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1 한국군은 침략군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침략군이라는 문제는 옛이나 지금이나 오랫동안 거론되었던 문제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다. 아직도 미국이 "침략군"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고 우방국인 베트남 공화국, 즉 월남을 도우러온 동맹군이기에 정당한 개입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수많은 학자들이 있고 다들 생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채적으로 정당성에 관한 학자들을 둘로 나눈다면 Apologists 와 Revisionist 가 있다.

현재 베트남 정부나 몇 학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침략으로 보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괴뢰 정부로 보았기 때문에 월맹과 베트콩 활동이 정당했다고 보고있다. 즉 베트남 전쟁은 민족해방과 통일 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논점에서는 미국이나 월남 우방국들은 민족의 통일을 막는, 즉 정당하지 않은 개입으로 본다. 이들을 apologist 학자들이라 부른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베트남 전쟁 자체는 민족해방이나 통일 전쟁보다는 냉전의 수많은 전쟁중 하나인 "이념"전쟁에 불과하다고 본다. 베트남인들이 통일을 위해 싸운 것보다 공산주의 vs. 반공산주의, 그리고 양쪽 강국들 (미국, 소련, 중국)이 밀어준 proxy war, 즉 프락시 전쟁이고 미군 측 나라들은 자기들 이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북베트남 역시 그들의 이념따라 행동한 거라 보고, 미국과 다른 남베트남 우방국의 참전을 정당하게 보는 것이다. 이들은 revisionist 학자들이라 부른다.

다만 전부 다 이렇게 똑같이 믿는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정당상에 관한 문제에는 정당하다 vs. 아니다로 쉽게 나뉜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선에 따라 한국군이 "침략군"인가 하는 논쟁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판단은 역사를 읽고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다만 사전상으로 "침략군"이라는 단어는 한국군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베트남이 어찌 세워졌든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정부였고 한국은 지원요청을 받고 모든 절차에 준수해서 파병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한국군은 월맹 영토에 들어간 적이 없다. 한국군의 주 임무는 치안유지, 대민지원과 월남 영토에 있는 베트콩 소탕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월남군 특수부대와 공군이 월맹영토를 때렸지만 한국군은 여기에 무관하다. 그리고 정당성을 따지자면 월맹군도 호치민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라오스, 캄보디아를 불법적으로 침공, 점령하였다.

여하튼 이러한 정치적과 이념적으로 꼬인 전쟁에서 철학적으로 대한민국의 베트남 개입이 옳은지 아닌지는 쉽게 단정짓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사전상이나 국제사회상으로는 침략군이 아니다.

2 용병 논란

당시 정권은 경제적 지원과 파병을 맞바꾸었고 많은 물자를 미군에게 직접적으로 지원받았고, 이는 엄연히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혹은 양심을 팔아먹었다는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군은 절대 용병이 아니었다.

1)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동맹국으로서 파병했으므로 용병이 아니다. 파병의 대가로 미국에게 받은 여러 가지 지원은 '어차피 파병을 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라도 얻어내자'의 결과지, 일부러 돈을 받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므로 '용병'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쿠바처럼 여기 저기 손 벌려서 돈 벌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행동한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파병인데다, 20세기 중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투병이 직접 파견되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일부 평화유지군이 있긴 하긴 하다)

2)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동맹국 지원 중 동맹국간의 경제적 지원을 근거로 용병이라고 부를수는 없다. 파병을 대신해서 해준 지원은 이런 것의 일환이라고 한다. 한국군이 소비한 상당수의 전투용 물자도 미군이 지원해 주기도 했다. 뭐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대한민국은 그당시 산업이 별로 잘 돌아가질 않았다) 동맹이 굳이 자기 힘 들여서 도와주는 만큼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도 이왕 받을 기회가 생기면 악착같이 받아야 하기도 했다.

3) 과연 '침략 전쟁에 한몫 하면서 돈이나 벌러 간 용병'이, 그 많은 대민 사업을 굳이 해야 할 필요 따위가 있는가? 라는 주장도 있다. 단순히 싸워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쪽에서 고생해서 굳이 남베트남에 이런 저런 시설을 만들 이유 따위는 없다. 실제로 월남전 당시에 미군은 채명신을 비롯한 한국군 장성들에게 당신들은 여기에 싸우러 왔느냐 자원봉사하러 왔느냐?라고 조롱하면서 한국군의 대민지원사업을 비웃었으나 나중에 자기네들이 이걸 소홀히해서 엿먹게 된다.

4) 제네바 규약에 의거하여 용병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군복-계급장-표식-휘장등의 정규군 표식을 한국군은 미군과 다르게 갖고 있었다. 제네바 규약에서의 용병이란 정규군을 나타내는 표식과 전투복등에 해당하는 사항이 없는 전투원에 대해서는 용병으로 규약하고 있으며 이는 1977년 제3협약에서의 표식이 없는 용병 혹은 비전투원 표식의 용병에 대해서의 포로대우가 규정되어 개정된 이후에도 마찬가지 문제이다. 정규군의 표식을 분명히 하였던 한국군인 점이 감안된다면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규정할수는 없다.

