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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항목 : KBO 리그/사건사고, 흑역사/목록/야구, 두산 베어스/사건사고, 해냈다 해냈어
1 개요
1994년 9월 4일, KBO 리그 팀 OB 베어스 선수 17명이 집단 이탈한 사건이다.
2 사건의 구체적 내용
2.1 원인
1993년 의외의 돌풍을 일으키며 준PO에도 올랐던 윤동균 감독 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문제는 이 젊은 감독(당시 만 45세)이 우승에 도전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1994년에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원인을 찾자면 1993년 시즌에는 선발진과 김경원이라는 특급 마무리의 투수진은 굉장했으나 타선은 홈런 개수가 같이 잠실구장을 쓰는 LG에게도 뒤지는 그저 그런 성적이었다. 거기다 1994년이 되면서 김경원의 부상과 계투진의 붕괴, 선발진의 약화 등으로 투수진마저 무너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5년에 13년 만의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에는 다시 정상화된 투수진에 타선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감독이 교체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겠지만.
만년 꼴찌인 쌍방울 레이더스야 늘 그랬듯이 망했지만(...), 같은 잠실 야구장을 쓰던 LG 트윈스는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인기 몰이 중이었고, 여기에 원래 동네북 신세였던 태평양 돌핀스까지 정말 잘 나가자 초조함에 자주 무리수를 연발했다. 여기에 원년 멤버로서 큰형에 가까웠던 윤동균은 초조함으로 비롯된 권위적인 면모로 인해 선수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큰형으로서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가졌던 윤동균과 당시 프로적인 마인드가 부족했던 팀의 고참 선수들의 갈등은 심했다. 그렇다고 중견&신인급 선수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신인급 주전 선수 가운데 항명 파동 당시 자리에 남은 선수는 윤동균 감독에게 직접 픽업된 김민호와 장원진 정도였으니...
다행히 두산그룹의 고위층과 친밀했던 윤동균 감독은 1992년과 1993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더욱 선수단을 강하게 장악하려고 나섰다. 함께 가기 어려웠던 고참 선수들은 대규모로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고, 처리할 구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선수들도 슬슬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구상을 했으면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하던가 해야 하는데, 원년에 선수단을 조지던장악하던 방식을 생각하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원년의 군기 잡기를 고수했다는 점. 그렇다고 소통 방면에서도 딱히 잘 한 것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슬럼프였던 김형석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두고 중단시킬까 말까를 두고 은근한 압력을 넣었던 것이 좋은 사례다. 김형석은 선발로 뺐다가 9회 대수비로 넣는 사례가 많았다.
2.2 사건의 시작
1994년 9월 4일,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OB 베어스가 쌍방울 레이더스에 패한 후 숙소에서 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당시 투타의 리더격이던 박철순과 김형석이 음주를 하고 들어온 것이 윤동균 감독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팀이 패배한데다 분위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고참이 술을 먹고 들어오자 윤동균 감독의 화가 폭발했다. 그리고 미팅 자리에서 급기야 배트를 들고 "오늘(9월 4일)은 매를 들어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선참부터 차례로 나와서 소위 말하는 '줄빠따'를 맞을 것을 요구했다. 2011년에 당시 신인급 선수였던 안경현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줄빠따는 과장이고 그냥 윤 감독이 얼차려를 시키고 겁을 줬던 것일 뿐이라고 회상했다. 이게 실상인지 안경현의 쉴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에 반발해 주장 김상호가 "최선을 다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맞고는 야구 못하겠다." 라며 말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그러자 윤동균 감독이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서울로 올라가 버리라" 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리자,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총 17명이 숙소를 나와 버리고 만다. 저 17명과는 별개로 이명수의 경우 처음엔 항명에 동조했으나 결국 이탈한 17명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전주에서 빠져나와 흩어진 선수들은 대전역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이 와중에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이탈 인원 전원이 최선참인 박철순의 뜻에 따르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가했는데, 심사숙고한 박철순은 결국 대표로 짐을 떠맡게 된다. 