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돌

흉노의 역대 선우
초대 두만 선우2대 묵돌 선우3대 노상 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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冒頓
? ~ 기원전 174년

한고제진 최종보스이자 그를 이긴 유일한 인물.

1 개요

흉노의 2대 선우. 재위 기간은 BC 209 ~ BC 174. 모돈, 묵특으로도 불리며 몽골식 명칭은 바토르.[1]

2 생애

2.1 선우 즉위 이전

묵돌은 두만의 아들로 좌도기왕(태자)였으나, 연지(閼氏, 흉노의 정실부인의 칭호)가 막내아들을 낳자 두만은 묵돌을 폐하기 위한 계략을 짠다. 묵돌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전쟁을 일으켰다. 선우의 예상대로 월지에서는 볼모를 살해하려 들었지만 태자는 오히려 명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두만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았지만 아들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1만기를 거느리는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묵돌도 아버지를 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명적(鳴鏑)[2]을 만들고 모든 부하들로 하여금 자신이 쏜 명적을 따라 쏘도록 명령한다. 이후 사냥터에서 명적을 쏘아 따라 쏘지 않은 부하를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다음으로 자신의 애마, 애첩을 쏘았는데 주저한 부하는 역시 모두 목을 베어버렸다. 다시 사냥에 나선 어느 날, 묵돌은 아버지의 명마를 쏘았다. 부하들은 그제서야 명적을 따라 두만의 애마를 쏘았다.

"이제서야 내 부하로 쓸 만하다!" 묵돌은 사냥터에서 아버지에게 명적을 쏘았고, 좌우의 부하들은 지체 없이 두만에게 화살을 날린 다음, 묵돌은 잇달아 계모와 형제, 대신들에게 화살을 날렸으며, 숙청의 달인 그에게 반대하던 세력은 모두 정리되었고 그는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

2.2 동호와 월지 정벌

동호의 군주는 묵돌을 애송이라고 생각해 얕보고 있었다. 그는 흉노에 서신을 보내 묵돌의 명마와 연지를 잇달아 요구했다. 흉노의 신하들은 진노했으나 묵돌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를 들어주었다. 교만해진 동호는 양국 사이에 위치한 황무지 1천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주어도 좋다', '주든 말든 상관 없다', '주어선 안된다' 세가지로 나뉘었다. 가만히 있던 묵돌은 "땅이란 무엇인가! 나라의 근본 아닌가!" 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주어도 좋다', '주든 말든 상관 없다' 라고 말한 신하들을 전부 참수했다. 과연 숙청의 달인 이후 동호를 기습하여 왕을 살해한 후 백성과 가축들을 노획하여 귀환했다.

다시 서쪽의 월지를 격파하고 남쪽의 누번, 백양까지 접수하여 과거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긴 땅의 대부분을 회수하기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혼유, 굴석, 정령, 격곤, 신려 5개국을 복속시켰다. 귀족과 대신들은 모두 엎드려 그를 현군으로 받들었다.

2.3 한나라와의 대결

시간이 지나 (漢)의 고조 유방이 비로소 의 패왕 항우를 쓰러뜨리고 중국을 평정했으며, 한(漢)의 제후국인 한(韓)나라는 산시성의 진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읍으로 도읍을 옮기는 상황이었다.

기원전 201년 가을에 마읍을 공격하여 한왕 신을 포위하자 한나라 조정에서 이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고, 한왕 신이 흉노에 강화를 위한 사자를 계속 보냈다가 한나라 조정의 의심을 사면서 한왕 신은 흉노에 투항한다. 이후에도 남하를 계속하는데 이 와중에 한고조 유방이 진희, 장도 등을 토벌하자 장도의 아들인 장연이 도망쳐서 흉노에 투항하며, 투항한 한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었고 그 부하였던 백토 사람인 만구신, 왕항, 조나라의 후예인 조리 등도 흉노의 신하가 되었다.

진양에 머물던 한고조 유방은 묵돌이 대곡[3]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하기 위해 정탐을 보내자 살찐 소와 말을 감추고 노약자와 마른 가축 등을 보이게 하여 자신들이 약한 것처럼 알게 만들었다. 기원전 200년에 한나라의 군사가 자신을 공격하자 40만의 기병으로 이들을 백등에서 포위하고 유방은 포위를 뚫기 위해 7일간 애썼으나, 한군은 포위망 안팎으로 고립되어 서로 구원할 수도 식량을 보급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진평이 연지에게 접근하여 뇌물을 주면서 묵돌에게 바칠 미인이 그려진 미인도를 보여주었고, 그 연지는 그 미인을 바치면 총애를 잃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설득하였고[4], 이에 묵돌이 연지의 설득과 함께 협력하기로 한 왕황, 조리 등이 오지 않자 한나라와 모의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를 풀었다.