5) 파병되었던 호주군이나 필리핀군등의 경우 따로 독자적인 사령부를 구성하지 않고 MACV의 지휘를 받았다. 반면에 한국군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여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따로 설치되었고 지휘권에서의 문제에서 미군과 전혀 별개의 작전활동을 전개하였다.(실제 채명신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인 =베트남전쟁과 나=에서도 이 지휘권 문제를 두고 논란을 심하게 겪었던 사례를 회고록과 공식 인터뷰에서 몇번이고 이야기한바 있다.) 이는 용병이라면 독자적인 작전지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한 조치일뿐더러 다른 기타 호주군과 같이 설령 MACV의 지휘를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할지라도 용병이라고 할수 없다. 현재의 청해부대-오쉬노부대와 같은 ISAF사령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있음에도 한국군이 용병취급을 받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하겠다.

6) 파병 규모가 크다고 용병은 아니다. 호주군만해도 1967년에 7천명 수준이었고 태국군은 1969년~1970년까지 1만 2천명을 주둔시켰다. 필리핀군은 1966~1967년 간에 2천명 정도를 주둔시켰다. 한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많이 보낸 것은 맞지만 한국군만 유독 많고 다른나라 우방국은 소수에 불과했다라는건 다른 시각으로 봐야한다.

세간의 인식과 국제법상 용병의 정의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국제법상 한국군의 파병은 분명히 정당하며 적어도 현대적인 용병의 범주에 합치되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용병"이라는 말은 한국군뿐만이 아니라 호주/뉴질랜드군, 태국군, 필리핀 등등 미국과 월남의 동맹군들에게 베트콩과 월맹이 선전용으로쓴 단어중 하나다.[1]

3 라이따이한 문제

베트남전 시기에 파월 한국군 혹은 한국인 노무자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베트남에서 부르는 명칭. 다른 항목과 달리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자세한 사항은 라이따이한 항목 참조.

4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한국군의 이미지 자체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과는 한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한국의 봉사단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1998, 2001년)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베트남 정부에 사과를 했었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사과에 반발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규탄했다. 베트남은 이전(1992년) "우리가 승전으로 끝난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1992년 베트남과 수교당시 과거사는 더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소위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동 조사를 통해 배상하고 싶단 의사를 전달한 바가 있는데 베트남 외교부는 우린 지나간 일에 관심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한국이 돕고 싶거든 투자를 통해 현실적으로 도와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당시 학살에대한 자세한 진상조사를 하겠답시고 남한과 미국이 저질렀다는 기록으로 남겨진 학살들을 파다 보면 거기에 곁들여서 베트남 농촌의 장악을 위해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저질렀던 각종 학살까지[2] 몽땅 드러날 터이니 정권 유지에도 좋지 않고 전쟁도 다 끝난 마당에 현 베트남정부가 정식 배상과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그동안 잘 묻어갔던 자기들 흑역사까지 전부다 드러낼 이유는 없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국가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 정부는 참전 유공자에 대한 처우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가 잘못됐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베트남 정부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적이 있다.

5 학살 문제

나무위키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관한 논란으로 토론이 여럿 존재했다. 대표적 토론의 예시. 토론 1, 토론 2, 토론 3 그러나 위 토론의 공통적 결론은 베트남전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많은 부분이 과장이나 근거 미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계속 한국군의 학살 책임을 과도하게 우기는 반달리즘 시도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전쟁의 특성상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 진보성향 단체 등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근거가 희박하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과장된 측면이 있다. 신뢰할만한 공식 문서에 남은 학살 기록은 거의 없으며, 베트남 정부가 거부하여 정확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고의로 판정된 민간인 사살이나 범죄등은 편찬 연구소에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당연히 가해자들은 군법으로 처벌 되었다.

학살의 '증거'가 되는 것은 북베트남의 공식문서[3],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4],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5]정도이다.

어쨌든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베트남을 방문하는 대통령은 사과를 통해 민간인 피해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고 있다.

5.1 논란이 된 주요 사례

5.1.1 김종수 소위 학살 사건

현재 법정에서 사실임이 확인된 학살사건 중 알려진 유일한 사건.
김종수 소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야간 매복 작전에서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당시에는 군법재판에 회부시켜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종수 소위 본인은 야간 매복작전에서 적을 사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재판에서 인정되지 않았으며, 후에 김종수 소위는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戰 '민간인사살'유죄 金목사 피맺힌 31년]
[베트남戰 '양민학살'판결당시 주심 유재방씨]
[베트남戰 '양민사살'인터뷰/채명신예비역중장]

5.1.2 고자이 마을 학살 조작 사건

구수정이 밝혔다는 고자이 마을 학살 사건#은 번복되는 기사 내용으로 인해 조작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폭격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였다가 한국군은 폭격기를 쓰지 않았다는 반론에 폭격기는 쓰지 않았다고 기사 수정을 하였다. 학살 사건의 날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막연하게 1966년이었다가 나중에 1966년 6월이었다가 현재는 한국군 비호 6호작전날로 계속 바뀌는 실정이다.

고자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 있는 그림에 맹호마크를 단 군인을 한국군으로 생각하고 학살사건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맹호부대 마크라기 보다 오히려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마크라고 봐야된다.

구수정이 2000년대 초반에 한겨레21에 기고한 고자이 마을 학살사건 주장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독가스'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구수정은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구덩이에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전자는 몰라도 후자가 사실이라면 한국군 전체가 전범이 된다.