다음 열차를 타고 자정 즈음에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 야구장에 주차해놓은 승용차를 빼고, 9월 5일 경기도 양평군 플라자콘도에 집결했다. 그리고 9월 6일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이탈했음을 알린 후,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연다. 리더격인 박철순은 자신의 선수 생활을 여기서 마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프로 원년 동료 선수로 함께 야구한 형님같은 사이인 윤동균 감독이 떠나면 자신도 야구를 할 수 없으니, 깔끔하게 둘이 책임지자고 말했다.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OB 베어스 프런트는 그들의 이탈을 당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유부단하게 미적거리다가 사태를 키우고 말았던 것. 예나 지금이나 이 팀 프런트는 하는 짓이 하나도 안 변했다 이에 대해서는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윤동균 감독을 퇴진시키기 위해 고의로 방관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을 제기한 사람이 스포츠서울의 고(故) 이종남 기자. 이 가설이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OB 프런트가 다소 수수방관하고 어정쩡하게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선수들을 대규모로 방출 또는 임의탈퇴시키든지 해서 강하게 수습하든지, 아니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빨리 이끌든지 했어야 했는데 모든 문제가 결정이 된 것은 항명 이후 열흘이 지난 9월 14일이었다. 그 사이 사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가 반려되고, 윤동균 감독의 신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2.3 수습&사회적 반향
결국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윤동균 감독의 사임과 항명 선수들의 복귀. 단, 항명을 이끈 선수들 중 고참 5명(박철순, 장호연, 강영수, 김형석, 김상호)의 경우 원래 방침은 방출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김형석, 김상호의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이 둘은 잔류하게 되었다.
또한 박철순의 경우, 인간 승리의 살아있는 전설로 등판할 때마다 공 하나에 OB 팬들이 울고 웃는, 팬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존재였고, OB의 박철순이 아닌 박철순의 OB라는 표현이 맞는 그야말로 프랜차이즈를 넘어 OB 그 자체였다.[1] 이런 박철순을 방출시킬 경우, OB는 팬들의 항의와 이탈로 구단 운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로,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잔류시켰다. 여기에는 당시 처음 등장한 하이텔 PC 통신 불사조 동호회의 장외 서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으며, OB 베어스의 팬 = 박철순 개인 팬이니 만큼, 여론은 절대 구단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박철순은 실제로는 떠밀리듯 후배들의 짐을 떠맡아 대표자로 나설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며, 공개적으로 윤동균에게 양 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함께 물러나는게 가장 좋다는 입장으로 마무리한 후 은퇴를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박철순의 대한 팬들의 존경과 지지가 구단에서 생각한 것과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 박철순은 은퇴하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은퇴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급기야 구단에서 박철순에게 은퇴를 철회하고 복귀를 바라는 은근한 호소마저 있었다. 단순한 팬층의 이탈이 아닌, '박철순을 버리면 OB를 버리겠다' 라는 여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두려워진 구단이 먼저 손을 내민 것. 그 외에도 박용곤과 박철순의 관계는 구단주와 단순한 선수가 아닌, 기적 같은 재기를 이룬 과정에서 끈끈한 인간 관계가 있었기에, 프런트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다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화살은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는데, 바로 장호연과 강영수였다. 강영수는 자유계약으로 방출되었으며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가 영입하였다. 사실 항명 주동자 중 강영수의 혐의가 가장 가벼웠음에도 그를 방출하는 것에 대해 찜찜해 하던 OB는 태평양에서 강영수의 영입 의사를 밝히자 "아이고 어서 데려가십시오"라는 심정으로 강영수를 웨이버 공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은 강영수는 이듬해인 1995년 중심 타선을 꿰차고 21개의 아치를 날리며 리그 홈런 4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다. 타율은 0.243으로 영 좋지 않았지만(...), 원래 낮은 타율에 공갈포 기질이 강했던 선수였기에...
