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동맹

神聖 同盟.
Holy Alliance

주로 기독교 국가끼리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형성하는 군사적 동맹[1]. 역사적으로 신성 동맹이라는 명칭이 붙는 사례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495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이전 해에 이탈리아를 침공해온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맞서기 위해 체결된 동맹.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참가했기에 신성동맹이라고 하지만, 베네치아가 중심이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연합군도 대부분 베네치아가 고용한 용병대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베네치아 동맹' 이라고도 불린다.
  •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창하여 교황령과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이 체결한 반(反) 베네치아 동맹. 율리우스는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는 이탈리아를 교황령의 주도 아래 통일하려는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북동부를 차지하고 상대가 교황인데도 굽신굽신하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덤비는 베네치아를 꺾기 위해 동맹을 체결. 전쟁을 일으켰다. 이 결과 베네치아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 반대 급부로 이탈리아 내 프랑스의 세력이 대단히 강력해졌고, 그에 따라 율리우스는 이번에는 프랑스를 꺾기 위해 동맹을 결성하지만 그 결과는[2]...
  • 1538년에,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주도하에 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이 체결한 동맹. 당시 지중해에서 위세를 떨치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해안지대를 약탈하고 있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후원자이자 주군인 오스만 제국을 꺾기 위해 체결된 동맹이었지만, 이어지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연합 함대는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손발이 맞지 않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퇴각. 동맹도 해산되었다.
  • 1571년 10월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격퇴한 스페인,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의 연합체. 30여년 전 프레베자 해전에서 깨진 연합체의 후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결력이 훨씬 공고했던데다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이 차이점[4].
  • 1595년, 신성로마제국에 선전포고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었던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가 체결한 동맹. 이 동맹은 '투르크와의 긴 전쟁(Long Turkish War, 1591~1606)' 중에 체결되었으며, 전쟁 자체는 무승부였지만 이전까지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 한 사람 뿐이라고 주장하던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황제라고 인정하는 등 오스만의 쇠퇴가 드러난 전쟁이 되었다. 오스만의 신하국이었던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신성로마제국만 참가해서 그런지 이 동맹은 빼는 경우도 있으며, '클레멘스 8세의 신성 동맹'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1683년 2차 빈 포위가 무위로 끝난 직후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제안으로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폴란드, 러시아가 참여한 연합체. 1687년 2차 모하치 전투, 1697년 젠타 전투, 1698년 포다이체 전투 등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1699년 오스만 제국과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동유럽 영지는 대폭 축소된다.
  • 1717년,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교황령과 베네치아, 포르투갈,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이 체결한 동맹.


그리고 1815년 9월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린 직후 파리 조약의 부산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혁명에 맞서 형성된 유럽 왕정 국가간의 연합체. 본 항목에서는 이 동맹을 중심으로 다룬다.

당시 유럽에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정면으로 쌩까주시고 모스크바에서 프랑스군을 발라주신 러시아 덕분에 유럽에 평화가 돌아왔다는 분위기가 팽패해 있었으며, 이 상황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5] 마침 알렉산드르 1세는 1812년 프랑스군에 의해서 모스크바가 잿더미가 되자 러시아 정교에 귀의하게 됐으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이 지상에 평화를 구축하는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게 되었다. "러시아 군대가 철수하게 되면 프랑스 국내사정은 다시 불안해지고 맙니다"라는 베르가스N.Bergasse와 샤토 브리앙F.R.de chateaubriand의 진정에 알렉산드르 1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구상해 낸 방안이 바로 신성동맹이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신성 동맹의 주축이었다.

사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주축국들이었지만, 처음부터 이 조약에 냉소적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 황제메테르니히에게 알렉산드르가 보내준 초안을 보여주면서 조약안이 탐탁치 않다고 말했고, 메테르니히도 조약으로는 성립될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였다. 프로이센 국왕(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이들 셋은 이 조약을 "종교의 외투 밑에 있는 박애의 열망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메테르니히는 개인적으로 그의 회고록에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프리드리히 폰 겐츠는 이를 두고 어떤 실제적 목표도 없으며 정치적 무효이며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또 여하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신성동맹에는 가입하기 위해서는 3국의 황제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해야했지만, 그런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영국[6], 교황청[7], 오스만 제국[8]를 제외한 (독일의 군소국가들을 포함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가입했다. 공화정인 스위스도 이러한 종교적 연합에 가입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심지어 알렉산드르는 미국에게도 가입을 요구했는데, 미국이 주저하는데도 계속 가입을 요구하자 (후에 대통령이 되는) 미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J.Q. Adams는 미국은 1783년 이래로 유럽체제에는 관여하지 않는것이 기본정책(먼로 독트린이라든지)이라고 가입을 거절했다.