왜냐하면, 독가스는 현지에서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군수물자로 보급이 이루어져야 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측도 방호복을 착용해야 한다. 즉, 파월 한국군의 보급 담당은 물론이고, 말단 전투원까지 독가스의 존재를 알고, 방호복도 입고 다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보병이 휴대하는 독가스병기라면 저격이나 포격에 의해 용기가 깨지거나 손상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는 보병들은 모두 그 위험을 알고 있어야 하며, 유사시 즉각 방독면 착용 등을 해야 하는데.... 그런 증언은 어디에도 없으며, 증거도 없다. 시간대나 다른 내용들은 계속 번복하며 바꿔 말하고 있다지만, 한국군 전체를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파렴치한 전범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구수정의 사과나 정정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후속기사에서 독가스 사용을 공식화하며 한국군이 고의적으로 학살을 하고 다녔다는 논거로 삼기도 했다.

또한 한겨레에서는 고자이 사건 당시 "맹호부대 2개 소대와 2개 보안대대와 2개 민간자위대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적었다. 보안대대와 민간자위대는 월남군 소속이다. 민간자위대는 (Regional Force 혹은 Popular Force)라고 볼수 있는데, 이들은 도시에서 떨어진 마을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민병대 수준 자위부대이다. 그렇다면 고자이 마을의 소속도 있을것이고 아니면 근처 마을 출신들이 있을것이다. 이들이 외국인들이 자기 가족이나 이웃들을 살해하는데 동참했거나 묵인했다는 뜻이다 만일 한국군 교모가 훨씬 컸다면 두려워서 묵인했다고 볼수 있지만 규모도 중대-연대 차이가 나는데 그냥 있었다는게 말이 안된다. 그리고 4개대대 이상 규모이니 거의 연대규모가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눈에 띄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5.1.3 린선사 스님 학살 조작 사건

구수정이 밝혔다는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정작 한국군에게 누명 씌우기 위한 베트콩의 계략임이 수십년전에 밝혀 졌음에도 지금도 버젓이 사실인양 인용되고 있다.

5.1.4 퐁니-퐁넛 마을 학살 논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전략촌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우발적인 학살(70여명)을 당했다는 논란이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6] 해당 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학살 사건의 근거로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7]를 제시했다.

미군 조사 보고서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군번 2302735, 미군 해병 연합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의 증언


2월 12일 월요일 13시 30분 경 CAP D-2 해병대와 Sylvia 대위 그리고 Seacrest 하사관은 CAP D-2 서쪽의 제 1 루트를 통해 Phong Nhi 마을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자동화기로 습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집이 불타고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민병대원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과 여자를 소대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에게도 총을 겨누고 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 경 우리는 Phong Nhi와 Phong Nhut으로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경비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의 민병대 그리고 S-3로 구성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진 연구를 위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동쪽 경로의 잠복을 고려해 Phong Nhi 근처의 넓은 루트를 선택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A: 처음으로 간 집
사진 B & C: 타버린 집들
사진 D: 재더미에 뭍힌 채 죽어 있는 마을 주민
사진 E: 마을 주민 두 사람이 이 불에 타 숨진 채 이 집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F & G: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사진 H: 가장 큰 여자들과 아이들의 집단. 거의 모두 죽었음. 오른쪽 위의 여자와 아이들은 아직 살아있음. 사진 F & G에 있는 여자도 이 집단에 찾았음
사진 I & J: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여자와 아이. 아이의 머리에 난 총상이 증거
사진 J1 & J2: 사진 I & J에 있는 여자와 아이가 발견된 집단
사진 K & G: 볏짚에 가려진 채 도랑에서 발견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
사진 M: 이 아이는 몸 어느 곳에도 상처가 없다. 근처 연못에서 익사된 것으로 보임
사진 N: 총에 맞은 채 연못에서 발견됨. 사진 가운데 임신한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음 (머리 앞이 날라감). 왼쪽 위의 아이는 사진 M과 동일 인물
사진 O & P: 20대 초반 여자 두 손 모두 손가락이 찢어지고 왼쪽 팔에 부상 당함. 미군 병사가 치료하고 있음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 더미 주위에서 총알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진술서는 1968년 2월 17일에 미군해병 J. Vaughn 상등병에 의해 작성되었다.

J.M. Campanelli, 미군해병 소령

위 진술서의 내용은 당시 한국군과 별개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미군의 분견대의 병사가 작성한 것으로, 최초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 부대가 마을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관측을 계속하며 대한민국 국군 부대가 마을을 습격하는 지켜본 뒤 마을로 진입하여 부상자 치료 및 사진 촬영등을 했다는 것으로 이 진술서의 내용을 기초로 미군 측이 한국군을 제외하고 조사를 벌였던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당시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자체보고서를 통해

"한국군이 퐁니퐁넛 마을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미군 분견대가 관측하던 시점에서는 이미 마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는 아예 다른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또한 학살의 주체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라고 주장했으며, 한국군 부대의 이동상황은 현재 공개된 베트남전사에도 시간대별로 기록되어 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은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의 주장에 다음같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a) 작전에 투입되었던 한국해병들의 진술의 진의가 의심된다. 그들이 지휘그룹과 마을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12시간동안 1번 도로에 남겨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중대의 이동이 여러 마을과 관련해서 구분짓지는 않는다.

