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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년 신성동맹(또는 기독교 동맹)과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인근 레판토에서 맞붙은 전투.[1]
떡밥으로 나도는 세계 4대 해전의 SALT에서 L을 담당하고 있다.
1 배경
베네치아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과 조약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570년 그야말로 뜬금없이 키프로스를 침공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침공은 정확한 이유나 근거가 없어 뜬구름 잡는 추측이 난무하는데, 당시 오스만 술탄인 셀림 2세(재위 1566~1574)가 포도주를 좋아해서 좋은 포도의 산지인 키프로스를 점령하려는 목적이었다고도 하고(...), 셀림 2세가 엄청난 위업을 쌓아 대제로 존경받은 아버지 술레이만 1세(재위 1520~1566)가 로도스 섬을 함락(1522)시켰듯이 자기도 서방 기독교 세계가 지배하는 섬들 중 하나를 점령하려고 마음먹었을 거라는 설도 있지만... 어느 게 진짜 이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저런 야사에 가까운 설화들은 치워 두고, 당장 지도만 보면 동지중해의 복판에 떠 있으며,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군사를 주둔시키고, 해군 기지로 만들만한 규모와 농업이 가능한 토양이 되었던 키프로스의 전략적 중요성이 대반에 파악된다.
당시 동지중해 전체를 거의 꿀떡 집어 먹고 아드리아해 내부로의 진출을 노리던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자기네 안마당 복판에 떠 있는 적성 세력의 불침 항모와도 같았던 키프로스를 차지 하는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저런 잡스러운 야사에 매달릴 필요 없이 단박에 알 수 있다.
베네치아와 화평을 맺고 있었다 한들 이거야 당시 누구나 오래 가지 않을거라 예측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양쪽 다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휴전에 불과했고, 게다가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접수하기 훨씬 이전부터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왕국이 영혼 까지 털린 이후 기 드 뤼지냥이 건너가서 차지하여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까지 해적질과 기습을 걸었던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바로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그 찌질한 왕 뤼지냥의 기이다. 예루살렘이 함락 당하고 3차 십자군에게 기대어 빌빌거리다가 이용만 실컷 당하고 버림받은 다음 그나마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로 키프로스의 군주 작위를 받아 현지의 왕가를 세웠다.
당시 키프로스에는 1만명 전후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7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던 까닭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맨 처음 공격당한 니코시아는 그대로 짜부라지고 키프로스의 중요한 거점인 파마구스타까지 포위당했다[2]. 다행히 파마구스타는 잘 요새화된 지역이었고 요새와 즉시 연결될 수 있는 항구가 있었서 보급이 가능했던 까닭에 오스만군은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이듬해 4월까지 포위를 한 상태에서 대치만을 반복한다.
한편 느닷없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게 되고, 교황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신성동맹의 소집을 결정하고 1570년 9월에 180척 가량의 신성동맹 연합함대가 구성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 영향으로 제노바 출신 용병지휘관으로 스페인에 의해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가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 그냥 돌아갈래"라면서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없이 해산(…)되었다. 이 양반은 레판토 해전에서도 별로 한 것이 없어서 전쟁 후 전리품을 나눠가질 때 동맹군 지휘관들에게 고의적인 사보타지 의혹에 휩싸여 심하게 까였는데, 교전을 하지 않으려고 지시한 고용주인 펠리페 2세의 의향을 철저히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는 문제였다. 극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모두 장악한다고해도 스페인이 아쉬울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스페인의 돈줄은 신대륙에서 오는 황금이었고, 오히려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반면, 베네치아는 지중해 교역이 국가의 생명줄이었으니 오스만 제국을 막는 것에 국운이 달려 있어 필사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가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수십 척으로 해전을 벌이는 것은 아무리 잘 나가던 당시 스페인에도 국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었으니,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스페인은 파산 선언을 할 정도였으니 뭐.
때문에 펠리페 2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체면치례로 함대를 적당히 보내는 시늉만 하고 싶어했던 것이고,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 뿐으로 당시 스페인의 정황으로 보았을때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이 레판토 해전 이전에도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3]는 함대를 출격만 시켰다 돌아온 일이 있다. 여담이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을 로마 제국 다음으로 좋아하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2명의 안드레아 도리아와 스페인을 상당히 깐다.
