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데 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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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그려진 세르반테스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없다. 어디까지나 상상도.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1547.09.29. ~ 1616.04.23.

아, 그 세르반테스라는 친구는 오래전부터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시 쓰는 일보다는 불행에 더 이력이 난 것 같아. 그 친구 책은 무언가 독창성이 보이긴 해. 하지만 시작만 해놓고 무엇 하나 끝내놓은 게 있어야지. - 돈 키호테 1권에 나오는 구절[1]

1 소개

'최초의 근대 소설'이란 평가를 받는 명작, 돈 키호테(Don Quixote)를 저술한 스페인군인소설가, 시인, 극작가. 스페인 문학사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급으로 대접받는 대문호다.[2] 몇몇 스페인 문학자들은 근대 이후의 스페인어 자체를 '세르반테스의 언어(La lengua de Cervantes)'라고 불러버릴 정도다.

2 인생역정

마드리드 북쪽에 자리잡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몰락한 이달고(스페인의 하급 귀족) 집안을 뿌리로 둔 이발사 겸 외과의사인 로드리고 세르반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흔히 세르반테스의 생일로 알려져 있는 9월 29일은 고향 마을 성당에서 보관하던 세례 기록부에 적혀 있던 날짜에서 가톨릭 관습 상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는 기간을 역산해서 계산한 것이라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1554년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여 가족들은 1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는 것이 없지만, 마드리드로 집안이 이사한 1560년대부터 저명한 인문학자인 로페스 데 오요스(López de Hoyos)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1569년이 되자 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스페인 추기경의 종자로 선발되어 로마 물을 좀 먹고, 이후 나폴리로 가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뜬금없이 왜 군입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리고 1571년 스페인과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가 중심이 된 신성 동맹의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이 벌어질 즈음에 재수없게 열병에 걸렸다. 기어이 수병으로 참전했지만 전투 과정에서 가슴과 왼팔에 심각한 총상을 입었고, 결국 절단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왼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후 황제가 써준 표창장을 받고 제대하면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악명 높은 알제 해적들에게 형 로드리고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그 후 5년 동안 알제에서 갇혀 지내게 되었다. 이 때 마드리드에 있는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에서 그를 위해 해적들에게 몸값을 지불해줬고[3] 세르반테스는 풀려난 뒤 군사식량을 납입하는 식량조달원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직책을 맡았으나, 밀을 함부로 팔았다는 죄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풀려난 뒤로 그라나다에서 세금 징수원을 했는데, 책임자의 먹튀와 기타 억울한 과정으로 인해 다시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다. 갇히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돈키호테는 사실 투옥으로 인한 한풀이였다 카더라

갇혀있던 동안에 그는 돈 키호테를 구상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바야돌리드에 가정을 꾸렸고 거기에서 돈 키호테 1권을 탈고한다. 그 뒤 마드리드로 거주지를 옮기고 1616년 4월 22일 68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결국 사후에 그 수녀원에 묻혔다.[4]

3 작품에 대하여

그가 쓴 희곡은 약 30여 개에 이르지만 가난 속에 헐값에 판권을 팔아버리고( 돈키혼테는 인기를 끌었지만 생활고로 출판사에 판권을 팔아 이득을 보지 못했다.)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돈 키호테와 <알제리에서 삶>,<누만시아>,<라 갈라테아>이다. 다만, 이런 불우한 삶이 돈 키호테를 쓰는데 큰 영향과 지식을 주었으며 당시 은근한 사회풍자와 성직자, 종교에 대한 풍자, 비아냥에 대하여 자신이 노예생활을 할때 아랍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썼다는 글을 쓰면서 검열을 피했다고 한다.

그가 쓴 <모범 소설집>라는 단편집도 수작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으니, 읽어보기 바란다. 한국어로 번역도 되어있다.

