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 ||||
세베루스 왕조 | ← | 군인 황제 시대 | → | 4두정치 |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기.
1 개요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로마 제국 각지의 군대가 자기들 멋대로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한 시대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죽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는 사이의 49년 동안 18명의 황제가 즉위했다. 공동 황제까지 따진다면 20여명은 가뿐히 넘어가며 황제들 중 전염병에 걸려 죽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노령으로 죽은 타키투스 두 황제를 제외하면 죄다 전사, 자살, 암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평균 재위 기간이 2년도 안될 정도였다. 이 시대에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5년 296일, 가장 짧은 황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르디아누스 3세의 각각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되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로 15일 밖에 되지 않는다. 오현제 시대가 끝난 후 점점 삐걱대던 로마 제정의 문제점이 그야말로 폭발한 시기였다.
이 시기가 3세기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3세기의 위기라고도 칭하기도 하며 이 때 로마제국은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 격화와 이로 인한 현저한 국방비 증대, 제국의 인재풀을 이루었던 원로원 계급과 기사 계급의 정치력 저하, 정국 불안과 치안 악화, 중과세에 따른 국내 상업의 쇠퇴, 기독교 세력의 급속한 대두라는 위기를 겪게 된다. 단, 3세기가 위기의 시기긴 했어도 제국 경제에 대한 혼란상은 상당히 깎아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중론. 게르만족 사회가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전에 비하면 꽤 발전헀어도 제국에 비해선 여전히 후진적이었고, 이 당시의 게르만족들은 정규 로마군이 되는 걸 인생에서의 대단한 기회로 생각했을 정도로 생활 환경도 제국 안이 밖보다는 훨씬 나았다.
2 상세
워낙에 내전이 잦았던 시대고 이후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제국 경제의 순환 상태에 대단한 장애를 주었고, 이것이 다시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곤 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3세기의 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독한 정국 불안정을 꼽지만, 사실 이는 그녀가 그렇게도 애찬하는 원수정 체제 자체[1]에 내재한 모순이었다.
3세기의 위기가 반 세기나 이어진 현상이 된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의 대두를 꼽는 것도 아주 낡은 18~19세기 학설에 불과하며, 이런 단순한 분석은 20세기 중반 넘어 이미 학계에서는 타파된 방법론이다.[2] 그렇다면 3세기의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점점 로마 사회를 본받아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쌓아가고 있던 야만족 사회의 성장과, 로마 제국 체제 자체의 한계 수익성 악화 이 둘로 압축된다. 더 요약하자면 외부 상황은 변화하며 가혹해지는데 그에 대처하는 내부 역량은 약화된 상태로, 이 두 가지 문제점에 대응하는 것이 당대 로마 사회의 최대 과제였다.
사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로마에서 내전은 수십 년 주기로 자주 일어났었고, 군인 황제 시대 이전에도 병사들이 전선을 시찰나온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하극상을 일으켜 죽여버린다든가, 근위대가 황제를 암살한다든가 하는 등 이미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애당초 황제라는 지위는 호민관 권한을 쥔 제1권력자 정도여서 군대가 자신들이 따르는 장군을 황제로 지지하고 원로원의 승인만 얻어낸다면 쉽게 황제가 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상황이 매우 안좋았던 시기로 밖으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의 침공이 점점 거세어지는 데다 군단병들은 오래 정착하면서 현지인과 혼인하는 등 기강이 땅 아래로 떨어졌고 경제적으로도 은화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대농장을 돌릴 노예의 공급이 멈추게 된다.[3][4]
그 시기에 그런 단점이 크게 돌출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완 전혀 무관한 극히 우연적인 몇 가지 요소가 원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킨 대가로, 후기 로마 제국이 그전 로마 제국의 유연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실상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그녀가 말하는 유연성이란 체계적인 관료 제도 운영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무질서한 황위 계승 방식을 고집하면서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은 그만두란 얘긴데, 사실 3세기의 위기는 그런 게 미비했던 내부 상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응을 못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전통에 대한 이상한 강박적인 집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대응을 늦춰서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가며, 로마인들도 슬슬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여러 대응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4세기의 경제 회복과 체제 안정화. 로마 제국이 3세기에 이런 과제들을 그저 손놓고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며, 그 해결책들을 종합해서 본격적인 체제 수술에 들어간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지만 그런 작업들도 3세기의 황제들이 이미 한 여러 조치들의 선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게다가 테트라키아 이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의 체제변화로 인해 제국 동부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무려 11세기를 더 존속할 수 있었다. 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150년만에 제국 서부는 멸망해버렸지만.