이에 실망한 베네치아는 일단 12척의 갤리선을 동원하여 파마구스타에 일시적인 보급을 하고, 다시 로비 작업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펠리페 2세도 마음을 돌려 적극적인 참여를 결정하고 1571년 5월 다시 신성동맹 연합함대 결성이 선포된다. 그리고 애초에 신성함대를 해산시킨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대신 자신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1547~1578)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8월 말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도 동지중해의 패권 문제가 국익에 서유럽과 네덜란드 문제보다는 부차적이였다 해도, 당장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스페인 왕실의 영지였거나 제후국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마그레브 지방에 기반하여 스페인 동부의 지중해 해안을 아예 황무지로 만들 만큼 털어대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물주 노릇을 했기 때문에 마냥 방관할 수도 없었다.
한편 오스만군은 5월부터 8만 병력으로 파마구스타 공성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8월 1일 파마구스타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당초 키프로스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베네치아 군대는 크레타섬으로 보내주기로 약조하였는데, 오스만군 사령관이었던 라라 무스타파 파샤는 애초에 이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휘하 병사 가운데 5만이 전사한데다 전투 도중 포로로 잡힌 오스만군이 예외 없이 처형당한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장남이 전사한 데에 격분하고 있었던 것.
결국 오스만군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베네치아 군대는 험한 꼴을 보게 되었다. 파마구스타 수비군 대장인 마칸토니오 브라가딘의 귀와 코를 베서 끌고 다니다가 살가죽을 벗겨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사령관은 살가죽이 벗겨진 상태에서도 얼마간 살아있었다 하며, 가죽이 벗겨진채로 흙바닥에 끌려다니다가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에 수차례 담가지기를 반복해서 당했다고도 한다. 그 밖에 마칸토니오의 부관들은 모조리 참수하여 허수아비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전리품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 군대는 너나할 것 없이 울분에 사로잡혔고,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병사들까지도 경악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 정도인 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惡手)였던 셈.
이런 상황에서 돈 후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신성동맹 함대가 접근을 하고 오스만 해군이 요격을 위해 나서면서 양측은 레판토 부근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
1.1 신성동맹 함대의 규모[4]
- 참전 지휘관이 많기에 대표적인 지휘관만 기록했다.
- 총사령관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중앙 갤리선 62척)
- 지휘관 : 마칸토니오 콜론나(교황령 함대의 총지휘관, 돈 후안을 보좌),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베네치아 함대의 총지휘관, 역시 돈 후안 보좌),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우익 갤리선 53척), 돈 알바로 데 바잔(예비 선단 갤리선 30척),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좌익 갤리선 57척)
- 총병력 : 갤리선 206척, 베네치아 갈레아스 6척 (선원 40,000명 ; 전투원 30,000명)
- 참여국가
1.2 오스만 함대의 규모
- 총사령관 : 무에진자데 알리 파샤[5]
- 지휘관 : 울루치 알리(오치알리), 메메드 슐류크(메메드 시로코)[6], 투르구트 레이스[7], 페르테브 파샤, 카라 호자, 하산 레이스, 메흐메트 베이[8]
- 총병력 : 갤리선 220척, 갤리엇[9] 60척, 푸스타[10] 64척 (선원 50,000명 ; 전투원 27,000명)
2 전개
10월 4일 오스만군의 정찰대가 기독교 함대의 규모를 140척이라고 보고하는 바람에 알리 파샤는 쪽수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믿고 기독교 함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으며, 이 기회에 눈에 가시였던 베네치아가 점유한 섬들도 점령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10월 7일 양쪽 함대가 맞딱뜨린다.[11] 기독교 함대 중앙부대의 갈레아스 2척이 포격을 시작하고, 곧이어 좌익부대의 갈레아스 2척도 포격을 하면서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함대의 우익부대를 지휘하던 시로코는 자신이 직접 부대 절반을 이끌고 기독교 함대와 정면으로 맞서고, 나머지 부대는 다시 둘로 나눠 우회를 시킨 후에 포위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던 기독교 함대 좌익부대 사령관 바바리고는 그 즉시 틈을 막아 저지하려 하였으나 7척이 무사히 뚫고 나오는 바람에 4척의 갤리선을 잃고 바바리고의 기함이 습격당해 심한 부상[12]을 당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돌진했던 갈레아스들이 피하기 위해 갈라진 오스만 함대의 틈바구에 섞여서 마구 깽판부리고, 시의적절하게 구원출동한 갤리선들이 발목잡힌 오스만 해군을 포위하여 암초지역으로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회복되었다.
