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Isiah Thomas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 ||||||
네이트 서몬드 | 네이트 아치볼트 | 데이브 빙 | 데이비드 로빈슨 | 데이브 코웬스 | 돌프 세이즈 | 레니 윌킨스 |
래리 버드 | 로버트 패리시 | 릭 베리 | 마이클 조던 | 매직 존슨 | 모제스 말론 | 밥 페팃 |
빌 러셀 | 빌 셔먼 | 빌 커닝햄 | 빌 월튼 | 샤킬 오닐 | 샘 존스 | 스카티 피펜 |
아이재아 토마스 | 얼 먼로 | 엘빈 헤이즈 | 엘진 베일러 | 오스카 로버트슨 | 웨스 언셀드 | 윌리스 리드 |
윌트 체임벌린 | 월트 프레이저 | 제리 루카스 | 제리 웨스트 | 제임스 워디 | 조지 거빈 | 조지 마이칸 |
존 스탁턴 | 존 하블리첵 | 줄리어스 어빙 | 카림 압둘 자바 | 칼 말론 | 케빈 맥헤일 | 클라이드 드렉슬러 |
폴 아리진 | 패트릭 유잉 | 피트 마라비치 | 하킴 올라주원 | 할 그리어 | 찰스 바클리 | 밥 쿠지 |
선수시절의 토마스.
닉스팬들에게는 혐짤 욕만 처먹던 뉴욕 닉스시절의 그 아이고 머리야.
이름 | 아이제이아 로드 토머스 3세(Isiah Lord Thomas III) |
생년월일 | 1961년 4월 30일 |
키 | 185cm (6 ft 1 in) |
체중 | 82kg (180 lb) |
출신학교 | 인디애나 대학교 |
포지션 | 포인트가드 |
드래프트 | 1981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지명 |
등번호 | 11번 |
역대 소속팀 |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1981~1994) |
지도자 경력 |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0~2003, 감독) 뉴욕 닉스 (2006~2007, 감독) 플로리다 국제대학교 (2009~2012, 감독) |
프런트 경력 | 토론토 랩터스 (1995~1998, 부사장) 뉴욕 닉스 (2003~2008, 단장 겸 사장) |
수상내역 | NBA Champion 2회 NBA Finals MVP (1990) NBA All-Star Game MVP 2회 (1984, 1986) All-NBA First Team 3회 (1984-1986) All-NBA Second Team 2회 (1983, 1987) NBA All-Rookie First Team (1982) NCAA Final Four Most Outstanding Player (1981)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1987) |
1990년 NBA 파이널 MVP | |||||
조 듀마스 | → | 아이재아 토마스 | → | 마이클 조던 |
1984년 NBA 올스타 MVP | |||||
줄리어스 어빙 | → | 아이재아 토마스 | → | 랄프 샘슨 | |
1986년 NBA 올스타 MVP | |||||
랄프 샘슨 | → | 아이재아 토마스 | → | 톰 챔버스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영구결번 | |
No. 11 |
1.1 소개
전 NBA 농구 선수. Zeke[1], Baby-faced Assassin[2] 등의 별명으로 유명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포인트가드인 동시에 전직 감독 및 GM. NBA가 선정한 50인의 위대한 농구선수 중 한 명이며 1980년대 말을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의 리더. 선수시절 활약상은 가히 전설이지만 은퇴 후 행정가로서나 감독으로서는 그리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뉴욕 닉스팬들에게는 스콧 레이든과 함께 금지어 겸 공공의 적이다.
1.2 플레이스타일
현시대 공격형 포인트 가드의 틀을 확립한 선수
팀이 배드 보이즈시절 피스톤즈고, 본인이 마피아 보스처럼 팀을 장악했기에 본인의 농구 스타일까지 터프하고 지저분한 타입으로 오해받기 쉬운 선수지만 선수 토마스는 굉장히 정석적이면서도 화려한 농구를 할 줄 아는 선수이다.
일단 공격에 있어서 포인트 가드의 기본기에 매우 충실한 선수이다. 포인트 가드는 드리블로 찬스를 만들면서도, 드리블 중에도 언제든지 팀원을 살리기 위한 다음 전술을 이어갈 수 있는 시야 확보와 패스 전개를 위해 공은 낮게 드리블 하고 고개는 세운채로 팀원들의 위치를 볼 수 있으며 항상 다음 플레이를 준비해야한다. 토마스는 이런 포인트가드의 기본 자세가 완벽했던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과 스킬로 다소 투박한 타입의 선수들이 많던 피스톤즈의 오펜스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에 팀 특성상 1옵션 역할을 하면서 포인트 가드로써 어려운 슛을 성공시키는 골 결정력과 에이스 기질이 탁월했던 선수로 수비지향적인 팀에 느린 페이스의 팀이다보니 1차 스탯상으로는 평득 20점대를 꾸준히 기록하지 못한 선수일지 몰라도 NBA 2회 우승에 빛나는 피스톤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토마스인 셈. 하이라이트에서 보여주는 집요한 드리블 끝에 보여주는 풀업 점퍼나 마무리는 그만의 전매특허이다.
