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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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1926 - 그라치아 델레다앙리 베르그송1928 - 시그리 운세트

Henry 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

프랑스 파리 출생.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고등사범학교[1] 출신. 폴란드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1 생애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너무 그렇다보니 동료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2] 그래도 성적은 발군이어서 항상 학력경시대회 같은데 나가기만 하면 항상 입상이고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놓고 선생님을 배신하고 고등사범학교 입학은 수학이 아니라 철학과로. 데보브는 '너는 수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철학자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점잖게 쓰고 철학자 나부랭이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읽는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수학에 대한 언급 하나.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과목. 참 쉽죠?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강단철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비유하자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김용옥'과 같은 아주 인기있는 대중적 철학자여서 그의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온갖 사교계의 유명인들이 오는 인기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교양 있는 귀부인 등이 주로 오는 학원 비스무리한 곳인데, 그 부인들 수준이 철학자 버금간다.(...) 또한 콜레주 드 프랑스는 그 시대 가장 명망 높은 학자들만이 강단에 서는 곳으로, 딱히 베르그송이 강단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렇다.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나기도 했고 전후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류머티스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노령의 나이에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렴으로 죽는다.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Messieurs, il est cinq heure. Le cour est termine')"

천재로 태어나 그 뛰어난 머리로 그저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지적으로 노동하며 일생을 다한 사람.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쇼펜하우어 같은 재밌고 독특한 일화를 남긴 천재들과는 다르다.

2 철학사에서 위치

보통은 쇼펜하우어, 딜타이와 같은 생의 철학자로 구분된다. 이것은 주로 독일 철학의 관점에서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고, 프랑스 철학의 시각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로 지목된다. 멘-드 비랑에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 전통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해석에서부터 기본적인 입장들은 모두 이 전통에서 해석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초기 작이라 할 수 있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등에서 등장하는 이마누엘 칸트에 대한 인용 문구 때문에 이 당시가 인용이 활성화될 무렵이기도 하다. 칸트의 적자로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베르그송이 후에 직접 이야기했듯, 그는 칸트에게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칸트를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칸트는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의 주저 창조적 진화를 보건대 베르그송이 주적으로 삼은 것이 칸트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칸트의 학설과 베르그송의 학설은 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이 필요한 바이지만, 베르그송이 프로이트의 최초 인용자로 프랑스에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신참 논문쟁이들 입장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주장하는 내용이 굉장히 신선한데, 인용 없이 논문 올렸다간 리젝될 거 같으니 유명한 사람 인용해서 논문 제출해야겠다는 심보와 유사한 편.

그는 시간에 대한 탐구를 일생동안 지속했는데, 그것은 주로 공간에 대해서 탐구해 온 파르메니데스-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 전통에 대해 전복을 꾀하는 것이다. 2500년간의 서양철학사가 그에게는 '시간 망각의 역사'라고 생각되었고, 본질상 분절할수 없는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따로 일부분만 떼어서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 온 철학사의 오류들을 시간을 정당하게 인식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논의 역설 중 하나인 아킬레스와 거북이에 관한 역설을 그는 비판하면서 시간과 운동은 분절시킬수 없으며, 운동이 지나간 자리에 불과한 '궤적'을 공간적으로 임의로 분절시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한 제논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과거의 베르그송 해석은 주로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3]를 중심으로 한 생명과 진화에 대한 독특한 해명에 중심이 맞춰줬고 그래서 생의 철학자로 구분했으나 요즈음에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 나온 지속이라는 그의 독특한 시간이론과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현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평가하는 바이고 서양에서는 영국과 미국 학계가 주도한 심리철학과 현대과학철학 사조에 눌려서 사실 많이 죽었다. (고 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에 속하는 질 들뢰즈 [4]나 해체주의의 자크 데리다... 이런 사람들보단 훨씬 많이 연구되는 사람임. 물론 영미철학계는 관심도 없다.) 1950년대 이후 비약적인 자연 과학의 발달로 베르그송의 과학 인식은 많이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사실, 그래도 적어도 출신국인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의 주류로 대접받는편, 그의 다양한 저술들이 프랑스 학자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현재 프랑스의 철학교육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시되는 인물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번역한 최화 교수는 "세계 어디서도 이러한 철학사 파악은 찾아볼 수 없으며, 플라톤과 베르크손이 짝지어져 이처럼 깊이 이해되고 이처럼 높이 평가된 적은 없다"라고 서문에 쓰고 있는데, 이걸 뒤집어서 얘기하면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유독 베르그송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책 홍보문구로 뽑기 딱 좋은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자생적인 철학사조라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때 불다마는 유행일 수도 있다. 새로운 조류일지, 반짝 유행일지는, 베르그송에 대한 수입이 이루어진 지 아직 2세대가 지났을 뿐이기에 조금더 지켜봐야 할 일. 덧붙여 말하자면, 여전히 한국의 철학계에서 프랑스철학 전공은 독일철학 전공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수이며, 프랑스철학 안에서 베르그송을 단지 번역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더 극히 소수라고 보아야 한다.

