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현역 시절 신동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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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역 시절과는 달리 안습의 극치를 달린 감독 시절.
이름 | 이충희(李忠熙) |
생년월일 | 1959년 11월 17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강원도 철원군 |
출신학교 | 송도고 - 고려대 |
포지션 | 슈팅가드, 스몰포워드 |
신체 사이즈 | 182Cm, 79Kg, B형[1] |
프로입단 | 1981년 현대전자 입단 |
소속팀 | 현대전자 (1981~1992) 대만 홍커우 (1992) |
지도자 | 대만 홍커우 코치 (1992) 대만 홍커우 감독 (1995~1996)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1997~2000) 고려대학교 감독 (2003, 2009) 동국대학교 감독 (2006~2007) 대구 오리온스 감독 (2007)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2013~2014.2.1) |
가족 | 배우자 최란 |
1983~1984 농구대잔치 MVP | |||||
출범 | → | 이충희(현대전자) | → | 임정명(삼성전자) |
1985~1986 농구대잔치 MVP | |||||
임정명(삼성전자) | → | 이충희(현대전자) | → | 박수교(현대전자) |
1 개요
"스타 선수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의 산증인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 전 농구 감독. 전 농구 해설위원. 별명은 슛도사, 神射手[2]. 전성기에는 이충희라는 이름이 곧 슛과 동의어였을 정도로 최고의 슈터였다. 하지만 은퇴후 감독을 맡았을 때는 돌충희, 멍충희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2 선수 생활
2.1 선수로서의 경력
중학교 때부터 그냥 농구가 좋아서 선수 생활을 시작, 겨우 150cm대의 키 때문에 농구 그만두란 소리도 듣고 스스로도 농구를 포기하려고도 했다가, 다른 건 몰라도 슛 하나만 잘 하면 농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하루에 천 개의 슛을 던지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연습을 거듭, 고3의 나이에 슛에 대한 도를 깨달았다. 거기다 작던 키까지 크기 시작했고, 그 덕에 졸업할 무렵에는 시절에는 모든 대학이 탐내는 슈터가 되어 있었다.
고려대학교로 진학, 대학 팀이고 실업 팀이고 가리지 않고 이겨나가며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뒤 말 그대로 전쟁같은 스카우트 파동 속에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3][4], 농구대잔치에서 한 경기에 50점대 득점을 해내고 그 기록을 자기가 갈아치우고 허재, 김유택, 한기범이 버틴 중앙대학교를 상대로 60득점을 하며 격파해 허재가 분을 못 삭여 스스로 삭발하게 만들기까지 한 후,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 다시 중앙대학교를 격파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렇게 이충희는 대한민국 농구를 상징하는 스타로 활약했고 김현준과의 라이벌 구도는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크게 상승시켰다.
이충희와 허재 |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대만과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고 퇴행성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제대로 선수 생활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새로운 시대의 강자 기아자동차에게 왕좌를 내준 상태로 대한민국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충희가 대만 시절에 얻은 별명은 神射手.
농구대잔치 기록은
1983년 26경기 출장, 총 642득점, 평균 24.6득점
1984년 21경기 출장, 총 687득점, 평균 32.71득점
1985년 13경기 출장, 총 434득점, 평균 33.38득점
1986년 23경기 출장, 총 695득점, 평균 30.21득점
1987년 14경기 출장, 총 473득점, 평균 33.78득점
1988년 21경기 출장, 총 629득점, 평균 29.95득점
1989년 14경기 출장, 총 439득점, 평균 31.35득점
1990년 19경기 출장, 총 339득점, 평균 17.84득점
1991년 14경기 출장, 총 74득점, 평균 5.28 득점
농구대잔치에 3점슛 제도가 도입된 건 1986년부터로, 그 이전의 정규시즌 기록이나 결승전 60점은 3점슛 없이 만든 기록이다.
무릎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었음에도 대만 홍궈팀에선 벤치에만 앉아 있어도 된다며 파격적인 대우로 이충희에게 영입의사를 표했고, 이충희는 하도 대우가 좋아서 일단 응했는데, 대만에 간 이후 이충희의 무릎은 거짓말처럼 상태가 좋아졌다. 결국 하위권이던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고 선수 겸 감독까지 하며 팀을 우승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대만에서 활동하다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감독 영입 의사를 받아들여 한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안돼
2.2 국제 대회에서의 이충희
1982년 아시안게임에서 신선우, 신동찬, 박수교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30점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따는 일등공신 중 한 명이 되었다.