굳이 약점을 찾자면, 포인트 가드 1옵션으로써 현시대의 덕목인 3점 슛이나 캐치앤슛같은 장거리 슛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고 체격이 탄탄한 편은 아닌지라 골밑까지 파고들어 결정을 보는데는 약간 약한 점이 있었고 본인의 대인수비력 자체는 평균보다 좀 나은 정도였다는 것. 특히 장거리 슛의 부재로 인해 TS등의 2차 스탯은 이름값에 비해 약한 편이다.
만약 토마스를 현시대 선수와 비교한다면, 데릭 로즈 + 크리스 폴 ÷ 2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스킬셋이나 공격에서의 완성도는 데릭 로즈에 가깝고, 포인트가드로써의 기본기와 패서로써의 패싱능력은 크리스 폴[3][4] 로 이어지는 조합이다.
1.3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토마스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대가족의 막내로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고 한다. 굉장히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형들은 마약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활을 하였으며 실제 한 형은 어렸때 폭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실제로 한 대학팀의 코치가 토마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토마스가 살던 동네로 간 적이 있었는데 거리가 더럽고 무시무시하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본인들은 나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막내는 잘 나가게 하기위해 막내인 아이재아가 나쁜 짓을 하면 호되게 혼냈다고 한다.
대학은 인디애나 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인디애나 대학 농구팀에는 열혈 감독인 밥 나이트가 있었다. 밥 나이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조직적인 농구로 유명했고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다혈질이었다. 그런 나이트도 토마스를 보자마자 한 말이 딱 이랬단다. "토마스, 넌 네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해라."
감독의 지원 아래 토마스는 2학년 때 학교를 NCAA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자기 자신도 MOP에 선정되었다. 그 후 바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1.4 선수 경력: 배드 보이스의 보스
198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5] 지명된다.
여담으로 그는 처음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오는 것을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피스톤스와 인터뷰에서 일부러 건성건성 대답하였다고 한다. 시카고 출신이었던 그는 시카고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본 맥클로스키 단장은 "니가 무슨 짓을 하던지 상관없어. 만약 우리 차례때 니가 아직 드래프트 되지 않았으면 너 뽑을꺼야" 라고 단정지었다고 한다. 결국 배드 보이스의 리더가 되어 자기가 가고 싶어했던 시카고 불스를 그리 여러번 좌절시켰던거 보면 참...
어쨋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된 토마스는 전시즌에 21승에 그쳤던 팀을 39승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마스가 루키였던 시즌과 2년차 시즌에 팀의 전력은 아직 배드 보이스 1기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다. 팀은 중하위권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 시즌에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토마스의 은사 척 데일리가 보스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평균 21.2점 11.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를 통틀어 첫번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배해 탈락했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그 후 배드 보이스 1기 멤버들인 데니스 로드먼, 조 듀마스, 비니 존슨, 릭 마혼, 빌 레임비어 등등 주축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익히 알려진 팀컬러가 완성되었다. 1987-1988 시즌,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동부의 강호들을 아작내고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 제임스 워디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다. 3승 2패로 앞선 채 맞은 6차전에서 토마스는 도중에 발목이 나가버리지만 출전을 강행, 3쿼터에만 25점을 넣으며 파이널 한 쿼터 득점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대활약을 보였지만[6] 결국 디트로이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경기를 연속으로 내주며 아쉽게 패배했다.[7] 이 때 토마스는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88-1989 시즌에 두 팀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때는 매직 존슨을 비롯한 레이커스의 주축들이 모두 부상을 달고 있었고 복수의 칼을 갈던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에게 자비란 없었다. 파이널에 진출하며 토마스가 한 말이 '레이커스 외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건 복수다'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4전 전승으로 레이커스를 처참히 발라버리고 우승. 이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2패한 거 빼면 전승이었다.그리고 의도치 않게 아래 선수의 이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 다음시즌인 1989-1990시즌에는 같은 동부지구 시카고 불스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으나 이겨내고 파이널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맞이하여 4승 1패로 다시 우승. 2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토마스는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이후로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 1기의 번영은 끝이 났다. 시카고 불스에 의해 4전 전패로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난 뒤 팀의 성적은 내리막을 걸었다. 1991-1992 시즌을 끝으로 척 데일리도 사임하면서 배드 보이스 1기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토마스는 1993-1994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1.5 흑역사 및 논란
1.5.1 래리 버드와 관련된 인종차별 논란
1987년 동부 결승에서 피스톤즈가 셀틱스에 패한 당시 루키였던 데니스 로드맨의 발언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버드에게 처절하게 당한 로드맨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버드는 매우 과대평가되었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3연속 MVP를 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발언을 토마스에게 언급했고 그의 의견을 물었는데 여기서 보여준 토마스의 발언이 바로 기름을 부은격이 되었던 것.
