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계승의 법칙

1 개요

군주가 죽거나 퇴위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물려줄 때 계승 순서를 정하는 규칙. 역사적으로 볼 때 왕위 계승 제1순위는 보통 군주의 장남이며 형제상속시는 바로 밑의 남동생이 해당된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왕세자, 황태자, 황태제 같은 특별한 호칭을 받는다.

보통 가장 큰 문제는 군주가 아들이 없을 경우인데, 여기서 각 문화권이나 나라별로 다양한 계승 법칙이 존재한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1]

귀족도 작위와 영지를 상속할 때 왕과 비슷한 문제를 겪기 때문에 이 항목은 귀족 작위의 계승법까지 포괄한다[2].

2 왕위 계승 법칙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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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주국들의 왕위 계승 방식. 녹색은 절대적 맏이 상속법, 검은색(리히텐슈타인)은 살리카 법(=남계친 상속법). 짙은 갈색(모나코)는 아들 우선 상속법, 옅은 갈색(스페인)은 아들 우선 상속법이지만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개정할 예정이다. 파란색은 선거/임명을 통한 선출.

2.1 주요 방식

다음은 동서양에서 왕위가 계승된 주요 원칙들이다. 원칙이라지만 각 왕조의 시대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전엔 A방식이었는데 후대엔 B방식이 성립되었다거나 하는 식. 그리고 각종 현실적인 제약으로 여러 가지 부차적인 방법들이 개발되고 예외가 성립했다.

2.1.1 살리카 방식

남계친 상속법(Agnatic primogeniture)이라고도 한다. 모계의 왕위 계승을 아예 배제하는 법칙. 여성의 왕위 계승은 인정하기도 하고(예를 들어 일본) 안 하기도 한다(프랑스). 유럽은 원래 왕의 아들의 후손이든 의 후손이든 남자이기만 하면 왕위 계승권이 있었으나 백년전쟁 때 딸의 후손, 즉 외손자 같은 경우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그런 거 없이 몇몇 여성 군주가 즉위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무조건 남계 후손만(유전적으로 Y염색체가 동일해야) 인정했다.

살리카 법의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동일한 위치이면 나이가 많은 쪽이 우선이고 만약 어떤 계승권자가 이미 사망했는데 남계 후손이 존재하면 대습상속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나이가 너무 적으면 그 다음 순서로 넘어갔지만 서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상태의 남자아이도 무조건 대습상속을 인정했다.

  • 군주의 아들과 그들의 남계 후손(손자, 증손자…)
  • 군주의 남동생과 그들의 남계 후손(조카, 종손(형제의 손자)…)
  • 군주의 삼촌과 그들의 남계 후손(사촌, 당질…)
  • 그 밑으로는 촌수 계산을 통해 남계 후손에게 계승권을 준다.

살리카 법이 동아시아권 왕조의 부자상속과 가장 큰 차이점은 직계 남자 후손의 계승권이 소멸할 때의 계승권을 누구에게 주냐는 점이다. 살리카 법은 방계 왕족이나 통혼을 맺은 다른 왕국의 왕에게도 왕위 상속권을 준다.[3]

서양에서 이런 식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은 봉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단순히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왕위가 계승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 제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리카 법제하에선 각종 결혼이나 세습에 따라 영토가 같이 따라갔고, 살리카 법에 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 지도의 영토 구분이 막장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계승 방식은 영토 분쟁과 직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특정 국가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면 다른 나라의 왕이나 여러 대귀족에게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발생하는데, 각 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곤 했다. 이 때문에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백년전쟁장미전쟁이다.

반면 직계 후손이 단절되었더라도 가끔 엄청나게 먼 촌수에서 계승권자가 나와 왕국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이런 계승법에 의한 결혼상속이 연달아 이루어지면 소국들이 모여 순식간에 대국이 형성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오스트리아다. 프랑스에서도 나바르앙리 4세가 부계로는 22촌이 됨에도 왕국을 이어받아 부르봉 왕조의 기원이 되었고,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영국에선 전혀 생뚱맞은 독일인들이 왕위를 계승해 하노버 왕조가 창건되어 왕국의 명맥을 이었다.

2.1.1.1 준 살리카 방식(Semi-Salic law)

살리카 법에서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을 때 서양에서 사용하는 왕위 계승 법칙이다. 살리카 법 체계에서는 계승자가 아예 없으므로 군주의 딸을 제1 왕위 계승권자로 삼는 법칙이다. 여성 계승권자가 1회에 한해서 대타로 뛰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계승은 도로 살리카 법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모계로 왕위가 이어지기 때문에 여성이 왕이 된 이후에는 부군의 성을 따라 왕가의 성이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다.

준 살리카 법의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살리카 법에 따른 계승자 후보들
  • 군주의 과 그 남계 후손
  • 군주의 남동생이 낳은 조카딸과 그 남계 후손
  • 군주의 여동생이 낳은 조카와 그 남계 후손
  • 그 이후로는 촌수 계산을 통해 가장 가까운 여자 친척과 그 남계 후손에게 계승권을 준다.

2011년까지는 룩셈부르크가 이 방법을 채택했었으나 절대장자상속법으로 갈아탔다. 준 살리카 법 자체가 살리카 법에서 남성 후계자가 단절되었을 때 사용하는 대타로 만든 법칙이어서 흔하지 않은 사례이고 현대의 왕실들은 어차피 남녀평등이 확산된 시대라 절대장자상속법으로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

준 살리카 법으로 즉위한 왕은 부르봉 왕조펠리페 5세, 합스부르크 왕조마리아 테레지아, 로마노프 왕조옐리자베타 여제표트르 3세 등이 있다. 유럽에서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가문은 모두 준 살리카 법을 한 차례씩 거쳤다. 준 살리카 법을 고안한 이유는 왕들이 딸바보라서 순수한 살리카 법에 따라 왕위 계승을 하면 다른 나라 왕이 우리 나라 왕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같이 이 문제가 실제 왕위 계승 전쟁으로 확대된 사례도 있다.

2.1.1.2 현대화된 살리카 방식

일단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간다거나 왕의 가장 가까운 혈족에게 왕위가 이어진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왕위 계승에 따라 영토가 변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입헌군주제와 근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더 이상 영토는 국왕 개인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재위중인 유럽 왕실 가운데 살리카 방식을 따르는 왕가는 리히텐슈타인밖에 안 남았다.

