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스, 특히 전자랜드 팬들에겐 엄청난 혐짤.
이름 | 박수교(朴守教) |
생년월일 | 1956년 7월 13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출신학교 | 인창고-연세대학교 |
포지션 | 가드 |
실업입단 | 1978년 현대전자 입단 |
소속팀 | 현대전자 (1978~1988) |
지도자 | 현대전자 코치 (1989~1993) 현대전자 감독 (1993~1994)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감독 (1999~2002)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감독 (2004~2005) |
프런트 |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단장 (2005~2006) |
1986~1987 농구대잔치 MVP | |||||
이충희(현대전자) | → | 박수교(현대전자) | → | 김현준(삼성전자) |
1 개요
한국의 농구인. 모비스, 전자랜드 팬들 : 어디서 개소리를!!!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명 가드이자, 동시에 최악의 감독(...).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을 증명한 인물이다. 한국의 아이재아 토마스.[1] 야구로 치면 선동열[2] 정도 된다.
2 선수 시절
연세대학교 시절 신동찬, 신선우와 함께 연세대의 주축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가드로 명성을 얻었다. 탁월한 득점력이 무엇보다 일품이었고, 패스 한 방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여우같은 플레이로 그야말로 한국 가드의 계보를 잇는 적자 중의 적자였다. 얼굴도 잘 생겨서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나서 대학 시절부터 농구대잔치를 뛰었다면 그야말로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 선수. 물론 그 시절에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선수임에는 분명했다.
선수 시절에 성깔도 있는 선수라서 당시 얌전하게 플레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심판 판정에 거세게 항의도 하고, 쇼맨십 비슷하게 대응도 했고, 무엇보다 선수로서 팀원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있었던 선수. 한국 남자 농구의 첫 업적으로 평가받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대표팀 주장이자 포인트가드로 맹활약하면서 한국이 중국을 누르고 극적인 금메달을 차지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현대와 삼성이 1977년 창단을 선언하고 선수를 모집할 때,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결국 현대로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출범한 농구대잔치에서도 그 뛰어난 플레이는 어디가지를 않아서 선수로서 뛴 다섯 시즌동안 세 번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면서 화려한 시절을 이어갔다. 1986-87 농구대잔치 MVP에 빛나는 인물.
1988년을 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 가드로서의 명성을 안은 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까지는 정말 멋있는데
3 지도자 생활
3.1 첫 출발
1년 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수교는 현대전자 코치에 임명되어 지도자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코치로서 계속 일하다가 스카우트 전쟁에서 자꾸 밀린 것의 책임을 지고 정광석 감독이 1993년 사퇴하자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실업팀 감독으로 처음 데뷔하기에 이른다. 안돼
그러나 박수교가 처음 발을 내딛은 시절은 흔들려도 여전히 기아차가 건재하고, 삼성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연세대와 고려대가 실업팀을 두들기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SBS 창단 과정에서 우수 선수 스카우트에 실패하면서 선수층 보강도 이루어지지 않던 시점이었다.
결국 박수교는 1년 만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후임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신선우다. 감독직 사임 후, 박수교는 라디오 진행자를 맡으면서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3.2 기아 - 모비스 시절
1999년 박인규 감독의 뒤를 이어 새롭게 기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재밌는 것은 1998-99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현대와 기아에 맞붙었는데, 양 측 사령탑인 신선우와 박인규는 모두 1982 뉴델리 멤버였고, 계약 만료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약 만료가 된 후, 후임으로 거론된 인물이 바로 박수교였다. 결국 박수교는 챔프전의 패자였던 기아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히 망했다. 외국인 선수 장악에 실패해 외국인 선수가 박수교의 뺨을 때리려 했다는 루머가 돌 정도로 흔들리기도 했고,[3] 주축이었던 김영만은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고전하던 김영만은 무리해서 나가다가 전성기를 잃어버렸다. 뭐 이런 악재가 있다고 해도 전년도 31승 팀이 21승으로 추락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1999-2000 시즌 5할 승률 밑이었지만, 6위를 차지하면서 PO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이게 박수교 감독 생활의 유일한 PO였다. 2000-01 시즌에는 17승 28패, 2001-02 시즌에는 18승 36패로 마침내 최하위라는 수모를 당했다. 계속되는 부진에 허덕이면서 명가 기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 이 세 시즌을 끝으로 박수교는 모비스 감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감독직도 끝날 줄 알았는데...
3.3 전자랜드 시절
2004년 전자랜드를 이끌던 유재학 감독이 연봉 2억 3천만원이라는 당시 최고액의 대우를 받고 울산 모비스 피버스로 이동하면서 전자랜드이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당시 해설위원 생활을 하던 박수교였다.
