기갑과 항공 전력이 발전해, 대규모 참호전이 날 가능성은 낮다. 제대로인 산악 지대라면 참호 형성 자체를 못하고, 평지에서는 참호를 돌파할 수단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중화기와 전차, 공군을 보유한 집단들의 충돌이 아닌 소규모 지역공동체들의 내전이나 국지전이면 아직 참호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형적 유리함을 선점할 경우 갖는 장점은 당연히 나오니, 비록 엄밀히는 교리도 형태도 전술도 다르지만 자연 및 인공적 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자의 철저한 은, 엄폐 하에 공격자는 지형 및 노출의 불리함을 안고 보병 중심의 전력으로 대치 및 교전을 통해 조금씩 전진한다는 면에서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전장바로 다음 전쟁부터 새롭게 나타났다.
  1. 기관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걸 보병이 맡느냐 포병이 맡느냐로 논쟁이 벌어졌었다.
  2. 현재까지도 종종 불발탄이 발견될 정도다.
  3. 정확히는 공격군 입장에서 10시 혹은 2시 방향 정도. 대략 45도.
  4. 상대 참호를 점령하거나, 포탄을 매설해 날려버리려는 목적이었다. 청진기를 들고 땅의 진동을 감청하거나 방어용 땅굴을 뚫어 땅굴을 파고 들어오는 적군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5. 톰과 제리에서 제리가 갈퀴나 삽, 나무판자등으로 자주 만드는 톰이 밟으면 벌떡 일어서며 면상이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트랩을 생각하면 쉽다.
  6.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전방 지대는 오히려 수십 km의 전 전선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통신 수단이 없었으니 문제였다. 유선 전화야 있었지만 적의 공격준비 포격이 참호 가까이 떨어지거나 하면 단선하기 일쑤였고, 이는 아군의 공격 때도 지속적으로 올라온 문제였다. 확보한 적의 참호에 유선 전화망을 가설해도 아주 당연히 단락했고, 전선과의 통신은 문서수발 병을 거쳐야만 했다. 당연히 전방에서 일선 보고를 수합하고 상부에 보고한 뒤 상부가 계획을 세운 다음, 다시 일선부대에 하달하면 상황이 끝난지 수 시간 뒤였다. 각 군 수뇌부는 수만 명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하는 핵심 지휘관이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통신 두절 상태에 놓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 정확하다.
  7. 이와 반대되는 사례로는 봉천 전투 당시의 일본군 3군이 있는데, 상부의 강요에 의해 사령부를 전선에 밀착시켰다가 러시아군의 역공에 걸려 핵심 지휘부가 전멸당할 뻔 했다.
  8. (당시 영국령이었던)캐나다 BBC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러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지금까지 적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줄 알았던 고조할아버지가 알아보니, 다쳐서 참호 안에 뒀다가 의무대로 옮기는 사이 눈먼 포탄에 죽었다고.
  9. 이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HMS 후드 함의 주포는 사거리가 30km 정도였다. 즉 해안진지가 아닌 한 참호 돌파에 전함의 포격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등장한 일본 제국야마토급 전함과 더불어 세계 최강 전함으로 대접받는 아이오와급 전함의 최고 사정거리가 기상 양호, 45도 기준 40Km 정도밖에 안 되었다.
  10. 반자동소총이나 자동소총같은 과도기적 형태의 자동화기들 자체는 1차대전 이전에도 존재했고, 군부도 이에 대한 유용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1차대전때도 일부 채용되기는 했으나, 문제는 채용 시기. 전쟁 후반기에나 채용되어 최전선에서 제대로 활약할 일이 드물었고 수량도 적었다. 본격적으로 자동화기가 사용된 전쟁터는 아무래도 제2차 세계대전부터라고 정의할 수 있다.
  11. 강대국끼리 전면전을 벌여봤자 국가는 신용도를 잃고 주가는 폭락해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을 얻을 뿐이며 수틀리면 버튼 한 번에 막을 수도 없는 SLBM에 국토가 초토화되 다같이 멸망하는 길밖에 없으니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
  12. 당장 참호에 네이팜탄 몇개 날라가면 참호에서 강제퇴거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