각국이 영토와 왕위 계승을 명확히 구분하여 헌법화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의 황태자가 스웨덴 공주와 결혼해서 그 손자가 통합 일본-스웨덴 왕국을 만들 가능성은 0%다. 거기다 근대에 들어서면 외국의 왕위 계승자와 결혼하는 왕족은 상당수가 관습적으로, 또는 법적으로 자국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 예를 들어 1964년 당시 덴마크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던 안네마리 공주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 결혼하면서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결국 그 길고 긴 세월을 거쳐 동아시아의 부자상속제나 마찬가지가 된 셈(…). 이 부분은 배타적 영토 개념이 비교적 일찍 확립된 동아시아에 비해 봉건제 유럽의 영토 개념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적이었다는 데서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혀 다른 나라의 귀족, 또는 다른 나라 왕을 데려다 자국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 인정받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고, 국민국가 개념이 완성된 후에는 유럽에서도 예전처럼 영토가 결혼 한 방에 왔다 갔다 할 수 없게 된 것이 당연하다.

2.1.2 부자상속(적장자상속)

중국 왕조의 왕위 계승 방식이다. 주나라 때 정한 종법 체제를 받아들였다. 왕실뿐 아니라 귀족과 사대부까지 영향을 주었고 기본적 골격은 동아시아의 각국 왕조들에도 전파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지배층을 넘어 일반 백성들의 상속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내용은 단순명료하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손자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계승 방식의 이념은 유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항렬로 따라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들, 아들에서 손자로 넘어가는데, 항렬로 계승되는 '종법' 체제에 바탕을 둔 것이지, 연장자를 우대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 이하의 지손(서손)은 승계에서 배제된다. 또한 혈통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서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여 적자로 삼으면 동생이나 조카, 또는 서자보다 우선한다. 물론 적자가 없을 경우 같은 항렬의 친척에서 본인이나 조상과 가까운 혈통을 들이는 게 원칙이긴 하다. 보통 조카뻘 되는 친척을 영입하지만 남송의 고종이나 위나라 조예처럼 먼 친척에서 들여온 경우도 있긴 하다. 윗항렬에서 아랫항렬로 내려가면서 '부자관계'로 상속한다고 보면 된다.

또한 부계 계승되는 가문을 중시한다는 점이 부자상속제의 큰 특징 중 하나. 직계 자손이 단절되었을 경우 '가까운 친척'에게 계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가문 내에서' 양자를 들여 계승자로 삼는다. 즉, 왕조 창시자로부터 부계로 내려오는 자손 중에서만 계승자를 구한다. 외손자가 있더라도 부계가 다른 이상 계승자가 될 수는 없고 차라리 사촌, 육촌, 팔촌급으로 먼 친족을 입양한다는 것. 또한 적장자가 있으면 넘사벽급 정통성을 가지지만, 없다 해도 친족 중 누군가를 '입양'하는 방법으로 명분을 세우기 때문에 오히려 탄력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계승의 정당성이 입적 과정에서 생긴다면 왕족 집단 중에서 능력이 출중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입양할 수 있는 것. 이에 따라 계승 과정에서 종실, 또는 왕실의 발언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서양과 달리 왕위 계승권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관계는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천륜이라서 서양식 권리-의무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칙상 물려주는 입장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없고 물려받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홍무제-건문제-영락제 관계처럼 능력치 높은 넷째 아들보다 물러터진 맏아들에 어린 손자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고, 만력제 당시 '쟁국본'이라 하여 맏아들한테 황태자 책봉을 미루는 병림픽을 20년 동안 했어도 결국엔 천하의 만력제가 물러섰다. 절대황권을 자랑했던 명나라가 이 정도였다.

원칙은 첫 번째 입적(立嫡: 적자 우선), 입장(立長: 장자 우선), 입선(立善: 성품이나 능력)으로, 적자 중에서 장자가 물려받아야 하고, 적자가 없으면 서자 중 장자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병이 있거나 불효자거나 기타 계승하기 어려운 사유가 있을 때에만 세 번째 순서가 적용된다. 만약 이 원칙을 어긴다면 절대권력을 휘두른 명의 홍무제, 만력제도 신하들 까임을 견디기 어려웠고, 위에 형이 있었던 광해군은 능력을 인정받았어도 세자 자리가 위태로웠다. 명나라에서도 임해군이 개막장인 걸 알았어도 본국의 사정 때문에 '나라가 위급할 땐 예외다'라는 조선의 주장에도 반대하며 책봉을 반대했고 명나라 장수는 "군자는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는 법" 드립을 치면서 광해군에게 포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명나라에 매달리지 않고 등거리 외교를?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조선에선 왕으로 등극하지만 명에서는 책봉을 미루었고 광해군은 책봉받기 전에는 '조선국 권서국사'라는 요상한 타이틀로 외교문서를 타이핑해야 했다.[4]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유목민 풍습이 남아있는 이민족 출신 왕조나 정복 왕조, 한족화되었던 왕조에선 혼란기나 왕조 초기에는 적장자 상속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왕조가 지속되면서 안정화되면 다시 부자상속제를 도입한다.

그리고 부자상속제를 완벽하게 개무시한 경우도 있다. 보통 찬탈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세조는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세손으로 책봉받아 날 때부터 사적으론 삼촌-조카이지만 엄연히 군신관계가 성립했지만 유교적 종법으로 패륜에 해당하는 탈적(奪嫡)[5]으로 왕위를 빼앗은 데다 상왕으로 있던 단종을 내치고 죽이기까지 했다. 예법상 후대 왕은 전왕의 '아들'로서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 패륜 합쳐서 트리플 패륜을 저질렀다. 이러니 사대부들한테 두고두고 까이는 등 정통성에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다.[6]

어쨌든 유교를 따르면 따를수록 이 원칙은 절대적이다.[7] 삼국시대의 왕들이 유교와 함께 이 방식을 왕위 계승에 도입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잘 알려져있는 사실이다. 물론 잘 되진 않았다. 그나마 좀 멀쩡한 계보가 신라 왕가의 김씨인데, 내물 이사금 이래, 또 중대(통일신라)의 태종 무열왕(김춘추) 이래 이어지긴 했지만 오래 가진 못 했다. 고구려고국천왕 이래 (정확히는 산상왕 이래) 부자세습이 확립됐지만 그 이전에는 일단 단일계보인지도 부정확하다.

