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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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에 38도선 부근에서 미 국무부 고문 존 덜레스(가운데)와 함께 북쪽을 살피는 신성모(덜레스 오른쪽, 방서모를 쓰고 망원경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장관. 그의 좌측에서 찍지마를 시전중에 있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유재흥 장군이다. 금성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책에도 나오는 사진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표지로도 쓰였다.[1]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초대 이범석2대 신성모3대 이기붕

1 개요


휴일에는 전화를 안받는 신사[2]신사는 개뿔 개같은 학살자새끼 용서받지 못할 영국병

신성모(申性模,1891년 10월 20일-1960년 5월 29일)는 대한민국의 2대 국방장관이자,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그리고 해기사에서 국방장관이 된 자. 호는 소창(小滄)이며,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이다.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병크가 너무나도 커서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이 사람의 별명이 참으로 다양하고 폄하적인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 할 때마다 오버하며 울었기에 낙루장관(落淚長官), 눈물의 장관. 그리고 6.25와 전시상황의 삽질로 인해 사회주의노력영웅, 인민영웅(…), 병역비리의 시조, 남파공작원, 이등병만도 못한[3] 능력을 갖고 국방장관의 임무를 수행한 자 등등 그 악명이 매우 높다.

그에 비견될 수 있는 사람으로 일본제국무타구치 렌야가 있을 정도다.[4] 인터넷에서는 채병덕 유재흥과 더불어 초창기 대한민국 국군 중에서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이다. [5]

신성모는 처음부터 전투경력이나 지휘경력이 전무한 채병덕을 참모총장에 앉힌 장본인이며, 이외에도 낙하산 + 무능함 + 부정부패 + 학살 등 온갖 최악의 요소는 다 갖고 있는지라 어느 누구도 옹호해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막장이다. 현대판 원균 수준.

2 해방 전

경술국치 이후로 해외로 망명하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을 하고, 상하이에서 상선학교 과정을 수료해 해사쪽에서 일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를 맡았다. 이때 그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에 대해서 이승만을 탄핵하는 입장에 섰다. 후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선에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되고 런던으로 유학, 해양대학에서 1등 항해사 자격을 얻고 선박 분야에서 일하다가 1948년이 되어서야 환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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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창
상선사관 시절로, 견장으로 보아 선장 진급 이후로 보인다. 일부 해알못 사람들이 이 사진 띄워놓고 "군대의 군자도 모르게 생긴 뱃놈을 국방장관에 올리다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상선사관의 경험이 군대와 맞지 않는 것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상선사관을 양성하는 해양대학교가 거의 해군사관학교와 구분 안 갈만큼 생도 생활을 하고, 배에선 말단 선원들부터 선장, 기관장까지 해군에 준하는 위계질서와 통솔, 근무 환경 등에서 사는 점 등을 고려해 봐야 한다. 당장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한국 해군의 창설멤버 거의 대부분은 상선사관 출신이었고[6] 미국은 아예 미국상선단사관학교라고 상선사관들에게 해군 예비대 소위 자격을 준다.[7] 한마디로 그냥 신성모의 문제인 셈.

3 해방 후

3.1 낙루장관

1947년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었다. 그 당시는 해방 이후라서 독립운동가들을 띄워줬는데, 그과정에 그도 띄워졌다. 그리고 1948년 11월에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이때 신성모 제독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물론 그는 영국 상선선장을 지낸 후 인도 상선회사 고문으로 있었을뿐...[8][9] 같은 항해사 출신인데도 이 사람과 너무 차이가 난다. 물론 영 좋지 않은 의미로

귀국 후 그는 친이승만 인사가 되었다. 국내 기반이 전혀 없던 그는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했다. 그리고 그 후 1년 동안 내무부장관, 국방장관으로 승진했다.

령도자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며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낙루장관, 즉 눈물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퇴역 육군 헌병장교 장흥 대령은 신성모가 김구 암살의 배후일거라며 회고록에 지목한 바 있다. 이어서 군부에서는 그 암살이 한국독립당(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일인 것처럼 꾸미려고 했다고도 한다. 이건 걸러서 들어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장흥 대령 자신이 임시정부 출신(국민혁명군 육군 군관이었다가 넘어왔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 암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3일뒤에 교체되었다(장흥 자신은 다음날 해임되었다고 주장).