b) 중언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1. 한국해병은 소총과 포를 발사했다.
2. 한국해병 중대는 민간인학살이 행해졌던 그 지역에 있었으며, 그리고 그일이 있었던 밤동안 퐁니 북쪽 600미터 인근에 배치되었었다.
3. 한 해병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경고는 미해병 연락부대로부터 제2한국해병여단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c) 조사보고서나 또는 추가보고서에 포함되었던 ,미해병연락부대의 장교로부터의 증언이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미군 보고서가 공개된 2000년 이후로 사건의 1, 2 소대장은 학살 주체가 한국군일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3소대장과 중대장은 모른다고 했다가 3소대장은 이후 앞의 소대에서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
또한 당시의 수사계장은 "베트콩의 소행으로 조작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조작했다."는 증언을 했으며# 학살의 주체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라고 주장했던 채명신 장군또한 베트콩이 했다는 주장을 하는 대신 당시 한국군이 했을 수도 있다는 언급을 했다.#
이와 다르게 당시 2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학살이 있었을 가능성만을 인정했고, 최종적으로는 포병과 베트콩에 의한 피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 베트남 민간인이 증언하였고, 보고서 공개 후에는 한국군 1, 2, 3 소대장도 한국군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중대장 및 채명신 장군도 인터뷰에서 베트콩이 했을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으며, 당시 조사를 맡았던 조사계장도 베트콩의 소행으로 하라는 지침에 따라 조사했다는 증언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군의 학살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 다만 1, 2, 3 소대장은 서로 다른 소대가 했을것이라고 증언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을 오랫동안 다뤄온 한겨레21의 고경태씨조차 한국군의 어느 소대, 어느 분대가 학살의 주체였는지는 확정하지 못했고 미군 조사관들 또한 퐁니-퐁녓 마을에서 작전을 펼치던 한국군 부대가 학살을 했다는 것을 법정에서 입증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보인다. #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

5.2 학살 주장에 대한 반론

학살의 경우에도 전범재판에서 순간적으로 저지른 것과 명령에 의해 저지른 것은 죄의 측정 정도와 형벌의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 그리고 민간인인 줄 모르고 사살했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베트남전의 특성은 게릴라전이 중심이었는데, 이러한 게릴라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해 민간인 구역에 기지를 만들거나 숨어서 총이나 수류탄 공격 등을 퍼붓는 식의 공격이 주류인 전쟁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상대가 지속적으로 이런 게릴라전을 겪다보면 민간인을 의심하게 되고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평시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민간인과 게릴라를 구별해서 대응할 수 있겠지만 전투 중에서 그러한 대응이 시행되지 못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선 1969년 4월 15일 저격총과 부비트랩으로 공격받은 한국 해병 2대대는 이에 통제를 잃고, 민간인 상해를 일으킨 사건이 있다. 채명신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감안한 듯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자, 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리 몇 차례에 걸쳐 전단지를 뿌려 "지정 일자까지 그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으면 베트콩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전단지를 보고 게릴라들이 전투 지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비트랩에 의한 사상자가 주였고 교전이 없는 경우 역시 존재하였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작전지도에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을 정도로 게릴라 준동이 심했다. 그래서 미군들이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8]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 피해를 입은 후,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심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은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권헌익 교수도 1995년 하미라는 마을의 전쟁 당시 이장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장의 말로는 전쟁당시 하미에는 베트콩들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조사를 해보니 공산주의자들이 아주 많았고 베트콩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또한 Ha Gia 라는 마을의 여성이 베트콩 협력자로 추정되어 체포할때 그녀는 베트콩이 아니라고 했지만 집 벽뒤에 숨겨둔 카빈 소총 한정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현지인들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벌어지면서 주둔군과 현지인들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 그의 논문의 따르자면 학살이 일어난 지역들은 대다수 이미 한국군이나 미군, 혹은 월남군과의 교류가 있던 마을이었고 여기서 갑자기 전세가 뒤집히거나 주둔군이 손실을 입으면 그 마을들이 제일 먼저 베트콩 협력자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둔군들은 여부가 사실이든 아니든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베트콩 협력마을이 맞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학살이 일어나는 것이다.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는 베트콩이나 베트콩 협조자를 뺀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평가받는 지역이었다. 파월 한국군이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 [9]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이것이다.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또한 몇몇 학살에서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로 맹호부대가 벌였다는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그 당시 한국군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남베트남군의 관할이었는데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발생되기 어렵다.

학살 주장의 근거가 되는 한국군 증오비의 일부는 한국군 증오비로 추정되기 힘든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국군 증오비라고 올라온 사진의 왼쪽 하단의 병사 팔을 보면 부대 패치가 한국군의 파병부대중 어느 부대와도 일치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제일 비슷한 부대 패치가 남베트남군의 레인져 패치. 그리고 한국군은 부대패치를 오른쪽이아닌 왼쪽에붙인다.

학살 주장에는 한국군이 있지도 않은 독가스, 군견, B-52 폭격기를 몰고 죽여댔다는 주장들도 있어서 신빙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학살을 숨기기 위해 전차로 시체를 짓뭉갰다(...)라는 이야기도 클리셰 수준으로 자주 나오는데, 시체를 파묻는것도 아닌 짓뭉개는 것으로는 당연히 학살을 숨길 수 없다는건 둘째쳐도 주월 한국군은 전쟁기간 내내 심각한 전차 부족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빼박 거짓말이다. 학살 숨기는데 쓸 정도로 전차가 남아돈다면 수기사가 뭣하러 두코 전투에서 미군 기갑부대에게 지원을 받았겠나?