고려는 부자상속제를 도입했으나 조선과 같이 부자상속제가 확고하지 않았다. 왕조 초기부터 형제상속이 밥 먹듯이 이어졌고 현종처럼 사생아 군주라는 꽤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 이쪽은 근친혼까지 합쳐서 좋은 막장 드라마 소재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외척의 발호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근친혼 관계에서 탄생한 왕자를 왕위 계승 순위 1위로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종도 강조가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서야 제대로 즉위한 것을 볼 때 고려의 왕위 계승이 그때까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왕위 계승이 부자상속으로 확고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에 복속된 이후.

그래서 이 방식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확립된 것은 가장 유교 원칙에 충실했던 조선시대. 태종, 세종대왕 세조인조를 제외하고 전부 이 원칙으로 왕위가 계승됐다.[8]

한편 선조, 철종, 고종 등은 선왕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니 부자상속 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선조는 선왕이던 명종에게 적자가 남지 않아 대안으로 자신의 서형제 중 덕흥군 이초의 3남 하성군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승계시켰다.[9] 고종황제도 원래는 철종의 17촌인데 익종(효장세자)의 비였던 신정왕후(조대비)가 그를 양자로 삼아 철종의 양자가 아니라 조카로 뒤를 이었다. 입양 관계 때문에 촌수가 좀 복잡한데, 이렇게 순서가 꼬이는 건 철종이 전임자 헌종보다 항렬이 한 항렬 높았고 고종의 경우 전전임자 헌종과 항렬이 같아서 당시 생존했던 조대비의 남편(익종: 효명세자)와 한 항렬이 아래였기 때문이다. 철종이 왕위 계승할 때도 장유유서라서 삼촌이 조카에게 절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인조 뒤의 효종, 현종, 숙종은 아들을 달랑 하나만 두었고, 영조는 아들 둘 중에 하나는 요절[10]하고 남은 아들은 사도세자뿐인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장성한 아들은 순조 달랑 하나 남긴 데다 순조도 효명세자 1명, 효명세자도 헌종 하나 남기고 요절, 사도세자의 서자와 그 후손들은 역모로 코렁탕 먹는 바람에 직계가 철종밖에 안 남아서[11] 대안이 없었다. 알려진 바대로 철종, 헌종과 혈통과 거리가 있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장조)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리되었다. 남연군은 인평대군(인조의 적3남)의 6대손이었다.

중국에서 잘 나가고 안정적인 나라들은 대체로 이 원칙을 따랐다. 후한은 말기에 어린 나이의 막장 황제들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 원칙을 꿋꿋이 지켜 멸망을 가속화했다(…). 심지어 오대십국시대후주 곽시영은 곽시영의 고모부인 곽위가 황제 즉위 전에 가족들이 대부분 몰살당하는 바람에 처조카인 시영에게 곽씨 성을 주고 양자로 삼아서 명목상의 부자상속을 이어갔다.[12] 또 명은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과 재상의 폐지로 황권이 매우 막강한 상황에서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는데, 자질 미달의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고 견제는 못 하면서 나라는 막장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좀 더 특수하다. 일본에서 부자상속 원칙이 확립된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쇼토쿠 태자 이후, 실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유교가 전파되어 제도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헤이안 시대 이후다. 어쨌든 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중화식의 부자상속제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 무엇보다도 유교 문화에 대한 피상적 이해 때문에 심하게 변형되어 적용되었다. 일단 형식적, 상징적으로는 부자상속 원칙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다만 중국, 한국과는 달리 일본서는 종법 체제는 잘 지켜지지는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헤이안 시대 말기의 '상황 정치' 인세이막부 정치처럼 권위와 실제 정치가 분화했다.

2.1.3 형제상속

군주가 죽으면 그 군주의 아들이 아니라 그 군주의 형제에게 계승권을 주는 법칙. 그 세대의 형제들이 모두 죽어야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유목민족 계열의 왕조가 주로 이 상속제를 선호했다. 몽골, 투르크, 흉노 등이 대표적이다. 한반도에서도 고구려가 초기에는 이런 방식을 선호했다고 추측되며, 고려의 왕위 계승에서도 형제상속의 흔적이 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목민족의 왕조뿐 아니라 고대 중국 역사에도 그 흔적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선 부자상속이 법제화되면서 일찌감치 사라졌다.

부자상속에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삼촌들이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유목민의 형제상속은 법제화된 왕위 계승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런 찬탈과 차이가 있다.

형제상속은 특성상 남성 계승만 인정된다. 하지만 계승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유목민 특유의 집안 맏어른으로서의 어머니의 권위나 형사취수 제도 등의 이유로 왕실의 여성들이 계승권 인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 계승 방식의 장점은 창업주나 왕조를 중건한 1세대 왕의 다음 2세대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왕조 중흥의 국력을 투입해야 할 시기에 어린 자식에게 왕위가 돌아갈 위험성이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2세대 형제들 전체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기에 일종의 가족경영 체제가 되어 국정 운영이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다. 이 체제는 2세대 형제들이 모두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므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2세대 다음의 3세대는 사촌지간인데, 이 3세대들은 혈연의 정이 매우 옅어지고 이전 세대와는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왕자로서의 권리나 봉토가 주어지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다. 게다가 3세대의 사촌형제 중 누가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지 구분하기도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원칙상으로는 큰아버지의 맏아들에게 우선권이 있겠지만 둘째 삼촌이 형제 중 가장 잘난 사람이라 왕조에 대한 공헌이 커서 그의 자식들을 따르는 무리가 가장 많을 수도 있고, 막내 삼촌, 즉, 가장 최근의 왕이었던 자의 아들들이 당연히 현 시점에서 가장 왕권에 근접한 자들이다. 때문에 3세대에선 반드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운이 나쁘면 여기서 국가 멸망, 운이 좋으면 50~100년 이내에(…) 3세대 계승권 분쟁이 끝나고 왕조를 중흥할 새로운 1세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죽고 왕위를 물려받은 2세대들이 죽고 다시 3세대가 왕위를 물려받을 시점이 되면 또 한 번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난다.

