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어린이 연쇄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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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산 어린이 연쇄살인 사건.jpg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낙서

1 개요

1975년 8월 20일 오후 8시,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1]에서 7살 김현정양이 실종 후 살해된 채로 발견되고 불과 닷새 후 동구 좌천동에 사는 5살 배준일 군이 실종된 후 살해된 채로 발견된 사건이다.

2 김현정양 피살사건

핫도그를 유난히 좋아하던 김 양은 그 날도 ‘핫도그를 사먹으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핫도그를 파는 구멍가게는 김 양의 집에서 5~10분 정도의 지척거리에 있었다. 간식으로 핫도그를 즐겨먹던 김 양은 거의 매일같이 집 근처에 있는 가게에 가서 핫도그를 사먹고 돌아오곤 했었다. 그래서 김 양의 부모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한참이 지나도 김 양은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해진 김 양의 부모는 딸을 찾아 나섰다. 핫도그 가게 주인에 따르면 이 날도 김 양은 핫도그를 사들고 곧장 집을 향해 뛰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목격된 김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주민들과 인근 파출소 순경까지 나서서 김 양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김 양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감쪽같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다음날인 8월 21일 오전 5시 45분경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용두산공원 인근 숲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공원을 순찰하던 공원 관리인 35살 문모 씨는 어린아이의 시신을 발견한다. 문 씨는 즉시 '여기 용두산공원에 어린 여자아이가 죽어 있습니다.'라고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 중부경찰서에 보고되었다. 2시간이 지난 8시경 형사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현상에 도착하니 신고상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잔혹했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되었고 죽은 아이는 손발이 움직이지 못하게 속옷을 찢어 만든 끈으로 손발이 묶여 있었다. 문제는 복부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쓰여진 낙서가 매우 소름돋게 만들었다.

범천동 이XX이가 대신공원에서 죽였다.[2]

경찰은 상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걸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식중독 내지 약물중독으로 죽어 있었으며 외상흔적이 없어 타살로 보기 어렵다.

이것은 손발이 묶인 채 목이 졸려 죽은 여자아이를 본 경찰의 보고였다. 경찰은 보고 이 후 여자아이에 대한 신원수배를 내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 '신원 수배된 아이가 어제 실종된 내 딸인 것 같다.'라고 연락이 들어왔는데 바로 전날 실종된 김 양의 가족이었다.

김 양의 가족은 처참하게 죽은 김 양을 보고 절망했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가족이 있고 명백히 타살당한 김 양을 걸인 취급하고 식중독으로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김 양 가족의 강력한 요구 끝에 경찰은 이 사건은 유괴살인으로 초점을 맞추고 급히 수사방향을 변경했다. 김 양의 시신 발견 당시는 사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난 후였는데 시신 상태로 보아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김 양이 집을 나선 시간과 살해추정 시간 등을 따져볼 때 김 양은 핫도그를 사먹고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 그리고 그 시간은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김 양을 봤다는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특히 범인이 해가 지지 않은 시각에 그것도 주택가에서 무모하게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주택가에서 강제로 김 양을 끌고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유괴에서 살해까지의 범행이 목격자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한 수사팀은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김 양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일차적인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또 채무나 치정 등 원한관계에 의한 보복범행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김 양의 부모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조사했다. 하지만 용의점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김 양의 이마와 오른쪽 귀 밑에는 심한 타박상이 있었다. 당시 김 양은 팬티만 착용한 상태였는데 상의와 신발은 발견되지 않았다. 통상적인 아동 유괴살해사건의 경우 범행 목적은 돈이지만 하지만 김 양의 경우는 예외였다. 수사팀은 범인이 김 양을 살해한 뒤 김 양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금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범인의 목적은 돈이 아닌 여아의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팀은 아동 성추행 전력이 있는 동종수법 전과자 및 성도착증 환자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동시에 시신에 글씨를 써놓은 점으로 미뤄 정신병력이 있는 인물에 대한 탐문조사도 병행했다.

하지만 이런 수사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또 한 건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3 배준일군 피살사건

8월 24일 오후 7시경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집 앞에서 놀던 5살 배준일 군이 실종되었다. 배 군의 가족들은 밤이 새도록 찾아다녔으나, 누구도 7시 이 후의 배 군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고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날인 8월 25일 오전 6시경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의 어느 야적장에서 사과판매상 박 모씨가 한 쪽에 쌓여 있었던 사과상자더미 사이로 작은 손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박 씨는 사과상자를 살짝 들췄더니 사과상자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죽어있는 남자아이의 시신이 있었다. 바로 전 날 실종된 배준일 군의 시신이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시신을 조사했는데 아마도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보였고 손발을 묶은 끈은 아이가 입고 있던 런닝셔츠를 찢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런닝셔츠를 걷어 올렸더니 복부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빼뚤빼뚤한 글씨로 낙서가 씌여 있었다.

후하하 죽였다.

이것은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 야적장은 배 군의 집에서 약 4km 떨어진 남부민동 방파제 매립지 인근이었다.

