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리바르바리(Barbary) 해적.
15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백년 동안, 지금의 북아프리카인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와 리비아의 해안 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전 유럽을 상대로 인신매매와 약탈을 벌였던 무슬림 해적 집단. 유럽의 사략선과 기본개념은 비슷한면이 있지만 이들의 악행은 질과 스케일 모두 두수 위. 종교는 이슬람을 믿었지만, 기독교 신자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 패로 받아들여 주었다. 심지어 기독교를 믿던 유럽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해적단의 한 무리를 지휘하는 해적 두목이 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이 두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1530년과 1789년 사이에 대략 150만명의 유럽 기독교인과 유대인 및 미국 선원과 여행자들이 납치당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물론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적 자체는 서기 7~8세기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가장 극렬했던 시기가 바로 15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바르바리 해적들이고, 여기에 동유럽 정복 과정에서 이미 강대해져 가는 서유럽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오스만 제국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그 세력이 엄청나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무슬림이나 유대인이 합류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같은 해인 1492년에 '그라나다 칙령' 을 반포하여 스페인 전역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했는데, 그들이 갈 곳이라곤 북아프리카 뿐이었기 때문[1]. 그리고 그 가운데 해적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스페인 출신이다 보니 그쪽 지리에 밝은 것은 당연지사[2]. 물론 오스만 튀르크의 해군은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쇠퇴하게 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해적집단의 노략질은 그 뒤에도 300여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미국이 프랑스에 파견한 2대 대사인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 주재 초대 미국 대사 존 애덤스와 함께 1785년 런던 주재 트리폴리 대사를 만났을 때 충격을 받았다. 두 미국 대사는 베르베르 이슬람 국가들이 무슨 권리로 미국 선원들과 여행자들을 납치하는지 물었다. 트리폴리 대사는 쿠란과 이슬람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국가 사람들은 죄인이며 전투에서 대항하는 자는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고 코란에 적혀 있다고 말했다.
주로 활동 무대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해안 지대였으나, 18세기가 되자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서구의 범선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그 무대를 점차 넓혀나갔고, 아일랜드와 영국, 심지어 아이슬란드의 해안가에 나타나 주민들을 납치하고 약탈을 일삼는다. 물론 유럽 국가들의 워낙 강력한 상대이다보니 서유럽쪽은 약탈을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못하는 벽촌만 골라서 털었고 후원자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선박과 주민들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서유럽 자체를 못털고 약소국이었던 러시아와 동유럽만 노렸으며, 19세기 초 이런 전략의 최대 피해국이 바로 미국과 러시아였다. 그나마 미국은 거리가 멀다보니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러시아는 투르크랑 가까워서 바르바리 해적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들에게 납치된 유럽인들은 모로코나 알제리, 혹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남자들은 해적선과 이슬람 선박들의 노잡이나 북아프리카 카이루안의 목욕장, 이슬람권의 각종 노역장에서 죽을 때까지 착취를 당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개죽음을 당했고[3], 여자들은 왕국 하렘에서 하녀로 살거나 이슬람 군주, 귀족들의 첩, 하녀가 되었다고 한다. 단,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몸값을 내면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 잡혀가면 평생 노예로 살다죽었다보면 된다. 이러다보니 유럽인들은 바르바리 해적이라면 치를 떨었다.
물론 유럽 국가들도 가만있지 않아 몸값을 낼 수 없었던 가난한 기독교도들을 구출하고자 따로 구출 기사단과 구출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무력 행위는 구호기사단이나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했고, 구출 수도회나 구출 기사단은 몸값을 마련해 기독교도 노예들을 사들여 해방시켰다. 또한 일부 기독교도들은 보복으로 같은 해적단을 만들어 이슬람권 도시들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바르바리 해적과는 달리 해적선과 해적 근거지만 공격했다는 차이는 있다. 물론 대다수의 기독교도 해적들은 대서양에서 주로 활동했다.
무슬림으로 구성된 집단이니만큼, 기독교 유럽 국가들의 적국인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정규 해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4] 사실 바르바리 해적이 오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오스만 제국이 뒤를 봐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 국가들이 족치려고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17~18세기경에 이미 소멸되었을 것이다.
19세기 초, 산업 혁명에 성공한 서구 열강은 북아프리카에서 활개치며 자꾸 유럽을 약탈하는 바르바르 해적단에게 빡쳐서 그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서구 열강의 공격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맨 먼저 1801년과 1815년에 미국이 트리폴리를 공격하여 초토화시키면서 해적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1차 바르바리 전쟁, 2차 바르바리 전쟁), 1816년과 1820년에는 노예 무역 근절에 열을 올리던 영국이 모로코를 공격하여 남아있던 해적들의 수도 줄어들었으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고 해적들을 소탕함에 따라 바르바리 해적단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이 놈들이 저지른 짓을 보면 자업자득이지만.
이 해적들 중 가장 이름을 남긴 이는 바로 하이르 앗 딘.
여담으로 이 세력은 미국이 처음으로 외교 조약을 맺은 대상이자,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 파병하여 수행한 국제 전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트리폴리 조약과 1차 바르바리 전쟁 항목을 참고할 것.
물론 그명맥은 19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이전처럼 유럽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의 풍요로운 삶을 동경하는 이슬람권 내 이민 희망자들을 모아다 유럽에 밀입국시키는 브로커 역할이다. 물론 유럽을 대상으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돈을 번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초반 이전의 조상들과 다를 게 별로 없긴 하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 로빈슨이 3번째 항해에서 이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잡혀 한동안 노예생활을 하다 탈출한다.- ↑ 당시 황제 바예지드 2세의 원조로, 오스만 제국으로도 꽤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유대인은 쉴레이만 대제의 주치의가 되기도
- ↑ 여담이지만, 무슬림들을 북아프리카로 수송해주어 이름을 얻은 것이 하이르 앗 딘의 형 우르지다. 그는 후에 알제를 차지한 뒤 이러한 명성을 한 축으로 하여 잠시동안이나마 독립 왕국을 세웠고, 하이르 앗 딘도 해적 일을 하는 틈틈이 형의 이런 사업(?)을 계속해나갔다.
- ↑ 사실 이는 유럽인 노예만 그런게 아니라 흑인 노예들도 이렇게 당했다.
- ↑ 그러나 이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충성한 것은 아니다. 무와히드 왕조와 같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은 오랜기간 중동의 무슬림과는 별도의 국가를 세워왔으며, 이들은 종속적 관계에 있지 않았다. 아래 언급된 하이르 앗 딘의 형 우르지만 하더라도 '알제의 술탄' 을 칭하며 독립 왕국을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이 통일되고, 지중해에 세력권을 형성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르바리와 오스만은 결국 술탄이 해적 두목에게 해군제독의 직함을 내리는 방식으로 서로 해군과 육군을 제공하는 공조관계를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