명문화된 것은 아니나 고려 문종의 세 아들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 것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선종이 어린 아들 헌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고, 결국 헌종은 선종의 동생인 숙종에게 양위하게 된다.

형제상속은 지금도 현존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인 사우드 가문은 1대 국왕 이후 왕위를 1대 국왕의 아들들이 2015년 현재의 7대 국왕까지 계속 잇고 있으며 왕위 계승자 역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이다. 근대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대부분 살리카나 부자상속 방식을 따르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색적이다. 다만 현 왕세제(왕위에 오른다면 8대)를 마지막으로 1대 국왕의 아들들의 형제상속은 막을 내릴 예정이다. 현 왕세제 다음으로 왕위를 이을 부(副)왕세자는 왕세제의 조카이자 1대 국왕의 손자뻘 항렬이기 때문이다. 손자들 세대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날지 어떨지 두고 보기로 하자

역사적으로 이 계승법을 채택한 경우로는 러시아의 류리크 왕조가 유명하다. 류리크 왕조는 형제상속 + 분할상속으로 왕의 자식들이 영토를 나눠갖고, 다시 형제상속으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영토를 물려받는다는 난잡함의 끝판왕급 상속제를 사용했다. 물론 괜히 이런 짓을 한 건 아니고 류리크 왕조 러시아의 성립 과정 자체가 바이킹 정복자가 러시아 일대의 슬라브족을 정복해 세운 국가이다 보니 정복과 국가 운영 과정에서 지배자의 친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고, 따라서 각자의 지분을 배려해야 했던 것.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연단위로 시나리오를 넘겨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고증이 완벽한 것은 아니고 게임 시스템의 한계도 있지만 어지간한 책보다 직관적이다.) 그나마 당시의 기술 수준이나 러시아 지역의 개발 상태로는 어차피 한 사람이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는 힘들었기에 각 통치 단위를 잘게 쪼개는 것이 유리하기는 했다. 형제가 죽으면 각 형제들이 한 자리 윗형의 영토로 거점을 옮겨야 했기 때문에 독자세력화도 생각보다는 덜한 편이었고. 그리고 류리크 왕조는 형제상속제 특유의 아랫세대 계승 분쟁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각 영토의 지배자들이 사촌 이상으로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그냥 박치기 한 판(…), 이긴 쪽이 먹는다. 그리고 이긴 쪽은 다시 자식들에게 분할상속, 몇 대 또 흐르면 또 박치기 한 판…(…) 이런 식이어도 혈족주의가 강한 분할상속이다 보니 누가 이기건 승자는 여전히 류리크 가문 출신. 만약 다른 가문 출신 지배자가 나오면? 그때는 류리크 왕조 출신의 지배자들이 다구리.

2.1.4 로마 방식

로마 제국(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에서 황위가 계승된 방식. "일단 혈통을 우선적으로 하되 혈통이 가장 최우선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냥 인정받은 자가 황제다.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하고 사실상 이 방식을 따른 나라는 로마 제국 뿐이다. 하지만 이 계승법은 각 서양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다.

이 '인정'이 성립하는 데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며, 종합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보통 인정의 조건은 대체로 혈통이지만, 무조건 혈통만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황제(아우구스투스 또는 임페라토르)가 자기 자식을 부황제(카이사르)로 임명함으로써 차기 계승자로 인정받게 한다. 따라서 자기 자식이 아닌 다른 유력자, 즉, 권력을 공유하는 다른 귀족을 카이사르에 임명함으로써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죽은 황제의 황후가 가장 유력한 귀족과 결혼을 해서 아우구스투스 작위를 물려받게 함으로써 황위를 이어가게 하는 방식으로 계승할 수도 있다. 동로마 중흥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후 조에가 대표적인 사례.

원칙은 법규에 따른다는 것이지만 계승권이 불분명한 상황에선 실제로는 힘센 놈이 짱이어서 그가 황제가 된다. 때문에 조금만 계승이 꼬여도 다른 놈이 현임자의 실정을 운운하면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 대립황제로 추대되는 바람에 내전이 벌어지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런 계승 원칙으로도 안 될 정도로 꼬이면 원로원에서 황제를 옹립하거나 변경 로마군들이 자기들 중에서 황제를 옹립한 뒤 원로원에서 승인을 받는 식으로 황위를 이어나갔다. 후대에 이르면 원로원에 한정짓기 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등 국가 고위층의 승인을 받는 식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로마 황위의 계승이 이런 복잡한 방식이 된 것은 로마 황제라는 자리의 특수성 때문이다. 로마의 황제는 그 시작 단계에서는 군단 지휘관과 호민관 특권을 동시에 가진 하나의 '관직'이었고, 그 관직의 계승은 주로 '이전까지 황제직을 수행하던 자가 차기 계승자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관습적으로 자식에게 계승권을 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혈통 계승처럼 보이지만 법적으로는 딱히 혈통 계승이라고 정해진 바가 없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기 황제들도 혈통 계승이 아닌 양자 계승이었다. 그러니까 살리카 방식이나 동아시아의 부자상속과 달리 로마의 황제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자기 자식이 이어가게 하긴 했지만 혈통에 근거한 것도 아닌, 로마법에 따른 계승이라는 것.

