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朴興植
1900.8.30[1] - 199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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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이 재생버튼인줄 알았다

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거부로 불렸던 사람. 민족자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백화점이며 일제 시기를 다룬 시대극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화신백화점[2]이 바로 이 사람 소유였다. 백화점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큰 규모인 전국 350개의 체인점을 운영하는가 하면 해외무역을 시도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 반도의 유통업을 지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 물론 이러한 승승장구는 허가제 등을 적절히 활용한 조선총독부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매판자본가였던 것.

2 생애

2.1 생애 초기

1900년 8월 30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다. 20세 되던 1920년 거금 5만원을 자본으로 인쇄업을 시작한다.[3] 경쟁업자가 없었다는 것도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그의 노력과 성실성 덕에 인쇄사업은 날로 번창해 나간다. 1926년, 경성부로 올라온 그는 황금정(현 을지로) 2가 180번지, 식산은행 건물을 임대하여 '선일지물'이라는 종이회사를 차린다. 이어서 그는 종로네거리 동북쪽 모퉁이[4]에 있던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 화신백화점을 출범시킨다. 화신상회는 1932년 주식회사가 된다.

1932년 1월에는 화신상회 바로 옆 건물에 동아백화점이 들어선다. 그러나 상품권 발행, 오사카에서 물품 직수입, 금전등록기 설치, 문화주택 경품 등의 대담한 전략을 구사하는 화신백화점에 밀려 매출이 부진하자 6개월만에 상호와 경영권 일체를 화신상회에 매각한다. 동아백화점을 흡수한 화신은 두 건물 사이에 육교를 가설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고,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 등을 채용하여 광고업무를 맡기는 등의 재치도 발휘했다.

또 전국의 주요잡화점을 화신의 연쇄점(프랜차이즈)로 만드는 구상을 하는데, 1934년 신문 광고를 통해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모집하고 1935년 1월에는 3천여명 이상의 신청자 중에서 경영상태 등을 기준으로 300여개 점포를 엄선한다. 그 후 이들 연쇄점에는 화신이 일본 등지의 생산공장에서 염가로 수입한 물품들이 공급되었고 이들 공급물품의 견본을 전시하는 견본시장과 대규모 창고도 마련되었다. 각 연쇄점은 이 견본시장에서 상품을 임의로 선정하여 주문하는 선구적인 체계였다.

한편 이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조선식산은행에서 3천만원을 대부받는데, 이런 거금을 한반도 경제침략의 본거지였던 식산은행으로부터 빌렸다는 것은 바로 일제 침략행위에 적극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거듭된 성공으로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 등과 함께 조선 최고의 거부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1939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서우사범학교[5]를 인수하여 1940년에는 '광신상업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는 현재의 광신중학교-광신고등학교-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2.2 대화재 그리고 재개관

1935년 1월, 목조 4층 건물이던 화신백화점에 큰 불이 난다. 동관, 서관 건물 중 서관 건물에 이웃한 빈 터에 있던 허술한 사과창고에 처음 불이 났는데, 과일장수가 촛불을 켜고 그대로 둔 것이 원인이었다. 서울 중심부인 종로 네거리에 대화재가 난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주위에 고층건물이라곤 전혀 없던 시대라서 화신백화점이 타오르는 불길은 도성 안팎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삽시간에 성 안팎에서 몇 만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혼비백산한 것은 조선총독부 당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화재로 불타 없어진 건물의 연면적은 약 270평 가량이었고, 손해액은 약45만 3천원에 달하였으나 박흥식은 다행이 44만원의 보험에 가입해 있었다. 박흥식은 곧바로 부흥계획에 착수하였으며, 500여 점원 및 조선총독부, 식산은행, 보험회사 등도 적극 협조하였다. 그 후 화신은 서관에 인접한 부지까지 새로 매입하여 연건평 2천 평이 넘는 지하1층 지상6층의 새 모습으로 1937년 11월 개관식을 치른다. [6]

화재가 나던 해 9월에는 평양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평안백화점을 인수하여 12월 1일부터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개관하였으며, 전술한대로 1936년에는 화신연쇄점까지 흥행을 터뜨려 박흥식의 인생은 고공행진을 하게 된다. 당시 경성 조선인 사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6층 식당의 비빔밥이었다. 경성의 조선인들은 6층에 올라가 비빔밥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나들이 코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엘레베이터를 타보는 것도 큰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2.3 친일행적