4 진전없는 수사

범인의 엽기행각에 수사팀들은 또 한 번 치를 떨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 범행대상이 10세 미만의 아동이라는 점
  •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 상의를 찢어 손발을 묶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점
  • 범행 시간이 해질녘이라는 점
  • 살해 후 피해 아동의 배에 사인펜으로 의문의 낙서를 해놓았다는 점

특히 낙서의 필적이 같다는 점은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범이라는 것에 무게를 실어줬다. 뿐만 아니라 범인은 김 양 때와 마찬가지로 배 군의 집에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동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범인은 아동혐오론자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5 다른 사건들

출처

출처2

출처3

11월 30일 오전 11시 30분경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의 영선초등학교[3] 화장실 내에서 여자아이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피해자는 이 학교 1학년 8살 이 모양이었는데 사인은 질식사였다. 이 양은 목에 졸린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으며 자열창[4]도 목과 복부 등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11시 30분경 서구 감천2동 뒷산에 있는 까치고개 인근에서 13살 이 모군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군은 국제시장의 한 양복점 직공이었는데[5] 사건 당일 노상에서 김밥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먼저 귀가한 후 실종된 상태였다. 이 군의 사인 역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는데 안면을 둔기로 심하게 구타당한 것이 달랐다.

두 사건의 범인은 사건 발생 하루 만인 12월 1일 새벽 야간순찰을 하던 경찰에 의해 검거된다. 야간통행금지 위반으로 신병이 인도된 24살 박 모씨를 조사하던 경찰은 전날 행적에 의문을 갖고 추궁한 결과 이 양을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경찰은 박 모씨가 이 양을 살해한 후 이 양의 친언니마저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쳤으며 같은 날 이 군도 살해했다는 것을 추가로 밝혀냈다.

살해된 이 양은 박 씨의 누나의 딸로 조카였다. 11월 30일 오전 11시경 박 씨는 자기 매형의 집에서 혼자 TV를 보던 이 양을 놀러가자고 꾀어 학교로 데리고 가 화장실에서 목졸라 죽이고 이어 중구청 옆 육교 밑에서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던 이 군을 꾀어 아미동에서 감천동으로 넘어가는 까치고개에 이르러 목을 졸랐으나, 반항하자 돌로 죽였다는 것이다. 이 양의 어머니 박 모씨는 검거된 범인이 자신의 남동생인 것이 밝혀지자 한 때 실신했다가 '동생이지만 혈육의 정을 떠나 극형을 받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범인 박 씨는 지난 1월 대전교도소를 나온 전과3범으로 출감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두 어린이를 살해한 혐의로 박 씨가 검거되자 수사팀은 난리가 났다. 수사력은 당연히 여름에 발생한 두 건의 아동살인사건과의 관련성을 찾는 데 모아졌다. 박 씨는 살해된 이 양의 외삼촌이었으며 박 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3년 전부터 누나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 씨는 절도죄로 구속됐다가 그해 초 출소한 인물로 누나에게 용돈을 요청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행패를 부리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박 씨는 경찰조사에서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신의 계시를 받아 두 어린이를 죽였다.’는 황당한 말을 했다. 하지만 박 씨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은 없었다. 당시 수사팀은 박 씨를 상대로 앞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과의 관련 여부를 집중 추궁했으나, 다른 범행사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결국 이 사건은 개별사건으로 결론났으며 수사는 그대로 종결됐다.

박 씨가 앞서의 사건들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나자 경찰은 수개월간 비상을 걸고 범인 찾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수사팀은 처음부터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김 양과 배 군이 살해된 직후 부산 곳곳에서 아동을 상대로 한 유사범행이 여러 건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범행이 대부분 미수에 그친 탓에 피해 아동들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아동을 상대로 범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김 양·배 군 살해사건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 8월 24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는 집 앞에서 놀고 있던 10살 한모 군을 30세가량의 남자가 연필깎이 칼로 위협해 납치하려 한 사건
  • 8월 25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의 한 야산에서는 동생과 메뚜기를 잡고 있는 10살 최모 양을 30대 남자가 끌고 가 성추행한 사건
  • 8월 26일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서 9살 여아 납치미수사건
  • 8월 27일에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13세 여아 납치미수사건
  • 8월 28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2동에서는 7세 남아 유괴미수사건

경찰은 이 중 8월 27일 온천동 사건의 범인을 검거, 다른 연쇄살해사건 및 기타사건들과의 연관성을 추궁했으나, 무관한 것으로 판명됐다. 한편 이 사건들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8월 29일 특별지시를 내려 사건을 해결하도록 했다. 극히 이례적으로 같은 날 부산지방경찰청과의 공조수사를 위해 부산지방검찰청에도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그 해 12월 용의자의 몽타주가 담긴 전단지 10만 장을 제작해 배포하는 동시에 ‘현상금 100만 원’을 내걸고 현상수배를 하고 검거 경찰관에겐 1계급 특진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범인을 검거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무렵 유사한 수법으로 피해를 당한 어린이들의 진술을 분석해 좁혀진 범인의 윤곽은 ‘키 170cm가량의 왜소한 체형을 갖고 있는 20~30대의 남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1990년 8월 21일8월 25일 앞서 김 양과 배 군 두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1. 당시에는 부산직할시 서구 장림동이었다. 서구는 1983년 사하구로 분리되었는데 그 때 장림동은 사하구로 들어갔다.
  2. 참고로 범천동은 부산진구에 있으며 대신공원은 서구 서대신동 3가에 있다.
  3. 당시에는 영선국민학교
  4. 칼에 베이거나 피부가 찢어져서 생긴 상처
  5.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직공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군의 어머니 김 모씨는 아들이 고생만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