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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완서(朴婉緖) |
출생 | 1931년 9월 15일 |
사망 | 2011년 1월 22일 |
첫 작품 | 나목 (1970) |
마지막 작품 |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2010) |
홈페이지 | [1] |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 ||||
유재용 (1980) | → |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1981) | → | 최인호 (1982) |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 ||||
이문열 (1992) | → | 박완서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 | → | 윤후명 (1994) |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 | ||||
송기원 (1993) | → |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4) | → | 정찬 (1995) |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2] |
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1931년 9월 15일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났다. 1970년 잡지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중산층과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룬 많은 작품을 남겼다. 2011년 1월 22일 사망했다.
2 생애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반남 박씨 장손 집안의 1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의 프로필에는 1931년 10월 20일생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은 9월 15일생이다. 중간에 호적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모든 서류를 다 정리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냥 두었다고 한다.
네 살 때인 1934년 아버지가 그 당시 치료가 가능했던 병인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집안에서는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큰 슬픔은 별로 느끼지 않고 컸으며,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반일 감정이 강한 분이셨기 때문에 손녀에게 창씨개명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하셨고, 덕분에 박완서는 일본이 망할 때까지 창씨개명을 안 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오오.대인배(!!)[3]
하지만 딸에게 좋은 학교를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서울의 명문 학교로 와서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고.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일제의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이사 가 호수돈여고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보니까 어렸을 때 놀던 친구들이 정신대로 잡혀갈까봐 모두 시집보내진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서울 살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학교와 시골 학교 간의 괴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개성에 머물고 있던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고교생활을 지속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이후에도 문우나 동창생의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절친했다고 한다. 또한 학창시절 담임선생으로 있었던 소설가 박노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여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혹은 오글거리는)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막상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안 돼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4]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께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었다! 당시 박완서는 좌익 사상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안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 기간 중에 오빠와 숙부가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한 뒤로도 책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처음에 제가 시작한 거는 소설이 아니라 전기였어요. 박수근 전기를 써야겠다. 투고하게 된 것도 처음부터 여성동아였던 게 아니에요. 여성동아에서는 7월달에 여류장편소설 마감이 있고, 또 신동아가 있지요. 지금은 교양지도 많지만 그때 신동아가 아주 고급 교양지였습니다. 거기서는 논픽션 공모를 했어요. 그것이 5월이 마감인데, 이듬해 1969년이었을 거예요. 논픽션은 기럭지가 길지 않아요. 여류 장편은 1200매 이상이어야 되는데 이거는 300, 400매만 해도 되고. 그래서 저기다 내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써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그냥 PX에서 그런 일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어딜 사냐, 창신동 살고.. 이런 얘기 외에는. 쓸 거라곤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막 취급받고 화가로서는 우중충한 데 앉아서 그리면서 얼마나 모욕스러웠을까, 고거 원고지 열 장도 안 되는 거예요. 논픽션이면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다 있어야잖아요. 그런데 아는 것도 거의 없어요.그러니까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이십 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막 내가 보태는 거야. 고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
그런데 만약 논픽션에 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당선이 됐다가도 취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 규정이 있어요.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잖아. 그러면 허가받은 거짓말이라는 건 뭐냐. 픽션이 나에게 맞는구나. 아, 거짓말을 보태니까 이렇게 즐겁고. 쓰는 게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래 갖고 쓰던 걸 아주 파기를 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날짜도 좋더라고. 내가 그 해, 1970년 초였을 것 같애요. 5월달에 낼려고 쓰던 거를 2,3월 됐을 때 다 찢어버리고는 느닷없이 소설로 바꿨어요. 그거는 1200장이나 되고 마감은 7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던 붓이 방향 전환을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빨리 써지는 거예요.
그렇게 써낸 글이 바로 박완서의 데뷔작,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다. 박완서는 당시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것과 딸을 잘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것.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준 것이 바로 50만 원과 엄마였다고 한다. 대단한 점은 처음 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 없이 한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써내서 공모에서도 한번만에 바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질문자: 처음 써 보는데 1200매를 다 쓸 수가 있었어요, 선생님?박완서: 그러믄요. 네.
질문자: 습작을 안 하셨잖아요?