그러나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장호연이 남아있었다.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라는 것을 배짱삼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매 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 장호연을 구단에서 내보내기 위해 OB 프런트는 온갖 수를 썼다. 하지만 그룹 고위층에서 강영수 방출에 대해 구단을 강하게 질책하며 "장호연을 (강영수처럼)공짜로 내보낼 생각 말라"는 지시를 내려 무상 트레이드나 웨이버 공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장호연을 대만 프로야구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키려는 꼼수도 쓰려 했지만, 당시 대만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양 국간에 선수 계약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이드 자체가 위법이었던 지라 OB는 여론의 뭇매만 실컷 맞았다(...). [2][3] 그러게 좀 살펴보고 질러보든가 애초에 구단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장호연 또한 "내가 유니폼을 벗으면 벗었지 OB에서는 죽어도 못 뛴다" 라고 강하게 나오며 구단과 장호연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다. 결국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 이던 이종남 기자가 장호연을 설득하고, 학교 선배인 경창호 사장과 장호연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장호연은 다시 OB와의 인연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그 대가로 연봉 삭감 최대치인 25%를 연봉에서 삭감했지만(...). 덧붙이자면 장호연은 팀을 이탈해 있던 기간에 모교인 충암고에서 개인 훈련을 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해 줬는데, 이 때 그에게 지도받은 선수가 바로 박명환 이었다. 야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후 박명환은 OB 베어스에 입단해 1996~2006년까지 베어스의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시즌 잔여 경기는 선수 17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 꾸려나가기 어려웠지만, 2군에서 급히 선수를 끌어다가 간신히 메웠다. 한 때, 잔여 경기 몰수패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것만은 막아내는데 성공.
그리고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이 취임했는데[4], 이 사람이 9년이나 OB-두산의 지휘봉을 잡게 될 줄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두 번의 우승까지도. 결과적으로 윤동균 감독만 피해를 본 셈이다. 물론 원인 제공자 중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이 막장으로 간 팀을 다음 시즌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 이 사건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 문화의 한 사례로 지목되어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윤동균 감독은 졸지에 프로 선수에게 매질을 한 폭력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사실 윤동균 감독이 종종 흥분을 못 이겨 선수의 따귀를 때리거나 한 일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당시 스포츠계의 문화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였고, 프로야구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타나 기합 문화가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한 케이스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5] 물론 그랬다고 윤동균 감독에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같은 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변명이고 팀을 잘 관리했어야 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일탈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윤동균을 표현하는 문장은 '강할 때 너무 강하고, 약할 때 너무 약하다' 였다. 즉, 다혈질에 불같은 성격으로 보여주기용 쇼맨십을 곁들여 너무 오버해서 치고 나가지만, 인정에 끌리거나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결단을 못내리고 우유부단한 면이 강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OB 베어스 창단 성골이라는 점도 있지만, 구단에 정치적인 스탠스로 이전부터 많은 구설수에 올랐으며, 결국 감독 자리에 낙점되었을 때도 팬들의 비아냥이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구단을 기웃거리며 코치, 프런트로 복귀를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 이 사건이 선수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흘러간 데에는 '체육계의 폭력문화'라는 매스컴의 이슈화 덕이 컸고, 애초에 비난 여론이 많던 윤동균 감독을 끝까지 감싸려던 두산 구단도 여론에 밀리면서 결국 윤동균 감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후 윤동균은 2001~2002년 이광환 감독 휘하에서[6]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잠시 지낸 것 이외에는 현장과의 인연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다만 KBO의 운영위원 으로 재직하며 야구계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3 사건 이후
복귀한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연봉을 백지위임하거나 장호연처럼 대폭 낮춘 액수로 계약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감독을 짜르고 살아남은 하극상의 주역들'이라는 선배 야구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테니... 다만 장호연 못지 않은 막가파 스타일이었던 김상호만은 "그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만큼 이번만큼은 올려 받아야겠다. 안 올려주면 은퇴하겠다."는 폭탄 선언으로 다시 한 번 프런트의 속을 뒤집어 놨다(...). 그나마 OB니까 이정도로 끝났지 여기였으면 바로 트레이드or방출행 결국 신임 감독의 '원만한 처리'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프런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김상호의 연봉을 조금 올려주는 선에서 재계약했다. 사실 김상호를 꼭 막무가내라고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 OB 구단의 연봉협상은 더 가난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짜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김상호가 "지금 받는 연봉보다 더 깎이느니 그냥 지금 벌여놓은 개인사업에 전념하는게 낫겠다."고 했을까.