아시안 게임 이후 1980년대 내내 장신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국제대회에서 맹활약, 허재, 김현준, 김유택과 함께하며 1980년대의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선전하게 해주었다.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올린 45점은 세계 대회 역대 7위 기록이고,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전패했지만 이충희는 평균 27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올리며 자신의 역할을 했다.
아시아선수권에선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MVP를 받기도 했고 이런 활약 덕에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에서 정식으로 영입 제의까지 있었고, 댈러스 매버릭스에서도 영입 제의가 있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 건은 병역 문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고, 이후에도 한국을 방문한 당시 아이오와 대학교 감독 톰 데이비스도 "NBA에서 뛰어도 손색이 없을 슈팅과 수비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를 극찬했다.
1988 서울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2미터 대 장신들을 앞에 두고도 슛을 넣으며 한 경기 30점을 넣기도 할 정도로 대활약을 했고, 대회 평균 22득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하며 주포 역할을 해냈다. 특히 올림픽 경기는 이충희의 여타 경기들에 비해 보기가 쉽다 보니 2000년대 와서야 이충희의 올림픽 경기를 보고 경악한 농구팬들도 여럿 있다.
3 감독 생활
슈퍼스타는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없었다!
무능한 지휘관이 적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적절히 보여주는 반면교사.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1997-98 시즌, 당시 팀의 에이스감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양희승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에서 무명 급의 선수들을 조련해 극강의 수비전술로 상대를 잠그고 공격은 버나드 블런트에게 작정하고 밀어주는 전술로 시즌 2위까지 해내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선수 시절 발목을 잡았던 허재와 기아가 또 다시 발목을 잡은 끝에 플레이오프에선 1승 3패로 패배하고 만다.
두 번째 시즌에는 앞선 시즌보다는 못해도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나 플레이오프에선 1라운드 탈락하며 세이커스의 플레이오프 잔혹사의 서막을 열고 말았다.
세 번째 시즌에는 이충희의 수비 올인 전략에서 팀의 공격을 책임져 주던 버나드 블런트가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여젔고, 블런트의 공백은 메울 길이 없어 결국 팀은 플레이오프도 못 나가고 이충희는 사퇴했다.
비록 사퇴했지만 엘지 세이커스에선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올렸고, 그 뒤 해설위원을 하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의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당시 고려대학교 농구부를 둘러싼 상황이 이래저래 엉망인 탓도 있어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 이후 동국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잠시 맡았다가, 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막장 소리가 딱 어울리는 기존 팀 상황에 돌파구를 만들지는 못하고 7개월만에 자진사퇴 형식으로 잘렸다. 다시 고려대 감독으로 돌아가나 했다가 고려대 농구부를 둘러싼 개판 싸움 속에 감독 부임도 아니고 부임 안 한것도 아닌 기묘한 상황에 처했다 물러났다.
세이커스 감독생활의 말년부터 어째 이충희 개인의 감독으로서의 능력 이전에 불거지는 팀 외부적인 상황에 휘둘리며 불운한 꼴만 이어갔다.
2011년 8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해 현장 복귀보다는 교수직 부임의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지만, 2013년 강동희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로 구속되면서 하차하며 공석이 된 원주 동부 프로미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6년 만에 프로 감독으로 복귀했다. 일단 복귀 후 개막전부터 3연승을 쌓으면서 무난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되며 경기 운용을 유연하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동부 팬들의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주전 선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주전 선수들을 혹사에 가까운 식으로 돌리는데다,[5] 동부 특유의 수비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충희만의 컬러를 주입시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스타일이라는 게 문제. 김주성의 부상과 1순위용병 허버트 힐의 태업논란이 겹치면서 동부가 어느새 팀 역사상 최다인 12연패까지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작쟁이를 다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9구단 팬은 선동열, 이만수에게 하는 종신감독드립도 한다더라
2014년 1월이 온 후로도 반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이승준이 아킬레스건 파열로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급한 대로 김주성을 복귀시키고, 삼성에서 마이클 더니건을 트레이드해왔지만 동부는 작년의 12연패에 이어 또다시 연패 기록을 써나가며 꼴찌로 추락.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10개구단 중에서 가장 무능한 감독으로 찍혀 오랜만에 오리온스 감독 시절부터 불렸던 멍충희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미친 듯이 까였다.[6]
1월 28일날 또다시 12연패를 찍은날에는 10득점하며 잘 뛰던 두경민을 중간에 빼버리기도 했다.[7] 그렇게 빼고서 다시 넣었을때는 두경민 본인이 맛이 간 상태였다.(...) 사실 이충희는 시즌 초부터 잘 하던 선수를 빼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았었는데 이번 건은 그간 행동의 정점을 찍은 모습을 보였다.