한국군이 했다는 명확한 증거 역시 부족하다. 베트남의 전장은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미군,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소수민족군, 민병대들이 얽히고 설킨 전장이었으며 서로의 군복으로 위장하는 일이 잦았다. 부락인으로 가장하여 VC를 생포하는 한국군[10] 학살하는 주체가 누군지 식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월맹과 베트콩들도 양민이나 포로학살에 대해 깨끗하지 못했다. 베트콩 경우는 "공포 정책"을 실행하며 친미/친정부 마을에서 인민재판이나 학살을 벌인적도 있으며 구정공세 당시 월남 고위간부나 군경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다녔다.관련 사진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진[12] 후에(Hue)도시 경우는 베트콩들과 월맹군에게 장악당한후 수천명의 포로들, 민간인들이 고문이나 강간당한후 학살 당했고 또 수천명이 강제 월북 당했다. 현재 베트남 정부는 이 사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있어 해외 망명한 베트남인들에게서 진실규명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한국군 군복만으로 한국군 학살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퐁니-퐁넛 학살관련 미군 조사 문서를 보면 베트남군 민병대와 남베트남군 증언으로 베트콩들이 한국군 얼룩무늬 군복이나 월남군의 군복을 입고 범죄를 저지른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1] [13]

현 베트남 정부의 학살 사건에 대한 태도도 이런 깨끗하지 못함에 기인한다.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감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14]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학살 사건에 대해 배상을 하고 싶단 뜻을 전달하자 베트남 정부는 즉각 과거의 일은 관심없으니 투자나 해달라는 반응을 보였다.

베트남 전쟁박물관 사진이 학살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나, 베트남의 전쟁박물관에는 왜곡된 사진들이 걸려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베트콩 포로를 압송하는 사진을 (이것은 명백히 종군기자가 찍으면서 설명한 사진에다가 어디서 찍혔는지, 무슨 부대 소속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다.) 몬타크나드족들을 수용소에 압송한다고 왜곡시키거나
[2]
베트콩 여자를 심문하는 사진을 "후옹 디엔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짤막하게 적어 놓은 경우도 있으니
[3]
베트남측 자료는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어떤 베트남 자료에는 한국군 700여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예 말이 안되는 소리다.[15]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도 한국학살이 언급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19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라고 보도했으나,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링크

지금도 한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십수개에 달하는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해 적혀 있으며 총합 학살 카운트가 무려 수천명 단위에 이른다. 이 문서들을 다 믿기 힘든 이유는 일단 영문 위키백과등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의 학살 관련 항목과 숫자의 근거가 베트남이나 미국측 자료도 아니고 한국군이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꾸준글 쓰는 한국인들 출처다. 그것도 원문 출처 상당수가 구수정과 한겨례 신문이고, 아닌 것들도 대부분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한인 단체 사람들이 쓴 책이거나,마을에 조성된 증오비 뿐이다.

수기 '전투감각'으로 유명한 서경석 장군의 경우에는 적을 크게 무찔러서 훈장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사로잡은 포로들을 구타한 것이 드러나서 훈장 서훈이 취소될 정도였다. [16] 포로 구타 정도로도 상부의 반응이 민감했는데 구수정이나 증오비 주장처럼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죽이고 사지를 절단했니 어쩌니를 밥먹듯이 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

하물며 관련된 증언과 문서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최대한 잔혹하게 살해'나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 배를 가르는' 같이 패턴화 된 문장들이 등장하는 구도이다. 잔인무도한 귀축 한국군 VS 무고하고 선량한 베트남인들의 희생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듯 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시신이나 학살 현장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도 시신이고 당시 잔해고 아무것도 없이 오직 추모비 뿐이다. 명분에 대해서도 미군과 한국군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침략자"로 소개하니 조심히 읽을 것.

이러한 문제는 하노이에서 출생하여 남베트남 장교로 복무한 "Nguyen Cong Luan" 윈 공 루안이 쓴 책 "Natinoalist in The Vietnam Wars"에서 자세히 나온다. 월남 장교로 복무하면서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쟁범죄나 강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대부분 근거가 없었고 베트콩 선전이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한건도 없지는 않았지만 엄격하게 처리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나트랑에서 한국군 한명이 소녀를 강간하고 죽였는데 군법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소녀가 살해당했던 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나온다. 상부에서 학살을 조장하지는 않은 셈. 하지만 이러한 처벌이나 엄격한 규율을 지킨다는 사실은 신문에 짤막한 기사로밖에 처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문들이 돌면서 한국군이나 미군에 관한 적대심은 커졌다고 나온다.

쓰인 자료를 무조건 믿을 이유도 근거도 없다. 교차검증이 되지도 않는 증언같은 것을 진실인 것 마냥 쓴 것을 둘째치고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주장과 자료만 올리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 애시당초 그들이 제시하는 미군의 자료가 쓰인 시기는 대부분 미라이 사건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시기, 즉 가장 날이 선 시기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은 동양의 이름 없는 나라이니, 한국군이 학살을 벌여도 잘 안알려졌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당시 베트남 파병군 숫자 제 2순위가 한국군으로, 5만 명이 주둔했다. 그러니깐 미군 10명 당 한 명 꼴 숫자로 많았다는 것인데, 그런 한국군이 학살을 벌였으면 누군지 몰랐을리가 있나?기록도 안 찾아보고 헛소리를 주장하려니 앞 뒤가 안 맞는게 당연

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지지하며 베트남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갔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라는 자료 역시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조차 입증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러 정황을 참고하여 한국군과 파병군인들 측의 의견도 들어야 하며 각각의 글을 그대로 믿는 우를 범하지 말고 자신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현직 군간부라는 자들이, 그것도 장병 대상 정훈 시간에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듯이 입을 놀리는 일이 종종 있다는게 문제다.(...) 상술된 사건은 그나마 인터넷에 의해 파장이 커질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 기사화된 것이지, 가깝게는 90년대에 군생활한 군필자들조차 정훈교육시간에 저런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간부들의 의도는 우리 파월 한국군이 그정도로 용맹하고 무서운 존재였으니 니들도 선배들을 본받으라는 허세가 깔려 있는 건데 엄연히 반론의 내용 및 국방부 공식입장과 대치되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5.3 일본군의 학살과 한국군의 학살이 같다?