한편 중앙부대 역시 갈레아스 진격으로 오스만 해군은 갈라져서 일단 피한 다음 기독교 함대를 공격하였다. 반면 돈 후안은 오스만 해군의 원거리 사격에 응하지 않고 접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함대가 접근하자 일제사격을 가한 후에 접근전에 돌입하였다.[13][14] 중앙부대의 전투가 달아오르자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알바로 데 바잔은 돈 후안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투입하여 충각 전술로 오스만 갤리선을 박살내버리고, 추가 갤리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알리 파샤 주변의 오스만 군을 수세에 몰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예비병력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역시 오스만 함대의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드라굿 레이스 역시 알리 파샤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해 즉시 예비병력을 파견하였다.
반면 기독교 함대의 우익부대는 우루치 알리가 좌측을 공격하려 해서 이를 막으려고 우현으로 향하는 바람에 기독교 함대 본대와도 떨어지게 되었으며 전투도 늦게 돌입하였다. 우루치 알리는 갤리엇이 지닌 속도의 우위를 앞세워 기독교 함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보고 베네치아 갤리선 16척이 사령관 안드레아 도리아의 명령없이 멋대로 돌진하는 바람에 포위당하였으며,[15] 뒤늦게 갈레아스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화약고에 불이 붙어서 폭발한 갤리선(오스만 군에게 배를 나포당하게 되자 선장이 아예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고...)으로 인해 기독교군의 함선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옆의 오스만 함선들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켜 오스만에게도 적잖은 피해를 안겨줬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오스만의 우익부대는 전면적인 패주 상황에 놓여있었다. 상황을 깨닫고 잽싸게 도주한 갤리선들도 있었지만, 포위망에 갇힌 갤리선들은 숫적우위를 앞세운 기독교 함대의 공격에 줄줄히 침몰되었으며, 결국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부상당한 시로코가 기독교 함대에 포로로 잡혔다[16].
비슷한 시기 오스만의 중앙부대도 서서히 몰리고 있었다. 특히 알리 파샤의 기함과 그 주변의 갤리선들이 기독교 함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간신히 저항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17] 지원을 위해 출동한 병력도 기함에 접근하지 못한채 족족 저지당하고 있었다. 돈 후안은 알리 파샤의 기함을 발견하여 공격하였고, 3번의 시도 끝에 배에 올라타서 전투를 벌여 알리 파샤 싸워 그를 죽이고 참수하여 알리 파샤의 목을 높이 내걸자, 오스만 함대의 중앙부대도 사기를 잃고 서서히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비슷한 시기 우익함대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고립된 함대 구출을 위해 접근하였다. 하지만 우루치 알리는 휘하의 30척을 거느리고 기독교 함대 중앙부대를 공격하여 우군을 지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알리 파샤의 전사소식을 듣자 곧 이를 포기하고 근처에 있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몰타 기사단 함대는 순식간에 패배하여 기함이 점령당하고, 기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으나 다행히 알바로 데 바잔이 몰타 기사단 기함이 나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즉시 구원병력을 보낸 덕분에 우루치 알리는 노획물만 챙기고 도망가버렸다. 이후 전선에 남아서 저항하던 나머지 오스만 함대도 기독교 함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하였고, 기독교 함대도 더이상의 추격을 포기하면서 해전은 끝을 맺었다.
3 결과
기독교 함대는 갤리선 40척 가량이 격침 또는 파손되었으며, 7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했다.