이미 사업을 시작한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위가 노골화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1937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비행기 헌납운동(소위 애국기 헌납운동)에 앞장선다. 친일 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이사를 맡았고,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도 가담했다. 전쟁 말기 친일 인사들의 총본산이었던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지내고 고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기간 중 조선총독부 기관자인 《매일신보》에 대한 기고 활동과 각종 간담회 참여로 전쟁을 지원했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이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44년에는 전투기 생산 기업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일명 조비를 설립하였고[7], 1945년 종전 직전에는 전투기 생산을 위한 자신이 운영 중이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꾸어 전투기 생산 인력을 양성할 정도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군수 업체로서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공장의 인력은 강제 징용된 노동자로 채워졌다. 아마 일제패망 이후 이 회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박흥식은 항공군수산업계의 재벌로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2.4 해방 이후

광복이 되어서도 그의 왕성한 기업활동은 변함이 없었다. 1945년 11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상호를 조선기계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금성방직에 매각하였다.[8] 12월에는 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홍콩 등지에 해산물과 인삼 등을 수출했고, 1947년 10월에는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에 취임했다.

이 와중에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과 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400만원의 폭리를 취득하고, 비행기회사 청산정리자금으로 일본 육군성에서 받은 5000만원 가운데 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946년 2월 기소되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200만원을 구형받았으나, 1946년 5월 무죄가 언도되었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 공포된다. 이 법은 1949년 1월 5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는데, 박흥식은 1월 11일 제1호로 구속 수감된다. 박흥식이 제일 먼저 체포된 이유는 미국 도피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과 함께[9], 미군정 수도경찰청 청장을 지낸 장택상의 형 장직상과 만나거나 현직 경찰 최란수에게 수사금을 지원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10] 박흥식은 다른 반민족행위자들과 함께 매일 특별검찰들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의해 활동이 유야무야된다. 박흥식은 구속 3개월만인 4월 2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그 해 9월 26일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어려웠던 일제 하에서 이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고 민족자본 육성의 기수로서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다. 그러므로 친일파로서의 기소사실은 편파적이었다. - 반민특위 재판부의 무죄판결이유 중

그러나 해방 이후 박흥식은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해방 후 터져버린 6.25 전쟁으로 인해 그의 기반이었던 유통업의 경기가 영 좋지 않았고, 막대한 외자를 투입해 화학섬유 제조업체인 흥한화섬[11]을 설립해놓고 실적 부진으로 고작 1년여 만에(...) 산업은행에 넘겼다. 해피랜드라는 놀이공원 사업도 해봤지만 운영미숙과 비싼 요금으로 인해 부자집에서나 왔다갔다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난 아딕 늙디 않았디오, 현역입네다. - 1968년 10월 흥한화섬 부도 당시 그가 남긴 말.[12]

1970년대에 소니와의 합작으로 화신쏘니를 설립하여 재기를 기도했으나, 직후 터져버린 오일쇼크로 나빠진 경기와 국내의 타 경쟁회사에 비해 낮은 실적을 보이는 것에 실망한 소니측이 자본금을 회수하여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또 다시 부도를 냈다. 이 와중에 그룹의 본가라고 할 수 있던 화신백화점 역시 차남인 박병찬이 말아먹고 해외로 도피(...)[13] 이렇게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되어버린 1980년의 파산 이후 1981년에는 화신전기가 부도를 냈고, 1985년에 자신이 소유한 광신학원을 장남인 박병석에게 물려준 것을 끝으로 각종 활동을 중단한 이후에도 새로운 사업에 몰두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말년인 1989년에는 자택마저 팔아치운 뒤[14] 전세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은거하다 1994년 사망했다.