3.2 한국전쟁 초반부의 병크 행각

문제는 명색이 국방부장관이면서 국방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고, 하필이면 그의 재직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것. 게다가 그를 보좌하는 육군참모총장이라도 유능하면 퉁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 육참총장 마저도 하필이면 똥별로 악명높았던 채병덕이였다. 안돼 이미 꿈도 희망도 없어 그의 처신은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이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한편으로 아군쪽 피해가 속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해참이 그나마 유능했지만 육방부의 나라라 큰 힘이 못된데다 개전 당일엔 함정 인수하러 미국에 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자리에 있었다지만 지청천, 이범석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광복과 귀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된 일만 했기 때문에 군사쪽에 대해 아는 것은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보다 없었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부에서 일했었지만 해당 업무를, 그것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경험 자체는 거의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국방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북진통일 발언을 무책임하게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49년 7월 17일에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전쟁 초기의 현실은 점심은 대전에서 먹고 저녁은 부산에서 먹게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저녁은 굶게 되었다. 실제로 이승만과 수뇌부들은 호남선 기차를 타고 대전, 익산, 목포로 가서 목포에서 해군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 혹시 평양이 대전에 있는 평양 칼국수집이었던건가 부산에는 신의주 칡냉면

직위가 직위이고 대북관련 사안이라 38도선 접경지대에서 북한군과 한국군의 국지전이 수시로 벌어졌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자 오해다라고 해명했으나 그 해 9월에 "때가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부산까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였다. 오긴 뭘 와 이 사람아 오기는 왔다. 밀려서 문제지이러한 신성모의 헛소리는 후에 북한이 남한의 북침설을 내세우는 떡밥이 되었다. 한국전쟁전의 남과 북의 전력 그리고 멍청한 신성모 국방장관 그런 놈이 정작 그 이듬해 여름에는 전쟁준비는 커녕 육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 그것도 전방부대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을 장교클럽에 모두 모아다 놓고 술파티나 하고 자빠졌다. 당시 일부 장성의 증언에선 이후에 북한 스파이인 것이 발각되어 사형된 장성이 이 때 파티 비용 전액을 지불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진짜라면 간첩 입장에선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왔을 듯. 아무튼 저렇게 발언했으면 오히려 전방부대를 중무장시켜야 말과 행동이 맞는건데 말은 저렇게 해놓고 행동은 지휘관들을 빼다가 술파티를 벌이고 있었으니 다른건 다 둘째치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다.

더욱이 군사능력의 부재로 예비전력을 자기 마음대로 해체해버렸다. 1949년 바로 징병제 핑계를 대면서 한국군의 예비군 전력인 호국군의 존재를 해산시켰는데 문제는 한국전쟁전까지 국회에서 병역법에 의거한 의무병역제도 법률이 제대로 통과가 안되고 있었던 상황인데 2만명의 육군 예비전력을 자기 마음대로 해산시켜 버리고 예비전력으로 신설한게 바로 청년방위대였다. 문제는 이 청년방위대는 호국군처럼 예비군이나 즉흥 예비전력이 될 수 없는 정치조직에 가까운 오합지졸들이었고 한국전쟁때 이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혹자들은 호국군 2만명 전력이 유지되었다면 그래도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초반 병력부족문제를 조금은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겠는가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게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의 북진통일론과 별개로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이미 수세적인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계획 제38호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이 계획도 세부적으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1950년 3월에야 계획이 세워져서 실행에 옮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으며 현실반영도 별로 안되었고[10], 내용 자체도 잠깐 물러났다가 단시일내에 실지를 회복하고 북진! 이라서 해당 계획에 끼친 신성모의 악영향이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전쟁 발발 전에는 이런 저런 단체들을 반강제로 통합하여[11] 만든 대한청년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추대했고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고 선언문에 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해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2011년 9월 4일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에서 등장한 퇴역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에 의하면, 신성모가 전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는데, 그날 대책회의 소집 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그의 보좌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관각하께서는 일요일날 그 어떤 전화도 안받습니다! 그놈의 쓸데없는 영국병

이런 사태를 만들어놓고 대정부겸 대국민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육군이 38선 부근에서 분전하면서 북진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현실은... 중요한 건, 불리했던 전세를 이승만에게만 보고했다는 것이고, 그걸 들은 이승만은 27일 대전으로 튀어버렸다(...)역시 런조.