이 항목이 생겨난 이유는 월남전 당시에 한국군과 엮인 학살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조작이건, 과정이건 사실이건) 급격히 일본군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겨레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한국군과 연류된 학살사건관련 기사나 포스트가 올라오면 "일본군과 다름없네" 혹은 "우리가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니 우리도 베트남에게 사과하자" 라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심각히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물론 민간인 피해나 학살이 일어난것에 대해서 [17] 사과를 하는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잘못된 정보를 이용하면서 이것을 일본군과 비교하는것이 큰 우가 되는 것이다. [18]

2차대전 당시 사령부에서 위안부를 만들고 민간인 생체 실험까지 했던 막장 집단의 경우와 한국군의 경우는 엄연히 다르다. 최소한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는 분명히 민간인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교하자면 2차대전 당시 연합군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들도 있겠다. 당시 복수심에 불타올라서 포로들을 학살한 경우가 많은 소련군은 그렇다 쳐도, 미군이나 영국군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사령부에서 민간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게 아니라 몇몇의 일탈 때문에 일어난 범죄들이다.

게다가 많은 참전용사들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거나 개별 병사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당시 전쟁에서 공식적인 명령은 백 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살리는 것을 우선하라였기 때문이다.[19]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군은 당시 궁지에 몰렸었고 한국인 중 북한군이 섞여있을 가능성을(실제로 북한과 남로당에서 자주 써먹던 짓이다.) 들어 이미 민간인들이 대다수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건을 자행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외국에서 수행하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민간인임을 알면서도 학살을 자행하기 쉽게 만든다. 요즘 일본과 민간 토론을 진행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를 언급하면 "너희가 베트남에서~"로 많이 대응하고, 이게 기사화된 적도 있다.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은 위에서 나온대로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썩었는지,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던 나라인지, 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월남전에 참전했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을 조목조목 비교해주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만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군 사령부는 최소한이라도 이런 사태를 막으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명령도 철저히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사재판으로 밝혀진 사건의 가해자들은 처벌했다. 전쟁이란게 원래 뜻대로 되지 않아 가슴 아픈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애초 한국이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는 불법침략 및 강제적 합병, 그리고 정부에서 허가된 학살, 징병 그리고 강간 때문이다. 베트남전의 한국군 개입이야 물론 말이 많고 정당성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지만 일본과 비교할 만큼 우리가 전쟁시작에 관계도 없고 침공은 절대 아니다. 더구나 한국도 월남전 도중에 발생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사과하였으며 전승국이었던 베트남도 이에 물고넘어지지 않겠다고 승자의 아량을 베풀었다. 특히 한국 교과서에도 월남전 당시 한국군으로 인하여 발생한 민간인 피해와 라이타이안 문제에 대해서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민간인 학살과 전쟁범죄를 미화하거나 아예 거론하지 않는 일본 역사교과서와는 대조되는 셈.

5.4 결론

요약 하자면, 분명히 있어서는 안되는 사례는 존재 했을것이다. 한국군 사령부는 이러한 사례를 엄격히 막으려 했으며, 이에 대해 엄중 처벌했다. 그렇기에 이런 사례를 과장시켜 "한국군=일본군" 이라고 등치시키고 한국군이 모두 학살자라는 오명은 자제시켜야 한다. 진심을 다해 조국의 이름으로 자유를 위해 싸우신분들도 많으니까.

물론 무작정 부정하고 보는것은 일본 극우들이나 하는짓과 다름 없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조사를 하고있는 한겨레의 심하게 치우친 정치적 성향이나 과격한 표현을(한국군은 구일본 황군과 동일하다는 발언 등) 감안해서 양쪽의 자료를 조심히 봐야한다. 위에 요약한것 처럼 이미 거짓이라고 드러난 사건을 진실인 마냥 보도하는 경우도 있고 제임스 맥의 평가 하나 가지고 한국군을 무능한 군으로 매도한적도 있다. 역사 관련 자료를 제출할때 자료 하나로 평가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일이다. 딱 욕먹고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소리 듣기 좋다. 이 때문에 양식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한겨레와 구수정이 사료 비판도 없이 감정적으로 사고치는 바람에 베트남 전쟁 당시 문제들을 냉정하게 평가할 첫 단추부터 망가뜨렸다는 측면의 비판도 제기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역사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정치적 성향도 개인적인 가치관도 전혀 개입시키지 말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한다.