오스만 함대는 17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갤리엇이 격침 또는 파손[18]되었으며, 3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3천명 가량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총사령관인 알리 파샤가 참수당하여 충격이 컷다.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이유는 당시 기독교 함대가 더 많은 포를 싣고 병사들도 모두 총기류로 무장하고 있었던 까닭에 화력면에서 앞섰다. 게다가 베네치아의 신병기 갈레아스가 함열에 뛰어들어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초반부터 대열이 붕괴되어 기독교 함대에 각개격파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반대로 오스만군은 총기가 부족해 총기로 무장한 병사가 많지 않아 활로 무장해야 했다.[19] 보유한 대포 역시 기독교군보다 더 적었다.
오스만 노잡이 노예
여기에 베네치아 함선에 타고 있던 노잡이들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유 시민이었고, 도시국가인 관계로 항상 인구 부족이 고민이었던 베네치아는 이들에게도 무기를 지급했다. 즉 전투가 시작되면 그 즉시 무기를 빼들고 싸울 수 있는 전투원이었던 것. 한편 스페인은 사형수나 수감수들에게 죄를 사해준다는 조건으로 노를 젓게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오스만 제국 갤리선의 노잡이는 기독교도 노예들 위주[20]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함대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자 당연히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21], 오스만군은 기독교 함대와 교전을 하면서 동시에 노예들의 반란도 진압(…)해야 했으므로 정상적으로 전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1만 5천명 가량의 기독교도 노예 노잡이들이 전원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스만 제국은 어쨌든 키프로스를 점령하였으며,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명성을 날리던 인재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까닭에 실질적인 해군력은 과거에 비하면 떨어졌다. 반면 베네치아는 비록 키프로스를 상실하였지만,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여 크레타 섬과 나머지 섬 지역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나머지 참여한 기독교 국가들은 전투에서 건진 전리품들을 적당히 나눠가짐으로써 이익을 챙겼는데, 솔직히 가장 이익을 많이 챙긴 곳은 베네치아다.
4 의의
오스만-이슬람과의 충돌에서 기독교 군대가 거둔 결정적인 승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론되는 해전이지만, 의외로 그 세계사적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세계사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이슬람 세계나 기독교 세계, 지중해 세계 모두에 별다른 여파가 없다고 보아도 좋은데, 해전 이후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불협화음으로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강화조약을 맺어버려 전쟁에서 빠졌고 스페인도 튀니지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1574년 북아프리카의 거점을 상실해버렸다. 그 결과 해전 전보다 오히려 기독교 동맹은 세력이 줄어들어버린다.
실제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자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을 운영해 나갔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는 베네치아 대사 마르칸토니오 바르바로에게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배가 아파 혹은 대제국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허세(...)를 부린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22]
반면 오스만 제국은 튀니지를 탈환하고 해군의 규모 자체는[23] 수복하여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후 막장 황제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레판토 해전 자체의 의미가 덧칠된다.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대제국이 쇠퇴하고 말고가 결정될 리가 없지만, 기독교 세계의 선전으로 마치 레판토 해전 패전 이후 오스만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며, 오스만의 진정한 쇠퇴는 레판토 패전 후 무려 110년이나 지난 2차 빈 포위(1683)의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폴란드-베네치아-러시아가 뭉친 '신성동맹'시즌 투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뒤부터 시작된다.[24] 특히 젠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한테 개발살나면서 오스만이 쇠퇴했다는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이토록 과대평가되는 이유는 그전까지 기독교 세력, 더 정확히는 서유럽이 오스만 제국에게 전투에서 그럴 듯한 승리를 거둔 역사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세계가 1571년 이후로는 이슬람 세계에 이후 400여 년 간, 즉 현재까지 대반격을 가하여 위세를 회복하면서 그 시초로 레판토 해전을 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503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동지중해의 패권을 뺏긴 뒤 레판토 해전 후에 다시 기독교 세계가 제해권을 차지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레판토 해전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았을 뿐이지 제해권을 되찾은 것은 아니였다. 그러다 하더라도 실제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지라도 레판토 해전의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다. 1560년대까지 기독교 세계의 해군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전체의 헤게모니를 잡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다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레판토 해전의 승전으로 인하여 이전까지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해군을 미친듯이 바르며 그야말로 무적, 무패의 위세를 자랑했던 오스만 해군이 격파되어 반오스만 동맹군이 사기적으로 크게 고양되었다는 점이다.[25] 그리고 중세 이후 유례없는 대해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의 타격으로[26]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려는 방향에서 선회, 동지중해와 레반트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정도에서 만족했고 서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비록 그 이후 점차 유럽세계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북해로 옮겨가기는 하지만 지중해의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의 의의를 그저 과소평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키프로스의 상실과 해적의 증가, 신항로에서의 본격적인 향신료 유입으로 인해 이탈리아 공화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상술한 것과 같이 오스만의 확장 역시 정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영국과 스페인과 같은 서유럽 열강들이 지중해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5 그 외 참고할 이야기
- 636년 야르무크 전투이후로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레판토 해전 시점까지 늘 수세에 몰려 있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열세였던 것은 사실, 물론 동유럽의 슈퍼파워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측에 분명한 공세적이었다.