그리고 남하 저지책으로 내놓은 게 한강철교한강대교 폭★8파(…). 철교와 대교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위해 폭파되어야하긴 했으나, 신성모가 너무 빨리 폭파한 탓에 국군의 후퇴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서 신성모가 까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육군 공병최창식 공병대령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까지 보이는 등 정말 천하의 개쌍놈같은 짓을 저질렀다. 채병덕 장군이야 온갖 욕을 들어먹은 걸로 끝나서 그나마 다행(...)인데 최창식 대령은 단지 신성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전비행죄로 총살당했다. 자세한 내용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이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했고 심지어 다수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요인들과 김규식 등의 저명인사들도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저명인사들이 납북되거나 적 치하에서 학살당했고 가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서부전선의 한국 육군 사단들이 와해되어 버렸다.[12] 훗날 김홍일 장군이 지휘하면서 버티던 한강방어선에서 소집되어 투입한 한국 육군의 낙오병력은 한강교 폭파전 기존의 전선에 배치된 병력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고, 장비는 거의 모든 중화기를 상실해서 개인장비만 간신히 갖춘 상황이었는데, 이는 북한쪽에서 대규모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하는 형태의 전과를 만들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래놓고 자신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뿐인 애꿎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총살시키고 모든 덤탱이를 최창식 대령에게 뒤집어씌우는 추태마저 보였다.

이 정도만 해도 당연히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사안이지만, 비슷한 병크를 저지른 채병덕 장군이 패전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사실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기보다는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에게 채병덕의 보직해임을 요구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에 비해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삽질은 어디가지 않아서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합리화하였다는 국회의 비판을 받았고, 곧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신성모가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에서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는데, 국방부장관이라는 직위에 따른 책임도 있었지만,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신성모가 단장으로 이끌었던 대한청년단 단원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13] 하지만 후안무치하게도 사건 수사를 방해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하였다. 예를 들자면 국민방위군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그들을 재판하는 군사재판장마저 자기 친구로(...) 임명하여 봐주게 했다거나 등. 하지만 수만명의 청년을 굶겨죽인 것에 비해 형량이 너무 낮게 나와[14]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직에서 사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기붕이 임명되었다. 문제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위를 살려보려고 했는지 당시 여론은 "사위 김윤근 장군을 신성모가 빼돌릴 것이다."라는 소문이 쫙 퍼져있어서 이종찬 장군이 직접 이례적으로 군사법원 판결과정을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하여 그대로 공개를 했고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공개처형을 실시하게 했다. 안좋은 것의 시초는 이 놈이 다 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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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사령관 김윤근 장군 외 5명 총살형 집행 순간이다.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또한 자기위신을 생각하여 백골병단을 제대로된 훈련이나 장비 지급 없이 대충 만들어서 아군병력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2011년 9월 11일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에서 등장한 채명신 장군에 의하면 당시 북쪽에서 남파공작원들이 들어와 피해가 발생하자 UN군 등에서 왜 한국은 북한처럼 못하냐라는 질책과 비웃음 등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신성모는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신 때문에 우리도 대규모 유격대가 들어간다라고 허장성세와 허풍을 쳐놨고 그렇게해서 대충 만들어진 백골병단에 채명신 대위가 가게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당시 채명신 대위가 지휘를 제대로 해서 소모품 수준 밖에 안되는 부대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즉 살아남은 것 자체가 다행인 수준.

이처럼 전쟁내내 국방장관으로서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병크를 잇달아 저질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민간인 출신이 가면 안된다'라는 편견을 만든 장본인이다.

오늘날 한국군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국방장관 대부분을 전역한지 얼마 안된 군 그것도 육군 대장 출신들이 독점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합찹의장 혹은 육군참모총장이 전역 바로 다음날 국방장관으로 승진(?)하는 독재국가에서나 볼만한 괴이한 일도 자주 일어난다. 같은 군 출신이라도 해공군 출신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과거 군부독재 정권 시절에는 쿠데타를 막고, 지지기반인 육군 출신들을 우대하기 위해서 이런 인사를 했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행태가 계속되고 있으니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어불성설이며 군내부의 여러 불합리한 관행, 비효율적인 운영, 방만한 예산집행 등이 고쳐질리가 없다.