핵심 전력인 윤호영이 제대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1월 31일에는 역시 3쿼터때 점수 따돌리기도 벅찰 때 중간에 김주성, 윤호영을 뺐다. 이젠 딴지 걸 기운도 없다 작전타임때는 화를 내거나 다독이는 등 선수들에게 감독이 해야하는 멘트를 김주성이 하기도 했다.[8] 이날도 당연한 소리같지만 졌다. 거기에 1월달 전 경기 패배라는 기록은 덤. 팬들의 평가는 전술도 구려, 작전타임 때는 아무것도 안해 등등 박수교, 박종천(남자농구 한정), 김상준 등과 함께 감독 취급도 못 받는 감독으로 낙인찍혀 사실상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가루가 되었다.
결국 설연휴 도중인 2월 1일 감독직을 사퇴했다. 오리온스에 이은 실패로 인해 더이상 프로 무대에서의 지도자 생활이 어려워 보인다. 어째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 용두사미가 된 행보도 고대 후배인 선동열, 홍명보와 비슷하다. 다만 홍명보는 올림픽 메달이라도 땄고 선동열도 욕은 미친듯이 먹었지만 삼성 시절에 우승이라도 해봤다. 그러나 이충희는 프로 감독으로서는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었다는 게 매우 큰 차이점.
4 선수로서의 특징
정말 하루도 안 빠지고 한 1년 동안 던졌어요. 정말 무식할 정도로. 그래서 던지다가 보니깐요… 이건 정말이에요,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정말 몇 개월 던지다 보니까, 눈을 감잖아요? 그럼 링이 보여요. 옛날에 무협지에 보면은 날라 다닌다고 그러죠, 사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르고 뭐 축지법을 쓰고, 도사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넘나들고… 그게 하나의 창작이나 꾸미는 얘기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정말로 그걸 하면서 하도 던지다 보니까 눈을 감아도 정말 보여. 그리고 던지니깐 들어가. 그리고 그게 더 넘어서니까 내가 마음대로 링을 크게 작게 보일 수가 있어. 그럼 얼마나 넣기가 편해.ㅡ 인터뷰에서 발췌
수백 수천 수억 슛을 쐈어요. 그래서 슛의 모든 걸 이해했어요. 그럴 정도로 슛을 쐈기 때문에...
한국 농구 역사상 손꼽히는 득점기계이자 가장 위대한 슈터
오늘 슛 감이 안 좋으니 리바운드 좀 해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하고 연습을 했는데 수백 번 쏠 동안 같이 있는 동료가 리바운드 잡아준 게 몇 개 밖에 안 된다거나, 티비에서 눈 가리고 자유투를 넣을 수 있는 실험한다고 취재를 왔는데 눈 가리고 8개를 연속으로 넣으니까 취재온 쪽이 '다 넣으면 시청자들이 짜고 한줄 아니 좀 놓쳐달라' 하는 바람에 두 개만 일부러 노골시켰다던가, 감독 시절에 슛을 쐈는데 팀의 현역 선수들 중에서 이충희 비슷하게 넣은 선수조차 없다거나, 등등 무슨 만화 속 내용으로 넣어도 과장 심하다는 소리 나올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슛 정확도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스테판 커리가 한국에서 뛰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슛 정확도를 만들어 낸 건 미친 듯한 반복 연습. 중학교 때 키가 150밖에 안 되는 상태에서 슛 하나에만 죽어라 매달렸는데, 한참 연습에 몰두할 때는 하루에 천 번 슛을 쐈다고 했다고 스스로 말했고, 평소에도 매일 수백 번 슛을 쐈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이충희가 정말 무서웠던 건 저런 정확한 슛을 자신보다 큰 수비수를 앞에 두고도 성공시켰다는 점. 이충희는 동료들의 스크린을 받아 수비를 제치고 슛을 쏘는 데 당연히 능했을 뿐 아니라 앞에 수비수가 있어도 좌우 스텝으로 수비수를 흔들어놓고 슛을 넣었고, 슛으로 페이크 해놓고 돌파로 득점도 했다.
거기다 이충희는 독학으로 페이드어웨이 슛을 연마해 거의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선수였다. 외곽에서 페드어웨이를 쏘는 건 기본이고 골밑까지 돌파해 놓고는 자신보다 큰 센터를 앞에 두고 유유히 페이드어웨이로 슛을 넣기까지 했으니. 상대 수비수는 스크린 없이 일대일로 매치된 상태라도 좌로 우로 뒤로 움직이며 쏘는 이충희의 슛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다만 안 들어가기만을 바랄 뿐.