대신 어쨌든 갖다 붙인 법이라도 법적으로 인정만 받으면 황제가 되기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동로마 제국이 1400년대 후반까지 존속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중간중간 혈통이 소멸되고 듣보잡 오랑캐가 황제가 되어도 인정받은 이상 어쨌든 황제는 황제이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을 전후하여 동로마에서도 서유럽식의 왕위 계승 방식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1000년 넘게 이어진 왕위 계승 방식을 봉건제 비슷하게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았다. 콤네누스 왕조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가 이것을 위해 부단히 선전선동과 공작을 시행했는데, 시민들이 이것을 고깝게 봐서 반란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혈통을 우선으로 하되 혈통이 최우선은 아니라는 이 방식은 서구 각 왕국의 왕위 계승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실 살리카 방식이 동아시아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막장 불안정하게 보이는 이유는 이런 로마 방식(법적 정당성)과 게르만이나 켈트의 문화(혈통 승계)과 휘리릭 짬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준 살리카 방식에서 여성의 결혼으로 외부 혈통을 유입해 왕조를 이어가는 방식은 바로 이 로마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아래에서 설명할 신성 로마 제국의 투표 방식도 로마식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워낙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따라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대로 따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래도 굳이 유사한 곳들을 들자면 중세 불가리아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같은 동유럽 왕국들을 들 수 있다. 이들 국가는 동로마 제국의 제도, 문화, 법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이들은 왕위에 올랐을 때 동로마 제국의 승인이나 동로마 교회의 승인을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2.2 부가적인 방식들

2.2.1 아들 우선 상속법(Male-preference cognatic primogeniture)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계승권을 주는 법칙. 아들이라도 서자는 계승이 인정되지 않는다. 기독교 문화권은 일부일처제이므로 서자는 곧 사생아라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서자가 공주에 앞서 계승할 수 있었다.) 국왕의 자녀 가운데 아들이 전혀 없다면, 그때에야 공주에게 계승권이 돌아온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맏이였으나, 당시의 아들 우선 상속법에 따라 남동생 에드워드 7세에 밀려 왕위를 잇지 못했다.

현재 아들 우선 상속법을 채택하는 유럽 국가는 스페인모나코뿐이다.[13] 스페인의 경우 아들 우선 상속법 때문에 알폰소 13세가 태어나자마자 즉위하는 일이 있었다. 부왕인 알폰소 12세의 사망 후 왕위계승자인 누나들이 있었으나 어머니 뱃속에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의 성별을 확인하느라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6개월 간 왕위가 공석이었던 것. 결국 6개월 후 알폰소 13세가 태어나서 누나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은 2015년부터 절대적 맏이 상속법이 적용된다.

동아시아에선 공식적으로는 이 방법을 쓰지는 않았으나 부자상속를 하면서 부수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로 운영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들을 우선하며 태어난 순서도 적용하지만, 끝까지 적자가 태어나지 않아 서자만 남은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적자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적자가 있는데 서자를 우선할 경우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당장 광해군이 이 케이스에 들어간다. 국가에 공적도 세웠고, 왕위를 이어받을 나이가 되었으며, 이미 왕세자로 책봉될 정도로 실력도 검증되었으나, 영창대군이 늦게나마 태어나자 왕세자 지위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2.2.2 절대적 맏이 상속법(Absolute primogeniture)

아들딸 구분 없이 무조건 먼저 태어난 자녀나 형제에게 군주의 계승권을 주는 법칙. 1980년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로 인해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의 맏이인 빅토리아 잉그리드 알리스 데씨리에 공주는 남동생 칼 필립 왕자를 제치고 왕위 계승자(왕세녀)가 될 수 있었다. 영국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세손의 딸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도, 이 법 덕분에 앞으로 남동생이 태어나더라도 왕위 계승 순위가 밀리지 않게 된다.

이 방법이 도입된 이유는 귀천상혼이나 살리카 법 등으로 인해 왕가의 구성원은 많지만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 전무하다는 엽기적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의 남녀평등 사상에도 부합하며 계승 방법이 복잡하지 않고 왕통이 끊길 위험성이 적으므로 의외로 여러 국가에 전파되었다. 단, 왕실 구성원이 그만큼 많아져서 재정부담이 커질 우려는 있다.

2.2.3 말자상속

막내아들이 계승권을 받는 법칙. 주로 유목민들에게서 보이던 상속법으로 상속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장남부터 차례대로 부모의 재산 중 미리 자기 몫을 땡겨받고 독립하건 분가를 하건 했고, 최종적으로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를 상속받는 것, 혹은 큰아들에게 가장 확장이 용이한 최외각의 땅을 주고 나이가 어린 자식일수록 확장이 불가능한 본가가 있는 지역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이 상속제도는 유목민들의 특수한 상황에 바탕을 두는데, 농경민족의 토지와 달리 유목민족은 주요 재산이 자체적으로 수가 늘어날 수 있는 가축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유'목이란 단어 뜻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목)초지의 고갈은 생존의 최대 위협이고, 새로운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것은 필수였다. 따라서 유목환경에서는 노동집약적인 농업과는 달리 아들이 노동 가능한 연령이 되면 가능한 한 빨리 분가시키는 것이 초지의 고갈을 막을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 칭기즈 칸이 막내(4남) 툴루이에게 몽골 제국의 중심부를 상속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단, 이것은 특수한 경우로, 사실 툴루이는 왕위, 그러니까 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 몽골 유목민은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로서 가장 어린 막내에게 부모의 재산 물려줬는데, 이러한 제도가 제국의 대칸 계승 문제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어차피 칭기즈 칸은 후계자를 오고타이로 명확히 정했기 때문에 툴루이 세대에선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후 툴루이의 후손인 쿠빌라이가 원제국을 세우면서 툴루이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말자상속제를 강조하게 된 것.

태조 이성계가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도 이 제도의 영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2.2.4 서양자 제도

일본에서 쓰는 계승 법칙으로 군주의 사위를 군주의 양자로 삼아서 계승권을 주는 법칙이다. 중화의 부자상속이 변형된 형태로 이해하면 된다.

일본의 쇼군이나 영주들은 기본적으로 군인이자 관료였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낮았고, 덴노나 쇼군 가문을 제외하면 모계 혈통 계승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사위가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는 형식을 취했다. 민간에서는 보통 데릴사위라고 하는 제도가 비슷한 개념이다. 닌텐도야마우치 히로시가 이런 방식으로 외조부의 성을 이어받은 케이스.