토마스는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이에 동의한다면서 "버드는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지만, 만약 그가 흑인이었으면 리그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그냥 잘하는 선수 정도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사실 로드맨이 한 말이었으면, 듣보잡 루키가 한 철없는 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슈퍼스타 토마스가 이에 한 술 더 뜨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이후 언론의 포격 대상이 된 건 로드맨이 아니라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이후 이에 "농담이었다"며 수습을 시도했으며, 로드맨 역시 "패배 직후 감정적이 되어서 한 말"이라며 버드에게 사과했다. 정작 버드는 사건 직후,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극적으로 패한 경기 이후엔 그럴 수도 있다고 쿨하게 넘겼다. 버드는 이후에도 이에 대해 별 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1]
토마스를 인종차별자로 보기는 그런게 당장 죽마고우였던 빌 레임비어 역시 백인이었고 그 당시 코치였던 척 데일리, 단장 잭 맥클로스키 등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 당시 말투도 인종차별 말투보다는 그저 기분도 상했고 (다 이긴 게임을 버드의 스틸로 졌다.) 로드맨도 지원사격하는 마음으로 한 것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피스톤스는 팀워크가 더 강해졌다고 한다(...) 누가 배드 보이즈 아니랄까봐
1.5.2 1991년 파이널 퇴장 사건
토마스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자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비매너 행위로 꼽히는 사건.
(7분 44초부터)
1991 파이널 4차전에서 승부가 기울자 데일리 감독은 주전 멤버들을 모두 뺐고 이들은 홈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코치진과 포옹을 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들은 모여서 무슨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이 바로 코트를 퇴장해버리는것. 결국 게임 종료 7.9초를 남겨두고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 대부분은 퇴장해버렸다. 이때 심지어 불스 벤치 앞을 지나갔는데,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을 포함한 불스 주전멤버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감상할 수 있다.
사실 퇴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경기 직후 관례로 되어있는 상대팀과의 악수(친한 선수들의 경우 포옹)를 거부한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피스톤즈에서 매너 좋은 극소수에 꼽혔던 조 듀마스와 존 샐리만 악수를 했다. 이 중 샐리는 훗날 불스에서 뛰기도...) 아이러니 한점은 사실 2년전 래리 버드의 셀틱스도 똑같이 퇴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제대로 악수를 한 사람은 맥케일정도... 단 버드의 셀틱스와 달랐던점은 대부분의 셀틱스 멤버들은 조용히 나갔던 반면에 토마스와 피스톤스는 하필 코드를 가로질러(...) 나가는 바람에 셀틱스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욕을 먹은 것. 그리고 그 대상이 조던이었다는 점도...
왜 토마스가 퇴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나온다. 단순히 게임을 져서 그렇다기에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는데 토마스는 나중에 NBA Open Court란 프로에 출연해 이 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직접 "조던과 필 잭슨 등 불스 전원이 우리에게 챔피언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레임비어가 깡패(thug)다, 우리가 (피스톤즈)가 농구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느니 무례하게 굴었다"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밝히면서, 이런 태도에 화가 나 당시 벤치에 앉아있던 주전선수들이 "그냥 나가자"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 바 있다.[2]
나중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배드 보이즈" 에서도 토마스는 "나는 그 어떤 팀이 자신들이 우승후보에서 끌어내리려는 팀을 그런식으로 말한적을 본적이 없다" 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가 말한 발언은 불스가 3-0으로 동부 지구 우승전에서 앞서 있던 시기였는데 조던과 필 잭슨을 비롯한 불스는 1승을 남겨놓은 공개적으로 한 발언이었는데 조던은 "피스톤스는 지저분한 농구로 리그를 망치고 있다" 라고 하면서 "피스톤스가 사라진다면 디트로이트를 제외한 모든 리그는 기뻐할 것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피스톤즈를 디스한 것. 바로 전 해에 피스톤스가 불스를 7차전에서 이겼을때 아이재아 토마스와 마이클 조던은 포옹을 주고 받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재아의 반응은 동부 결승전에서 진 분풀이 보다는 압도적으로 자신들이 앞서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에 있었던 자신들을 매장시키려 했다는데 더욱 더 분노했던 것. 이 사건의 주동자가 토마스였을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정작 레임비어와 토마스 등 당사자들은 그것을 부인하며 주동자가 누구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 토마스의 성향을 보면 충분히 토마스였다고 추측해볼 수는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토마스는 나중에는 후회하는 입장을 보이며 "Should we have been bigger? Yes" 라고 이야기로 하였다. (더 대인배 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나? 아마도... 정도로 해석) 그러면서 "다시 동일한 상황이 온다면 악수를 하겠다"면서 비록 불스가 자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더라도 똑같이 대해주면 안되었으며 상대의 행동에 관계 없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했어야 했다(take the high road)고 한 바 있다.
