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의 1960년대 모습.

1 개요

"예가 무슨 집이에요, 아버지."

"저, 화신상……, 화신상이란 데야."
"화신상요? 그래, 아무나 들어가요?"
"그럼, 아무나 들어가지."
박태원 - 《천변 풍경》

일제 강점기 에 있었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한국자본 백화점이자 근대건축 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최초의 서양식 상업 건물
하지만 알고 보면 당시 최대 친일자본가 박흥식[1]의 거점 [2]

서울특별시 종로종각 네거리, 그러니까 현재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건물. 혹은 한국 근현대사 시기에 존재했던 재벌 '화신그룹'의 모기업.

1978년 시행된 도시재개발 및 종로확장계획에 맞물려 철거된 건물이나 이 건물이 철거되었기에 제일은행 본관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근데 어차피 신세계에 팔렸잖아 안될거야 아마

2 역사

2.1 탄생! 화신백화점상회

조선시대부터 종로육의전을 중심으로 길가에 시전행랑들이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한복판인 종각 맞은편에는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선전이 있었는데, 한때는 육의전 중 최고라고 불렸던 선전은 임오군란 후 중국 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직접 물건을 팔면서 직구족들에 밀려 망했어요 상태가 되고 만다(...). 이 자리에 1890년대 말 신태화란 상인이 신행상회란 이름의 귀금속 상점을 열었다가 1918년 자기 이름의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따서 상점 이름을 바꾼다. 바로 '화신상회'의 시작이었다.

종로를 기반으로 화신상회는 꾸준히 성장해 1922년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귀금속 상점이 되었으며, 주력인 귀금속 외에도 여러 잡화를 취급하며 사실상 준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은 박흥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박흥식은 지물사업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화신상회에도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구조조정을 이유로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한편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 계획대로 화신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박흥식은 자신의 주식을 기반으로 곧바로 화신상회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원래 목조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롭게 지어올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기존 임원과 점원도 모두 갈아치웠다. 1932년, 화신상회의 바로 옆에 동아백화점[3]이 세워지면서 양 업체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나, 방만했던 경영과 무엇보다도 집 한채를 경품으로 걸어버리는 경쟁자 화신상회의 패기에 버티지 못한 동아백화점이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합병되는 것으로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고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각각 서관, 동관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종로 상권의 패자로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 화신상회는

불이 나 건물이 통째로 타버렸다

2.2 화재. 그리고 신관-전설의 시작

초저녁 도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백화점 두 동이 통째로 불에 휩싸이고 총독이 직접 나서 진화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등, 오늘날로 치면 숭례문 방화 사건과 맞먹을 이 화재는 어이없게도 작은 촛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관 옆에는 대창무역 소유의 공터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던 과일 노점상이 놓았던 촛불이 사과를 덮은 겨에 옮겨붙고, 그 불이 서관 외벽의 목재 광고판에 옮겨붙고, 서관을 황폐화시킨 다음 연결통로를 타고 동관까지 옮겨붙은 것(...) 그나마 분리되어 있는 건물 구조 덕에 대화재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건 후, 박흥식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 백화점 두 동이 타버리는 동안 종로소방서는 무얼 하고 있었냐며 압박했고, 결국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총독은 '500여명에 달하는 점원을 놀릴 수 없으니 건너편의 종로경찰서 구관[4]을 빌려달라'는 박흥식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같은 해 한국에 119가 처음 도입[5]되는 등, 한반도의 엉성한 소방 행정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영업은 재개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던 만큼, 우선 그나마 반소된 동관부터 증⋅개축에 들어가 1936년 12월 동관 일부를 다시 개장했다. 이 때 두번 다시 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건물에 셔터와 비상계단을 설치한 것이 포인트였다고. 한편 완전히 타버린 서관은 이렇게 된 이상 새로 짓기로 결정, 아예 문제의 대창무역 부지까지 사들여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성시켰다. 신관이 완성된 1937년 10월, 이제는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상회'라는 이름을 떼어버린 화신백화점은 구관[6]과 신관을 합쳐 연건평 2500평에 달하는 명실공히 당시 한반도 최대 크기의 백화점 자리에 올랐다.

