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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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철순(朴哲淳 / Cheol-Soon Park)
생년월일1954년 3월 12일[1]
출신지부산광역시
학력동광초[2] - 경남중 - 배명고 - 연세대 중퇴[3]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팀(1980~1981)
OB 베어스(1982~1996)
지도자OB 베어스 플레잉 코치 (1989)
OB 베어스 투수코치(1997~1998)
등장곡권인하 - 에이스를 위하여[4]
프랭크 시나트라 - My Way
종교개신교
수상 기록
1982년 한국프로야구 MVP
1982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
1982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OB 베어스 등번호 21번[5]
창단 멤버박철순
(1982~1997)
영구결번
두산 베어스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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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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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원년부터 활약한 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출신의 투수. OB/두산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KBO리그 통산 4번째로 영구결번된 레전드.[6][7][8]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두산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된다.

1.1 불사조

불사조(不死鳥)

- 통산 15년 동안 231경기 76승 53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2.95, WHIP 1.24를 기록.
- 프로야구 최초 투수 3관왕 기록(1982년의 다승&평균자책점&승률).[9]
- 단일 시즌 투수 22연승 기록(1982년).[10]
-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39세 7개월 8일)[11],
- 경기 개시 6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1994년 8월 31일 vs. 해태전)
- 일어설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심각한 허리부상을 극복한 불사조

전용 응원가는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상처투성이의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잠실 야구장의 OB 팬들에게 전설이자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프랭크 시내트라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전성기 시절에는 저음의 목소리에 뛰어나게 잘 생긴 용모로 국내에서 미남 운동선수 하면 종목을 불문하고 첫손에 꼽히는 외모 덕에 야구에 관심없는 여성들도 박철순의 팬인 경우가 많았다.[12] 초코파이 광고에도 나온 적이 있다. #

2 선수시절 활동

해당문서 참조

3 지도자 활동과 근황

이후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를 경영하였다. [1] 한때 연매출 100억 가량의 우량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았으나, 07년도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암 투병이 계기가 되어 건강상의 문제로 사업가 생활도 정리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요양과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듯.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 사업을 경기도 의왕시에서 했던 인연으로 박철순을 의왕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는 등의 소일거리 정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olleh 편파중계에서는 두산까 악덕 해설자 마가 손가에 지친 두산팬들을 위한 구원자 역할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그러다가 2015년 3월말에 갑자기 스리랑카 야구 코치가 되었다. 5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야구대회에서 3승 2패를 기록했다.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축하 인사를 남겼다.

4 여러가지

4.1 OB 베어스 항명파동

1994년 시즌 말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군산 원정경기가 끝난 뒤 전주 숙소에서 다혈질의 윤동균 감독이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체벌하려 하자[13] 최고참이었던 박철순과 장호연, 김형석 등이 이에 반발했다. 결국 주축 선수 17명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숙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한국프로야구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났다. 구단 측은 본보기 차원에서 박철순을 비롯한 주축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동균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당시 여론은 폭력을 휘두른 윤동균 감독보다 선수들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다.

결국 박철순이 경창호 구단 사장에게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라"고 배수의 진을 친 끝에, 윤동균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김인식 감독을 영입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신임 김인식 감독의 선처 요구와 팬들의 성화로 박철순과 김형석, 김상호 등은 연봉이 삭감되는 선에서 팀에 계속 남았고, 강영수는 방출당했지만, 바로 강타자를 원하던 태평양에서 데려갔으니 퇴진한 윤동균 감독만 책임진 꼴. 그래도 다음 해의 기적적인 우승으로 결과적으로는 감독 교체가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래저래 흑역사.[14][15]

자세한 내용은 OB 베어스 항명파동 참조.

4.2 기타

한국프로야구의 원조 레전드이며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대인관계도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사생활이나 야구인생 모두 우여곡절이 많았다.