비록 결과는 좆망
흔히 "공격적인 방어"를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면에서 불필요한 짓을 혐오했던 바실리우스 2세의 성향[27]이지, 군사적인 영광을 꿈꾸며 옛 로마에 대한 향수가 있었던 그 이전의 대다수 황제들에게까지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얘기다. 이 시기에 몇몇 황제들이 나름 대로는 꽤 좋은 조건으로 테마병들의 군역을 면제해주려다가 거꾸로 군사 폭동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유는 이들이 풍요로운 이슬람 지역에 쳐들어가서 마음껏 약탈하게 되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으로 여긴 데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공격적인 방어"로 이름난 바실리우스 2세도,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은 반드시 생전에 근절해야겠다는 분명한 플랜을 세워두고 있었다.그러기 전에 죽긴 했지만
- 기독교 측은 당시에 유명한 해군 지휘관인 마르코안토니오 콜론나, 아스카니오 델라 코르나, 마르코 퀘리니, 마뤼탱 로메가스 등 참전하였는데, 콜론나의 기함에 탑승한 로메가스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배를 지휘했다.
- 이슬람 측은 벡타시 무스타파, 델리 첼레비, 하지 아가, 코스 알리, 피알리 오스만, 카라 레이스 등 여러 명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이 전투에 돈키호테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이 전쟁에서 마르케사 호에 승선해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으면서도 보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하사관인 마르틴 무뇨스도 시칠리아의 함선인 산조반니호에 탑승해 참전했지만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았다.
-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세르반테스는 결국 이 전쟁으로 왼손을 잃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스페인으로 귀국 도중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돈세야 호의 페데리코 베누스타는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려 팔이 불구가 되면서 왼 팔을 잘라 의수를 단 채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구호기사단의 기사인 로메가스는 몰타 섬의 갤리선들이 아닌 콜론나의 기함에서 승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구호기사단의 부단장인 피에트로 주스티아니는 화살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 영국 국왕인 헨리 8세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는 해적이자 용병인 토머스 스투켈리가 에스파냐 함선 3척을 지휘하였으며, 파마구스타 공방전에서 사망한 베네치아 사령관인 마르칸토니오 브라가딘의 일가인 안토니오 브라가딘, 암브로조 브라가딘 등이 선두에 서서 갈리아스선 2척을 지휘했다.
- 아내 살해 혐의로 12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한 피렌체의 음악가인 아우렐리오 셰티가 참전했으며, 총사령관 돈 후안의 기함에 애인을 따라 나선 마리아 라 바일라도라라는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화승총병으로 참전했다.
- 알리 파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해군의 깃발이 노획되어 베네치아의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야 터키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화해의 증거로 반환되었다. 흰 천에 금실로 쿠란의 경구를 자수한 군기라고 하는데, 현재 터키에서는 패한 전투의 깃발이라 그런지 공개하고 있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는 소설+에세이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 깃발 반환이 터키의 요구였음을 몰랐는지 반환을 실행한 교황 바오로 6세에 대해 '이상주의자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다'며 그 깃발 멋있는데 니들 땜에 이제 못보잖아라고 하면서 왜 돌려줬냐고 깠다. 이뭐병.
- 가톨릭에서는 이 해전의 승전일인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가 신성동맹의 승리를 기원하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다.