구관 시절의 조잡했던 배치 대신, 넓어진 면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각 층마다 최소한 15개 부류로 상품 진열을 나눠 구분하고 매장의 통로 좌우면에 쇼윈도를 두어 상품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등 우리가 떠올리는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매장 안에 엘리베이터 4대,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두 대를 조선 최초로 설치하는 한편 건물 옥상 정면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내보내는 등 당시 남촌에 밀집한 일본계 백화점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편의시설 혹은 볼거리를 갖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노렸고, 경성전기주식회사와 협의해 전차정류장 이름을 “화신앞입니다”로 해서 백화점의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7] 이러한 시도는 종로 보신각 네거리 한복판이라는 입지조건과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건축학적 가치로서 보았을 때는 절충주의 양식 아래 최상층의 아치 처리와 처마끝 처리 효과 등 건축양식 측면에서도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화신백화점 신관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계한 최초의 서양식 상업 건축물이라는 데 최고의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1938년 4월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이왕직 장관 외 다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화신백화점에 임어(臨御)하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광복을 맞음..

2.3 광복. 그리고 쇠락

폭리와 면포·비누 등 필수물자 불법유통으로 적발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 곤란
1950년 10월부터 일반에 임대운영.

5.16 군사정권 ‘재건국민운동’
1961년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 발표
1961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 정찰제 실시 정책

충무로는 일제강점기부터 백화점 거리로 알려져 왔는데, 해방 후에도 이곳을 중심으로 백화점이 줄을 이어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일본인 백화점이었던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은 이름을 동화백화점으로,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은 중앙백화점으로 고쳤다. 이들 백화점은 귀속재산으로 미군정에 귀속되었고, 동화백화점은 규모가 커서 국가가 직영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상공부 직할로 운영되다가 민간에 불하되었다. 중앙백화점은 미군 매점(PX)으로 바뀌어 미군 상대 영업을 했고 전후 새로 문을 열 때까지는 백화점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백화점을 대표했던 화신백화점은 폭리와 면포·비누 등 필수물자 불법유통으로 적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조선인 백화점으로서는 선두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 지자 1950년 10월부터는 일반에게 임대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11월 15일에는 종로1가 화신백화점 맞은 편에 신신백화점이 개점되었다. 신신백화점 건물은 당시로는 드물게 넓은 유리창을 많이 달고 있었고, 헐리기 전까지 서울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가건물이었다.

1950년대 백화점 상권은 중앙백화점이 변신한 미도파가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화신과 신신이 그 뒤를 따르는 형세를 유지했다. 이들 백화점에는 당시 고급 소비품인 시계점·안경점·귀금속점 등 전문업체가 들어서 있었다. 1961년 서울의 백화점 수는 7개에 불과했지만 그 매상고는 1960년 현재 44억원, 1961년 82억원으로, 1958년 시장에서의 매상액이 32억원인 것에 비교해 보면 매우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2.4 재개발, 그리고 철거

이렇게 화신백화점은 물론 화신그룹 전체가 몰락하는 와중에, 1978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종로 확장계획과 맞물려 공평동이 도심재개발 사업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백화점 건물 면적의 절반(...)이 도로확장 예정 부지에 포함된 화신백화점이 철거 대상에 오르게 된 것. 이 소식에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과 전문가들이 철거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시대가 시대였고, 결정적으로 건물주인 화신그룹이 몰락하고 있었기 때문에...1980년, 화신그룹은 결국 해체되었고, 몇몇 사람을 거쳐[8] 86년 최종적으로 한보그룹이 화신백화점의 주인이 되었다. 어쨌든 철거는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한보는 그 자리에 새로운 백화점 신축계획을 세웠으며[9]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건축가 김무언의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김무언의 설계안은 이왕 건물을 원형보존할 수 없다면 새로 짓되 적어도 구 화신백화점 건물의 전면부, 그러니까 파사드만 남긴 뒤 이를 신축 건물에 대입하는 방식[10] 으로 화신백화점의 장소적 역사성을 살려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1987년, 마침내 신규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서 화신백화점은 폐업되고 그 해 철거가 시작되었다.

2.5 철거 전, 철거 이후 이야기

화신백화점 철거 이야기는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나오고 있었다. 폐점 전 당시에는 화신백화점이라는 간판, 내부 구조는 그대로 두고 있었지만 "신생 학생 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시대부터 써 온 건물의 시설은 겉보기는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낡을대로 낡아 있어서 엘리베이터는 자주 고장나고, 에스컬레이터도 종종 운행을 멈추고 사고를 내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으며, 건물 내부의 전기와 수도 시설은 건물을 골조만 남기는 수준으로 뜯어내서 다시 짓지 않고는 답이 없던 상태였다. 또한 (2010년대에도 유지되고 있는 일본 건물의 특성인) 좁은 통로와 계단은 빠른 대피가 어려워서 화재나 사고시에 인명 피해를 크게 늘일 가능성이 있었다. 철거 직전에 영업중에 가 본 위키러에 의하면 소방법상 규정을 떠나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질서한 배선과 좁은 통로까지 막은 가판대와 상품 등, 도저히 영업을 시킬 상태가 아니었다 한다.