  • 대학생 시절(호적상 나이 20세)에 결혼을 했으며 한 차례 이혼 경력이 있다.[16]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부상을 극복한 사연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지금의 부인인 채수정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도움도 컸다.
  • 연세대 재학시절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후배인 최동원을 구타하여 병원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연세대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다 결국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던 최동원측에서 몇달 후에 학교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 편인데, 최동원이 나중에 학교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허리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 그로 인해 전치 2주 판단을 받아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고 한다. 연세대와 박철순의 흑역사인 셈. 다만 박철순의 단독행동이 아닌 연세대 야구부가 집단으로 저지른 행동이었고 최동원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구타할 사람으로 박철순을 지목해서 그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꺼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번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17]
  • OB 코치 재임 시절이던 1997년,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되어 면허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적발된 시기가 한창 정규시즌이 진행되던 7월이라 더 말들이 많았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적이 있다.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박철순 빅맨 광고
  • 그가 OB를 떠난 이유도 구타와 간접적 관련이 있었다. 2군 투수코치로 일하던 1998년 OB 2군의 주장인 소상영 선수가 자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은 후배를 구타했고, 구단이 소상영을 방출하려 하자 "선배가 후배를 좀 혼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면서 반발,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 자신이 맞은건 아니지만 선배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부당하고, 내가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 나만 아니면 돼 지도자로서는 실격감이다. 결국 박철순 쉴드가 사라진 소상영은 시즌 끝나고 방출되었다.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구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핵실험가 이혜천, 김유봉, 최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2012년 기아자동차의 '포수의 매니큐어' 광고에 목소리로 출연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광고에 나오는 선수의 수비 포지션은 포수이지만 박철순은 투수였다는 것과 두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OB의 레전드가 KIA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의 광고에 목소리로 나왔다는 것.(...)[18]
  • 던진 구종중 무회전 체인지업때문에 유난히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왜 무회전 체인지업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냐면 박철순선수 본인이 너클볼이라고도 할때도 있고 팜볼이라고 할때도 있기 때문. # 같은 인터뷰를 하고 적은 기사들을 보면 너클볼이라고 언급되는데, 인터뷰 기사인 # 에서만 봐도 팜볼이라고 언급하시고.두 기사를 근거로 정리하면 81년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인터뷰했을때는 너클볼이라 밝혔지만 근래엔 팜볼이라고 하시는 듯.이는 인터뷰의 언급을 봤을때 두 변화구 다 구질이 비슷한 무회전계통인데 박철순선수 본인의 사용 방식이 체인지업과 같았기 때문에 팜볼이라 정의하신 것 같다.마구마구나 프로야구 매니저에선 박철순 카드가 팜볼과 너클볼 둘 다 가지고 있고 마구매니저에서는 너클볼설을 채택하였다. 또한 나무위키에서도 근래 인터뷰를 따라 체인지업의 팜볼 항목에 박철순선수가 팜볼을 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실 당장 2016 넥센 히어로즈 용병인 로버트 코엘로만 봐도 포크볼을 팜볼형태로 무회전에 가깝게 던지는 등 던지는 방식이나 그립, 구질명을 떠나 무회전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 젊은 시절 굉장한 미남이었다. 지금의 이대형이나 심수창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요즘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박철순 좋아서 야구본다는 젊은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들어서 조금 일찍 탈모가 찾아왔고 세월의 풍파와 탈모를 견디지 못하며 그 미모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공유가 1982년 당시 박철순 역을 맡았는데, 젊은 시절 박철순과 굉장히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박철순이 정말 얼마나 잘생겼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김용희롯데-SK 감독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19]