하지만 문민통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당장 민간인 출신에서 임명되었던 사람들도 신성모 뺨치는 병크를 자랑했다. 그리고 장성에서 제대하고 국방장관 되신 높으신 분들도 이런저런 병크 빵빵 터뜨리시는게 현실이다. 뭐, 그래도 이분보단 더 하겠느냐만...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지 얼마되지 않아 뇌출혈로 사망했다(...).

4 평가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하도 병크를 터트린 나머지 뉴데일리 같은 곳에서조차 이름이 금기시되고 있으며, 오히려 이쪽에서는 신성모를 북한에서 보낸 고도의 간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육사 8기생들의 회고록에서도 채병덕, 신성모 라인의 간첩설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흠좀무.

그나마 말과 행동이라도 일치하면 욕이라도 덜 얻어먹을텐데 북진통일을 하자는 놈이 정작 병력조련을 게을리한 데다가 심지어는 전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지휘관들을 불러다가 육본 장교클럽에 모아놓고 술파티를 벌이는 등 이 얼간이의 병크는 결과적으로 북한을 도발시키기만 했을 뿐 국방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채병덕과 함께 간첩일 확률은 아예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 이유는 한 국가의 현직 국방부장관인 인물을 포섭하려면 북한이 뭘 미끼로 던져주어야 할 지 생각해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게다가 북한 입장에서 봐도 위에 언급한 병크를 저지른 인물을 막대한 대가를 주고 굳이 영입할 필요가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어차피 영입 안해도 알아서 삽질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또 굳이 포섭해봤자 비밀임무 수행을 위해 또 다른 삽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첩설까지 나돌 정도로 신성모의 병크와 삽질은 심각했다. 따지고 보면 신성모 덕에 김일성은 한국전쟁 초반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므로 김일성이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실제로 당시 계인주 대령이 신성모 국방장관을 북한의 이중간첩으로 의심했다는데 이건 본인이 적전도주한 뒤 변명하는 것에 가깝다. 당장 계인주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사령관이었으나 뚜렷한 이유없이 작전 구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구에 나타났다. 원래 사형당해야 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중간에서 호송차 탈취 후 어찌저찌 미군 특수전 요원으로 싸웠다. 계인주가 남겨놓은 부하들중 둘은 김포지구가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참고로 계인주는 죽을 때까지 이때의 일을 사죄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살면서 이름만 들으면 아시는 정치인의 미국 망명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사례가 다르지만 묘하게 독립유공자 무다구치 렌야를 떠올리게 한다(무다구치 렌야도 울고 갈 정도다).

그런데 2009년에 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해기사 명예의 전당을 준공하면서 신성모 흉상 조형물을 헌정했다(#).

하지만 이런 괴이한 사태가 일어난 원인은 의외로 진지하였으니,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고 해당 이시형 박사와 함께 헌정된 이유는-그가 정말 동양인 최초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Extra Master자격(지금도 존재하는 영국의 명예 선장 면허로, Extra Master자격이 있는 선장이 타는 배는 보험료 감면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신성모의 약력을 다룬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등 항해사'라는 표현은 Extra Master의 오역으로 보인다. 1등 항해사로 번역되는 직책은 Chief Officer다.)을 취득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태동기에 있던 한국의 해운업이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한 업적 때문이다(국가 기반사업 육성 차원에서 KOTRA의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던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에 흡수될 뻔한 것을 막은 것도 이 사람. 만일 당시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와 통합되었다면, 역시 지원금 문제로 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이 통합되어 있는 필리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해군도 해운업계도 젖망크리를 탔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해기사협회와 항만청 측에서도 신성모의 병크는 인정하였고 논란 역시 많았으나, 정치가 신성모와 해기사 신성모는 별개로 보고 해기사로서의 공과만을 평가하기로 한 결정 끝에 헌정자로 결정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해양사를 평가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특유의 연공서열과 기수에 묶여 있는데다 일반의 관심도 없고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도 몇 안 되는 대략 아햏햏한 상황 때문이다. 결국 인재가 없고, 누굴 선정하더라도 '누구는 올라갔는데 나는...'이란 논란을 못 피하는 상황. 따라서 이 인간을 어쩔수 없이 헌정자로 올릴 수 밖에 없던 셈.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이 대한민국에서 문민통제란 단어를 사실상 터부로 만들어버린 원흉이기도 하다. 실제로 문민통제를 반대하는 측에서 자주 예시로 드는 인물. 문민통제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이 인물을 언급하며 '문민통제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가 등장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할 필요 또한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5 관련 항목