그런데 여기서 박수교는 또 다시 전설을 썼다. 전년도 30승으로 4강에 올랐던 전자랜드를 순식간에 17승 37패로 만들면서 최하위로 추락, 다시 몰락한 것. 물론 프로농구가 외국인 선수의 선발, 선수들의 군 문제 때문에 전력이 자주 변한다고 해도 너무 쉽게 무너진 것임은 분명했다. 결국 이 때의 몰락으로 인해 한 시즌만에 감독직을 물러나면서 진짜 지도자 생활은 접는가 싶었지만, 구단의 삽질로 단장으로 승진했다! 팬들은 이 놀라운 승진능력(...)을 칭송(?)하여 이때부터 수교본좌란 별명을 내려주었다. 동시에 박수괴란 별명도 덤으로 얻었다. 이 때문에 전자랜드 팬들은 뒷목을 잡아야 했다.
하지만 단장으로서는 더더욱 무능의 끝자락을 보여주었다. 한국프로농구 최초의, 현재까지는 유일한 외국인 감독으로 동부에서 코치로 꽤 잘나갔던 제이 험프리스를 세웠으나, 험프리스는 20경기 3승 17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단명 감독 신기록 수립.[4] 작전타임 등 경기중에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돼야 되는 농구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리빌딩을 명목으로 단행한 문경은 트레이드에서도 딱히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5], 드래프트에서는 하필이면 망픽일 때 1픽이 걸리는 불운으로 성과가 전혀 없었다. 그가 단장으로 재임한 2005~2006시즌 전자랜드는 8승 46패로 전설적인 32연패의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제치고 역대 한시즌 최다패 신기록을 수립한다.[6] 결국 2006년 최희암이 감독에 임명되면서 단장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고, 그렇게 박수교는 진짜로 현장에서는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워낙 감독, 단장으로 너무 위대한(...) 업적을 쌓은지라 다시 현장에 돌아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전자랜드 팬들은 박수교 얘기만 들어도 이가 빡빡 갈릴 정도로 박종천과 함께 지도자도 아닌 시궁창 취급.
4 해설자 시절
감독과 단장으로 또 하나의 전설(...)을 쓴 박수교는 이후 SBS Sports의 농구 해설위원을 맡게된다.
SBS 해설 초창기에는 과거에 쌓은 업적(?)이 워낙 큰데다(...) 목소리톤이 거부감이 든다고 까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럭저럭 안정된 해설을 한다는 평. 해를 거듭할수록 넉살도 좋아지고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없으니 전체적으로 판세를 여유있게 읽는 해설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방송사 우지원 해설위원이 너무 선수를 감싸주는 해설을 하는 데 반해, 때로는 냉정한 멘트를 날리기도 한다. 그래서 농빠들은 KBL판 복귀욕심 내지말고 영원히 해설에나 전념하길 빌고있다(....)
2012년 마지막 중계에서는 종료멘트로 "모두 부~자되시길 바랍니다"를 외치셨다(...).
해설위원의 연령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그의 경륜있는 해설이 계속되길 바란다는 목소리도 있다. 결정은 시청자의 몫.
2014년 11월 18일 부산 KT 소닉붐와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경기 해설 도중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농구해설가 박수교 ‘장애 비하’ 채찍 필요. 이후 사과를 하긴 했지만, 평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발언.박수교 장애인 발언 및 사과 장면. 한편으로는 새 외국인 선수 에반 블락에 대해 평가를 한 kt의 모 선수도 신중치 못한 의견을 남긴 것도 크겠지만.- ↑ 실제로 둘의 커리어가 꽤 닮은 점이 많은데, 현역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팀의 리더이자 간판 포인트가드였다는 점에서부터, 감독과 단장으로써 대차게 말아먹었다(...)는 점까지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토마스는 이후 대학농구 지도자로 활동중인 반면 박수교는 해설자를 하고 있다는 것.
- ↑ 뭐 선동열은 삼성 시절 우승이라도 했지만 실상 삼성은 그 누가 와도 우승하는 팀이었으니... 준우승 전력에서 최강팀 현대의 전력을 빼고도 우승 못하면 그게 감독인가? 기아 시절의 암흑기를 생각해 봐라...
- ↑ 당시 외국인 선수인 듀안 스펜서가 멱살을 잡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얘기가 돌았다. 경기 도중에 감독지시에 여러차례 반발하거나 태업논란도 있었던만큼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이 기록은 훗날 같은 팀에서 박종천 감독이 12경기 1승 11패로 경신한다.(...)
- ↑ 문경은이 SK로 가고 김일두, 임효성을 데려오는 트레이드인데, 김일두는 김성철의 보상선수로 KT&G로 이적했고, 그나마 데려온 김성철도 나중에 다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임효성은 농구가 아니라 슈의 남편으로 유명하다(...)
- ↑ 1998~1999시즌 동양이 32연패의 기록을 세웠을 때는 한 시즌이 45경기 체제였기 때문에 3승 42패로 시즌을 끝냈다. 그래서 역대 한시즌 최다패 기록은 전자랜드에게 넘겨줬지만, 역대 최저 승률 기록인 0.067은 오리온스가 가진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듯 하다(...) 참고로, 46패를 기록했던 전자랜드의 승률은 0.148이며, KBL 원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2할 아래의 승률로 시즌을 마쳤던 팀은 이 시기 전자랜드와 32연패의 동양 둘 뿐이다.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