사실 토마스는 이날 방송에서 옛팀에 대해 좀 지나칠 정도로 쉴드를 쳤는데 피스톤즈가 폭력에 가까운 수비와 부상을 유발하는 비매너 플레이로 악명을 떨친건 엄연한 사실임에도 토마스는 "모든 팀이 거칠게 플레이했음에도 피스톤즈의 경우 이미지가 그렇게 박혀서 욕을 더 먹었다"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다.[3]
1.5.3 국가대표 및 드림팀 탈락
토마스는 1980년에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혔었는데 하필 그때가 냉전 시대였고 올림픽 개최지가 구 소련의 모스크바였다. 결국 미국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토마스는 결국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토마스는 간절히 선발되길 원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드림팀 탈락.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드림팀2에 뽑히긴 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등 유독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물론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건 드림팀이라 불리는 1992년 농구 대표팀 탈락. 이 당시 토마스는 기량도 좋았고 감독도 그의 감독인 척 데일리이였지만 영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외되었는데 대부분의 전문가와 팬들은 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한 멤버들의 반대가 그 이유로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 조던 룰을 통해 조던을 폭행 수준으로 괴롭혔던 배드 보이즈의 리더였고 위에 언급한 퇴장사건만 봐도 조던과 토마스는 융화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조던이 원하지 않는 선수는 드림팀에 뽑힐 수 없었다는 소리도 돌았는데 어째 그냥 루머 같지는 않다. 실제로 조던은 여러 인터뷰 등에서 아이재아 토마스와 드림팀에 관한 질문을 받았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아이재아 토마스에 대한 질문은 하지마세요." 라고 이야기하고 인터뷰 하는 측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인터뷰를 하였다.
사실 이건 그 전까지 언론이 집요할 정도로 토마스 관련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토마스의 실력이나 위상으로 보면 드림팀 탈락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기 때문에 루키시절부터 서로 숙적이었고, 대표팀 구성위원회가 가장 눈치를 봤던 (실제로 드림팀을 결성하면서 가장 먼저 연락한게 조던이었다) 조던에게 화살이 간 것. 어딜가도 토마스 관련 질문만 해대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사실 피스톤스를 싫어한 건 조던만은 아니었다. 조던 룰 못지 않게 피펜 괴롭히기로 크게 당했던 피펜도 토마스라면 이를 갈고 있었다. 대놓고 피펜은 "나는 토마스가 합류하는걸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고 조던과 관련해서는 "아마 조던도 원치 않을 것이다" 라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래리 버드의 셀틱스도 피스톤스 치고박고 한 사이에 위에 말한 논란까지 겪은 터라 결코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조던 등 몇몇이 강경하게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반대하고 있을 때 다들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고 한다. 라고 밝혔다. 칼 말론은 이미 토마스에게 팔꿈치를 사용해서 복수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고, 패트릭 유잉도 배드 보이즈 비디오에서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라면 치가 떠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상 배드 보이즈는 거의 그 당시 외톨이라고 불릴 정도로 좋아하는 팀이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멤버들도 좋아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이재아와 사적으로 친했던 매직 존슨만 토마스를 옹호하는 식으로 인터뷰했지만, 몇년 후 그의 자서전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재아와 플레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재아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면 그가 기회를 날려버릴 것." 이라고 토마스를 옹호한 것은 단지 립서비스였다고 고백했다.