그 이듬해인 1995년, 항명 파동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고, 1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베어스 프런트는 이 때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정말로.
- 박철순 : 영구 결번에 화려한 은퇴식까지 해서 대우받은 것 같지만, 2군 코치 시절 구타로 문제가 된 선수를 옹호하다가 구단의 언플로 자진 사퇴한 이후, 다시는 야구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이후 스포츠용품 사업을 하다가 2015년 스리랑카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었다. 그래도 아래의 다른 가담자들 보다는 대우가 훨씬 나은 것이 원년 한국시리즈의 주역이기도 하고 당시 박철순의 팬이었던 OB아재들이 그대로 두산팬이 되었기에 구단에서 시구등의 각종 행사를 할때마다 꾸준히 초청받는다.
- 김형석 : 1997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삼성으로 건너갔다. 1998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으며, 그 뒤 홍익대와 구리 인창고 감독을 거쳐 현재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 장호연 : 두산에서만 109승을 거둔 선수지만, 1995 시즌이 끝나고 곧바로 방출되어 은퇴식 없이 은퇴해야 했다. 순천 효천고와 신일고 감독을 거쳤으나 메이저 리그 진출 문제를 둘러싸고 일으킨 문제로 인해 아마야구계에서 무기한 자격정지를 당했다. 2010년 무렵 자격정지가 해제됐으나 현장과의 인연은 없는 상태.
- 김상호 : 이듬해 두산의 우승을 이끌며 MVP를 차지하지만, 노쇠해진 후 1998년 시즌 끝나고 류택현과 함께 현금 1억에 LG로 트레이드되었다. 결국 2000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은퇴했다.
- 강영수 :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한 1995년에 21홈런[7]을 치면서 화려한 시즌을 보냈지만 그걸로 끝. 1996년 부진에 빠진 후 결국 쌍방울로 트레이드돼 거기서 선수 생활을 끝냈다. (아래의 강영수와 달리 1965년생)
- 김상진 : 팀의 에이스로 1995년 우승의 주역이긴 하지만, 모기업인 두산이 돈이 없는지라... 3억원에 1998년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 되었으며 2001 시즌이 끝나고 SK로 트레이드, 그 뒤 2003년에 SK에서 은퇴했으며, 2005년부터 2016년까지 SK 와이번스 코치로 있다가 2016년 시즌 끝나고 코치직을 삼성 라이온즈로 옮겼다.
- 권명철 : 역시 1995년 팀의 선발 투수로 우승의 주역. 그러나 군 복무 이후 기량이 쇠퇴했다. 거기에 교통사고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리막을 걸었으며, 결국 1998년 최훈재와 트레이드되어 해태로 건너갔다. 그 뒤 트레이드로 돌아와 두산에 잠시 복귀해서 2004년 은퇴해 코치까지 지냈다가 2011 시즌에 잠시 LG에서 투코를 지냈다. 이후 다시 두산에 돌아와 코치 생활 중.
하지만 무능력하다고 까이는 중
- 이광우 : 항명 파동의 주동자 중에서는 비교적 오래 남았다. 2001년까지 두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2001년 5점대 방어율을 찍고 방출. 결국 2002년 LG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고, KIA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11년 화순고 감독을 거쳤다. 그리고 2014년부터 두산에 코치로 복귀.