2.2.5 모계 남자 상속법

여자 형제의 아들에게 계승권을 주는 방식. 외삼촌에게서 남자 조카에게 계승되는 경우가 많다. 고대 에트루리아인이나 오늘날 일부 아프리카의 토착왕국이나 부족에서 적용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근거하여 신라도 이런 상속법이 적용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2.6 장녀상속법

남자 자손은 상속에서 제외되고 오직 여자 자손에게만 상속권이 있는 제도. 말하자면 역(逆) 살리카 법이라 할 수 있다. 남계를 통하면 안 되고 여계를 통한 여자 자손에게만 상속권이 있다. 이 상속법의 유일한 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데부족(族)의 족장인 비의 여왕(the Rain Queen)이다. 이쪽은 마지막 여왕인 마코보 콘스탄스(Makobo Constance, 모자지 6세라고도 한다. 1978~2005)가 만 27세의 나이로 의문사[14]하면서 혈통이 끊겨 2015년 현재까지 왕위가 공석이다. 딸이 있긴 한데 귀천상혼으로 태어나서… 모자지 6세의 남자 형제에 따르면 그 딸이 21세 2026년가 되면 즉위시킬 거라고 한다.

2.2.7 가문 분할: 본가-분가 계승

일본에서는 덴노의 계승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본가에서 파생되는 다수의 분가를 만든 다음 본가의 혈통이 단절될 경우 분가에서 양자를 들여 이어오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렇게 덴노가에서 분가화된 가문을 미야케(宮家)라고 부른다. 에도 막부 역시 이러한 방법을 채택했다. 이를 고산케(御三家)라고 했다.

2.2.8 교대 계승

일본의 남북조시대 직전, 덴노 가문이 두 계통으로 분열되면서 두 계통의 덴노가 교대로 집권하였다. 또 신라 극초기에도 박-석-김 3성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다는 것도 이 예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김씨 독점세습이 되지만.)

이 방식은 보통 얼마 못 가는 특성이 있는데, 왕위를 차지한 계통이 자신의 계통으로만 이어지게 하려 획책하기도 하고 특정 왕이 너무 오래 집권하면 다른 계통이 불만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2.2.9 근친 계승

왕위를 다른 가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근친혼을 통해 외척이 들어오지 못 하게 하는 방식이다. 왕위 계승자는 부계건 모계건 왕족이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 왕가는 왕가내에서 근친혼을 거듭하며 계승했다. 그리고 고려 초기 너무 많은 호족 출신 외척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근친혼 관계에서 태어난 왕자를 계승 순위 1위에 올리기도 했다.

2.2.10 협의제

유목민들이 3세대에서 일어나는 왕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도입한 방식. 대표적인 것으로 몽골쿠릴타이가 있다.

말 그대로 왕실과 귀족들이 모여 다음 왕을 협의해서 뽑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투표나 선거가 아니었다는 점. 이론상 다음 왕은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또 이 협의제가 왕위 계승의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었다는 점. 잘 생각해보자. 협의제에서 왕이 될 사람의 후보들은 선왕의 아들, 형제들이거나 손자들이었다.

협의가 잘 되면 좋지만 당연히 잘 되기 어려웠다. 애초에 왕위 계승이 매끄러웠다면 협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만장일치'로 뽑힌다 해도 늘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결국 왕위 계승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협의 자체가 양분되어 각자 자신을 따르는 세력만 가지고 회의를 열어 지도자를 추대하므로 각 회의에서 추대된 지도자가 전쟁을 벌여서 승리해야 한다. 당장 자신의 지지세력만으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서 선출된 쿠빌라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2.2.11 태자밀건법

중국 청나라 시절 옹정제 이후 사용된 왕위 계승 방식. 황제가 생전에는 황태자를 공표하지 않고 그 이름을 써서 밀봉해두었다가 황제 사후 이것과 내무부의 밀지를 맞추어 다음 황제를 지정하는 방식이다.

청은 3대 순치제 때까지는 북방 전통에 따라 유목민족의 형제상속이 변형된 추천제로 계승을 하다가 4대 강희제 때 와서 중국의 부자상속의 원칙을 도입하지만 부자상속 도입 안 하면 3세대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확률이 100%거든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어서 태자는 자질 문제로 여러 차례 폐위, 복위를 반복했고, 강희제의 치세 말기는 차기 황위를 둘러싼 여러 황자들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즉위한 5대 옹정제는 황태자를 일찍 정해버리면 황태자가 교만해지고 그를 둘러싼 파벌이 형성될 것이라 지적하며 위과 같은 방식을 도입한다. 태자의 이름을 적어 감춰두었다가 공개한다는 특이한 실행 방식을 제외하면 형제상속과 부자상속간의 조화를 꾀한 것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첫째로 황제의 아들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택할 수 있고, 둘째로 야심 있는 황자들이 모두 제위를 얻기 위해 능력을 닦겠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날 행동은 할 수 없으니 권력 다툼은 억제되며, 셋째로 황제 사후 제위를 둘러싼 친족이나 환관의 농간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을 쓰려면 현임 황제가 매우 강력한 황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고 난 뒤 유언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제위가 엉뚱한 곳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후계자를 미리 결정하지 않거나, 결정했더라도 나중에 과실이 있어 바꿔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 하고 죽었다면 대혼란이 일어난다. 거기에 황제의 모든 아들들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제위 계승을 위해 레이스를 하는 상황이라 그들 중 누군가가 승자가 된다 해도 탈락한 황자들의 야심 + 그들이 구축한 세력을 다음 황제가 감당해야 한다. 계승자가 정해져있다면, 암투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미리 포기하거나 황태자에게 달라붙어 황태자의 친위세력화하는 자도 있어 경쟁자는 줄어들 수도 있으나, 모든 황자가 예비 황태자인 상황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달려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작 청에서 이 방식으로 황위가 계승된 사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옹정제가 이 제도를 창안한 이후 제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다음과 같다.