4 창작물에서

대항해시대 5에서는 에스파냐에서 성실한 징수관이었지만 공금을 맡긴 은행이 도산하고 야반도주하면서 돈이 전부 사라지자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었으며, 세르반테스의 친구가 그를 석방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세르반테스의 친구는 석방하기 위해 20만 정도의 보석금이 더 필요하지만 친척, 지인에게 돈을 얻지 못해 후원자를 찾은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보석금을 내서 풀려나자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폴리에 간다고 하며, 에스파냐 해군에 입대해 오스만의 군사와 싸울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의 도움으로 나폴리까지 가며, 포르투갈 왕궁에서 주인공 일행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주고 해군에 입대하러 떠난다. 해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방면으로 출장갔다가 총탄이 박힌 고대인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이 유골을 발견한 일은 잉글랜드 왕궁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 일행이 이 유골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아프리카 남단의 아프리카 대폭포 거점을 조사했는데, 총알이 박힌 유골이 아닌 땅속의 유골을 발견하자 세르반테스에게 그 유골에 대해 듣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집무관이 세르반테스는 에스파냐 선박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오스만 함대에게 공격받아 실종된 사실을 전하면서 세르반테스를 찾아낼 것을 부탁하고 나폴리에 있는 에스파냐 주둔 함대의 사령관인 페르난도 로아이사를 찾아가라고 한다.

오스만 함대의 공격으로 나포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런던에서의 명성, 사관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인해 엄청난 거물로 오해받아 알제에서 포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서 세르반테스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100만을 요구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는 그런 막대한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기에 니나가 나서서 보석금을 융퉁해 석방된다.

석방되자 주인공 일행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답례로 소설의 등장인물로 출연시켜 준다는 말을 하지만 니나가 사양하는데, 이스탄불에서 어떤 왕족의 공주가 모험담을 듣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는 어떠냐고 하자 니나는 세르반테스가 말한 사람이 에미나 압둘라인 것을 깨닫고 정보에 대해 감사하다면서 이스탄불에 가기로 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여기 있는 사람이 배웅해준다며 마음대로 배에 타고 오스만 병사가 자신의 분위기에 말려들게 한다.

주인공 일행이 이스탄불에 가서 에미나 압둘라로부터 그 유골에 박힌 총 자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만들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 지적하고 총은 지금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총흔도 만들 수 있다고 지적당하자 런던으로 왔는데, 주인공 일행은 세르반테스가 앨런 블랙에게 금화 50만으로 가짜 유골을 받아 세르반테스가 사기당한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일행이 진상을 확인하고 런던에 이를 보고하자 선의의 실수이지만 위작을 왕실에 반입해 그 신뢰를 훼손한 죄를 갚아야 한다면서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1. 신부가 돈 키호테의 광증의 원인을 그가 읽던 소설때문이라 보고 돈키호테의 서가에 있던 책들을 불쏘시개로 만들지 말지 하나 하나 평가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 저자의 첫 소설 '라 갈라테아(La Galatea)'를 등장시킨 자기 디스대목이다.그래도 자기책은 안불태웠다.
  2. 심지어 두 사람은 죽은 연도는 물론 날짜까지 같다.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대륙에서 채택한 그레고리우스력 대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정확하게 따지자면 같은 날 죽지는 않았다.
  3.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세르반테스를 데리고 있던 쪽이 원래 수녀원에게 요구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자 수녀원은 세르반테스 가족에게 받은 돈 외에 부랴부랴 주변 상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간신히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협상이 타결되었다. 세르반테스가 이스탄불로 가는 배에 강제로 태워져 막 출발하려고 할 때에!
  4. 이때 트리니타리아스 수도원에 묻혔으나 수녀원의 사람들만이 참석한 채 장례가 치뤄졌고 그후 4세기가 지나 누구도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약 400년 만인 2014년, 스페인 정부에서 10만유로(약 1억 4천만원)가까이를 들여 트리니타리아스 수도원 내의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