건축허가가 떨어진 다음 날인 87년 3월 17에는 동아일보 등 각종 주간지에 전면광고까지 실어가면서 임대를 받기 시작했다.[11] 계획대로였다면 1989년에는 지하 5층 지상 18층 규모의, 하지만 전면부는 옛 화신백화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초대형 백화점이 종로 한복판에 세워졌겠지만... 종로타워 항목 참조.

그리고 층수도 있고 화려한 파사드 덕에 웬만큼 모양이 났던 화신 본 건물과 달리 길 건너편의 신신 백화점(아케이드)은 단층에 모양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별 의견 없이 그 이전에 철거가 되었다.

3 평가

3.1 보존 옹호론

화신백화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자원으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 가치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의 서울 진출이 크게 늘어나 일본계 백화점이 남촌 일대에 생겨났을 때 화신의 등장은 한인 백화점으로 우리나라 자본으로 북촌에 위치한 유일한 백화점으로 일본인 상권에 대응해 종로상권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건축적 가치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기에 한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써 당시(1937년)의 건축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백화점 건물로써의 특징을 갖는 건축사적 가치와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라는 건축가의 대표 상업건축물로서의 가치이다.

1965년 윤일주는 '한국인 신흥재벌이 처음으로 한국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위촉하여 중세풍의 건축과 근대적인 건축들을 얻었음은 의미 깊은 일이며 피압박민족중의 유지 와 자산가가 처음하는 큰 역사를 더 이름있는 외인에게 하지 않고 동족의 젊은 건축가에게 맡겼음은 의의깊은 일이다' 고 하며 당시로서는 지어진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건물이었으나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화신백화점은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에 대한 의식이 건축 전문가들과 건축학계 그리고 언론 일부에게만 있었을 뿐 도시계획을 집행하는 공공과 도시계획가들은 화신 보존에 대한 가치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법정 도시계획에 의해 재개발구역에 포함되어 철거 재개발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몇 전문가와 일부 언론은 근대 역사환경으로서 화신백화점이 보존할 대상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도시계획과 관련된 전문가와 공공 그리고 일반 시민 주민들은 가치인식이나 그 중요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정현, 김기호 "화신백화점의 보존논의와 도시계획적 논의" 내용 中

3.2 철거 지지론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보존하기에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첫째는 건축 양식이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석재로 마감한 것으로, 일제 시대 지어진 총독부 건물이나 구 한국은행 건물, 서울 시청 건물 등 다른 서양식 건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작품인지는 몰라도, 독특한 양식인 것도 아니다. 두 번째로는 조선 건축가가 설계했다 하나 민족 자본으로 일제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니었고,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댓가로 치부한 매국노의 자본으로 오로지 상업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미츠코시 백화점처럼 일본 지본이 직접 진출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유산이기 때문.
  1. 해당문서를 보기 귀찮은 사람들은 영화 암살에서 이경영이 연기한 강인국의 모델이 박흥식이라고 하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 문서는 '화신백화점 건물의 보존을 주장했던' 기본이 된 글의 성향 때문에 화신백화점과 박흥식을 상당히 미화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기원을 둔 한국 근대건축학계는 일제시대 건물에 대한 높은 평가를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미화가 문제가 된다.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 때도 그렇고, 화신백화점 해체 때도 그렇다.
  3. 대구의 이곳과는 전혀 무관하다. 4층 콘크리트 건물이었으며, 엘리베이터가 최고의 호객 요소였다고
  4. 현재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 여담으로 박흥식은 이 자리까지 사들여(...) 아케이드 구조의 신신백화점을 세워 영업구역을 확대했다. 지금의 모습은 제일은행이 잘 나가던 시절 신신백화점이 철거된 자리에 새 건물을 올려 이사해 온 것
  5. 일본은 1927년 처음 도입
  6. 화재 후 수리해서 쓰고 있던 동관
  7. 전차정류장을 거쳐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 이어진 '화신앞'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건물이 철거되고 난 90년대 중반까지도 건너편의 종로서적과 함께 약속장소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화신앞 버스 정류장 이름은 지금 종로2가가 되었다.
  8. 이 중에는 화신백화점의 건물을 임대하여 백화점 사업을 했던 신생백화점도 있었다.
  9. 계획했던 백화점의 이름도 한보 화신백화점이었다. 반세기 가까이 종각 네거리의 터줏대감이었던 화신백화점의 명성을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 것
  10. 구 대법원 청사인 서울시립미술관, 그리고 서울특별시청이 이렇게 외형이나마 보존되었다
  11. 덕분에 올 컬러로 당시의 설계안 및 분양계획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