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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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煥之
(1730 ~ 1802)

1 개요

조선 영조·정조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노론 벽파의 지도자로 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심진(沈鎭)의 아들, 심의겸의 형 심인겸의 8대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심택현의 종손(從孫)이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1].

2 생애

1762년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 교리, 대사성 등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직을 맡았으며 의리와 공의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쳤다. 1779년 부수찬, 부교리를 거쳤고 1784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과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그해 평택안핵어사(平澤按覈御史)로 있던 김희채(金熙采)의 탄핵(彈劾)으로 김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93년 풀려나 복직되었고, 그해 이조참판, 도승지, 규장각제학, 비변사제조를 역임했으며, 1795년 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그해 대사헌,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 때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 이가환(李家煥), 소론 서명선(徐命善) 등을 비판, 탄핵했다. 1795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799년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경모궁도제조(景慕宮都提調)를 겸하였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순조 즉위년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인해서 벽파가 집권하게 되자 영의정이 되었다.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주관하기도 했는데, 이는 시파남인들의 숙청으로 이어졌다. 장용영(壯勇營) 또한 혁파하였다. 김관주(金觀柱), 정일환(鄭日煥) 등 노론 강경파를 등용하여 반대파를 공격하게 했으며, 권유(權裕)를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김조순을 공격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정순왕후 김씨 사후 김조순파가 집권하면서 관직(官職)을 추탈 당하였다. 그뒤 고종 1년(1864)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데 본래 봉분이 있었지만 2003년 경에 화장을 해서 납골묘로 모셔 놓았다.

3 노론 음모론의 희생양

노론 음모론을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에겐 정순왕후 김씨와 더불어 정조 독살 및 수구 반동정치의 핵심 인사로 매도당하고 있다. 물론 아래의 어찰집 등의 사례를 볼 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4 기타

2009년 2월,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정조표 걸쭉한 욕들이 들어있는 어찰 299건이 공개되었다.[2] 정조는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인물이라도 놓치지 않고 길들이려 했는데 그의 이상정치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막후에서 편지를 보내 믿음을 주고 신뢰감을 유도했다.

영원한 제국에서는 최종원씨가 연기했다. 당시에는 정조 어찰이 아직 발견되기 전이었고 노론 음모론이 대중문화계에 한참 대세였던 시대였으므로 극중에서도 정조를 암살할 기회만을 노리는 능구렁이같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에서는 박찬환씨가 열연을 펼쳤다. 여기서도 철저한 정적이자 그야말로 꽉막힌 벽파 자체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철저히 정치인적인 계산된 모습이 나온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주기까지한다.
  1.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2. 정조심환지 뿐만 아니라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게도 어찰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정조어찰첩이라는 이름으로 탈초,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어찰로서 총 6첩 297건에 달하는 분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