옹정제의 4남이지만 옹정제 사망시 위의 세 형이 이미 요절해 사실상 장남. 게다가 옹정제의 아들 중 유일하게 만주족 후비의 자식이었다. 누가 봐도 건륭제가 후계자임은 다 알 수 있는 상황.
건륭제의 15남. 건륭제는 원래 적장자[15]인 단혜태자 영련[16]을 황태자로 밀건했지만 그가 일찍 죽자 역시 적자(7남)인 영종을 황태자로 밀건했다. 그러나 영종마저 죽고 후계자는 15년 이상이나 오리무중 상태였다.[17] 황위 계승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안 죽어 버틸 수가 없다 결국 건륭제는 재위 60주년 되는 해에 15남인 가친왕 영염(가경제)에게 양위한다. 밀건법으로 계승했다기보다는 그냥 황태자를 책봉해 양위한 것에 더 가깝다.
가경제의 차남…이지만 장남이 일찍 죽어 실제로는 장남이자 황후 소생의 적자. 게다가 계유지변에 공을 세워 도광제가 제위를 계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도광제의 4남…이지만 위의 형 셋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도광제 사망시에는 사실상 장남. 게다가 유일한 적자[18]이기도 했다.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라 달리 대안도 없었다.
동치제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방계에서 입양하여 계승. 서태후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서태후의 시동생인 순친왕의 아들이었으므로 서태후가 공친왕의 아들을 제치고 함풍제의 양자로 삼아 계승하게 했다.
광서제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광서제의 조카인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방계에서 동치제광서제의 양자가 되어 계승했다.[19]

죽 살펴보았듯이 밀건법이 제대로 적용된 예는 사실상 전무하다. 밀건법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장자가 아니라도 현명한 황자가 뒤를 이은 사례가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청나라 역시 적장자 원칙을 웬만하면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2.2.12 투표법

투표로 정한다! 왕권이 강하지 않을 경우, 또는 왕통이 깊지 않은 경우 왕 후보들끼리 치고받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채택하는 방법이었다. 역사적으로 동프랑크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과 동쪽에 위치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선거군주제였고, 이런 계승제도를 따랐다. 보통 이렇게 정한 왕은 당대에 국한하며 차기 왕은 현임 왕이 죽은 다음 또 투표로 결정한다.

물론 투표제라 해도 현대의 그것과는 달라서 소작농이 출마(…)해서 당선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없다. 후보자는 물론이거니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더구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잘 지켜지지 않아[20] 왕가가 단절되거나, 아니면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제후들이 대립왕이나 황제를 선출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공위시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득세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된다.

현재 이 제도를 채택하는 왕실은 캄보디아가 있다. 노로돔 왕가의 구성원으로서 30세 이상인 사람이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다. 한편 교황바티칸의 선출된 군주로 본다면 콘클라베도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2.2.13 분할 상속

몽골계 국가인 티무르 왕조와 쇠퇴 이전의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되던 방식. 아들들에게 왕국을 사이 좋게 나누어주거나 하나뿐인 옥좌를 두고 형제들끼리 싸워 이기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이다.

티무르 왕조의 건국자 티무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몽골인의 관습을 지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가운데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인지를 콕 집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티무르 사후 티무르 왕조는 자연스럽게 내가 정통이네 아니네 하는 이유로 내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티무르가 오래 살아 손자들에게까지 영토를 나누어주었기에 자연스레 헬게이트 오픈. 티무르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샤 루흐의 치세에도 이런 형태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샤 루흐가 문무에 두루 능통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한편 군대를 이끌고 왕국 전역을 순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뒤를 이은 아들 울루그 베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소양은 물려받았어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 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왕국 분열

원래 유목민들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새로 즉위한 술탄은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라는 것이 그것. 즉, 술탄이 죽으면 그 아들들이 서로 하나뿐인 술탄 자리를 놓고 피를 흘리라는 말이다.

오스만 제국이 처음부터 형제간에 피를 흘렸던 것은 아니다. 2대 술탄[21]인 오르한의 동생 알라딘 베이는 오스만 제국의 초대 재상으로서 내정을 훌륭히 이끌었다. 하지만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즉위 직전 동생을 처형하고 그 후 바예지드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옥사한 뒤로 그 아들 4형제가 10년에 걸쳐 내전을 벌이면서 형제를 협력 대상이 아닌 라이벌로 보게 되었다.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관습이 되었고 메메드 2세 대에 들어 아예 경쟁 관습을 법제화. 하지만 이 살벌한 경쟁 덕에 성장기의 오스만 제국은 유능한 술탄들을 줄줄이 맞이할 수 있었다.[22]

하지만 이 제도는 술탄이 아들을 낳지 못 하고 급사하기라도 하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고, 결국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폐지되었다. 이후로는 술탄의 형제는 처형하는 대신 카페커피숍과는 다르다, 커피숍과는라고 불리는 황궁내의 밀실에 가두어두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무능력자가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이 막장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공했다.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 때에 이러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창건자인 클로비스부터가 네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고, 이후 프랑크 왕국은 나라가 갈라졌다 합쳐졌다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베르됭 조약이나 메르센 조약은 이 분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

2.3 추가조건

독자적인 계승 방식이 아니라 국왕이 즉위할 때 추가하는 조건. 각 국가와 개별 왕에 따라서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며 이웃 국가들이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세세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일단 대표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다.

  • 의회의 승인을 얻을 것
  • 해당 국가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각종 맹세를 할 것
  • 해당 국가의 국교로 개종할 것
  • 해당 국가의 정해진 장소에서 정식으로 즉위식을 올릴 것[23]
  • 즉위를 위해 공약한 내용을 지킬 것
  • 타국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거나, 동군연합임은 인정하지만 국가를 합치지 말 것
  •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후계자는 지정된 특정인으로 할 것
  • 해당 국가의 종주권을 가진 국가나 직위, 세력에게 책봉을 받을 것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란 명칭을 사용 못 하고 독일 왕이란 타이틀로 활동해야 했다.</ref>

이런 추가조건들은 즉위하고서 안 지키거나 아예 무시할 수도 있긴 하지만,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는 데다 지속적으로 정통성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나므로 보통은 지키게 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런 조건들 때문에 왕위 계승은 각 사례마다 모두 독자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3 현존하는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

4 옛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

5 귀족 작위 계승

  • 영국의 작위는 대부분 살리카 법이 적용된다. 여자가 작위를 받는 경우도 가끔 있었으나 그 아래 대에서는 다시 살리카 법이 적용되었다. 다만 연합왕국 성립 이전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작위는 백작남작급에서 아들 우선 상속법인 것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는데, 작위 상속이 영지 상속과 연계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연합왕국 성립 이후에도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작위를 받은 사람이 딸만 있어 살리카 법을 적용하면 100% 대가 끊어질 상황이 예상되면 그 딸에게는 일단 계승권을 주고(맏딸뿐 아니라 보험으로 차녀 이하 자매에게도), 그 이하 세대부터는 그 딸들의 남자 자손만이 작위를 계승하게 하는 일종의 준 살리카 법을 적용해주기도 했다.
  • 스페인의 작위는 2006년부터 절대적 맏이 상속법이 적용되고 있다.