3 기타

  • 1930년대에 불광동-수색동 일대의 신도시 개발계획을 수립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은평구 불광-수색 일대는 황량한 논밭과 농촌 마을이 전부였는데, 박흥식은 이 일대에 이상적인 신도시를 조성하고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지하에서 불광-수색 일대까지 터널을 뚫어 지하철을 관통시킨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계획안을 작성하여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15]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않는데, 그 이유로 첫째는 이 계획에 호의적이었던 우가키 총독이 교체되고 후임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 박흥식이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아 했으며,[16] 둘째로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물자의 품귀해져서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계획안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아있어 정부 내부에서 열람했다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후 어느 시점엔가 사라져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박흥식의 형인 박창식과 아버지 박제현[17]은 그가 어렸을 때 독립운동을 하다 각각 고문과 화병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 동생이자 아들은 친일파이자 매판자본가의 상징...이강토? 사실 박흥식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도산 안창호를 우가키 총독에게 부탁하여 출옥시킨 후 2년 간 보호한 경력이 있기는 하다.
  • 대식가였다고 한다. 한 끼 식사량이 능히 보통 사람의 3인분을 넘었다고 한다. 게다가 승용차에 한약재를 넣어 특수 제작한 전병과 그의 농장에서 농약없이 재배한 사과와 배를 싣고 다니면서 시도때도 없이 먹어댔다고 한다. 그는 여러 자리에서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보다 더한 대식가는 딱 한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몸집 또한 커서, 100kg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조선의 최고 거부였던 그가 해방 이후 허망하게 몰락해버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기업 운영에 부채를 쓰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점이 거론된다. 상업자본시대에야 통할지 몰라도, 처음부터 막대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산업자본시대에는 그의 경영원칙이 너무 낡았었다는 것. 실제로 그러한 원칙을 고수하다 위의 흥한화섬처럼 막 세운 기업을 날려먹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원칙은 그룹이 망해서 해체되는 시점에서도 여전해서(...) 기업 부도에 따른 재정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재산으로 충당하는 모습으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마찬가지로 기업경영의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는데, 이렇게 조직이 아닌 원맨쇼적인 경영은 일제시대와 같이 미숙한 경제하에서는 통용될 수 있었으나, 현대적인 기업환경에서는 기업 발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 광신고 교정에 1996년부터 세워진 박흥식의 동상이 있었는데, 그간의 친일 행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은 끝에 2001년 10월부터 두 달간 민족문제연구소가 항의 시위를 벌인 끝에 그해 12월 23일에 철거되어 현재 목공실 창고 내에 있다.
  • 시류의 변화에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였기 떄문에, 해방이 되어 독립운동의 거두인 이승만김구가 귀국하자 각각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1. 호적상 1903년생이지만 실제는 1900년생. 음력은 8월 6일.
  2. 조선인 최초의 근대건축가로 불리는 박길용이 설계한 기념비적 건물로서 그대로 존치하자는 의견도 소수 있었으나 당시는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등록문화재같은 제도도 없던 시절. 때마침 종로 도로 확장계획이 맞물려 1987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3. 그는 2천석 부농의 외아들금수저이었다.
  4. 현재 종로타워가 서 있는 자리
  5. 1905년에 안창호, 박은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하였다.
  6. 참고로 이 건물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건물이었다.
  7. 시흥군 안양리, 즉 지금의 안양시에 있었다.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짜리 대형 공장인데, 문제는 이게 조선총독부의 힘을 빌려 강제로 빼앗은 땅이라는것
  8. 이후 해당 부지는 금성방직 안양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 대한농산(대농. 미도파백화점을 갖고 있던 그 대농이다)에 매각되었고, 1977년에 다시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인에게 매각된다. 현재는 평범한 주택단지로 변한 상태.
  9. 1948년 반민법이 제정되자 부인과 함께 미국비자를 발급받았다. 지금은 미국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대단히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외교관 이외에는 외국 구경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박흥식이 반민법 제정 후 비자를 발급받은 것은 신문에도 기사화될 정도였다.
  10. 박흥식 체포는 특조위제3조사부에 그가 곧 도망칠것이라는 제보에따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박흥식은 특조위 조사관 이덕근이 시경에서 차출해온 형사들과 4층 집무실로 들이닥치자 뒷문열고 비상구 통해 화신 옆골목으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으로 빠져 도망치다가 체포되었다.
  11. 이 회사는 훗날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으로 수백명의 사망자을 남긴 악명 높은(...) 원진레이온이 된다. 궁금한 위키러들은 원진레이온 사태 항목만 보지 말고 '원진레이온'으로 한번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해봐라. 얼마나 흉악무도한 회사였는지.
  12. 이때 박흥식의 연령이 68세로 알려져서 실제 생년은 1900년임이 밝혀진다.
  13.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귀국했다.
  14. 종로구 가회동 177-1번지. 박흥식은 1931년부터 1988년까지 57년간 거주했으나, 자금난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이후 이 저택에는 무역업자인 박우준씨가 낙찰받아 거주하다가, 2000년 2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매입하여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15. 화신그룹의 '화신 50년사'에는, 박흥식이 우가키 총독을 불광동 숫돌고개까지 데리고 가서 설명을 했더니 우가키가 그 원대한 구상에 탄복하고 승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 계획의 실행을 동양척식회사의 자회사를 설립하여 진행토록 하고 박흥식은 부사장으로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라는 제안을 하였으나 박흥식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17. 현재 광신고 내에 있는 유재기념관은 아버지 박제현의 호인 '유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