또한 이충희는 공격력만이 아니라 수비조차 좋았고, 빠르고 화려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적절한 패스로 동료를 살리는 능력또한 높았다.
이충희의 키는 180에서 180대 초반 정도의 키였지만 그럼에도 순발력은 출중했고, 이러한 순발력은 이충희가 장신 수비수들을 앞에 두고도 슛을 잘 넣게 해주는 무기 중 하나였다.
이충희, 그리고 김현준 이후에도 슈터로서 유명세를 떨친 한국 선수는 여럿 있지만, 노마크 상황이나 동료의 스크린을 이용한 상태에서 슛만이 아니라 자신보다 큰 수비수를 앞에 둔 상황에서도 수비를 제치고 일대일 공격으로 슛을 성공시키는 진정한 만능 슈터는 조성원의 짧은 전성기 때 모습 이외엔 제대로 보여준 선수가 없다.
5 해설자 생활
고려대학교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4년 10월부터 2006년까지 SBS에서 해설을 맡으면서 농구 해설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 오리온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8년부터 KBS에서 해설을 맡았고 2013년 4월 말 원주 동부 감독직을 맡으며 하차했다.
2014년 12월 19일에 새롭게 프로농구 중계에 참여하는 sky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 이후 skySports에서 14-15 시즌 말까지 프로농구 해설을 했다.
6 기타
아내는 탤런트인 최란으로, 부부가 함께 CF를 찍은 일도 몇 번 있고 이충희의 유명세 때문에 당시 결혼은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한데 당시 이충희는 실업리그 국제대회 농구대잔치 일정을 매년 돌면서 합숙을 했고 아내인 최란 역시 탤런트 활동을 하다 보니 부부가 결혼하고도 애 만들 시간조차 없었다. 거기다 겨우 임신한 다섯 쌍둥이가 유산되는 가슴아픈 일까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를 놓고 불화설을 비롯한 별 군말이 다 나올 지경이 되자 이충희는 당시 대표팀 감독인 방열에게 사정을 한 끝에 부상이니 감독과의 불화니 하는 뒷말 들으면서도 대표팀에서 잠시 빠진 후 아이 만들기에 열중했고, 그 덕에 쌍둥이를 얻었다.
긴팔 소매를 아무렇게나 접고 유니폼 상의를 대충 밖으로 빼놓고 경기를 뛰었는데, 경기중에도 머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한 김현준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실제로 셔츠를 바지 안으로 단정하게 넣고 경기를 뛰어봤더니 슈팅 정확도가 떨어졌다고....
- ↑ 원래는 O형인 줄 알고 있다가 혈액검사를 한 아들이 B형으로 나와 다시 혈액검사를 해 보니 B형으로 나왔다고(...) 솔깃한 연예토크 호박씨에서 최란이 얘기했다.
- ↑ 풀이를 하면 "신이 내린 슈터". 대만 리그에서 뛰면서 얻은 별명이다.
- ↑ 이때 현대전자 농구부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김용휘가 온갖 고생을 했다고 한다. 원래 삼성에 가기로 했지만 김용휘와 같은 아파트 살던 이충희의 동기 임정명을 이용해(현대에 입단하기로 약속했지만 이충희를 뺏긴 삼성이 임정명을 데려갔다.) 꼬드기는데 성공했다고.
- ↑ 당시 대학농구를 보러왔던 왕회장이 이충희의 현란한 플레이에 반해서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왕회장의 말이 곧 법이던 당시 현대그룹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참고로 정주영 회장은 실제 농구 매니아로 잠실체육관에서 대학농구나 농구대잔치를 직접 관람하는 모습이 자주 방송에 잡혔다.
- ↑ 이러한 경기 운용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시절부터 고집해왔었다. 사실 LG 감독 데뷔시즌에 거뒀던 2위도 버나드 블런트에게 대놓고 밀어주기 식으로 운용한 덕이었다.
- ↑ 앞서 상술한 대로 2007-2008 시즌, 오리온스 감독 시절에도 4승 22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사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 두경민은 이것에 반발한것인지는 몰라도 벤치에 앉지도 않고 들어가 버렸다.
- ↑ 김주성은 연고 밀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KBL에서 몇 안되는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다. 덕분에 은퇴 후 차기 동부 감독 1순위로 꼽히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