결국 이 50년에 육박하는 군인 황제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제 제도를 두어 질서를 되찾는 듯 하면서 끝나는 듯 싶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위가 끝난 후 다시 황제들끼리 내전이 일어난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누르면서 로마의 혼돈은 잠시 진정된다. 이후 로마의 황제는 전제 군주로 바뀌어가고 제국 내에는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지만, 이후로도 로마의 황제 암살이나 군부의 황제 교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군인황제 시대의 등장은 로마의 행정체계가 전 세계가 로마로 대동단결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서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장 황제가 어딘가로 간다하면, 바로 황제가 떠난 자리에서 "황제 내놔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하고 난리가 나는 판이었다! 로마제국은 더이상 로마인과 로마화되어가는 야만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100% 로마화된, 로마로 대동단결한 하나된 로마인들의 나라였고, 게르만이니 뭐니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판에 이른 상태로, 그야말로 제대로된 세계 보편제국에 이른 상태였으나, 로마의 행정은 이런 보편제국 개념에 도저히 따라가지를 못했다. 이 문제는 오현제 시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이미 다키아 원정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대원정에서 전 지중해 세계가 다키아로 해딩하러가는 (...) 장관을 연출한 시점에서 이미 로마가 더 이상 과거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없는, 세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세계정부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음을 보인바가 있었고, 원수정의 매우 큰 문제인 너무 쉬운 황제 옹립과 행정체계의 부실로 인한 각 속주들의 "황제의 관심 요구"가 겹처진 결과, 사방 팔방에서 황제가 튀어나오게 되는 막장 사태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3 해당 시기의 로마황제
3세기 가운데 235~284년 집권한 황제들의 대체적 연표와 중요한 이정표적 업적을 나열한다. 악행이나 실수는 워낙 다루는 곳이 많아서, 해당 황제의 목록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군인 황제'들도 생각보다 역량이 뛰어난 편으로,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자는 적다. 다만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거나 하는 식이 많아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제거당한 경우가 많다. 이는 그 전 시기와 그 후 시기를 살펴봐도 드문 일이다.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5~238, 암살)
- 3년동안 라인강 유역의 야만족을 토벌.
- 막시미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황제들. 3세기의 위기중 첫번째 위기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혼란했다.
-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 암살)
- 필리푸스 아라부스(244~249, 자살)
- 로마제국 천년제를 주최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
- 데키우스(249~251, 전사)
- 발칸반도로 침입한 야만족을 막다가 전사. 최초로 전사한 로마황제다.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251~253, 암살)
- 3세기의 위기 중 가장 큰 위기. 발레리아누스는 최초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였다. 이 때문에 사실상 로마제국이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3분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마군의 대대적인 전술 교리 개편이 바로 이들 부자에 의해 이뤄졌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268~270, 병사)
- 야만족을 막고 어느 정도 로마 제국의 교통정리를 했다.
-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암살)
- 로마시의 성벽 건설. 삼분된 제국을 재통합했다. 개인비서의 개인적 이유로 인한 암살행위로 인해 죽었으므로 수개월동안 차기 로마황제가 결정되지 않았다.
- 타키투스(275~276, 병사)
- 황제로 지명되었을 때 나이가 일흔 다섯이었다. 개인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국고에 돌리고, 목욕탕을 짓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 페르시아 전선으로 이동 중 병사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는 같은 씨족명을 쓰고 있긴 하지만, 후손일 가능성은 낮다. 이와 별개로 타키투스의 저작을 널리 퍼뜨려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게 하긴 했다.
- 프로부스(276~282, 암살)
- 군사, 정치를 잘 수행했으나, 이미 전투에만 익숙한 병력들에게 토목공사와 농사를 가르쳐서 농민화를 추진하려던 계획이 병력들에게 지지를 못얻은 것이 한계다.
- 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동부 국경에서의 시간을 벌었다.
- 카리누스(282~284, 암살)
-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이어짐.
- ↑ 시오노 나나미는 제정이 정확한 용어가 아니며 그저 원수정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전제정과 전제정에서의 여러 체제 개혁책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이유는 학계에서는 원수정이라 칭하는 시대에 시오노 나나미가 극도로 애호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데 있다.
- ↑ 시오노 나나미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유물론적 그리고 사회과학적 해석을 도외시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공학적 면을 강조하지만 그건 자기가 맘에 드는 부분에 한하며, 이점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 ↑ 로마 말기에는 그래서 노예로 운영되던 라티푼디움이 부자유 소작농. 즉 농노로 운영되는 콜로나투스로 바뀌게 된다. 기존의 노예도 일부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는 거의 다 해방시켜 소작농으로 전환했고.
- ↑ 참고로 이들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 참정권 등을 인정받지 못한 대신 병역도 어지간해서는 부과되지 않는 등(실제로 전쟁의 대부분은 기사와 용병에 의해 치러진다) 스파르타의 노예 계급인 헬로트(헤일로타이)와 유사한 측면이 꽤 많다. 다만 헬로트와 달리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생명권 등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차이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