이러한 사례들 때문에 베트남 관련 한겨레나 구수정의 기사들이 욕을먹는 이유중 하나다.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사건들을 조사하자는 의도는 좋으나,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으려 읽는 언론사인 만큼 제출하는 자료만큼은 신중하게 조사해야하며 틀린게 밝혀진 분명히 수정을 하거나 정정하고 이를 알리는 글을 올려야 하는게 정상이다. 구수정 역시 언론인이자 학자로써 틀린 사실은 인정하는게 상식이다. 하지만 고자이 사건이나 린선사 사건, 혹은 제임스 맥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몇몇 이들이 의문을 재기하거나 반박자료를 올리면 무시하거나 입씨름만 하는 태도를 보여서 언론사로써 프로페셔널리즘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

5.5 그 밖에

  • 美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소장자료에는 RG 472라는 자료 그룹이 있고, 그중에서 한국군이 실제로 학살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수사기록과 보고서가 있다. 그 내용이 위에 서술된 퐁니퐁넛사건이며, 국내의 한 단체에서 발췌해서 번역한 문서가 인터넷상에 유포된 일이 있다. 유포된 내용에는 미군의 수사기록과 함께 한국군의 항변내용도 잘 서술되어 있었지만, 한국군의 학살증거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유포되었으며,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오랜 전쟁으로 외부인에 대한 증오 및 소수민족과의 갈등으로 우거진 복잡한 문제 와중에 북베트남도 심리전으로 적군의 학살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있다.[20]
  • KBS 등에서 베트남전 학살 문제에 대해 다큐멘터리로 만든적이 있고, 옛날에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 관련 묘사가 나오자 월남 파병용사들이 소송을 건 적이 있다. 다만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는 학살 묘사는 없고, 구타와 내무부조리 때문에 군 이미지 관련 문제였다.
  •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자칭)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베트남 참전군들이 입을 열지 않고 부정만 하는 상황이라, 국내에서도 규명이 쉽지 않다.
  • 강창성의 일본/한국 군벌사에서 전두환이 양민학살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람이 전두환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강창성은 전두환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민을 학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갔다라고 했는데, 하급부대에서 사실인즉 거동 수상자를 확인도 안하고 묻지마 사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살되었다는 민간인은 살아있었고 해당 지휘관은 고발 조치되어 처벌받았다. 전두환의 예하부대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두환이 시킨 건 아니다.애시당초 거기서 농땡이 치다 왔다고 진급과 훈장도 주지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던 사람인데 그렇게 부지런 할 리가 문제는 베트남전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 하면서 생긴 학살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에서 배워온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참고로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던 육군 9사단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광주엔 내려가지도 않았다. 애초에 광주에 간 것은 공수부대다. 사실관계가 증명된 걸로 까자. 다만 이런 소문이 난 것은 당시 참여했던 공수부대 탓도 있는데, 이 부대원들은 허세, 허풍을 쳤다. 아래에서 보듯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는 군인이 떠드는 경우는 허다했고 당시 광주에서도 이런 허세, 허풍이 있었기에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이다.
  • 평화박물관에서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64), 응우옌티탄(55)을 초청하여, 2015년 4월 7일 저녁 7시 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이재갑 사진전 리셉션 행사를 열기로 하였으나,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와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의 반발로 전시회가 취소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가 베트남전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도 풀지 못한다. 베트남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전군인들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를 하는 순간, 참전군인들도 가해자가 아닌 국가동원 피해자가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감정적 대응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상 일이 그렇게 이상적으로 풀리지 않는다는게 문제. 문제는 참전용사들중에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시는분도 많기 때문에, 그들은 참전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시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실로 참전의 정당성은 아직도 논란이 있는 주제이기에 국가 동원 피해자라고 지칭하는것도 상당히 논란이있다. 많은 참전전우회들은 참전한 공헌을 더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피해자로 지정받고 싶을 일이 없다.
  • 워마드 작자들은 이미 고리짝에 털린 베트남 학살설을 아직도 밀고 있다.답이 없다. 남자는 무조건 싫으니까. 육이오 자체를 남자들이 서로 죽이는 고기파티라고 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전부 싸이코패스로 모는 미친인간들이다

6 포로?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잘 안 알려진 문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포로 문제가 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 전경수 교수가 최초로 베트남 전쟁 박물관의 사진을 토대로 수백명의 한국군 포로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채명신 장군 등 참전 군인들의 노력으로 그 사진 자체는 의문시 되었다. 물론 한국군 포로 송환은 아니더라도 전사자들에 대한 영헌 회수를 위한 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21] 하지만 여전히 전사한 영헌을 다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문제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국군 포로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 실종자 관련 단체에서 3급 정보로 일부 전사로 처리된 장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북한과 베트남 생존설을 주장해서 PD 수첩을 타기도 했다.

사실 당시 주월사의 기본 방침은 "한국군은 너무나 용감해서 포로가 없었다" 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실종자들을 공식 발표한다. 그 중 몇명은 북한에서 생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실 1973년 파리 협정 당시 북베트남이 억류 중인 한국군 유종철 일병을 송환하였는데 그의 집은 이미 전사 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국방부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유종철 일병 사건 후에 국방부는 "현재 파악된 실종자들은 월북한 상태이고 그들은 반역자다(???)"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소련군도 아니고...

2000년대 들어서야 베트남에서 포로가 된 후 북한 생존이 확인된 안학수 하사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월북을 부정하고 납북을 인정하게 된다. 안학수 하사는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 탈출하려다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PD 수첩에서 실종후 베트남 생존의혹이 제기된 한국군 장교는 1990년대말 미국 실종자 협의회의 발굴로 전사 시체가 발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기본적으로 한국군은 당시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실종자나 포로 잡힌 병력에 대한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이는 실제 VC들에게 잡혔다가 자신이 탈출했던 태권도 교관단으로 파병경험이 있는 박정환씨의 '느시'라는 포로생활 및 탈출을 담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탈출하고 나서 그의 병적기록부가 사라져서 당황했다는 일화가 분명하게 있다. 그외 한국군 실종자들의 대응을 봐도 이는 여러곳에서 한국군이 한국군 포로들이나 실종자들 관리에 매우 허술하거나 은폐하려고만 했다는 정황이 많아서 비판받을수 밖에 없다. 또한 한국군 포로는 이미 미군포로로 송환되었던 포로생존자나 CIA의 당시 정황보고서에도 드러나 있다.