3 아인슈타인과의 일화

1922년에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스 철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청중으로 참가.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의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논쟁이 있었다. 서로 결론 없이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적어도 베르그송 철학의 맥락에서는 옳은 말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베르그송은 "지속과 동시성"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에 대한 비판적인 저서를 내놓는다. 물론 그 비판이라는 게 물리학적으로 아인슈타인을 논박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칸트의 이성비판에서 비판처럼 그 한계와 효과를 명확히 정한다는 얘기.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아주 마니악한 떡밥.

이 책은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인, 시계의 시간과도 다르고, 심리적 시간과 가깝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필연적인 시간인, "절대 지속"의 특유함을 비교적 쉽게 밝히고 있는 장점이 있다. 도대체 이 개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이 분 철학의 핵심인데, 아인슈타인을 설득하려 열을 올리는 과정에서, 철학자가 아닌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본인의 언술들이 나온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지속 개념은 정말로 중요하지만, 아인슈타인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논쟁을 끝냈을 만큼 현묘한 개념이다.어찌 생각하면 본인이 이것을 인류에게 설득하려 평생을 두고 철학을 펼쳤으니 그럴 수밖에.

최대한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공평하게 평하려고 노력해보면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몇몇 개념들의 물리학적 배경에 대해 오해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송의 철학적 시간 개념에 대해 낮설어 이해하지를 못했다. 베르그송도 나중에 그걸 깨닫고 "지속과 동시성"은 사후 나올 자신의 전집에서 빼 달라는 말을 남겼다.

4 기타

이름의 한글 표기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베르그송'이라는 표기가 가장 널리 쓰이나, '베르크송', '베르그손', '베르크손'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그가 폴란드계이기 때문으로, 일단 프랑스어 표기법으로는 '베르그송'이 맞으나, 생존 당시에 그렇게 불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성이 폴란드계임을 적용하여 '앙리 베르그손'이라 발음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베르그송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카잔차키스는 베르그송의 강의를 직접 들었다.[5]

  1. 참고로 이 고등사범학교는 나중에 장폴 사르트르모리스 메를로퐁티, 자크 데리다등 뛰어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2.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3. 이책에서 쓰인 용어중에 딴곳에서 오용기로 유명한 용어로 elan vital(생의 약동)(엘랑 비탈)이 있다. 이 표현들은 심지어 1930년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고, 1920년대 베르그송 철학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이전에도 널리 유행하여 신문 기사 등에 쓰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어로 베르그송을 접한 사람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어로라도 당시에 베르그송을 정통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큰 고민 없이 유행에 휩쓸려서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질 들뢰즈의 철학이 베르그송 철학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 들뢰즈를 소개하는 책에는 어김없이 베르그송 항목이 들어있을 정도이니.
  5. 출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