또한 당시 피스톤즈는 "배드 보이즈"란 이름에 또한 대표팀을 구성하기 시작한게 1991년 플레이오프 종료직후였는데 이 때 토마스를 필두로 한 피스톤즈 선수 상당수가 게임 종료되기 몇초전에 라커룸으로 퇴장, 여론으로부터 격렬하게 까이던 중이었다. 위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여론도 토마스의 탈락에 크게 적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배드 보이즈의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것은 아이러니[8]
1.6 행정가 및 감독 경력
1.6.1 토론토 랩터스
토마스는 딱 1년 후인 1995년 당시 신생팀인 토론토 랩터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도 토마스가 이렇게 현장에 빨리 복귀할 줄 몰랐거니와 감독이 아닌 구단행정가로 돌아올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
같은 캐나다를 연고로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주로 한물간 노땅들을 확장 드래프트로 선발한 데 반해 토마스의 토론토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 위주로 로스터를 꾸렸다. 물론 로스터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1985-1986 시즌에 수비수상과 기량발전상을 동시 수상했던 33세 노장 가드 앨빈 로버트슨을 데려오기도 했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는 당시 토론토 팬들이 간절히 뽑기를 바랐던, UCLA의 에이스였고 1995년 NCAA 파이널 MOP 수상자였던 에드 오배넌[9]을 버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단신 가드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를 지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이 때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스타더마이어가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활약하면서 야유가 쏙 들어갔다. 이 해 팀은 21승 61패라는 하위권 성적을 거뒀지만 시카고 불스, 올랜도 매직, 시애틀 슈퍼소닉스, 휴스턴 로키츠 등 강팀들을 한 번씩 제압하는 등 소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NBA 구단 중 관중동원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1997년에는 고등학생 선수인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하면서 다시 한 번 팬들을 놀라게 했다. 스타더마이어 때처럼 야유는 없었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긴 했다. 토마스는 '맥그레디는 지금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몇 년 뒤에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 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토마스는 맥그레디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1998년에 구단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NBC 농구해설위원으로 일했다.
1.6.2 CBA
그 뒤 토마스는 1998년에 미국의 독립 리그인 CBA(Continental Basketball Association)의 커미셔너로 취임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비록 독립 리그라고 해도 리그를 경영하는 것과 구단을 경영하는 것은 달랐는지 토론토 랩터스에서처럼 성공적인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에 CBA를 떠났다.
1.6.3 인디애나 페이서스
CBA의 실패 이후 토마스는 래리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공석이 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전임 래리 버드가 3시즌 연속 인디애나를 컨퍼런스 결승, 파이널 1회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독직이 처음이며 전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감독으로 선임된 토마스에게 많은 이들이 기대반 걱정반의 시선을 보냈다. 토마스는 감독으로 있는 동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썩고 있던 저메인 오닐을, 시카고 불스에서 론 아테스트를 트레이드해왔으며 알 해링턴, 자말 틴슬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면서 팀 리빌딩을 진행했다. 토마스 재임 3년동안 인디애나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용 팀이 되었고 매년 1라운드 탈락.
인디애나는 그렇게 토마스의 팀이 되고 있었으나 2003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현장에 돌아오길 원했던 래리 버드가 구단 사장이 되었고, 래리 버드는 자신이 만들었던 레지 밀러 중심의 강력한 조직력과 수비를 내세운 농구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인 농구 스타일을 정립한 토마스를 경질하고 릭 칼라일(現 댈러스 매버릭스 감독)을 선택했다.
토마스의 경력은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그 후였으니...
1.6.4 뉴욕 닉스
토마스는 2003년 12월 22일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뉴욕 팬들은 스콧 레이든의 돌아이짓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있었다. 팬들은 '레이든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든보다 더 못할 수는 없을 테니.
의견이 갈리기도 하지만 여러 일이 있지만 레이든의 뻘짓은 대개 3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닉스의 상징 패트릭 유잉을 올랜도로 보낸 것, 둘째가 2002년 드래프트에서 네네를 지명하고 마크잭슨과 마커스 캠비를 얹어서 덴버에 안겨주고 안토니오 맥다이스 하나 달랑 받아온 일[10], 셋째가 사상 최고라는 2003년 드래프트 9번으로 마이크 스위트니를 지명한 것[11] .2번의 경우 부상 이전의 맥다이스는 훌륭한 포워드였으므로 결과론적으로 문제일 수 있다. 문제는 3번인데 당시 뉴욕은 포워드진이 거의 포화상태였고 206cm의 포워드 커트 토마스가 센터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스위트니는 203cm의 단신 파워포워드이니 팬들이 대체 목적이 뭐냐고 비난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토마스는 달라보였다. 토론토 랩터스 시절에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와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했던 선견지명,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저메인 오닐, 알 해링턴과 같이 재능있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 점 때문에 뉴욕 팬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토마스 또한 취임 일성으로 팀을 빠르게 재정비해 성적을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고, 발빠른 무브를 보였다.