- 이 전투 이후 오스만 해군은 이 전과 같은 정면 팽창보다 북아프리카의 가신 토후국들을 이용한 해적질에 더 무게를 두게 되고, 2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뒤흔든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무역 자체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 버려 결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에 큰 일조를 한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자금줄 또한 지중해 무역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레판토 이후 창궐한 이 해적들 때문에 전투의 참전 세력 대부분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는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아닐까. 그 후 이들은 "미국? 그게 어디있는 나라임? 우걱우걱"을 외쳐대며 미국인들을 털다가 분노한 천조의 해군과 해병대에게 장렬히 산화한다.[28] 이 때를 기점[29]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개발살났으며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함으로 완전히 근절된다. 한편 150년 이후 천조의 해군은 전세계의 바다를 자기네 수영장으로 삼는 희대의 먼치킨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6 관련 항목
- ↑ 오늘날 지명은 나브팍토스라고 투키디데스가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이 대판 맞붙었던 장소였다. 다만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서
지들 멋대로레판토라고 불렀고, 그게 해전의 이름이 된 것. - ↑ 이는 병사의 수적 차이도 차이였지만, 키프로스의 주민들이 베네치아에 그리 협력적이지 못했던 탓도 크다. 식민지인 키프로스 주민들을 베네치아 본토 주민들과 똑같이 대하기는커녕 노예처럼 부려먹어서, 오스만 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하거나 적어도 가만히 추이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은 자들이 많았다.
- ↑ 위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5촌 할아버지. 이쪽이 더 유명한 인물
- ↑ 이하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 함대의 총 규모나 좌익, 중앙, 우익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편차가 조금 있는 편.
- ↑ 이슬람이 하루에 5번 예배할 때마다 예배 시작 전에 미나렛(사원 바깥의 네 기둥들)에 올라가 아잔이라는 육성으로 일종의 알림 방송을 하는데 이 아잔의 진행자들을 무에진이라 부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무에진 출신이었는데 술탄의 하렘 후궁 중 하나가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하여 권세를 얻게 된 인물이었다. 다만 이전 항목에서는 '시작 전부터 오스만 측의 총사령관 함량 격차가 너무 컸으므로, 이미 무지막지한 밸붕이 있었던것이다' 라 되어 있었지만,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신성동맹 함대 총사령관 돈 후안도 육전 경험은 조금 있었지만 해군을 지휘하기는 처음이었다. 따라서 총사령관끼리의 '밸런스' 는 대충 맞는 상황이었다.
- ↑ 이하 괄호는 유럽에서 부르던 명칭들. 유럽인들에게는 투르크어나 아랍어 발음이 영 어려웠던 관계로 들리는 대로 대충 표기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살라흐 앗 딘도 '살라딘' 으로 표기되었던 걸 생각하면 꽤나 유서깊은 관행인 듯.
- ↑ 투르구트라고 하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유명한 해군 지휘관이지만, 1565년에 몰타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다만 레판토에도 이름만 같은 투르구트가 있었는데, 그 투르구트의 아들이다
- ↑ 하산 레이스와 메흐메트 베이는 하이르 앗 딘의 아들로 메흐메트는 네그로폰테 총독이 되었고 하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제 대총독이 되었지만 재능에 문제가 있었는지 자주 경질되고 다른 인물이 임명되었다. 레판토 당시의 알제 대총독은 울루치 알리.
- ↑ 갤리선 중에서도 소형이고 고속운항이 가능한 선박.
- ↑ 갤리엇과 비슷하지만 더 소형으로 전투용 함선이라기보다는 지원용이다.
- ↑ 이 때 기독교측 총사령관 돈 후안은 당시 궁정 연회에서 자주 추던 가야르라는 춤을 추면서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 시켰다고 한다.
- ↑ 바바리고는 전투가 끝난 이후 이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 전투 초입에 신성동맹 함대의 총사령관 후안의 기함 레알을 항해 오스만군 총사령관 알리 파샤의 기함 술티나가 돌입을 감행, 술티나의 충각이 레알의 뱃머리에 부딪쳐 단단히 박혀 버렸고, 레판토해전 최초의 본격적인 백병전이 레알과 술티나로부터 시작했다.