- 강길룡 : 1999년까지 뛰다가 조용히 은퇴. 2013년까지 경기고 감독으로 재직.
- 김익재 : 1995 시즌을 끝으로 방출. 그래도 현대 유니콘스로 건너가서 왼손 원포인트로 1999년까지 뛰었다.
- 박현영 : 이도형의 원조 유형의 포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1997년 이정훈의 트레이드 상대로 삼성으로 건너갔다. 이 때 같이 건너간 강영수라는 선수가 있지만, 위의 강영수와는 동명이인.(1973년생) 여하튼 그리고 나서 쌍방울로 다시 가서 거기서 은퇴.
- 김종성 : 그다지 활약한 선수가 아니라 1995년 시즌 후 바로 방출.
- 추성건 : 아마야구 최고의 강타자였지만, 프로의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하며 밀렸다. 결국 1999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SK로 이적했으며, 2002년에 은퇴했다.
- 이종민 : 이듬해인 1995년 무면허 운전으로 의경을 치여 숨지게 한 교통 사고로 구속되어 2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복귀해서 2003년까지 뛰었지만, 은퇴식이나 코치는...
- 안경현 :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기 때문에 안경현만은 다른 16인과는 다른 운명이겠지 했는데, 결국 그도 2008년 시즌 후 방출되어 2009년 SK로 이적해야 했다. 다만 안경현은 이 사건 자체와는 무관한 김경문[8]과의 불화[9]가 큰 원인이다.
보면 알겠지만, 두산에서 대접 받으면서 은퇴한 선수도 거의 없고, 심지어 2000년대까지 두산에서 잠시라도 코치를 맡았던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단 두 명. 박철순은 위의 사건을 계기로 아예 염증을 느껴 야구계를 떠났고 권명철은 한 번 두산을 떠난 적도 있었다... 두산 프런트는 이 때의 일을 정말 끝까지 잊지 않고, 제대로 갚았다. 그런데 사실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들의 그 후 이력을 보면 다른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선수도 꽤 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른 사고 때문에 예우를 못 받는 경우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민이라거나 이종민이라거나 이종민이라거나 당시의 두산 프런트들이 지금도 구단의 중역에 포진하고 있는 이상[10] 앞으로도 이들이 예우받을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4 변화?
그러나 2011년 각 구단들이 과거의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우대해주는 바람이 불면서 두산에서도 프로야구 창설 30주년을 맞아 2011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우승 반지가 없었던 시절인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들을 초청해 우승 반지를 수여하거나, 2011년 8월 21일 김상호를 시구자로 초청했다. 더군다나 김상호는 항명 파동 멤버 중에서도 가장 구단 속을 썩이던 선수였다.
그리고 2011년 시즌 후, 두산 베어스의 신임 김진욱 감독이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면서 LG 트윈스의 코치로 뛰던 권명철을 투수 코치로 다시 영입했다. 특히 이전에도 두산 코치로 재직 했었고 항명 파동에 연루된 인물이던 권명철을 두산이 다시 영입한다는 것은 항명 파동 멤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베어스 팬들은 반색하는중. 그런데 2015년 현재 권명철 코치는 이해할 수 없는 투수운용으로 겁나게 까이고 있다. 권멍청(...)이라고. 안습 이후 이광우도 2014년에 두산 코치로 복귀했다.
김형석은 2012년 2월, 두산 베어스의 전지훈련장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하고 두산의 선전을 기원했으며, 2015 시즌 두산이 14년 만의 우승을 차지하자, 박철순과 김상호가 축하 인사를 남기는 등,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자.