토마스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곧장 스테판 마버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그러면서 당시 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처분했다. 비록 마베리를 받아오면서 연봉 먹는 잉여나 다름없었던 페니 하더웨이까지 덤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마베리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 중 하나였고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플러스 요소까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은 호평 일색이었고 마베리 또한 고향팀에서 뛴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뛰었다. 또한 돈 체니 감독을 경질하고 명장 레니 윌킨스를 데려왔다. 팀은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4-2005 시즌의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토마스가 뉴욕에 있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그나마다.
2004-2005시즌부터 뉴욕은 다시 처절하게 몰락해갔다. 시즌 전 불스로부터 마베리와 포지션이 겹치는 자말 크로포드를 영입한 것부터가 좋지 않은 조짐의 시작이었다. 우려대로 마베리와 크로포드는 눈에 띄는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을 맴돈다. 이 와중에 레니 윌킨스는 중도 경질. 게다가 선수들 사이에도 잡음이 많아 구단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여러 모로 곤란한 상황 속에서 토마스는 2005년에 불스로부터 향후 1라운드 드래프트릭을 2개나 내주는 강수를 두며 에디 커리를 영입했고 명장 래리 브라운을 5년간 5천만 달러라는 최고 대우로 데려오는 무브를 보여줬지만 이미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뉴욕 닉스를 되살리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마베리와 브라운 감독 간의 갈등이 나중에는 선수단 전체와의 갈등으로 심화되면서, 결국 래리 브라운은 23승 59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고 한 시즌만에 해고당했다.
덤으로 2005년 오프시즌에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잠깐 활약상을 펼쳤던 센터 제롬 제임스를 연 600만 달러에 5년 계약으로 모셔와 팬들이 어이를 잃게 했다. 제임스의 2004-2005시즌 성적은 4.9점 3.0 리바운드 수준이고 선수경력 내내 고만고만한 기록만 낸 평범한 선수였다. 단지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대활약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액을 안긴 것. 제임스는 결국 평범한 성적만 남기고 NBA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2]그리고 제몫을 하지 못하는 페니 하더웨이를 처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영입한 선수가 스티브 프랜시스. 팬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이 둘은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비슷했고 당연히 별다른 교체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뉴욕 닉스의 페이롤 1위 자리만 공고히 했다.(...)[13] [14] 프랜시스에 이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제일런 로즈까지 데려오면서 팀 페이롤은 무려 130M을 초과했다. 팀 구성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좀 한다싶은 베테랑이면 무조건 수집하고 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브를 보여줬다.
2006년에는 아예 토마스 본인이 감독까지 겸했지만 성적은 더 떨어져갔다. 이 기간중에 역시 평범한 경력을 가진 제러드 제프리스를 또 연 500만 달러에 영입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2007년에는 잭 랜돌프까지 데려오면서 에디 커리와 함께 리그 최고의 골밑 자동문(...) 콤비를 결성케 하면서 다시 한번 팬들이 뒷목을 잡게 했다.
토마스에게 무한신뢰를 보내던 뉴욕 닉스 구단도 잇단 삽질을 참을 수 없었는지 2008년에 토마스를 해고하였다.
그 후 토마스는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FIU) 농구팀의 감독 제의를 수락했고, 2012년까지 그곳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별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중간에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복귀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닉스 팬들을 식겁하게 했으나 이내 다시 FIU로 돌아갔다. 천만다행이다.
1.7 TNT 해설가 시절
행정가로써 활동하기 전후로 TNT에서 해설가 역할을 하였다. 한때 샤킬 오닐, 크리스 웨버, 레지 밀러 등과 함께 Inside the NBA 패널로 함께 했으며, 포인트가드와 감독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날카로울때는 날카로움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괜찮은 입담을 보여주었다.
1.8 이것저것
선수시절에 승부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가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등이었지만 전혀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이클 조던을 세번이나 좌절시킨 배드 보이스 1기의 리더라는 버프도 있어서 올드팬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다.
현역시절이나 지금이나 조폭보스다운 리더쉽을 가졌던 선수이다. 그래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선수는 용납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유타 재즈에서 득점왕을 3번 했던 스몰포워드 아드리안 댄틀리. 유타에서 대활약하고 피스톤즈에 들어왔을때는 전성기가 약간 지날무렵이었던 댄틀리가 자신에게 공격롤을 더 늘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팀의 보스였던 토마스와는 필연적으로 충돌했고, 이때 토마스는 구단에 댄틀리를 트레이드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토마스가 댄틀리를 트레이드 하겠다고 한 주장은 댄틀리의 주장으로 그 당시 구단장 잭 맥클로스키는 "절대 그런적이 없다" 라고 하면서 "댄틀리 트레이드 때 아이재아는 하나도 관여하지 않았다" 라고 하며 댄틀리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였다.