박완서: 습작 안 해도 책 많이 읽으면 돼요.[5]
박완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기억이었던 PX 생활이 오히려 작가로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등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말년까지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이나 목마른 계절, 중산층의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말년의 작품들은 이른바 노년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80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81년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90년과 91년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93년 중앙문화대상을, 같은 해에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현대문학상을, 94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95년 '환각의 나비'로 한무숙문학상을, 97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99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인촌상을, 01년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0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1984년 영세를 받았으며, 1988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3개월 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마취과 수련의였던 외아들이 26살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남편도 사망하고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요절하자 큰 슬픔에 빠져 천주교 신자들이 사용하는 목주를 집어던졌다고.[6] 따라서 이 때의 절망은 그야말로 극심했으며, 큰딸의 회고에 의하면 아들을 앗아간 절대자에 대한 분노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박완서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 때 쓴 일기 묶음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한 말씀만 하소서〉[7].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8].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같은 작가 최인호 등과 함께 생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자신의 신앙칼럼을 틈틈히 기고 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전쟁 중 미처 졸업하지 못한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일곱번째. 박완서의 인사말.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맏딸은 호원숙 수필가이고 셋째딸은 서울의대 호원경 교수이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비판을 들어야 했다.[9]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2011년 10월 20일 탄생 8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3 주요 작품
박완서/작품 목록 항목 참조.
3.1 장편소설
- 나목
- 목마른 계절
- 도시의 흉년
- 휘청거리는 오후
- 욕망의 응달
- 살아 있는 날의 시작
- 오만과 몽상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서 있는 여자
- 미망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아주 오래된 농담
- 그 남자네 집
3.2 단편소설
-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4)
- 겨울 나들이 (1975)
- 도둑맞은 가난 (1975)
- 배반의 여름 (1976)
- 엄마의 말뚝 (1980~1991)
- 그 가을의 사흘 동안 (1980)
- 꽃을 찾아서 (1986)
-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3)
- 그 여자네 집 (1997)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997)
- 그리움을 위하여 (2001)
- 친절한 복희씨 (2006)
3.3 기타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 나의 아름다운 이웃
- 한 말씀만 하소서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4 문학사적 의의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쪽에서, 여류 문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선언한 작가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물론 그녀 이전에 여성 문학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10] 은희경, 공지영, 배수아, 김애란, 염승숙, 김숨, 황정은, 편혜영 등 여류 문학가들의 등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시대에는 월등히 여성 문학가보다는 남성 문학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자전적인 세계 의식이 문학에 녹아 들어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사망하였을 당시 잠시 절필했던 때를 제외하고 매년 쉬지 않고 집필 활동을 했다.
박완서의 글은 자전적인 체험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전부의 문학이 그런 것은 아니나, 작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유독 많다는 점을 들어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전적 회고에 가까운 '수필형 소설'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 보는 시각으로, 박완서라는 작가는 자전적 체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을 통해 시대와 국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날카롭게 해부해낸 작가라는게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6.25에 대한 자전적 체험뿐만 아니라, 익히 알려진 분단국가로서의 현실, 가부장적 가정 구도, 전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여성, 중산층 등 6.25 전후를 비롯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아래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예리하게 관찰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시각들이 잘 드러난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라는 작품 속 시각에 철저히 입각하여 작품을 전개하기에, 이를 회고와 체험의 범위 안쪽으로만 생각하기 쉬워서 위와 같은 평가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와 오빠가,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식만은 무슨일이 있어도 출세시키려고 마음먹은 어머니에 이끌려 어머니와 같이 서울로 이사를 가고(남편이 서양식 병원에 가지 않고 기존 전통적인 치료를 고집하다가 죽은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나와 오빠를 성공시키기 위해 (특히 '나'를 구세대적인 여성상과 반대쪽에 위치하는 '신여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어머니와 서울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성장하는 나와 오빠,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남았으나 6.25에 의해 오빠가 죽고 고향은 이제 갈 수 없게 된 박완서의 자전적인 경험은 박완서의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6.25는 여전히 박완서의 소설에서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며, 분단이라는 거대한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맞서고 거역하려는 모습이 계속 묘사된다. 일제강점기와 6.25, 해방과 분단, 봉건문화와 근대 신문화, 구여성과 신여성, 농민과 노동자 등 한민족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인 근대화-일제강점기-6.25-분단세대의 혼란스럽고 다채롭던 시대상과 가치관이 박완서의 소설에서 살아숨쉬고 있으며, 아직 6.25의 영향으로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상태인 오늘날까지에도 이러한 시대상과 가치관들은 박완서의 소설에서 사라지지 않고 빛을 발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쭉 이어져오고 있는 정서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박완서 작가 자신이 소설은 이야기라는 믿음을 가지고 쓰고 있기 때문인지 '-다우' 라는 어미형을 쓰기도 하며(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여자네 집), 서술자가 청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짜여진 소설(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도 존재한다. 또한 대다수의 소설은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적을 논하기 이전에 그녀의 글은 여성으로서의 세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근래의 글에서는 여성이기 이전에 어머니라는 존재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크다.
