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해 작전 요도. 검은색 선은 일본군 선단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붉은색 선은 연합군의 공습을 나타낸다.
연합군의 폭격에 피격당한 일본 육군 수송선 켐부마루.
1 개요
1943년 3월 1일부터 3월 5일까지 비스마르크해에서 벌어진 해전. 소탕전은 3월 14일까지 이루어진다. 이 해전 결과로 인해(병력 및 물자부족 등의 이유로) 일본군이 뉴기니 방어에 실패하게 되었다.
1.1 원인
부나-고나 격전이 마무리 되어감에 따라 미합중국 육군원수 맥아더 장군은 부나-고나 지역보다 북쪽 내륙에 있던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교두보로 쓸 와우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증원을 명령했다. 일본군은 당연히 이걸 막으려고 했지만 폭격기와 수송기를 동원한 연합군의 증원으로 인해 일본군의 공략이 실패했다.
하지만 일본군 대본영은 뉴기니 전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대규모 해상수송을 통해 라바울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아 재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일본 해군소장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에게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육군 수송선을 통해 5,000여명의 증원 병력과 물자를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앞서의 교전에서 교훈을 얻어서 각 수송선은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인원을 조금씩 나누어서 균등하게 적재하여 만일 수송선이 거의 다 격침당해도 1척만 도달하면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증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구축함과 수송선의 승조원들도 되도록 이런 종류의 작전에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했고, 보트와 주정을 많이 적재해서 변변한 항만 시설이 없는 곳에서도 빠른 양륙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선단을 호위하는 항공기도 100기를 뽑아낼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1.2 전개
미 육군 제5항공군에서는 일반 폭탄을 사용해 해상전투를 수행하는 방법을 한참 연구중이였는데, 폭탄을 물에 튕겨 함선을 격침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원래 중폭격기들은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했지만 함선들이 민첩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대부분 명중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저공폭격으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이 방법의 경우 일본 전투기와 함정의 대공포에 격추당하기 딱 좋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반도폭격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일명 물수제비 폭격이라는 반도폭격은 수송선이나 구축함 같은 비장갑이거나 경장갑 함선에 대해서는 절충안 답지 않게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일단 선체 측면에 폭탄이 명중하기 때문에 현측장갑이 없거나 빈약한 함선은 마치 어뢰에 맞은 것처럼 현측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며, 이는 곧 침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스마르크해 해전이 벌어질 당시에는 근방의 연합군 항공기들은 수송작전을 막기 위해 통상적인 출격도 될수록 자제하였으며, 앞서 말한 반도폭격도 열심히 연습해서 전문가의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동원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이 근방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항공기의 총수는 338대 이상이었다.
1.3 절정
3월 1일에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선단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3월 2일 일본군 선단이 발견되자, 3일에 걸쳐 보파이터 쌍발폭격기, B-17, B-25로 구성된 200여대의 폭격기와 P-38 라이트닝, P-40 워호크로 구성된 100여대의 전투기에 의한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2일 에는, 오전 10시 경, 초계중이던 B-24 폭격기 한대가 수송선단을 발견, B-17 폭격기 편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손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에도 11대의 B-17이 동원되어 폭격을 가했지만, 수송선 한 척에 경미한 피해를 주는 것으로 그쳤다.
일본군 수송 선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3월 3일의 공격이었다.
첫번째 공격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뷰포트 뇌격기 8대가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두 대만이 선단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가했지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후 오전 10시, 13대의 미 육군의 B-17 폭격기가 7000피트의 중고도 상공에서 수평폭격을 가했다. 일본 해군 제로 전투기들이 B-17 요격에 나섰고, 폭격기들을 호위하던 P-38과 공중전이 벌어졌다. 잠시 후 B-25 폭격기 부대가 추가로 도착해 역시 중고도에서 폭격을 수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부 선박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많은 전투에서 그랬듯, 중고도에서의 수평폭격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군 선단은 폭격을 회피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져 호위 구축함들과 수송선의 거리가 벌어졌고, 효과적인 대공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일종의 미끼였다.
B-17을 요격하러 나선 일본군 전투기들은 폭격기 및 폭격기를 호위하던 P-38 전투기들과의 전투로 중,고고도에 묶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위함대의 대공화력도 중고도의 폭격기들에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저공으로 또 다른 B-25부대와, 보파이터, A-20 하복 공격기 부대가 들이닥쳤다. 전투기의 원호도 없는데다, 대열이 흩어져 제대로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 없던 일본군 선단은, 현지개수로 기수에 12.7mm 기관총 8정을 장착한 B-25들과, 20mm 기관포 4문을 장비한 보파이터들의 기총소사에 그대로 노출되었다.[1]
일본군 수송선을 공격하는 B-25 폭격기.
