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선수경력

1 아마 및 미국 프로야구 시절

1954년 3월 12일 부산에서 태어났다.[1]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 때 대전 대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2학년 후보투수 시절 대전고와의 지역예선 경기에서 심판이 대전고 측에 유리한 볼 카운트 판정을 내려 대성고가 역전패 당하자 대성고 선수들이 앙심을 품고 심판을 구타했다. 이 때문에 학교 체면이 깎인 대성고는 야구부 해체라는 초강수를 둔다.[2] 박철순은 폭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야구부 해체로 인해 어쩔수 없이 학교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서울로 올라가 배명고로 다시 전학하여 졸업하게 된다. 즉 고교시절 부산고> 대성고 > 배명고로 2번이나 전학을 다녔던 것.

1975년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초년 시절에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자퇴원을 내고 도망치듯이 공군 야구팀에 입대했는데, 선임이던 이종도가 그의 정신력을 다시 일깨우고, 후임으로 들어온 당대 최강의 투수 남우식[3]의 조련을 받으며 급성장, 급기야 백호기 결승에서 그의 모교인 연세대와 연세대의 에이스 최동원을 누르면서 일약 주목받게 된다.

그 뒤 연세대가 자퇴원을 무효화시키면서 연세대에 복학, 결국 2학년 말에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면서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 야구 무대에 진출(따라서 대학 졸업은 하지 못했다)[4], 트리플A 입성 직전까지 갔다. 실제로 트리플A에서 던진 적은 없고, 더블A 우수투수로 뽑히며 트리플A 진출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실제 마이너리그 기록.[5]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 관계자들이 한국 측 인사들을 만나면 "한국이 우리 팀의 전도유망한 유망주를 뺏어갔다" 라는 농담을 건낼 정도로 브루어스에서 주목했던 유망주였다.[6]

1982년 OB 베어스가 창단하기 전에 박용곤 구단주가 미국에 직접 날아가 트레이드 머니 3만 달러에 합의를 보고[7] 어렵사리 박철순을 영입한다. 그리고 그 해 그는 신화가 되었다.

2 한국 프로야구 시절

eb51993c029254e98bdfa3418b51f12b_qKdNoN4iHrenFN8dR7ZY8Hd8y.jpg
OB 베어스 No.21
박철순(朴哲淳)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인 1982시즌에는 80게임 중 36게임에 등판, 선발/마무리 가릴 것 없이 224.2이닝을 던져 전체 팀 이닝 중 29.1%나 소화하는 혹사를 하면서도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 WHIP 0.97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올렸다. 특히 이 해 무려 22연승을 거두기도 한다. 연승은 롯데전에서 끝나는데 얄궂게도 동향 출신인 김용철이 연승을 끝내는 결승타를 친다.

공 쥔 손을 벨트라인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가 다시 올려 던지는 특유의 투구폼 때문에 허리부상의 위험을 달고 다녔는데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등판하는 혹사로 인해 1982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를 다치게 된다.[8] 1982년 한국시리즈 1, 2차전에서 등판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3차전부터 진통제를 맞으면서 출장을 강행[9][10], 기어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타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때의 무리로 인해 지병이던 허리디스크가 도지게 되어,[11][12] 1983년 0승, 1984년 1승으로 부진에 빠졌다.

이 후, 오랜 재활을 거쳐서 다시 구위를 조금씩 회복하면서 1987년 후반기와 스프링캠프를 통해 어느 정도 위력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1988년 CF 촬영 도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대참사를 겪는다. 본인 스스로도 이 때 구단에서 방출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거라고 했을 정도. 그러나 기어이 재활에 성공하면서 복귀, 결국 선수 생활을 1996년까지 이어가기에 이른다. 선수 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13] 큰 부상을 당하고도 그 때마다 불굴의 정신으로 마운드로 돌아오는 박철순에게 팬들은 '불사조 박철순'이란 별명을 붙여 준다.

1994시즌이 끝나고 윤동균 감독이 사퇴하면 나도 은퇴하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유는 OB 베어스 항명파동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박철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고참인 자신이 책임지고 은퇴하겠다는 뜻.

그러나 신임감독인 김인식은 원만한 처리를 요구했고, PC통신등에서도 박철순의 은퇴를 반대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체육계의 폭력 등으로 문제를 빚고 있었기에 여론은 선수단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철순을 그대로 방출시키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던 점도 한몫했다.

그래서 1995 시즌은 5선발로 뛰었고,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하기도 했다.