그리고 아쉬운 준우승의 다음 시즌인 88~89시즌 중에 댄틀리를 댈러스 매버릭스로 보내고 어렸을때부터 토마스와 절친이었으며 역시 댄틀리에 못지 않은 득점력을 갖춘 스몰포워드 마크 어과이어를 영입했다. 그리고 88~89시즌 우승. 그러나 커리어 최초의 우승기회를 어처구니 없게 트레이드로 날린 댄틀리는 그 시즌 이후 점점 쇠락하여 끝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 때문에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13수만에 겨우 헌액되었을 정도.
매직 존슨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존슨이 초창기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에게 우승을 헌납하면서 크게 좌절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곤 했다. 존슨이 에이즈 감염으로 은퇴한 후, 1992년 올스타전에서 팬들의 성원으로 올스타에 뽑혀서 경기에 나서게 되었을때, 몇몇 선수들은 그의 출전을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에이즈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주는 등 많이 노력했고, 실제로 코트위에서 매직과 포옹도 하는 등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매직이 이 올스타전에서 터트린 마지막 3점슛을 던질때, 그를 막고 있던 선수는 바로 토마스였다.
ESPN에서 실시한 포인트가드 순위에서 토마스가 올라왔는데, 토마스가 스탁턴과 커리(!) 보다 낮게 측정되었다 (스탁턴 3위 커리 4위(!) 토마스 5위). 이에 매직은 트위터로 "스탁턴과 커리가 아이재아 보다 낫다고? 뭘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가 한마디만 하지. 내가 결승전에서 토마스랑 붙은 적이있는데 다치고 다리 저는 토마스였어. 그런데 걔가 한 쿼터에 25점을 넣었지." 라고 말하며 토마스를 저 둘보다 치켜세우기도 했다. 실제 토마스를 까는 사람들 조차 인성이나 그의 경영 / 감독으로써의 실패에 대해서 까지 실력으로는 까지는 않는다. 실력, 투지, 승부심 만큼은 매직, 버드, 조던에 뒤지지 않는 (토마스 자신은 항상 자신을 그 밑에 둔다.) 농구선수다.
웃음이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이다. 그가 한번 미소지으면 아무리 화난 사람이라도 그 미소를 보고 화를 풀수있을정도. 미소를 지을때 들어가는 보조개도 포인트. 여기에 잘생긴 외모와 동안도 한몫한다. 실제로 토마스의 선수시절과 은퇴후의 사진을 보면 별 차이가 없다. 거기다가 현재 50세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살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닉스팬들은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더 부글부글 끓었겠지.
젊은 아이재아 토마스(1989)와도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져있다. 문자를 통해 격려의 말을 전한적이 있다는듯. 실제로 한 TV쇼를 통해 직접 만남을 가진적도 있었는데 젊은 아이재아 토마스가 이름때문에 팬들에게 부자관계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고 말하자 자신이 직접 친아버지라는 루머를 퍼트린다고 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녹화는 계속되었는데 영상을 찾아보면 둘이 훈훈한 선후배사이인것을 알수있다.
2 Isaiah Thomas
아이제아 토마스(1989) 항목으로- ↑ 조폭 보스. 실제로 성장 과정이나 인물이 조폭 보스에 가깝다.
- ↑ Charlotte Observe에서 취재한 상대팀 감독이 "I call him the baby-faced assassin because he smiles at you, then cuts you down."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2014년 이후에는 이 별명을 어떤 슛 잘던지는 애아빠 농구선수가 가져갔다.
- ↑ 특히 전술한 '공은 낮게, 허리는 높게라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 드리블 자세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선수는 현역중 폴 뿐이다. 동시대 뛰어난 포인트 가드인 커리나, 스티브 내쉬는 공이 높은 편이고, 카이리 어빙같은 선수는 자세가 지나치게 낮아서 돌파 뒤 골밑 트래픽을 찢는 킥아웃 패스 정확도 및 시야확보에 약점을 보인다.
- ↑ 참고로 폴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재아 토마스의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연습해왔다. 어찌보면 폴의 플레이 원천은 아이재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 ↑ 참고로, 토마스를 제치고 전체 1순위가 된 선수는, 후일 아드리안 댄틀리와의 트레이드로 피스톤즈에 트레이드 되어 토마스와 함께 2회 우승을 차지한 댈러스 매버릭스 출신의 스몰 포워드 마크 어과이어(Mark Aguirre). 둘은 같은 도시에서 자란 절친이었으며 어과이어가 토마스는 피스톤스로 트레이드 되었을때 썩 내키지 않았던 팀 동료들에게 어과이어를 소개해주고 관계를 좋게해준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 훗날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매직은 이 경기를 언급하면서 아이재아 토마스가 스테픈 커리보다 역대 포인트 가드 순위가 낮은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회상할 정도였다.실제 그 경기를 보면 아이재아 토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정도로 말도 안되는 사기슛들이 들어가고는 했다. 그것도 한발을 절으면서...
