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室福信[1]
? ~ 663년
목차
1 개요
백제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2] 또는 백제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3] 보통 복신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도침 등과 함께 거병, 왜에서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데려다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지만, 함께 거병한 도침을 죽이고 부흥군의 전권을 독차지하는 등 내부에서 마찰을 일으켜, 결국 풍왕에게 살해되었다.
2 생애
2.1 복신의 사정
백제 부흥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삼국사기》권제27 백제본기 제5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 (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권제28 백제본기 제6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백제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구당서》권 199 동이열전 제 149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여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복무한데다, 심지어 무왕의 조카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그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듯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이 일본서기 권 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환국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덤으로 왜국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연계 호응한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하고,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부여풍은 왜국에서 십수년을 보내며 긴 시간을 지나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4]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왕족인[5]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부흥군을 이끌었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근, 포 1천단, 쌀종자 3천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그가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왜군과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는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이동하였다. 피성은 김제로 비정된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학설.)
겨울 12월 병술 그믐에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사이노 무라치(狹井連), 에치노 다쿠쓰(朴市田來津)[6]과 의논해 말하기를“이곳 주유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에치노 다쿠쓰(朴市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주류(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권 27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병크 혹은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 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왜군의 장수가 반대하였다.
에치노 다쿠쓰 등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장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7] 그리고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건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정도 확실해 보이는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가미쓰케누노기미와카코(上毛野君稚)라는 장수에게 2만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가미노기미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당시 평양성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다름아닌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토착 기반세력을 지닌 복신보다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복신을 제거하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기 2년 6월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실복신이 죽고 두 달만에 백제 부흥군은 백강 전투로 궤멸되었고, 풍장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9월에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고 이어 임존성도 함락됨으로써[8] 백제 부흥 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3 기타
귀실복신의 아들이었던 귀실집사는 왜로 망명했는데, 시가 현에 그를 모시는 키시츠(귀실)신사(鬼室神社)가 남아 있다.
음력 3월에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은산별신굿놀이)에서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은산별신제의 유래 자체가 복신과 관련이 있는데, 은산면 일대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 마을 어른의 꿈에 나타나 "나는 백제를 지키다 죽은 장군이다. 지금의 역병을 내가 없애줄테니 나와 내 군사들의 뼈를 거두어 묻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말대로 오래 전에 죽은 장군과 병사들의 뼈를 수습해 묻어주자 역병이 그쳤고 이것이 은산별신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사실상 풍왕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항목 형성이 흑치상지나 지수신보다 늦다. 안습.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삼국통일전쟁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이라는 성씨에 대해 원래는 부여씨였는데 귀신의 감화
신내림?를 받아서 바꾼 거라고. - ↑ 똑같이 '명나라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로 평가받는 원숭환의 경우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많다.
- ↑ 다만 리키메르에 비하면 복신 쪽이 군사적으로 능력은 있었고, 나름 성과를 본 것도 있었다.
- ↑ 노태돈의 말로는 전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 ↑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 ↑ 일본서기에는 하타노미야쓰코(秦造)라고도 되어 있다.
- ↑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 ↑ 임존성은 지수신이 버티며 11월까지 버텼는데, 이 임존성을 함락시킨 것은 과거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흑치상지였다. 해당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