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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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역사
군인 황제 시대4두정치콘스탄티누스 왕조

1 개요

로마제국의 정치체제. 사두정치4두정치와 반댓말이 아니다., 테트라키아[1]라고도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인 284~305년 중 293~305년까지 12년 간 계속된 1차 4두정치와, 305~307, 308~311년까지 짧게 이어진 2차 4두정치로 나뉜다.

기본적으로는 3세기의 위기부터 혼란상황에서 능동적으로 2개 이상의 전장에서 활약하기 위해 자주 운용되던 공동황제제도를 정식 제도로 체계화한 것이다.

2 종류

2.1 1차 4두정치

1차 4두정치 동안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독자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으며, 로마제국을 전제군주국 비슷하게 개조하고 네 명의 황제가 담당구역을 나눠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항해 국방을 유지하도록 했다. 따라서 1차 사두정치는 이름만 '4두'정치이지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의 단독으로 통치하고 다른 황제들을 지도했다. 역사상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대탄압'도 1차 4두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다. 1차 4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 역사상 최초로 자의에 따른 퇴위로 305년 끝나고, 각각 서방 부제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동방 부제인 갈레리우스가 서방 정제와 동방 정제로 즉위하면서 2차 사두정치 시기로 접어든다.

2.2 2차 4두정치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고 시작된 2차 4두정치는 시작되자마자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병사하면서 어긋나기 시작, 퇴위한 선제 막시미아누스가 복위하고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에 대항해 싸워 내전이 일어나는 등 엉망이 되었다. 물론 308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재로 인해 다시금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고 새로운 서방 정제로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가 오르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방 부제, 갈렐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 부제로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듯 보였다. 물론 여전히 막센티우스는 건재한 상황이었고, 막시미아누스도 310년 아들과 따로 행동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4두정치의 골격은 유지가 되었다. 하지만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죽자 상황은 급변한다. 비어 있는 동방 정제 자리를 리키니우스가 차지하려고 하자 여기에 갈렐리우스의 조카이자 동방 부제로 동방의 제위 계승 1순위였던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반기를 든 것이었다.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혼인동맹을 맺고 곧바로 막시미누스와 전투를 펼쳤고 결국 승리를 거두어서 동방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결국 4두정치는 313년을 기점으로 양두정치가 되어버렸고, 이후 315년부터 324년까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내전이 펼쳐졌고 여기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고 유일한 황제로 남음에 따라 제국은 다시금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3 구조

4두 정치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 황제는 정제와 부제로 나누어지며, 정제는 부제보다 높고, 부제를 원칙적으로 지휘통솔할 수 있다.
  • 전체 구성은 정제 2명, 부제 2명이며, 제국 전체를 4분해서 서방 정제, 서방 부제, 동방 정제, 동방 부제로 나눈다. 다만 제국을 정식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담당 구역을 지정하는 것이다.
  • 황제는 일정 기간동안 통치한 다음에 정제들은 은퇴하고, 부제가 정제 자리로 승격되며, 새로운 부제를 임명한다. 단, 여기서 일정 기간은 딱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정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적절한... 기간이다.
  • 각 황제들은 자신이 담당한 구역내의 군사적 지휘권을 가지며, 해당 방면의 방어를 책임진다. 대규모 전면전 같은 사태가 나면 황제들간에 회의를 거치는 등의 과정을 통해 다른 황제의 군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 1차 4두정치에 한해서, 동방 정제가 가장 우월하며, 군사적 측면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 대한 전체 권리를 가진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대규모 전면전을 위해 다른 황제와 군대를 동원하거나, 황제임명권등을 가진다.

4 장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두정치를 만든 이유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방어의 효율성 증가. 황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 내란의 조기진압. 네명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조기에 진압한다. 종합하자면 내란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며, 내란이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되어서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다.
  •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5 문제점

그러나 4두정치가 존속력이 강하지 못하고 대규모 내전으로 끝난 이유는 아래와 같다.

  • 황제가 여러명이다. 즉 국가에 최고 지도자가 여러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곧 단일황제로 통합되기까지 내전이 발생하거나, 각자 국가를 찢어서 나누어 가지는 분할상태가 돼버린다.
  • 1차 4두정치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 원래부터 단독황제고 모든 권력을 가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유능한 장수와 동료를 골라서 황제로 임명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군사력만 대여형식으로 배분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유지가 가능하다. 즉 1차 4두정치는 말만 4두일 뿐, 실제로는 황제 한명과 3인의 부하다. 하지만 이건 1차 4두정치때만 가능한 이야기므로 2차때에 이르면 혼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 실력 위주로 황제를 선발하다보니 사람들이 보통 인정하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중요한 왕위계승권이 있는 황제의 아들을 제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장 내란의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제위에 오르지 못한 황제의 아들이라는 점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온다.
사실 오현제 시대에서도 다들 아들이나 손자가 없었기에 양자로 다른 유능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으며, 최후의 오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부자상속이 이루어져서 콤모두스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6 영향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이후의 황제들도 공동황제제도를 활용하긴 했으나, 그 대상을 황제의 자식이나 황제의 형제등 친족으로 한정했으며, 일시적인 제도로 유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서로 내전이 발생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서 항구적인 제도로 존속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두정치는 향후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동서 분열의 시초가 되었으며, 제국의 행정적, 경제적 중심지가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소아시아권으로 완전히 옮겨지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 테트라(tetra-)는 그리스어로 4를 뜻하는 접두사이기도 하다. 4차연산 이라는 뜻의 테트레이션이 그 예이며, 테트리스도 4개의 블록을 맞추는 퍼즐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