학교대사전에 따르면 '학생을 문학작품으로 고문하는 데는 나이의 제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카더라.[11]
5 일화
박완서는 인공 치하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해서 들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강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박완서는 이 경험을 통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공산주의의 인간성(개성)의 말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아버지 없이 커온 어릴 적.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해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의 우상이었고 각별했던 친오빠[12]가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부상을 입고 탈주,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남아있던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한다. 결국 오빠의 조카들과 늙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겨진 올케와 박완서가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의 나이는 40세. 그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며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집필했다고 한다. 집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등단 소식에 매우 놀랐지만 이내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40세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본인이 썼는지 증명하라고 해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여주어 증명했다고 한다.
초기 박완서의 작품은 극단적으로 6.25가 배경인 것이 많다. 그 외에 남자가 잘 없는 모계 중심의 가정인 경우도 꽤나 흔하다. 한국전쟁 당시 박완서가 겪었던 경험, 즉 오빠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대표작 엄마의 말뚝에서 형상화되었다. 작품 속에 그녀의 진짜 이야기라고 할 만큼 특유의 경험이 그대로 실려있으며, 특히 오빠의 죽음과 배경 설명이 거의 그대로다. 단, 소설 속에서 서술자의 오빠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다.
별세 전 까지도 출판사 쪽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한 작가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윤을 취하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물론 과도한 인세를 요청한 모 작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네임밸류에 비하면 과도한 인세 요청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집필에 신경 쓴 편이라서, 출판계에서 박완서의 평은 좋았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도서관에 박완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2]
구리역에서 멀지 않으므로 평소 박완서에 대해 관심 많은 분들은 찾아가기 좋기는 하나, 정말 볼게 없다. 하다 못해 흔한 시청각자료도 운영치 않고 있다. 그냥 친필 원고 몇개랑 책 전시 몇개가 전부.- ↑ 사진작가 김종구가 찍은 사진으로 박완서 본인이 이 사진을 좋아해 서재에 걸어두기도 했다. 장례식 당시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 ↑ 1998년 보관문화훈장을, 200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 ↑ 의외로 선생들도 이름을 안 바꿨다고 그리 압박을 해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 ↑ 1950년은 6월에 입학을 하도록 한 유일한 해였다. 일제 강점기 때는 4월에 입학을 해왔었는데, 해방 직후에는 미국식으로 9월에 입학을 하는 것으로 바꿨다가 다시 4월로 되돌아간답시고 바뀌는 학년의 혼란을 막기 위해 그 해에만 5월에 졸업하고 6월에 입학하도록 한 것이다.
- ↑ 이상 두 부분은 2012년 출간된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1931~2011'을 인용했다.
- ↑ 이전 글에는 박완서가 이 충격으로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쓰여 있으나 틀린 서술이다. 박완서는 남편이 사망하기 전에 이미 부부가 함께 천주교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 ↑ 미사 중 영성체 전 기도문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이다.
-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축일 9월 20일)은 성 정하상 바오로의 여동생으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세례명을 같이 부르려면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이라고 하면 된다.
- ↑ 대한민국에서 중도의 길을 걷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경우.
극과 극은 통한다. - ↑ 근래에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남성 신진 작가들을 찾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남성 작가라고 해봤자 박민규, 김영하, 김경욱, 이기호, 김연수, 김중혁 등이다.
- ↑ 그런데 정작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 등지에 인용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른바 수능, 진학 문제풀이의 용도로 문학작품의 심오한 이해없이 이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 오죽하면 작품을 칼로 재단하는 것 같다는 투의 발언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사례로 이외수가 있다. 이외수는 자신의 작품을 문제로 낸 것을 풀었는데 맞은 답이 거의 없었다고.
- ↑ 전쟁 이전 좌파적 사상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