우승이 결정되고서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96년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구단에서 1997년 4월 29일 잠실 LG전 때 은퇴식을 열어 주었으며, 그의 등번호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 때 은퇴식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원래 박철순은 은퇴식에서 이벤트성 선발로 1이닝 동안 등판하려 했었다. 이 때 상대 팀이었던 LG 트윈스 타자들이 먼저 찾아와서 박철순을 위해 "가운데로 던지시면 저희가 알아서 스윙 세개하고 물러나겠습니다."고 제안했지만 박철순은 "내가 어떻게 지켜온 마운드인데, 거기서 장난질 치는 것 같고 그래서는 도저히 등판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를 거절하고 은퇴식만 치뤘다고 한다. 박철순이 선수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사례. 또한 수단은 옳지 않았지만 박철순을 라이벌 팀의 고참이 아닌 야구계의 선배로 대우하고, 그를 위해 삼진을 자처한 LG 타자들의 행동 역시 미담으로 꼽힐만 하다.[14]

한편 이날 경기는 LG가 7:1로 승리, 10연승을 이어가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최동원이나 선동열 이상이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엔 스피드건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은 남아있지 않지만 리즈시절엔 최고 140km/h 중반대의 빠른 직구를 던졌다. 또한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볼도 잘 던졌다고 한다.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서 당시 해설자들은 그의 몸쪽 직구를 역회전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무브먼트와 스피드를 위해 상당한 하이키킹의 투구폼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만성적인 허리부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5]

너클볼을 최초로 던진 투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팜볼이었다고도 한다. 사실 박철순이 던진 구질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이 갈리는 편. 하지만 당시 한국 야구에서 생소하던 구질들을 던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상이 잦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선수 커리에 내내 구속은 유지된 편이다. 선수 생활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던데다가 아킬레스 건 부상은 수술을 한다고 해도 고질처럼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부상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도 구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은[16]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훈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김은식 기자의 <두산 베어스 때문에 산다>라는 책에서 실제 나이가 알려진 나이보다 2년 많은 1954년생이라고 밝혔다. 김용희와는 동광초등학교(현 광일초등학교) 동창.
  2. 팀 해체의 여파로 대성고의 3학년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야구를 접어야 했고 뒤에 장충고와 성균관대 감독을 지내는 유상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활약하는 정성만 등 2명만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3. 실업야구 선수들이 그렇듯 은퇴 후에 롯데우유에 입사, 현재는 푸르밀의 대표이사다.
  4. 참고로 첫 번째로 미국 야구 진출 선수는 이원국이다. 1968년 도쿄 오리온즈로 입단하면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한 뒤 한 시즌 지나 미국 메이저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다. 선수 말년이었던 1983년에 MBC 청룡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5. 대단한것이, 박찬호와 추신수등은 계약금으로 마이너 생활을 하는데 상대적으로 힘들진 않았지만, 박철순의 경우 파트타임 잡을 하면서 마이너 시절을 버티며 야구를 했다.
  6. 밀워키측에선 박철순이 귀국하질 않아서 정치적인 이유로 납치 당한줄 알았다고 한다.
  7. 박철순의 말에 의하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면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8. 정확히는 번트수비 중에 발을 헛디디면서 무리가 가던 허리가 결국 터져버린것.
  9. 당시 김영덕 감독은 박철순이 등판한다고 하면 지랄과 미친놈 등의 욕설을 하며 등판하지 말것을 요구했으나 박철순이 마운드에 오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는 누가봐도 등판하지 말라는 김감독의 요구가 정상적이었던 것이다.
  10. 이 혹사에 대하여 김영덕 감독은 한결같이 자신이 관리를 해주지 못한 것이라며 자책하는 반면, 박철순은 자신이 감독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등판했다고 했다. 끈끈한 사제기간
  11. 1982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삼성의 배대웅이 친 땅볼 타구를 잡기 위해 마운드에서 뛰어오르다 그대로 주저앉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이미 진통제 주사가 아니면 걷기도 힘들 정도의 상태였다고 한다.
  12. 또 다른 인터뷰에선 그 땅볼 처리를 하려다가 허리를 삐끗하게 되면서 문제가 부상을 입었다고도 한다.
  13. 의사 진단이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14. 김은식 저,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 장면 194P
  15. 다만 은퇴할때까지 투구폼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이 폼을 은퇴때까지 고수했다.
  16.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6년에도 당시 잠실구장 스피드건 기준으로 140km 초반대의 구속을 어렵지 않게 찍었다. 고질적인 부상에다 당시 실제나이가 만 42세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스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