  1.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 북침을 모의하는 미 국무부 덜레스놈과 남조선 괴뢰국방군의 모습이라고 선전한다(...)
  2. 그에 비견될 수 있는 사람으로 일본제국무타구치 렌야가 있을 정도다. 아니, 사실은 무타구치보다 신성모가 더 욕을 처먹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무타구치 렌야는 다른 악질 일본군 장군들과 다르게 포로나 민간인 학살을 막았다는 일화라도 있다.그리고 이분은 적어도 우리나라를 위해 광복군 스파이로 위장해 독립운동이라도 했지.
  3.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장교단에서 이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굉장히 크게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반의 능력을 보면 이등병에 비유한다는게 이등병들한테도 치욕이다(...). 적어도 이등병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 이 놈은? 정말이지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아니, 사실은 무타구치보다 신성모가 더 욕을 처먹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무타구치 렌야는 다른 악질 일본군 장군들과 다르게 포로나 민간인 학살을 막았다는 일화라도 있다.
  5. 그나마 채병덕은 병참 관련분야 참모에만 특화되어 있던 인물로, 군대에서 그가 잘할 수 있는건 군수참모 밖에 없었고 실제 전쟁 전 군수 행정 분야에서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다. 따라서 채병덕은 전문 분야와 관련없는 위치에 있어 무능하게 되었다는 옹호론도 있고, 군인으로서 양심은 있어서 보직해임 당했음에도 최전방에서 장군이 하기에는 수치스럽다 할 수 있는 미군 통역과 길잡이 역할을 하다 전사했다. 유재흥도 4.3 사건에서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처신을 잘하여 주민 피해를 줄이는 등 좋게 봐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다 현리 전투에서 유재흥이 도망갔다는 통설과 달리, 현재 그러한 증거는 없다. 애초에 도망갈 이유조차 없었으며, 부대가 와해되어 불가피하게 후퇴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무능했다 하더라도 그냥 역사상 흔하고 흔한, 위치에 비해 능력이 부족한 지휘관 수준 밖에 안된다. 유재흥 입장에선 억울한 부분이다.
  6.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학을 일본해군병학교에서 폐교시까지 거부한데다, 수병도 1943년에서야 조선인 지원자를 받았다. 전쟁 말기에 그나마 2선급 장교로 취급된 비행연습생 정도만이 개방됐으나 대부분 종전으로 임관 못했다. 수병과 하사관도 전부 육전대나 지원부대, 항공대에만 배치해서 일본 해군 출신들 대다수가 배에 대해 무지했기에, 자연히 상선사관 출신들에 밀려 대다수가 해병대 창설시 그쪽으로 빠졌다.
  7. 한국해양대학교도 원래 총원 해군 ROTC 제도를 운영했으나, 80년대에 거의 폭동에 가까운 폭력투쟁으로 이를 철폐해 현재는 희망자만 입단한다. 정작 지들은 똥군기 쩌는 주제에 군사문화 타파한다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 같은 기간 상선에서 돈 훨씬 많이 받는 상선에서 대체복무를 하는 게 박봉에 근무 여건도 안 좋은 해군 장교 생활보다 나았기 때문에 저지른 짓이다. 이래놓고 후배들에겐 이런 흑역사 안 가르쳐서, 지금 후배란 것들은 왜 미국 해대는 해군 장교 다 시켜주는데 자기들은 안주냐는 개소리를 수시로 하고 있다.
  8.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신성모 항목.
  9. 굳이 핑계를 대자면, "Admiral"이라는 단어에는 상선 여러 척을 거느린 선주라는 뜻도 있긴 하다. 제독 항목 참조.
  10. 육본에서 계획을 내려보내면 각 사단이 이를 받아 다시 사단단위의 작계를 짜야하는데 시간이 없다.
  11.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이범석, 장택상 등의 각 정치가들이 자신을 따르는 청년들을 모아만든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의 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를 죄다 통합시켰다.
  12. 사실상 이들은 동부전선의 육군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한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가용 병력이었다.
  13. 국민방위군 사령관 육군준장 김윤근 장군은 아예 신성모의 사위였다!
  14. 부사령관만 고작 5년형이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