이 공격으로 일본군 선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박 자체의 피해는 물론, 수송선에 타고있던 상당수의 승조원들과 육군 병력이 기총소사에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2] 특히 연합군 폭격기들은 일본 해군 구축함의 함교와 방호가 취약한 대공포좌를 기총소사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대공포좌 상당수가 이 기총소사에 무력화 되었을 뿐 아니라, 구축함에서 함교의 장비와 인원이 피해를 입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신나게 기총소사를 퍼부은 후, 연합군 폭격기들은 말 그대로 오리사냥감(sitting duck) 신세가 된 일본군 선단에, 마스트 높이의 초저공에서 물수제비 폭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특히 수송선을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3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었고, 나머지도 적잖은 손상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초저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A-20 하복 공격기.
오후에도 B-25 폭격기들이 다시 공습을 가했다. 그나마 속도가 빠른 구축함들은 죽어라 도망친 끝에 8척 중 5척 이나마 - 그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 목숨을 건졌지만, 무엇보다 (전날 격침당한 1척을 제외한 남은) 수송선 7척 모두는 이날 공격으로 격침당했다. 사실상 전멸한 것.
그리고 다음 날인 4일 아침에는,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생존자 구조 작업 중이던 일본 해군 구축함 한 척이 추가로 격침당했다.
4일, 일본군은 부나의 연합군 비행장에 공습을 가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3]
게다가 공습 후에는 3월 14일까지 미 해군의 어뢰정과 전투기에 의한 소탕전까지 이어졌다. 그 이유는 3일날 해전 도중 격추된 B-17 폭격기의 승무원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하자 일본군 전투기들이 기관총을 난사해서 죽여버린 것이다. 유럽 전선[4] 뿐 아니라 원래부터 험악한 태평양에서도 항공기에서 낙하산 탈출하는 경우에는 암묵적으로 사격하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는데, 이걸 일본군이 깨버린 것이다. 덕분에 분노에 찬 미군도 보복공격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 해전에서 격추된 일본군 항공기의 승무원도 기관총으로 벌집이 되었으며, 침몰한 수송선과 구축함의 탈출보트 및 표류자들도 당연히 집중사격의 표적이 돼서 비참하게 죽었다. 심지어 이들을 말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미 육해군 지휘관들도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고, 전투경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부하들의 행동을 치하한다는 발언을 전달하라고 말하면서 이 발언을 전해들은 연합군 조종사들은 더더욱 잔존 일본군 소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소탕전은 넓은 해역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멀리 표류한 사람들도 처참하게 죽게 된다. 결론적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다.
1.4 결말
이로 인해 수송선 8척 모두가, 구축함 중 4척이 격침되고, 선단 상공을 호위중이던 제로센 6기(3월2일 2기, 3월3일 4기)가 격추되었다.[5] 살아남은 나머지 구축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3,700여명의 육군이 땅을 밟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되었으며(...) 그나마 이 수치도 필사적인 구조작업 끝에 손실을 줄인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은 표류자들도 육지에 상륙한 자들은 식인풍습이 남아있던(!) 현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서 끔살당했다. 3월 내내 인간사냥이 이루어졌다고. 이 와중에도 강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호송대 자체의 피해도 막대했으며, 지휘관이였던 기무라 제독 또한 중상을 입었다. 이 공습으로 연합군은 폭격기 2대, 전투기 4대를 손실했다.[6] 이로 인해 일본군의 뉴기니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키스카 섬 철수 작전의 기적을 이뤄 낸 명장이 된 기무라 제독은 그의 공적을 시기하고 무시하던 해군 장교들에게 꼬투리를 잡혀 선단 호위 임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찍히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물론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기무라 제독은 무능력은 커녕 지극히 정상적인 능력있는 지휘관이었고, 이런 사람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을 정도의 사지로 장병들을 내몰은 일본 육해군 수뇌부야 말로 비정상적이자 무능력의 절정에 다다른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의 비극으로 불린다. 70년대 나온 태평양 전쟁 및 구일본군의 해전사와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한 일본어 서적이 해적판으로 나왔을때 이러한 해적판들에서 단피루(변이음 반영에 따라서는 담삐루)[7] 해전이나 단피루 비극이라는 용어가 대부분 이 사건, 만화 지팡구에서도 언급이 된다.