6 기타

  • 각 왕실이나 귀족 가문의 계승 법칙에는 종교적 제한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영국은 성공회, 모나코는 가톨릭, 태국은 불교 신자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 예전처럼 귀천상혼을 적용하는 가문은 거의 없지만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결혼을 한 왕족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경우가 있다.
  •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인 콘클라베는 투표로 차기 교황을 선출하므로 '투표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 아서스 메네실은 정당한 계승권을 보유한 왕자였으나 왕위를 계승한답시고 저지른 짓거리가…
  2. 왕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 경우가 많은 동양(동아시아와 중근동 포괄)에 비해 봉건제적 성향이 강했던 유럽에서는 예법이나 규범 측면에서 왕과 영주귀족 사이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실제 권력에서도 왕 못지 않은 대귀족이 드물지 않았고.
  3. 동아시아권과 다르게 서자의 계승권은 없다. 예외가 있긴 한데, 이건 전쟁으로 얻은 것이다. 당연한 것이, 일부일처가 기본인 기독교 문화권에는 이 없으니 자식은 적자 아니면 사생아다. 이 있는 문화권에서 서자는 첩의 자식이긴 해도 정식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 가문의 사람으로 당연히 인정받는다. 상속권은 그 나라 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4. 권지조선국사라는 명칭으로도 쓴다. 총리서리와 비슷한 개념.
  5. 가문에서 힘이 강해진 지손이 힘이 약한 적손을 누르고 지위를 빼았음.
  6. 광해군 폐위에 결정적 명분을 준 것이 인목대비에게 사실상 폐위에 해당하는 폄손절목임을 감안하자.
  7. 유학적 인간관에 의하면 평범한 인간도 노력을 한다면 요순급의 성인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선천적인 조건을 타고나지 않은 왕족이라도 교육과 갈굼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명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걸주가 뜬다면 어떨까?
  8. 인조는 반정이라는 특이 케이스, 태종정종이 적자가 없음을 명분으로 동생을 아들로 삼아 세자로 책봉되었고, 물론 정종이 바지사장이라는 어른의 사정이 있다. 적자가 없으면 한 항렬 아래에서 들여야지. 세종대왕은 양녕대군이 방탕하다 하여 동생인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교체, 세조는 왕위 계승권에 상당한 흠이 있었기 때문에 사육신의 일이 일어났고, 후대의 유학자들도 못마땅히 여겨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9. 형들과 입궁해서 총명하게 답변했다는 일화(선조 항목 참조)도 있지만 덕흥군이 주색잡기하다 일찌감치 인생퇴갤하고 선조의 생모 하동부대부인 정씨도 명종 승하 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문제 일으킬 사람이 없다는 장점(?)이라는 기타 어른의 사정이 겹쳤다.
  10. 정조의 족보상 양아버지인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이다. 정조조에 진종(眞宗)으로 추숭된다.
  11. 철종의 친형은 장애가 있었다고.
  12. 그러나 시영의 아들은 또 송태조 조광윤에게 양위해서 왕조의 대가 끊어진다. 대신 시영의 후손들은 송대 왕조 존속 내내 예우받았다. 포청천에도 등장함.
  13. 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는 슬하에 딸 둘뿐인데, 아내 레티시아 왕비가 딸만 낳는다며 보수층에서 열심히 비난했다(…). 아이 성별은 아버지가 결정하는 거 정말 모르나? 오죽하면 레티시아가 아들을 낳지 못 했다는 이유로 시부모인 후안 카를로스 1세 부부에게 구박받았다는 루머도 있었을 정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펠리페 부부가 아들을 얻기 위해 셋째를 가지려 노력했으나 두 딸들을 모두 제왕절개출산한 바 있는 레티시아의 몸 상태가 좋지 못 해 결국 포기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14. 공식 사인은 급성 뇌수막염이지만 암살당했다는 말이 많다. 에이즈 설도 있고.
  15. 나이 순서대로는 차남.
  16.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가 낳은 아들.
  17. 여러 정황으로 추측컨대 건륭의 아들들 중 가장 먼저 화석친왕에 봉해진 5남 영기가 이 기간 동안 밀건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기도 얼마 있지 않아 사망.
  18. 효전황후가 낳은 아들이다.
  19. 서태후의 애인(?)인 영록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지명되었다는 썰이 있다.
  20. 유력한 대귀족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다지 힘은 없지만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방귀족들이나, 교황이 맘에 들어하는 사람이 후보가 되었고, 보통 아예 전임 황제 가문과 생판 남보다는 어떻게든 (모계든 먼 친척이든 사위든) 혈연적 연관이 있는 사람이 후보가 되었다.
  21. 엄밀히 말해 술탄은 아니다. 술탄이라는 칭호는 3대 군주 무라드 1세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22. 역대 술탄 가운데 처음으로 형제를 처형하지 않은 인물이 바로 쉴레이만 1세다. 아버지인 셀림 1세가 자신과 아들을 제외한 남자 황족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다시피 해서 쉴레이만에게는 경쟁자가 될 형제가 없었다. 어찌 보면 행운.
  23. 스코틀랜드의 스콘이나 프랑스의 랭스가 대표적이다. 보통 암묵의 룰인 경우가 많다.
  24. 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지만 권력 세습 방식은 빼도박도 못 할 전통적인 유교적 부자상속 방식이다. 계승에서 밀려난 김정남이 떠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25. 공주가 결혼하면 계승권을 잃는다.
  26. 카를 6세 이전에는 독일계 다른 영방국가처럼 살리카 법이었으나 이전에 수여받은 특권을 내세워 특별히 준 살리카 법으로 변경.
  27. 표트르 대제부터 예카테리나 2세 시절까지는 군주 지명제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로마노프 혈통 한 방울 안 섞인,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여서 볼테르에게 지명제가 아니라 점령제 아니냐고 비웃음을 샀을 정도.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 이후 살리카 법으로 변경되는데 러시아 황실이 독일계 귀족들과 통혼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