- ↑ 전투 내내 중앙 쪽은 양측 기함간의 백병전을 중심으로 자잘한 다른 함선들이 모여들어 개판 싸움을 펼쳤다.
이 시대의 HOT! PLACE마지막에 알리 파샤의 목이 베어지면서 사실상 전투 종료. - ↑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소설 '레판토 해전'에서 도리아를 비난하고 이 돌진을 미화 찬양했다. 누가 동인녀 아니랄까봐...해전사 전문가들이 쓴 책들에서는 예외없이 이 돌격을 비난한다. 하마터면 우익 전체의 전열을 붕괴시켜 중앙부대까지 위험하게 만들뻔 했다는 것이다.- 단 어떤 자료에선 당시 오스만의 팽창에 가장 절박한건 베네치아였는데 도리아가 전투전부터 지나치게 소극적인데다 전투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이 벌어지지않자 결국 전투회피로 보고 도리아를 믿지못하게된 베네치아 함선들이 단독행동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어찌됐든 지휘체계를 무시한 베네치아 함선들이나 전투전부터 동맹군들에게 전투의지를 의심받아온 도리아나 문제지만...
- ↑ 시로코의 최후에 대해서는 사로잡힌 후 바로 처형당했다, 심한 부상으로 스스로 애원하여 처형당했다,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등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 초반엔 오스만 측이 이기고 있었으나 뒤에서 예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기독교측 지휘관 돈 알바로 데 바잔이 조그만 배에다가 병사 200명을 실어 돈 후안의 기함에 승선 시키고 나서부터 역전.
- ↑ 그래도 일부 재생불능인 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재활용됐다.
- ↑ 물론 총기가 부족하고 활로 무장했다해서 화력에서 열세인것은 아니다. 이 당시 총은 연사력 떨어지는 화승총이다보니 오히려 연사력은 활이 더 뛰어났다. 그러다보니 오스만군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기독교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기독교군 역시 화승총뿐만 아니라 석궁도 같이 써서 화승총의 부족한 연사력을 보완했다.
- ↑ 해적질을 하면서 사로잡은 기독교도들. 다만 이건 여담이지만 노잡이로 부려먹으면서도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해적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당장 레판토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 지휘관 가운데 하나인 울루치 알리가 바로 노잡이 노예 출신이다.
- ↑ 전투 직전에 총사령관인 무에진자데 알리 파샤는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노잡이들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노잡이들이 신뢰하지 않아서 결과는 망했어요.
- ↑ 한편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부재상에 해당하는 인물로 레판토 해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출신으로 부재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일 정도로 오스만 해군의 거물이었던 피얄레 파샤는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부터 메메드 파샤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황제 셀림을 비판할 수는 없으니 재상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것. 이에 메메드 파샤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함대를 재건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레판토에서의 패전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단시일 내에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는데, 베네치아 대사와의 회담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 ↑ 당연한 얘기지만 베테랑 해병들은 배와는 별개로 뽑고 싶은대로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 ↑ 다만 '진정한 쇠퇴' 라는 말이 나와서 덧붙이자면, '그럼 2차 빈 포위 이전까지는 오스만이 짱먹었겠네?' 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 오스만 제국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만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유럽의 환자' 티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2차 빈 포위부터이고, 쉴레이만 이래로의 쇠퇴와 레판토 해전은 하등 관련이 없으므로 레판토에서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여전히 맞지 않는다.
- ↑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오스트리아는 오스만령 헝가리를 침공하며 20년 가까이 질질 끈 Long War라는 전쟁에 돌입한다.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지만.
- ↑ 그것이 실질적인 피해였든 정신적인 것이었든
- ↑ 지금이야 제2의 전성기를 연 황제로 평가하지만 생전엔 업적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비잔티움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이상한 군주였다.
- ↑ 단순히 해적 함대를 섬멸한게 아니라 다시는 해적질 못하게 알제리, 튀니지 등의 해적 항구 등을 철저하게 개발살내 인프라를 아예 날려버렸다. 물론 이 해적 항구의 주민들은 해적들 때문에 미군한테 학살당했지만.
- ↑ 미군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