유방이 지혜를 써서 슬기롭게 위기를 넘겼다는 인상을 주려 하고 있지만 실상은 항복에 가까운 굴욕적인 패배로, 한고조의 치욕은 이후로도 여러번 회자된다.

기원전 199년에 여러 차례 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을 공격하였으며 유방이 군영에서 적의 군세를 바라보니 서쪽의 군사는 모두 백마를, 북쪽은 흑마, 동쪽은 청마, 남쪽은 적황마를 타고 있었으며, 싸우기도 전 위용에서부터 질려버려 화친할 생각을 한다. 결국 기원전 198년에 서인을 장공주라 속여보내어 화친을 맺었지만 자주 화친을 깨고 한(韓)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왔다. 나라의 번쾌가 출동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아왔으나 여전히 한나라는 국경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이 치욕적인 패배는 고제와 여후의 숙청 때문이라는 인식이 많은데, 이 둘의 숙청 작업은 몇 년 후인 기원전 196년부터야 본격화되었고 한신, 팽월, 영포도 이 시점엔 다들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즉 백등산 포위전과 숙청은 연관성이 없는 것. 장수가 타고 다닐 말이 없어서 소를 대신 타고 다녔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초한대전의 타격이 야기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뒤로도 한무제가 등극하기까지 한은 계속 흉노에게 빵셔틀 신세였을 정도.

어쨌든 진 것은 진 것인지라 이후로도 한나라 장수들은 자주 흉노에 투항하였고,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국경지방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유방은 황실의 여인을 공주라 속여 연지로 주었으며 해마다 면포, 견초, , , 각종 식량을 제공했다. 이를 조건으로 흉노와 형제국이 되는 화친을 맺었는데 흉노가 형이고 한이 동생이었다.

화친을 맺기가 무섭게 기원전 195년에 창립공신이자 한의 제후국인 (燕)나라의 왕 노관이 한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자 흉노로 투항하며, 그 해에 유방이 죽는다.

2.4 한나라와 화친 이후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여후(呂后)가 권력을 잡자 기원전 192년에 묵돌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여기서 '부족한 것'에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이 편지로 인해 한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하고 여후는 길길이 날뛰었다. 한 성질 하는 여후는 흉노 정벌군을 편성하려 했으나 계포가 유방의 실패를 들어 이를 말렸다. 그녀도 울며 겨자먹기로 참으며 화친을 계속하여 기원전 182년에 나라에서 종실의 여인을 공주라 속여보내어 연지를 맞이하였다.

효문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묵돌이 보내는 서신은 오만하고 고압적이었다. 예를 들면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5]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묻는다. 무사한가?

말년인 기원전 174년에 우현왕[6]이 화친을 깨뜨리고 현재의 허난성 지방을 공격했다. 한나라는 이를 격퇴했으나 피해가 막심했다. 묵돌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효문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게 걸작이다.

내 부하(우현왕)는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너희 부하(후의로후 난지)가 먼저 쳐들어온 바람(모의하는 바람)에 싸운 것 뿐이다.

근데 너희는 왜 먼저 사과 안하는 거냐? 죽을래?

...이게 심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쓴 편지인가?

한편 우현왕은 서방 원정을 벌로 받았는데(...) 월지를 섬멸하고 서방의 26개국을 평정했다. 이로서 흉노는 인근의 유목민족들을 평정했으며 서역의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묵돌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계죽이 노상 선우가 되어 뒤를 이었다. 효문제는 다시 황족 출신의 여인을 연지로 보냈는데, 이때부터 선우에게 황녀를 보내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효문제가 보낸 사절단 안에는 황녀의 보좌역인 중항열도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큰 사건(?)을 일으키는데...

  1. 바토르는 몽골어로 영웅, 용사라는 뜻이다. 몽골의 역사학자들은 묵돌 선우의 이름에서 바토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늘날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다.
  2. 우는 화살. 화살을 쏘면 쏜 방향으로 날아가며 굉음을 낸다.
  3. 대(代)의 상곡을 말한다.
  4. 단, 위에서 언급한 애첩을 사살하고 동호에 아무렇지 않게 바쳤던 등 얘기를 생각해보면 과연 일개 여자의 말을 듣고 결정했다기보다는 다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5. 이런 식의 표현법은 후대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도 보인다. 실제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인 샤푸르나 호스로 2세는 로마 제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왕중의 왕이자 해와 달의 형제'라는 표현을 썼다. 그 직후에 개털린 건 안자랑
  6. 흉노의 직위 중 선우 바로 밑의 위치.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