- ↑ 실제로 이 6차전 경기는 그 당시 상당히 말이 많았던 경기였는데, 빌 레임비어가 카림 압둘자바를 밀었다고 받은 파울이 영 시원치 않은 파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그 파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어쩌면 당연할지도여러 농구 관계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파울을 받은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도 "심판이 인정했으니 파울이다" 라고 하면서 딱히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에 "조던 룰" 이라는 책을 기록한 농구 저술가는 빌 레임비어가 파울을 받은것은 카림 압둘자바를 밀어서가 아니고 그 전이 수없이 많은 선수들을 밀치고 반칙해서 받은 파울이이었을 것이다업보다!레임비어니까 파울을 했을 것이다 정도라고 저술하였다. - ↑ 하지만, 오히려 배드 보이즈의 감독이었기에 드림팀의 감독을 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많다. 그 성깔있는 배드 보이즈를 맡을 수 있다면 개성이 제각각인 드림팀을 코치하는 것도 가능하게 보였던 것. 실제로 바클리는 "배드 보이즈 그 새X들을 코치할 수 있다면 우리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까지 하였다.
- ↑ 동생 찰스 오배넌도 농구 선수다. 하지만 둘 다 NBA에서 오래 뛰지 못하고 빨리 사라졌다. 그 후 형제는 외국 리그에서 뛰었다. 형 에드는 은퇴했고 동생 찰스는 현재까지 일본 리그에서 뛰고있다. 이 두 사람은 전 고려대학교 선수이자 이번에 청주 KB국민은행 스타즈에 코치로 부임한 박재헌과는 고교시절 농구팀 동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두 형제는 박재헌을 Jay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렀다고 한다.
- ↑ 두번째 뻘짓이 욕을 먹은 이유는 맥다이스는 무지막지한 운동능력에 20-10은 거뜬히 할수있었던 리그의 손꼽히는 파워포워드였지만 뉴욕으로 왔을때의 그는 무릎부상으로 전성기의 폭발력과 운동능력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물론 맥다이스는 그 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 백업 빅맨으로 전환해 제2 전성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때는 충분히 스캇 레이든의 뻘짓이 맞았다.
- ↑ 마이크 스위트니보다 앞에 지명된 선수들은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써니,크리스 보쉬,드웨인 웨이드등으로 더 설명이 필요없다. 참고로 이 스위트니는 뉴욕에서 2년, 시카고 불스에서 2년뛰고 NBA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D-리그에서 잠시 뛴후 현재는 해외리그를 돌며 아직도 선수생활중이며, 현재는 우루과의 리그에서 뛰고 있다. 참고로 스위트니 바로 밑에 순위에 지명된 선수중에는 현재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중에는 데이비드 웨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 ↑ 다만 제임스는 훌륭한 체격과 괜찮은 운동능력으로 인해 "포텐이 터진 것 아니냐"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하의 뻘짓이지만 영입 자체만 보면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미친짓은 아닌셈. 그러나 계약규모와 기간을 보면 미친짓이 맞다.
- ↑ 더 큰 문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마베리와 프랜시스의 롤이 겹쳤다는 것이다. 하더웨이의 경우 그나마 키가 커서 sf까지 볼수 있지만 마베리와 프랜시스는 둘다 가드만 볼수 있는데다가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프랜시스가 하더웨이보다 훨씬 좋은 선수긴 했지만 팀 입장에서 보면 별 쓸모가 없던 선수인데다가 계약기간도 하더웨이보다 훨씬 오래 남아있었다. 차라리 하더웨이를 계속 데리고 갔으면 시즌이 끝나고 샐러리캡 비우기라도 할수 있었으니 결국 최악의 병크인셈.
- ↑ 사실 이때 하더웨이는 프랜시스와 스타일이 비슷하지도 않았다. 전성기 시절 공격형 pg로 이름을 날렸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무릎을 잃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더 이상 pg를 보기 힘든 상태였다. 하더웨이는 커리어 말미에 주로 슈팅가드나 스몰포워드로 출전했다. 게다가 뉴욕에서 그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못한채 돈만 잡아먹고 있었으며, 닉스는 이에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그의 라커를 빼버리기까지 했다. 하더웨이가 이에 크게 분노하고 트래이드를 요구한건 당연한 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