더불어 감독직에서 사퇴한 윤동균은 이후 세차장에서 만난 박철순이 "형님, 죄송했습니다" 라며 고개숙여 사과하자 윤동균 자신도 "좀 더 빨리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느냐. 나도 미안하고 내 잘못도 컸다. 더 이상 우리 얼굴 붉히지 말고 살자"고 흔쾌히 받아들이며 눈물어린 화해가 이루어졌고, 박철순의 은퇴식에도 참여하여 자리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사건 주동자들과도 화해하며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야구 선후배로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산 베어스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윤동균에 대해서 악의적인 멘트는 없다.[11] 두산의 역대 감독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좋은 소갯말을 적었지만, 단 1명은 대놓고 깐다(...).
5 여담
항명파동이 일어난 곳은 전주시 및 군산시에 원정 경기를 오는 팀들이 묵는 숙소인 전주 코아호텔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2년 전인 1992년에 OB 선수들 사이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2년에 귀신을 목격했다고 하는 선수가 김상호와 박현영.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들은 항명파동에 가담한 선수들 중 하나였다. 이래서 항명파동의 뒤에 귀신의 장난질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돌았다나...
그리고 20년 후 다른 구단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건이 일어난다.- ↑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9회가 되자 팬들은 OB가 아닌 박철순을 계속 연호했으며, 우승이 결정된 후에도 박철순! 박철순!을 목이 터져라 연호했으니... 실로 팀 이상의 존재였다.
- ↑ 이 때 스포츠서울 이종남 기자는 "OB가 이제는 악수도 모자라 꼼수까지 쓰려 든다. 만약 팀의 에이스급 투수가 대만 구단과 결탁하여 소속을 옮기려 든다면 가만히 놔둘 셈인가?" 라면서 OB를 다소 몰아붙이는 투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나중에 이기자는 자신의 저서 이중노출 에서 기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장호연의 대리인인 양 나섰던 점은 경솔했다고 경창호 사장을 비롯한 OB 구단 측에 대하여 사과의 언급을 남겼지만...
- ↑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준궈 베어스와 자매구단이었던지라, 방출 이후 외국인 선수 입단 형식으로 한희민을 준궈로 트레이드 시킨 전력은 있다.
- ↑ 처음엔 선수 장악에 있어서 강성 타입인 백인천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이 낙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 ↑ 대표적으로 김응용 감독은 그의 해태 감독 시절을 기억하는 팬은 다 알 정도로 구타나 얼차려가 꽤 있었고, 김성근 감독도 쌍방울 시절까지 간혹 구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김 감독의 수제자인 외야수 심성보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사랑의 매"라고 표현하기는 했다). 또 김성한 전 감독의 경우, 2004년에 선수 구타 때문에 감독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실 지금도 '체육계 폭력 심각' 운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 ↑ 윤동균과 이광환은 OB 원년에 고참 선수와 타격코치의 관계였으며, 나이 차도 적었기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80년대 후반에 은퇴한 윤동균이 이광환 밑에서 타격코치를 하기도 했었고....
- ↑ 다만 여기서도 감안해야 할 점이 있다면 홈 구장의 변화다. 강영수는 트레이드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썼다. 그러나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홈 구장이 가장 작았던 숭의야구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숭의야구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과 비교할 때 홈에서 좌우측 펜스까지의 거리는 9m 짧고 중월 펜스까지의 거리는 무려 15m가 짧았다. 쉽게 말해 잠실에서 펜스 근처 깊숙한 플라이 볼로 잡힐 공이 인천에서는 홈런이 되는 셈이다. 숭의야구장은 이러한 약점을 메우기 위해 기존 1.5m 펜스 위에 높은 철망을 덧대는 방식으로 펜스를 운용했다.
- ↑ 당시 삼성 라이온즈 코치였다.
- ↑ 전지훈련 배제는 기본이요, 공개적으로 은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안경현은 이를 거부하고 이렇게 할 바엔 차라리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구단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안경현은 SK로 이적했다.
- ↑ 대표적인 인물이 1991년부터 지금까지 구단의 사장, 단장을 지내고 있는 김승영 사장과 김태룡 단장.
- ↑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토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