또한 한국군 포로들은 기본적으로 정당한 포로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 혹은 북송을 강요받았다. 북송 강요는 북한도 당시 베트남전에 북한군 심리전부대와 공군 전투기 조종사등을 파병하여 활동했다는 정황으로 볼때 북한의 요청에 의해서 북송을 포로들에게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 포로들 대부분은 북송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22] 이는 나중에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처 피하지 못했던 한국 외교관 포로들에 대한 처우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저런 대우를 받았었기 때문에 한국군 포로들중에는 포로학대나 학살을 당했던 사례도 있으며 이는 참전자들 수기에서도 나타난다. 주로 공포심리를 유발하기위한 조치를 취한 모습으로 사체를 매달아 놓는등의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한국군 포로는 9~18명 정도의 정황상의 확인만 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북한에 생존및 북송이 확인된 포로만 7명이었다가 위 기술대로 안학수 하사가 탈출에 실패하여 실종된 이후로 현재까지 북한에 확인된 공식적인 베트남전 한국군 포로는 6명이다.
  1. Nationalist in the Viet Nam Wars 저자 Nguyen Cong Luan
  2. 이 전쟁의 승자인 북베트남과 그들이 만든 베트남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자리잡을동안 쉬쉬했던
  3. 월간중앙에서 어느 참전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일주일에 남베트남군 20만 사살, 미군 함정 100척 격침수준이라는 게 문제
  4. 한국에도 번역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주요 증언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한국전쟁때도 북한을 취재했고 1970년대 북한 취재기도 내었는데 이 사람의 저작들은 전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금서였고 서강대학교등의 일부 학교에서는 아직도 대출 제한 서적이다. "미국의 조직적인 북침음모"-판문점에서의 사건, 리조트 같은 북한 포로 수용소베트남을 통해 남한에서 의거 귀순해서 북한에서 행복하게 사는 안학수 하사등의 기사를 쓰는 분이니 시각이나 신빙성은 각자 생각해볼 것.
  5.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건 아니다. 월남스키부대식의 자기 자랑도 있고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주제이지만 베트남 군사박물관의 한국군 항복 사진을 맹호부대라고 기록한 기자에게 근거를 물으니 맹호부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은 해병대 복장을 하고 있고 조작의 냄새가 짙다.
  6.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작성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의 공개와 관한 보도자료” (문서번호 베트남 00-11-14).
  7. 미국사료관 문서관리소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RG(Record Group) 472
  8. 라이프지, 1969년 12월 5일, [4]
  9. 파월사진첩을 보면 푸옌성, 칸호아성에서 한국군 철군 반대 사진들이 실려있다 (청룡부대 초창기 주둔지, 나중에 백마부대에게 인계 되었다.참고 [5]
  10. [6]
  11. 권헌익 교수, “Anatomy of US and South Korean Massacres in the Vietnamese Year of the Monkey, 1968”, [7], 40단
  12. 보기에는 남베트남 경찰의 양민학살 같으나 진실은 반대다.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8]
  13. 65쪽 2번 항목
  14. 전쟁 이후 토착 남베트남 해방전선 소속 인사들을 숙청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이들은 남베트남 정부 못지않게 일반 베트남인들에게 원한의 대상이었다.
  15. 전사자가 5000명 이하인데 20%가 전투 하나에서 몰살 당했다고? 특히 한국군은 파병국가이기 때문에 군사 통계를 엄청 자세히 기록했다. 사망자나 부상자을 일일히 이름으로 적을 정도였기 때문에 대대-연대규묘의 피해자가 발생했는데 한국측이나 미국측 자료를 찾을 수 없는거는 조작이라는 소리다.
  16. 엄밀히 말하자면 부하를 사살한 뒤 포로로 잡힌 북베트남 장교가 결박된 상태에서 제네바 협정을 운운하자 격분해 얼굴을 걷어찬 것
  17. 과장된 면이 많지만 분명히 소수 학살은 있었다. 김종수 소위 사건이 예.
  18. 미라이 학살에 대해서 미국도 인정을 하고 유감을 치욕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지만 주동자들은 처벌했고 주월미군이 나치들과 비교 당하는건 절대 아니다.
  19. 민간인 옷 입고있는 사람이 갑자기 총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불붙여 볼수도 없고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마을로 들어가는게 정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무서웠다고 증언한다. 정글로 들어갔을때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과 교전을 피하거나 하더라도 피해없이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마을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장병 중 한명이 죽는다 할 정도다. 선량해보이는 할머니가 갑자기 해병대를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여진다는 것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행해지는 비정규전은 정말로 위협적이다.
  20. 권헌익 교수, “Anatomy of US and South Korean Massacres in the Vietnamese Year of the Monkey, 1968”
  21. =지옥의 전장 베트남전쟁= 호비스트 출판 p131 출처
  22. 나중에 베트남전 실종자들이 북한에서 생존이 확인되었거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례가 밝혀진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