알렉산드르는 이 조약을 왕년의 적진의 심장부 파리에서 발표하고 싶어했으나[9],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10]임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독.오 양국의 상의도 없이 단독으로 러시아에서 신성 동맹의 결성을 발표해 버렸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이제까지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신문에서 신성동맹에 관련된 일체의 기사도 다루지 말것을 명해왔던 터다. 그랬던 그가 신성동맹의 존재가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도 확인되자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수 없었는데, "신성동맹이란 원칙의 표명이며 군주의 의사만 표시한것에 불과하며 대신들의 부서도 없는 문서"라고 규정했다. 더불어 "이런 문서에는 아무런 법률적 의무도 없으며 다른 동맹조약과 달리 의무규정이 따로 없다"고 천명하였다. 과연 오래잖아 열강끼리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 시작, 동맹은 결성 10년만에 사실상 해체되었다.

하지만 빈 회의의 결과물인 빈 체제, 특히 평화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존재는 바로 신성동맹임이 분명했고, 동맹은 해체되었으나 서구와 러시아의 대립 구도는 크림 전쟁 때에나 이루어지는 등 상당한 효험을 본 것은 분명하다. 이후 잠시 붕괴되었던 유럽의 평화는 보오전쟁보불전쟁을 거치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다시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국 동맹을 채결시키면서 재부활한다.[11]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이런 동맹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결국 러시아는 삼국협상으로 튕기면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만다.그리고 졌다

보수반동적인 목적의 메테르니히와 역시 공명심에 불탄 러시아 차르가 만든 빈 체제와 신성동맹이 역설적으로 평화와 세력 균형, 갓 자라나는 자본주의산업혁명의 수호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 신성동맹의 포인트. 강대국들간의 이익을 위한 반동적 공조가 선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복고주의, 보수주의의 원형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황이 참가해야 한다는 것. 교황이 참전해 종교적 명분을 세워줌으로써, 동맹은 '신성' 해지고 전쟁도 '성전'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왜 '망했어요' 가 됐는지는,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이제이' 를 내걸고 줄타기 외교를 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오랑캐'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공격해올 경우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3. 이전 항목에는 교황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되어 있었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파울루스 3세는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 개혁에 열심이었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던 스페인 왕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4. 이전 항목에서는 스페인이 중심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주도권은 스페인이 쥐고 있었지만 참전한 병사는 베네치아 쪽이 더 많았다. 게다가 당시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 영토를 공격하는 상황이었고 베네치아는 스페인과 교황령에 지원을 얻어야만 제대로 싸울 수 있었으므로, 스페인이 주도권을 쥐었던 것도 당연한 일.
  5.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가 다굴 맞았고 히틀러 대신에 나폴레옹이 유럽의 공적이었던걸 빼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 이후의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을때랑 2차대전 후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을때, 신성동맹이 국제기구의 선구자로서 각광을 받았었다. 멋도 모르고 서구문명의 수호자로 스탈린이 추앙 받은 것도 비슷했다.
  6. 이 때 세 군주는 영국의 섭정 조지에게 가입서한을 보냈는데, 카슬레이가 리버풀 수상에게 보낸 신성동맹에 대한 긴 보고문에 부록으로 신청서가 딸려 들어갔다. 여기서 카슬레이는 신성동맹이 알렉산드르의 깊은 종교적 성향에서 비롯되었고, 숭고한 신비주의넌센스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그래놓고 신청서는 보내다니. 가입을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그러나 평화를 추구하는 세 군주의 소박한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까 대신의 부서없이 섭정인 조지 홀로 서명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러나 영국헌정의 전통에 의하면 섭정이 조약의 가입을 하는것은 불가능하기에 조지는 알렉산드르에게 거절의 서한을 보냈다.
  7. 교황청은 처음부터 이런 종교적인 동맹에 가입할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8. 러시아는 처음부터 신청서를 오스만에게는 보내지도 않았다. 이슬람 국가가 기독교 동맹에 가입하는것도 이상하지만, 보내지 않는다면 반 오스만 정책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러시아는 신성동맹은 비기독교인에게 어떠한 적개심도 함축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9. 적진의 심장부니 하는 것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가 유럽의 외교 무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당장 영어 위키백과에 들어가서 'Treaty of Paris' 라고 치면, 17세기 이래. 특히 이 무렵의 조약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이다. 여담으로 이런 경향을 그나마 수그러들게 만든 것이,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
  10. 내용전문이 지금까지 유럽열강이 수행해온 정책에 대한 비판, 새로운 정치질서의 필요, 그리고 인민의 행복을 위한 헌신의 강조였다.
  11. 비스마르크는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