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1세

프로이센의 역대 국왕/독일 제국의 역대 황제
(초임)빌헬름 1세프리드리히 3세

220px-Wilhelm1.jpg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1 개요

2 즉위 전

179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왕국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 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이후 평생을 무인으로 보내다가 두살 위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혁명 때는 강경진압을(대포로 진압을 명령) 주장해서 '총알왕자(포도탄 대공)'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진압을 부르짖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눈여겨보게 된다.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성향을 띄었고 왕실이나 군부의 뜻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 혁명군에 굴복하게 되자 군부와 귀족의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세제 빌헬름왕자에 주목하게 된다.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이후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내 주도권에 굴복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기간을 보냈고 결국 60세가 되는 해(1857)에 정신병이 발작해서 빌헬름 왕자는 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1861년 왕위에 올랐다.

3 통치

즉위하자마자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 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1] 퇴위를 불사하며 평소 눈여겨 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이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보면 의회는 그저 세금을 내는 부르주아들의 푸념이나 들어주는 역할에 불과하고 왕권과 군대는 불가침의 영역이었고, 아랫것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왕 못 해먹겠다. 몽니를 부린것... 사실 이정도로 왕이 강하게 나가니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도 더 이상 충돌을 원치 않기도 했다. 문제는 비스마르크는 이정도에서 만족 할 사람이 아니었던것...

시도 때도 없이 "왕 노릇 못해먹겠다." 드립치는건 체통상 여러번 쓸 수도 없고 정치력이 필요한 현실 정치에서 무인 출신 국왕이 노련한 신하들을 상대하긴 어렵다 보고 프로이센 왕실과 군주제의 충실한 신하를 자청하는 비스마르크를 임명하게 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피와 쇠 연설 뿐만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쨌건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다만 대외 정책에선 빌헬름 1세와 다른 구상을 하는데 1862년 덴마크 위기때는 독일연방 의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덴마크를 털었는데, 이는 민족주의란 아랫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는 빌헬름 1세의 지론과 다른 것이었다. 빌헬름은 18세기 태생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데다가 평생 군인으로 살았기 아랫것들이 입헌이니니 자유니 뭐니 하는 정치사상 자체를 가지는 것을 금기시 했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신이 통치자에 수여한것(왕권신수설) 이요 왕은 신에게 수여받은 왕권으로 통치하고 신민은 복종해야 한다.. 정도가 전부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독일내 주도권을 가지고 갈등이 빚어지자 프로이센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나 해야된다는 지론덕에 비스마르크가 너무 막 나가는걸 자제시켰으나, 역시 또 현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까지의 공격하고, 영토할양을 꼭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밥통 싸들고 반대하자 뜻을 꺾는다. 이 결과 북독일연방을 조직하였으며, 이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1868년부터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각해져서 역시 전쟁엔 소극적이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나폴레옹 3세를 관광, 결국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그의 관심사는 황제드립이나 독일 민족 통일 따위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프로이센과 왕권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독일내 복수 주도권(Dual power)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지 오스트리아를 아예 배제하려는것은 그의 구상과 거리가 멀었다.. 폭도떼의 나라(?) 프랑스를 쳐바른건 그도 원하던 바였으나, 황제 자리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2]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잘 먹히지도 않아서 비스마르크가 뒷공작으로 독일 제후중 최연장자인 바덴대공이 직접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한데다가 30여개 군주국 군주들이 직접 와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 추대에 화답한것...

취임식 아침 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 제국 황제 자리는 타국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연대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자신의 관심사는 프로이센, 프로이센 뿐이며 독일 황제드립으로 프로이센이 없어지는것이나 다름없다고 매우 아쉬워 했다.
이 처럼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것은 아니며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크게 간섭하진 않았다고.비스마르크는 절대왕정을 신봉했는데도 비스마르크와의 관계는 때때로 경직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왕에게 위협(…)까지 했으나 몇몇 경우에서는 왕의 의견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3]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비스마르크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준것.

4 기타

33세 때 14살 연하인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4] 결혼이 늦은건 자신의 육촌 폴란드 귀족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망해서 나라가 없어졌다...

무려 90세 나이로 죽었다(…).한 보름 더 살았더라면 91세 채우는데 이는 서구의 군주 가운데 소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살은 것이며[5], 근대 이후 군주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것이다. 하지만 늦게 즉위하여 리베위키의 실제로 장수한 왕들에는 오랫동안 없었다. 소국을 제외하고는 엘리자베스 2세(89세)가 그 다음이고, 기록 깨지려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란츠 요제프 1세(87세)가 3등이다. 다만 재위기간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만 68년으로 캐바르기 때문에 괜찮다.[6] 다시 말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에 태어나서 130년 전에 죽은 사람이다(...)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도 88세까지 열심히 추격 하다가 2016년 10월 13일에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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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증손자까지 봤다! ㄷㄷㄷ 다시금 말하지만 언제 인물이냐면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인물이다. 삼촌과 그 조카와 모두 맞서 싸웠을 정도니... 프랑스의 전성기와 몰락 그리고 신흥 강국인 독일의 부상이라는 산업혁명과 궤를 같이 한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순환을 모두 살아서 목격한, 말 그대로 역사의 산 증인이다! 98세까지 장수한 고구려장수왕을 연상케 하는 수준.

후임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들 프리드리히 3세였으나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죽고(아버지가 워낙 늙어서 그렇지 이미 57세였으니 요절은 아니다. 흠좀무) 손자 빌헬름 2세가 29세의 나이로 뒤를 잇는다.

손자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까라서 독일 통일을 빌헬름 1세의 업적이라며 전국 각지에 동상을 세우고 대제(大帝,Der Große) 칭호로 높혔으나, 독일인들은 다 누구의 공적인지 잘 알고 있어서 별로 쓰지 않았다. 프로이센 군주중에 진짜 Der Große(大) 칭호를 인정 받은건 대선제후(大選帝侯)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대왕 뿐이다.
  1. 사실 징병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군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 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된다는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
  2. 애초에 서양에는 황제=천자라는 개념도 없고, 동양식 황제드립도 없다...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조차도 1848년 혁명세력이 바친 독일 황제관은 '돼지들의 관'이라며 거부했고 프랑스 오를레앙가문의 '시민의 왕'은 폭도떼들이 수여한 수치스러운 직위라 경멸했으니 나폴레옹의 황제드립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겠나 설명이 필요한지(?).. 이 시대 높은분들에게는 절대권력을 긍정하는 토머스 홉스 조차도 불순사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아래사람이 '위임'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왕권신수설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3.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소리.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다. 그리고 결과는... 이 외에도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 못하는 과대평가된 나라라고 지적했는데 이 점은 1차대전에서입증되었다.
  4.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첫) 배우자와의 나이차이가 가장 많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마지막 부인과 28살 차이였지만 이건 3번째 결혼이라... 참고로 아들 프리드리히 3세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는 10살 차이였고, 손자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는 1살(연상연하 커플) 차이.
  5. 필리프 에른스트라고, 호엔로에-발덴부르크-쉴링스퓌어스트의 제후가 96세까지 산 경우가 유일한 예외다
  6. 살아있는 전설 엘리자베스 2세는 2015년 2월 현재 재위 만 63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