이 전투가 일본 해군과 연합함대에 준 여파는 매우 컸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뉴기니 전선이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안그래도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로 인해 뉴기니 방면의 방어가 시급해진 상황이었다. 결국 야마모토는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항모 함재기들까지 지상기지로 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이호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초라한 전과만 거두고 항공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했다.(1943년 4월 7일~14일) 하지만, 야마모토에게 올라온 전과는 이런저런 이유로 터무니 없이 과장되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일선 항공기지인 부겐빌 섬의 부인기지로 시찰을 나갔다가 암호 해독을 통해 그의 이동을 파악한 미군이 출격시킨 전투기 기습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만다.(1943년 4월 18일)
2 외부 링크
Battle of the Bismarck Sea- ↑ 이 와중에, 일본군 선단은 저공으로 돌입하는 보파이터 폭격기들을 외형히 흡사한 뷰포트 뇌격기로 오인했다. 물론 이 전투에 앞서 뷰포트 뇌격기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군 선단은 어뢰공격에 노출면을 감소시키기 위해 보파이터들이 진입하는 방향으로 선수를 돌려 세로 대형을 취했다. 그런데 이 또한 연합군의 낚시에 걸린 것이었다. 보파이터 부대는 뇌격으로 착각하라고 일부러 뇌격코스로 진입했던 것. 덕분에 그나마 대열이 흐트러져 효율이 떨어진 대공화력이 더 비효율적인 상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총소사로 일렬로 죽 긁고가기 딱 좋은 표적이 된 것이다.
- ↑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 육군 병력들이 공격해오는 연합군 폭격기들을 향해 소총으로 대항하려다 기총소사에 몰살당하는, 임진왜란 영화 같은 장면도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 ↑ 남서태평양 연합군 항공대를 지휘하던 태평양 지구 미 육군 제5항공군 사령관인 육군 중장 조지 C. 케니 장군은, 그의 메모에서, 이날의 일본군의 보복 공습에 대해 기록하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짓'(원문은 '마구간의 말을 도둑맞은 다음에 after the horse had been stolen from the barn'이다)이라 말하며, "일본군 항공 사령관이 바보라는 게 정말 다행이다. (공습에 동원된) 저 백대의 비행기들이 지난 3일, 수송선단의 머리 위에서 벌어진 대 전투에 투입되었다면, 우리의 임무는 무척 힘들어졌을 텐데 말이다"라고 비웃었다. 다만 일본군은 선단호위에 가용 전투기 전력을 모두 투입하였고, 4일의 편대는 폭격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단호위에 투입됐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므로 가용한 항공전력이 있음에도 수송선단이 궤멸해버리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연합군 비행장을 공격한 것을 비웃는 뜻 정도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에 반해, 연합군은 바로 3월 3일 전투 당일에, 일본군의 항공엄호를 약화시키기 위해 20여기의 A-20 하복 폭격기를 동원해 라에의 일본군 비행기지를 공격했었기 때문이다.
- ↑ 서유럽 한정. 독소전쟁에서는 독일과 소련 양쪽 다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이쪽은 무사히 탈출하더라도 포로로 잡히면 사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도 비교적 잘 지켜지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건 아니어서 격추된 B-17 승무원들을 잡아서 죽인 사례도 있다.
- ↑ 2일- 252공 이치히라 비장 행방불명, 252공 노다 이비조 불시착후 구조, 3일- 즈이호 비행대 단죠 상비조 피격추 전사, 즈이호 비행대 마키 비장 Moore중위의 B-17과 충돌 전사, 204공 야토 비장 불시착후 구조, 204공 니시야마 이비조 행방불명, 영어권 위키 비스마르크해 해전에 있는 Fortress Rabaul: The Battle for the Southwest Pacific, January 1942 – April 1943 페이지313 출처의 실제 손실은 손실 7기 손상 3기
- ↑ 3일- 43rd BS B-17 Moore 중위 마키기와의 충돌과 탈출에 성공한 승무원은 기총소사로 전원 전사, 90th BS B-25 파일럿 불명 착륙 중 추락, 39th FS P-38F Faurot 중위 행방불명, 39th FS P-38F Eason 중위 행방불명, 39th FS P-38F Shifflet Jr. 중위 행방불명, No.30 SQ Beaufighter Jones 중위 불시착 구조
- ↑ 비슷한 오역으로는 <담피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있다. 항목 참조. 심지어 이 캐릭터는 영미권에서도 오역된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