    • 김용희가 처음으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1994년 4월 12일, OB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코어 4:4로 맞선 연장 11회 말 OB의 투수 강길용이 2루타와 실책, 고의사구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OB는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팬들은 지난 해(1993년) 데뷔하자마자 평균자책점 1.11[20], 9승에 23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운 마무리 김경원이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는 그가 아니었다. 다름아닌 박철순이 등판한 것. 당연히 조금이나마 사직 야구장에 응원을 왔던 OB 팬들은 난리가 났고, 롯데 팬들마저도 그의 등판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홈 팀의 감독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장면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희귀한 상황이었고, 등판한 상황도 매우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온 박철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을 던졌고, 8번 타자 홍순기와 9번 타자 공필성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2사 만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였던 1번 타자 전준호에게 끝내기 중전 안타를 내주면서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 젊거나 야구를 본 지 오래지 않은 팬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선수 시절의 박철순은 진정한 전국구 스타였다. 특히 그의 투혼에 모든 야구팬들이 찬사를 보내었다. 1995년 한국 시리즈에서 패배한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조차 박철순의 OB에게 진 것은 괜찮다, 라는 말을 할 정도. 물론 롯데가 이렇게나 오랜 기간 동안 우승을 못 할 줄은 몰랐겠지만.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2OB 베어스36224⅔
(2위)
24
(1위)
47
(3위)
-0.857
(1위)
1.84
(1위)
151773108
(2위)
60460.970
1983410⅓010-0.0003.4810044441.355
19841군 기록 없음
1985950⅓140-0.2002.68362163419150.993
19861353⅓530-0.6253.54463222923211.275
1987524201-1.0002.25170911761.083
19881군 기록 없음
19891216⅓110-0.5004.961719141191.592
19901896490-0.3084.781046415853511.510
199118102⅔750-0.5833.51975535548401.403
19923099⅔769
(5위)
-0.5382.80925356835311.264
199325116⅔752-0.5832.08993399030271.183
19942093770-0.5002.61733326631271.097
19952094⅔920-0.8184.47988506754471.479
19962168⅔261-0.2502.62680384426201.485
KBO
통산(15시즌)
2311050⅓765320-0.5892.95908434216484013441.237
  1. 호적상 출생년도는 1956년, 똑같은 부산 출신의 장효조도 1954년 생이지만 호적상으론 1956년 생이다.
  2.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
  3. 법학과재학했는데 학점도 안 나오고 공부도 안되서 때려치고 공군에 갔다고... 여담으로, 학교는 다르지만 허구연, 김병현, 최희섭 등도 모두 법학과 출신이다.
  4. 박철순 헌정곡으로 구단에서 제작한 응원곡이다.
  5. 영구결번은 2002년 3월 28일 이루어졌다. 다만 결번식은 2002년 프로야구 개막일인 4월 5일.
  6. KBO리그 통산 첫 번째 영구결번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던 김영신 선수다. 이전에 명시된 '2번째 영구결번'이라는 표현보다는 2번째로 영구결번식을 갖고 결번 처리된 선수가 맞다.
  7. 정확히는 KBO리그 선수 중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을 모두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맞는 표현. 은퇴식은 1997년 4월 29일에 열렸고 영구결번식은 2002년 4월 5일에 열렸다.
  8. 참고로 KBO 통산 첫 영구결번식 수혜자는 LG 트윈스의 김용수 선수다. 다만 김용수는 은퇴식을 치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2011년 LG팬들과 함께 은퇴식을 치렀다.
  9. 이 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승률 0.857,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했다.
  10. 단일시즌 연승으로는 세계기록이며, 일본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2012시즌에 이어 23연승으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아시아 기록이었다.
  11. 물론 이 기록은 호적상 생년을 따른 것이다. 실제 정확한 기록은 41세 7개월 8일.
  12. 그러나 30대부터 일찍 탈모가 진행된 후에는 약간 안습….
  13.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전에도 선수나 코치의 뺨을 때리는 등의 폭력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체육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14. 여담이지만 이 당시 스포츠 서울의 故 이종남 기자가 칼럼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선수들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박철순은 그렇다 쳐도, 거의 팀에 남을 가능성이 없었던(실제로 대만프로야구 트레이드설이 들렸던) 장호연과 구단 측을 직접 중재해서 OB에 잔류시킨 것도 이종남 기자 본인. 이종남 기자는 원래 인천 토박이로 특별히 OB 팬은 아니었으며, 이 때 선수들 편에 선 것도 OB 구단 수뇌부의 좀스러운 운영에 예전부터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5 KS 우승 이후 OB는 1996년 1월에 기다렸다는 듯이 장호연을 방출했다.
  15. 박동희 기자가 라디오에서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 양반은 감독을 사실상 이긴 셈.(...) --
  16. 그런데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 잘못이 아니라 전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선수시절 내내 빚쟁이에 시달려야 했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000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본인의 돈인 2천만원을 빌려줬다. 참고로 저 당시 9급공무원 초봉이 20만원을 조금 넘던 시절이다.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은사이자 은인으로 존경한다고,대체 김성근이란 사람은... 덕분에 50대 중반 나이에 벌써 손자까지 둘이나 본 할아버지.
  17. 같은 투수출신인 선동열등의 감독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18. 여담으로 이 광고에서 나오는 포수는 실제 KIA 타이거즈의 포수인 김상훈과 그의 아내이다.
  19. 20160913014055_9.jpg
    선수 박철순, 감독 김용희 시절
  20. 이는 선동열을 제외한 다른 선수가 기록한 가장 낮은 평균차책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